EP.22 뻗어나가는 음모 #2
크와아아앙!!
후지산 전체를 울리는 짐승의 울음소리.
3미터에 달하는 높이의 검치호가 내뱉는 포효는 그야말로 사자후라고 표현해도 될 정도로 강렬했다.
그게 단말마라는 것이 문제였지만.
얼굴을 찡그린 내가 통신기에 손을 대고 물었다.
“죽었어?”
-처리했어. 시커먼 피랑 투명한 액체가 섞여서 나오는데, 이게 대체 뭐지?
“뇌수 같은데... 징그러우니까 그만 말해줄래? 상상되잖아.”
-미안...
“산 중턱 전체에 걸쳐 놈의 새끼들이 내려가고 있어. 그대로 놔두면 위험할 거야.”
-알았어.
푸화악!
공기를 찢으며 날아가던 레오나는 허리 파우치의 버튼 세 개 중 하나를 눌렀다.
그러자 딸깍거리는 소리와 함께 파우치가 열리면서 집속탄 세 발이 튀어나왔다.
레오나는 그것을 왼손으로 집고 뛰어난 동체시력과 힘을 활용해 검치호 새끼들에게 던졌다.
좋은 제구구나. 메이저리그에 가도 되겠어.
퍼엉! 퍼어엉! 퍼엉!
근데... 쯧쯧... 집속탄은 무한대로 있는 게 아냐.
저렇게 마구 뿌려대면 원거리 견제용 무기가 다 떨어진단 말이야.
대상을 정해놓고 한 발씩 뿌려야지.
아직 경험이 없으니까 이해해주마.
캬아앙! 크왕!
새끼 검치호 여러 마리가 고통스런 비명을 내지르며 폭사된다.
레오나는 이번엔 왼손 중지로 손바닥을 지그시 눌렀다.
철컹!
팔목 부근에서 손가락 마디만한 크기를 가진 삼각형의 무언가가 튀어나오더니, 마치 호밍 미사일마냥 검치호 새끼를 쫓아갔다.
새끼의 몸통에 닿은 그것은 갑작스레 작은 조각으로 분해되면서 놈의 몸을 둘러 지져버리기 시작했다.
빠지직거리는 소리와 함께 통구이가 된 새끼를 무심한 눈으로 바라본 레오나는, 본격적으로 땅에 내려가 놈들을 학살하기 시작했다.
모니터를 통해 그 모습을 지켜보던 박사가 초조해했다.
“전투경험이 모자라서 다대일 전투가 길게 늘어지고 있어. 이러다 에너지가 다 떨어지면...”
“우리도 출격하죠. 전투기를 끌고 오셨잖아요.”
“레오나가 어디까지 처리할 수 있는지 한 번 보고 싶은데...”
그래, 너도 레오나라는 이름에 적응했구나.
입에 착착 감기지?
난 모니터 화면 한 켠에 자리한 디바이스 충전량 수치를 바라보았다.
“21퍼센트 남았는데 저 호랑이들은 스물이나 남아있어요. 아, 방금 또 한 마리 죽었네.”
“시간 안에 못 끝내겠지?”
“그렇다고 봐요. 출격합니다.”
“야! 잠깐...”
박사의 말을 상큼하게 씹은 내가 전투기를 몰고 레오나에게서 멀리 떨어진 새끼들에게 레이저포를 발사했다.
푸슝-!
기체 양옆에 달린 포구에서 나온, 암두시아스의 어깨를 맞췄던 그 녹색의 그 응축된 에너지는, 새끼 검치호의 미간에 구멍을 내버리고는 산에 엄청난 폭음을 일으켰다.
그렇게 내가 다시 한 번 발사버튼을 누르려 하는데...
위이잉...
포구가 힘없는 소리를 내더니 고개를 축 늘어뜨렸다.
“이 멍청아! 이건 아직 미완성이란 말이야! 어휴... 고치려면 시간 좀 들겠네.”
“아니, 그럼 왜 들고 오셨는데요? 이런 위험한 자리에...”
“위력이 강한 만큼 비상용으로 쓰려고 했지! 잔말 말고 함포나 쏴.”
“지금이 비상신데 비상용은 뭔 말이래... 근데 함포요? 리펄서 미사일을 갈기면 다 처리될 것 같은데요?”
“이 뇌에 화력만 가득한 새꺄! 그거 쏘면 산이 날아간다고! 네가 일본 정부에 보상할 거야? 아직 세계연합과의 협상도 제대로 안 됐는데...”
“아 거 더럽게 뭐라고 하시네... 함포를 쏴도 망가지는 건 마찬가지구만...”
투덜거린 내가 함포를 조작해 후지산 전체에 갈겨대기 시작했다.
콰앙! 쾅! 콰앙!
전함에서나 있을 법한 거대한 함포에서 무지막지한 굉음이 울려 퍼졌다.
분당 200발이라는 경이로운 속도, 위력은 함포의 크기에 비해 그저 그랬지만 1미터 정도 되는 검치호 새끼들을 처리하는 데엔 충분하다.
지금쯤 신나게 달려오고 있을 자위대는 이 위력을 보고 자신들이 필요할까? 라며... 깊은 고민을 할 것이 분명했다.
신명나는 소리를 내지르며 함포를 발사하는 나.
그런 날 한심한 얼굴로 바라보던 캐시 박사가 레오나에게 말했다.
“남은 에너지는 3%야. 지금 당장 돌아와.”
-네? 하지만 아직 세 마리 정도 남았는데...
“지금 이 미친놈이 산에 돈을 마구 뿌려대고 있잖아. 잔말 말고 돌아와. 상황은 곧 종료될 테니까.”
-.... 네.
**
[이 익명의 인물은 갑작스럽게 나타난 괴물들의 통로를 이블리언 게이트라고 칭했습니다. 이블리언은 악을 뜻하는 Evil, 그리고 외계인을 뜻하는 Alien의 합성어로써...]
연구실 안, 뉴스를 보던 내가 혀를 끌끌 찼다.
“쯧... 저렇게 촌스러운 이름이라니...”
그에 발끈한 캐시 박사가 내 뒤통수를 강하게 때렸다.
빡!
“아! 왜 때려요!”
“그럼 세화의 활동명을 레오나라고 작명해준 송지혁 씨, 네가 직접 정해보세요.”
“.....”
“할 말 없으면 닥치고 뉴스나 봐.”
“예.”
시무룩해져선 다시 TV로 시선을 돌리는 나에게, 멋쩍은 웃음을 지은 세화가 다가와 뒤통수를 살살 쓰다듬어주었다.
[익명의 인물은 오늘 후지산에 나타난 여성 히어로의 측근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세계연합이사회에서는 이 주장이 증명만 된다면, 그와 긴밀한 협조를 구축하고 조약을 맺기로 결정을 내렸습니다. 아직 미완성 상태인 조약 내용을 살펴보자면, 자유로운 영공개방, 그리고....]
뉴스를 보던 캐시 박사가 분통을 터뜨렸다.
“이 멍청한 놈들! 세화... 아니, 레오나가 전투기를 타는 것도 똑똑히 봤을 텐데 왜 안 믿고 지랄이야! 이블리언 게이지가 언제 다시 나타나고, 빠르게 차오를지도 모르는데 너무 마음 편히 생각하는 거 아니야?”
“레오나는 슬슬 여러 아날로그식 카메라에 의해 공개되고 있는데, 우리 얼굴은 밝혀진 적이 없잖아요. 의심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는데...”
“증명이 필요하다 이거지? 좋아, 미국에 날아가야겠어.”
세계연합본부는 미국에 자리하고 있었다.
급하긴 어지간히 급했던 모양.
“허가 없이 무턱대고 날아가면 공중에서 벌집이 될 걸요?”
“내가 너처럼 단순한 줄 알아? 당연히 연락부터 해야지.”
“변장하고 가셔요. 괜히 얼굴 드러내지 마시고.”
“그래. 하지만 이름은 드러낼 거야. 그 정도는 해줘야 조금이나마 더 믿을 테니까. 그리고 디바이스의 용량을 좀 늘려놔야겠어. 오늘 봤지? 전투기의 화력지원이 없었더라면 변신이 풀렸을 거야. 그러니까 괴짜 너도 언제든 준비하고 있어. 조만간 또 바빠질 것 같으니까.”
“알겠습니다.”
담담하게 말한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부를 수밖에 없었다.
의도한 대로 다 됐다.
디바이스 개조에 손을 거들 수 있고, 며칠 안으로 세계연합과의 협상이 진전을 보일 것이다.
이제 진짜 시작이라고 보면 된다.
박사는 우리 둘을 자동차가 주차되어 있는 영등포 쇼핑몰로 데리고 갔다.
그리고 세화를 내려주면서 그녀에게 무언의 명령을 내렸다.
디바이스 에너지를 채워놓으라는 명령을.
세화는 부끄러운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도 예전보단 창피해하지 않는 것을 보니 적응을 잘 해나가고 있는 것 같다.
박사가 떠난 뒤, 우린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간만에 데이트가 이렇게 끝나버린 것에 대한 한숨이었다.
시간을 확인해본 내가 말했다.
“11시네. 곧 주차장 닫겠다. 얼른 가자.”
“응...”
“그리고 너 치마 올라갔어. 속바지 다 보여.”
그 말에 세화가 화들짝 놀라면서 치마를 내린다.
그러면서 내 고간을 곁눈질하는 것이, 커졌나 안 커졌나 확인해보려는 것임이 분명하다.
진짜 요물이네, 요물이야.
주차장으로 내려가 차에 탄 나는 곧바로 시동을 걸었다.
그렇게 주차요금을 내고 집으로 돌아가고 있는데, 세화가 말을 걸었다.
“또 나 때문에 연구실에서 살다시피 하게 됐네... 미안해. 학고 받는 거 아닌가 몰라...”
“대학보단 연구실에서 기계들 만지작거리는 게 훨씬 더 나아. 내가 원해서 하는 일이고, 대학을 그만두게 된다 해도 전혀 상관없어. 그러니까 미안하단 말 좀 그만해.”
“아, 알았어... 근데 그만두지는 마. 너랑 학교 다니고 싶어.”
“학업이랑 연구개발을 병행하라는 거야? 날 아예 갈아 넣겠다는 소리로 들리는구만.”
“그게 아니라...”
“알아. 농담 좀 해봤어. 집에 돌아가면 그 디바이스 좀 봐도 돼?”
“.... 미안하지만 이건 안 돼.”
저자세로 나오다 디바이스를 언급하자 대번에 거절한다.
그만큼 저것이 소중하다는 증거.
하지만 세화야, 박사가 그랬잖아. 나도 준비하라고.
그게 디바이스를 같이 개조하자는 말이 아니면 뭐겠어?
난 곧바로 박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왜.
쿨하게도 받는구나.
세계연합에게 상당히 열받아있는 상태로군.
“박사님, 디바이스 용량을 늘릴 때 혼자 하실 건가요? 저도 같이 하는 거 맞죠?”
-내 말 못 들었었어? 언제든 튀어나올 준비를 하라고 했잖아.
“어떤 방식으로 작동되는지 좀 확인해보려고 하는데 세화가 거절해서요.”
-그래? 스캔만 하려는 거야?
“네, 내부구조만 보고 싶어요. 미리 공부해놓으려고요.”
-세화 거기 있어?
나는 화면 디스플레이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직접 대답하라는 뜻.
망설이던 세화가 말했다.
“저... 여기 있어요.”
-괴짜한테 내부구조만 살짝 보여줘. 조작방법은 알지?
“아, 알긴 아는데... 이건 박사님이...”
-절대, 누구한테도 내주지 말라고 했지. 근데 허락할게. 내 입으로 말하기엔 짜증나지만, 괴짜 쟤는 똑똑한 애야. 오늘 너한테 끼워둔 장비들도 나랑 같이 공동으로 개발한 거고. 보여줘서 나쁠 건 하나도 없어.
“그러면... 알겠어요.”
-그리고 아이테르에 대해서도 설명을 좀 해놨으면 좋겠네?
현재 송지혁으로 변장한 나는 디바이스가 어떤 식으로 충전되는지 모르는 상태다.
세화가 화들짝 놀라는 것도 당연했다.
“다... 다 말해요?”
-네 결정에 맡기겠지만, 나는 다 오픈하는 게 낫다고 봐. 괴짜는 남이 아니잖아.
“.....”
-나 바쁘니까 끊을게. 일단 아이테르에 대해 말하지 않더라도 디바이스는 보여줘.
박사가 전화를 끊자, 난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무구한 청년을 연기했다.
“아이테르는 디바이스에 있는 변신 에너지잖아. 따로 더 설명할 게 있어?”
“.... 그...”
무척 곤란한 얼굴을 하는 세화.
그녀가 한참을 우물거리더니 말했다.
“돌아가서... 돌아가서 설명해줄게.”
“그래? 알았어.”
**
세화는 결국 아이테르에 대한 것들을 알려주기로 결정했다.
식탁에 마주앉아 모든 설명을 들은 내가 혼란스러운 척을 했다.
“그러니까... 좋아하는 사람과의 성적 흥분으로 에너지가 충전된다고...?”
“.....”
“뭐 그런 말도 안 되는... 지금 나랑 장난치는 거 아니지?”
“절대 아냐... 나중에 박사님한테도 물어봐...”
고개를 푹 숙인 채로 창피해하는 세화.
입은 옷 때문인지 오늘따라 더 예쁘고 귀여웠다.
한참동안 침묵한 채 멍하니 있던 내가 말문을 열었다.
“그... 저번에 너와 섹스했을 때 디바이스가 웅웅거리던 게... 충전되는 소리였어?”
내 단도직입적인 말에 세화가 고개를 더 숙인다.
손가락만 꼼지락대던 그녀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 응...”
“허... 지금까진 그냥 알림이라도 온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구나. 그럼... 유승현 씨와 성적인 일을 해도 충전이 된다는 소리네?”
“아마도... 근데 지금까지 승현이와 그런 일을 한 적은 없어...”
“유승현 씨는 아이테르에 대해 알고 있고?”
당연히 모르겠지.
“모, 몰라...”
나중에 유승현에게도 말하도록 해야지.
자신으로 인해 디바이스 에너지가 찼다고 착각하게끔 만들어줄 거다.
그러려면 좀 아쉽지만... 가끔 가벼운 스킨십 정도는 허용해줘야겠다.
아니면 상황을 만들거나.
“일단 이 얘기는 나중에 하자. 디바이스 먼저 보여줘.”
세화에게 귀속된 디바이스는 그녀가 아니라면 절대 조작할 수 없었다.
박사도 마찬가지, 세화가 근처에 있을 때만 디바이스를 만졌다.
그래서 장비를 만들어놓기만 하고 미리 장착해놓을 수가 없었던 거다.
세화가 오른팔을 식탁 위에 올리더니, 디바이스에 있는 버튼을 일정한 패턴으로 조작했다.
그러자,
위이잉-!
신비한 기계음이 일어나더니 허공에 반투명한 디바이스의 구조가 확대된 모습으로 나타났다.
‘드디어...!’
희열을 간신히 삼킨 내가 그것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보인다. 디바이스의 모든 구조가.
어떤 식으로 만들어졌는지 내 머릿속에 똑똑히 들어온다.
캐시 박사의 남편이 기초를 다졌다지? 확실히 천재로군.
보안부터 시작해서 모든 게 완벽하게 어우러졌다.
하지만 어떻게든 뚫어주지.
또 보인다. 가운데에 자리한 무지개색 가루 같은 기운이.
저게 아이테르, 지구에서만 나는 신비한 힘이자 비스트 슬레이어들의 힘의 근원.
난 날카로운 눈으로 디바이스를 살피면서, 모든 구조를 똑똑히 익혀놓았다.
그리고 세화 몰래 식탁 아래에 놔둔 손을 펼쳤다.
디바이스의 내용물을 마르셀라에게도 보내주기 위해서였다.
‘됐다.’
전송을 완료한 내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저... 지혁아...”
세화의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린 내가 고개를 흔들었다.
“어? 왜?”
“솔직하게 말했는데... 그... 괴물들이 갑작스럽게 나올 수도 있으니까...”
충전하고 싶다는 소리로군.
해가 떠있을 땐 활발하다가 질 땐 수줍어지는 것이 마치 낮에 피고 밤에 지는 나팔꽃 같다.
“너 날 휴대폰 충전기처럼 취급하는 건 아니지?”
“아냐! 왜 그런 소릴 해?”
“알았어, 미안해. 귀청 떨어지겠다.”
자리에서 일어난 내가 거실 화장실로 들어가면서 말했다.
“넌 안방 화장실에서 씻어.”
다음화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