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1 뻗어나가는 음모
난 내 앞에서 삐딱한 표정을 짓고 있는 학생들 셋을 바라보았다.
“아직 너희들이 어려서 잘 모르겠지만, 담배는 건강에...”
“아 씨발! 홍삼냄새 존나 나네! 그냥 갈 길 가요. 할 짓 드럽게 없는 아저씨네.”
이런 싸가지 없는 새끼가 말하는 뽄새 좀 보소... 너는 내 마물한테 무조건 잡아먹히게 만들어준다.
근데 홍삼냄새는 또 뭐야? 틀니는 들어봤는데.
요즘 애들 창의력은 따라갈 수가 없다니까.
“이 녀석들! 경찰에 신고해야 알아듣겠니!”
“푸하하하! 이 녀석들? 야, 들었냐? 이 녀석들이래.”
연기하기가 이렇게 힘들 줄이야.
그냥 좀 때려라 새끼들아.
유리아가 숨어서 지켜보고 있단 말이야.
한 대 맞지 않으면 나서지 않을 거라고.
“그냥 좀 꺼져요 할배. 뒤지기 싫으면.”
뒤지고 싶다니까?
“안 되겠다, 내가 직접 경찰에...”
팍!
내 손에 쥔 휴대폰이 바닥으로 떨어진다.
학생들 중 한 명이 내 팔을 쳤기 때문.
난 학생들을 잔뜩 훈계하려는, 정의로운 중년인의 그 표정을 연기하며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그러면서 가슴주머니에 있는 지갑을 흘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떨어진 지갑을 본 학생들의 눈에 탐욕이 어린다.
그들 중 한 명의 손이 느릿느릿한 내 손보다 먼저 지갑을 낚아챈다.
서로의 눈을 마주쳐 무언의 약속을 한 학생들이 고개를 끄덕이고, 한 명이 내게 다가와 주먹을 날린다.
속도 좋고, 힘은 뭐... 별로 없겠지만 아픈 척이라도 해야겠다.
뻐억!
“억!”
비명을 내지른 내가 훌륭한 연기력으로 휘청거렸다.
벽에 등을 부딪친 난, 학생 두 명이 날 때리려 다가오자 양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 때,
휘이익! 빡!
어딘가에서 자그마한 돌멩이가 날아오더니 학생 한 명의 뒤통수를 정확히 때렸다.
“어억! 씨발...!”
욕지거리를 내뱉은 학생이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근처엔 아무도 없었다.
당연하지. 네깟 놈들이 유리아를 찾을 수 있을 것 같냐?
원래 은밀한 녀석이기도 하거니와 지금까지 숨어 다닌 세월이 얼만데.
휘이익! 휘익!
돌은 계속해서 날아와 학생들을 맞췄다.
과연 백발백중 사수답군.
겁을 집어먹은 학생들은, 얼굴에 돌멩이를 몇 대 더 맞자 지갑도 내팽개쳐놓고는 나살려라 도망쳤다.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은 내가 골목길을 두리번거리고 있을 때, 담벼락 위에서 유리아가 나오더니 폴짝 뛰어내렸다.
사뿐하게 땅을 밟은 그녀가 지갑을 주워들고 내게 다가왔다.
“태곤 아저씨, 괜찮아요?”
“유... 유리아 씨? 이게 대체...”
“일단 일어나요. 남들이 보면 제가 아저씨의 돈을 뜯으려는 줄로 오해할 것 같잖아요.”
“아, 예...”
얼떨떨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유리아가 내민 지갑을 두 손으로 받았다.
“고맙습니다.”
“양복에 먼지 묻었어요.”
그 말에 몸을 살핀 내가 손으로 먼지를 털어내고는 말했다.
“이거 정말 오랜만입니다. 그간 잘 지내셨나요?”
“그럭저럭요. 아저씨가 그랬죠? 인연이 된다면 또 볼 수 있을 거라고. 세상은 생각 외로 좁다고.”
“음...”
“저희 인연이 닿았나 봐요. 세상 참 좁죠?”
그래, 좁다고 착각이나 해라.
이 상황을 만들려고 얼마나 노력했는데, 알아주는 사람이 없으니 좀 섭하네.
이 의지만 있고 힘없는 중년인은 일부러 연기한 거다.
나중에 있을 유리아와의 성관계, 그녀의 성벽을 만족시켜주기 위한, 그리고 조작하기 위한 밑거름이란 뜻.
아마 지금쯤 날 신념만 있는 허접으로 생각하겠지.
동시에 아버지와 닮았다고도 생각할 테고.
“그러네요.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무리 옳은 길이라도 힘이 없다면 돌아갈 줄 알아야 돼요.”
“아직 새파랗고 미래가 창창한 젊은이들인데... 가만 두고 볼 수는 없었지요.”
“아저씨답네요.”
“답다고요? 무슨 말씀이신지...”
“아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나저나 왜 연락 안 하셨어요? 제 연락처도 드렸는데...”
약간 화난 얼굴이다.
그야 그럴 수밖에. 아버지와 똑 닮은 날 일주일 정도 보지 못했으니.
아마 밤잠을 설치지는 않았을까? 눈 밑이 퀭한 것을 보니 그런 것도 싶은데.
“굳이 연락을 해야 했을까 싶었는데...”
“그랬는데?”
“오늘 다시 만난 것을 보니 지난날이 후회되네요. 고작 두 번 만났지만 인연이긴 한가봅니다.”
유리아의 낯빛이 밝아진다.
“그럼 다음엔 꼭 연락해요.”
“전화번호를 적어준 냅킨을 입 닦는데 써서... 버렸습니다만...”
그녀의 예쁜 눈썹이 꿈틀했다.
내가 미안함이 가득 담긴 표정을 하고 있자, 그녀가 말했다.
“연락처 주세요.”
“예...?”
“연락처 달라구요. 인연이라고 하셨으니까 이제 연락처 정도는 가능하겠죠? 여기 찍어요.”
기세가 꽤나 매섭다.
안 주면 큰일이 날 것 같은 느낌.
난 마지못한 척 꾸물대며 유리아의 휴대폰에 번호를 찍었다.
새로이 만들어둔, 유리아와 연락을 하기 위한 전용 휴대폰번호를.
“잠깐만요. 확인 좀 할게요.”
“.... 제가 거짓말이라도 했다는 건가요?”
“제가 아는 아저씨라면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해서요.”
“한 번 봤는데 너무 섣불리 판단하시는 것 같습니다.”
유리아는 아무 말이 없었다.
그저 내 휴대폰이 울리나 울리지 않나 확인만 할뿐.
♬♪♬♪-!
내 가슴주머니에 있는 휴대폰에서 기본 벨소리가 울려대자, 그제야 만족해한 유리아가 방금 했던 내 말에 대답했다.
“저희 아버지도 그랬으니까요. 잘 알 수밖에 없죠.”
“설마 저번에 했던 말을... 절 그분의 환생이라고 믿는 건가요?”
“네. 확신하진 않지만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해요.”
“허...”
“어이가 없죠? 그런 생각이 드는 걸 어떡해요. 근데 아침 일찍부터 그렇게 차려입으시고 어딜 가던 길이었어요? 오늘 토요일인데.”
“사업에 주말이 어디 있나요. 시간이 좀 지체되었으니 빨리 가봐야 하는데... 이야기는 다음에 해도 되겠습니까?”
“네, 어차피 연락처도 받았으니까... 오늘은 그냥 보내드릴게요. 제가 연락하면 꼭 받으세요. 아셨죠?”
내가 침묵했다.
그러자 유리아가 다시금 강조해왔다.
“아셨죠?”
“.... 그렇게 하지요.”
“저흰 인연이니 어떻게든 또 보게 될 테니까, 행여나 무시할 생각은 마세요. 일 잘 보시고요, 태곤 아저씨.”
연락처를 받고 확인까지 해서였을까? 유리아는 날 쉽게 보내주었다.
찌질함 한 스푼을 전신에 담고 골목을 떠난 나는, 그녀의 위치가 나와 반대로 멀어지자 곧바로 서울로 돌아갔다.
이 정도면 두 번째 만남도 성공적.
조만간 세 번째 만남을 가지면서 더욱 가까워져야겠다.
그 뒤 상황을 보고 그녀 안에 내재된 영웅심을 슬쩍 건드려봐야지.
**
“이거 어때?”
하늘하늘한 연분홍색 테니스 스커트를 살랑거리며 탈의실에서 나온 세화가 내 앞에서 한 바퀴 돈다.
잡티 하나 없는 매끈한 다리가 허벅지까지 드러나니 절로 감탄이 나온다.
흰 티를 그 안으로 넣기까지 한 상태라 상큼발랄해보이기까지 하다.
간신히 마음을 진정시킨 내가 말했다.
“예쁘네. 그거 사고 다른 것도 좀 보자.”
“응.”
그녀는 패션센스가 아주 좋았다.
지금까진 돈이 없어서 비슷한 옷을 돌려 입는 것이었을 뿐.
오늘 눈호강 제대로 하는구나.
세화는 나와 함께 나와서인지 오늘따라 무척 활발했다.
뭘 하든 깔깔거렸으며, 움직일 땐 내게 팔짱을 껴놓고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그렇게 우린 오랜 시간동안 쇼핑을 마치고, 영화를 보러 가기 위해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차 안엔 이미 쇼핑백이 한가득.
트렁크를 포함해 뒷좌석까지 꽉 차있었다.
“그냥 심부름 시켜서 집 앞까지 보내자니까... 아니면 쇼핑백 몇 개에 몰아넣던가.”
내 눈밑은 다크서클이 진하게 서려있었다.
차라리 음흉한 계획을 짜는 게 재미있지... 아무런 의미 없이 백화점을 돌아다니니 녹초가 될 지경.
물론 세화의 여러 코디를 보는 건 눈이 즐거웠지만, 앞으로는 인터넷 주문만 하자고 해야겠다.
“옷 구겨져서 안 된다니까? 왜 또 불평이야? 손톱도 칠했잖아.”
세화가 양손을 들어 올리더니 연한 빨간색으로 칠된 손톱을 흔들었다.
백화점 안에 있는 네일아트 샵을 지나치면서 지나가는 투로 칠하면 예쁠 것 같다고 한 건데, 그 말을 듣자마자 샵에 쪼르르 들어갔던 그녀였다.
“칠하면 예쁘겠다고 했지, 누가 칠하래?”
“칠하라는 뜻인 줄 알았지. 내가 하고 싶은 거 전부 하라며. 나 네일 처음 해봤는데... 마음에 안 들어?”
“마음에 들고도 남아. 얼른 타. 영화 시간 늦겠다.”
“응.”
조수석에 탄 세화는 날 향해 배시시 웃더니 불편한 듯 다리를 꼼지락거렸다.
현재 그녀는 아까 봤던 테니스 스커트를 입은 상태.
그렇다고 해서 겉옷으로 가리려는 행동은 하지 않았다.
그런 그녀를 곁눈질한 내가 말했다.
“이거 완전 요물이네?”
“속바지 입으니까 불편해... 더워...”
“아하, 그런 핑계를 대시겠다?”
“아 진짜... 그냥 가기나 하지?”
“알았어.”
낮은 웃음소리를 낸 내가 차에 시동을 걸었다.
그렇게 영화관으로 움직이고 있는데, 세화의 휴대폰 벨소리가 울렸다.
슬쩍 보니 [내새꾸]라고 저장된 이름이 튀어나왔다.
내새꾸라면 분명 유승현.
저번에 봤을 때도 같은 이름이었으니 분명했다.
세화는 잠시 발신자 이름을 빤히 바라보더니, 이내 휴대폰을 무음으로 설정해놓고 가방에 집어넣었다.
내가 모른 척 물었다.
“누구야?”
“승현이...”
“안 받아도 돼?”
“어차피 승현이는 일할 시간이고... 전화해봤자 짧게 통화만 할 거고... 오늘은 너랑 있으니까 안 받을래. 나중에 문자만 몇 번 보내면 돼.”
허, 어제 일이 서운하긴 심하게 서운했던 모양이다.
전화까지 무시할 정도면.
이 이야기를 하는 것이 양심에 찔렸는지, 세화가 말을 돌렸다.
“근데 나 궁금한 거 있어. 연수가 학교에서 너한테 큰일 났다면서 떠들고 다니던데... 네가 말했어?”
연수라면 세화와 딱 붙어 다니는 동기.
성은 오씨고, 나와도 꽤나 친하다.
“응. 요전번에 전화 오더라. 개인적인 사정으로 일주일 쉰다고 말해놨지. 너도 알다시피 걔가 입이 좀 싸잖아. 말해두면 동네방네 소문낼 거라고 생각했는데, 딱 맞췄네.”
“연수랑 자주 통화해?”
“자주는 아니고, 며칠에 한 번 정도.”
“그렇구나... 연수는 어때?”
의식하는구나. 세화는 참 알기 쉬워서 놀리는 맛이 있다.
“괜찮지. 예쁘고, 성격도 좋고. 옷도 잘 입고.”
“그래...?”
세화는 고개를 숙이고 자신이 입은 옷을 바라보았다.
코디가 괜찮은지 안 괜찮은지 스스로 평가해보려는 것 같다.
조만간 오연수와 함께 밥이라도 한 번 먹어야겠다.
나에게 여자친구가 생긴다 하더라도 이상할 게 전혀 없잖아.
너한텐 유승현이라는 남자친구가 있는 상태니까.
오연수와 진짜로 사귄다거나 하려는 건 아니다.
그저 질투심을 부추기기 위한 소모품으로 이용해줄 생각이었다.
물론 세화의 마음이 잘 다스려진 후에. 지금부터 그러기엔 시기가 너무 안 좋다.
삐빅-! 삐빅-!
오묘한 분위기 속에서 영화관으로 향하던 도중, 휴대폰과 연결된 차 스피커에서 이질적인 소리가 울렸다.
디스플레이를 보니 캐시 박사의 이름이 떴다.
세화와 눈을 마주친 나는 핸들 옆에 있는 통화 버튼을 눌렀다.
“말씀하세요, 박사님.”
-너 지금 세화랑 같이 있어?
“네.”
-이블리언 에너지가 탐색됐어.
알아. 내가 오늘 마르셀라한테 말해놨거든.
“뭐라고요!? 어디, 그리고 몇 퍼센트인데요?”
-8퍼센트인데 천천히 오르고 있어. 일본 후지산 근처야. 저번에 그 바다괴물 때처럼 급작스럽게 올라갈 수 있으니까 준비해. 지금 너희 위치가... 영등포구나? 데리러 갈 테니까 아무 빌딩 옥상에서 대기하고 있어.
“알겠습니다. 장비 개조는 마무리 됐어요?”
-구두에 장착할 블레이드만 빼면 마무리됐어. 나 기다리는 동안 세화한테 다 설명해주면 좋겠네? 변신했을 때 낯설어하는 것보단 나을 테니까.
“바로 실전투입 하시려고요? 장비는 어떻게 장착하시게요?”
-날아가면서 해결할 거니까 걱정하지 마.
말을 마친 박사가 전화를 끊었다.
난 곧바로 앞유리를 통해 주변에 있는 가장 큰 빌딩을 찾아보았다.
괜찮아 보이는 높이의 쇼핑몰이 보이자, 난 그쪽으로 차를 돌렸다.
“영화는 내일 봐야겠다. 졸지에 외국으로 나가게 생겼네. 여권 같은 건 필요 없으려나...”
내 실없는 농담에 세화가 킥킥댔다.
“박사님이 알아서 하시겠지. 이번엔 꼭 나타나자마자 처리할 거야.”
굳은 결의가 담긴 목소리였다.
저번에 일어났던 일을 만회하려는 듯 한.
이번 세 번째 마물은 동물, 크기가 집채만 한 검치호다.
기존의 흐름대로 나타나야할 마물은 아니다.
암두시아스나 악토아보다 훨씬 약한 마물.
보스라고 하기에도 뭣한 허접이라고 봐도 됐다.
RPG 게임으로 따지자면 그냥 네임드 몬스터.
내가 이런 놈을 세 번째로 내보내는 이유가 있었다.
‘새끼들을 처리하려면 골치가 좀 아플 거다.’
사족보행에 빠른 속도를 지닌 마물이다.
아무리 빠른 레오나라 하더라도 모두 다 없애려면 시간이 꽤나 걸릴 터.
나와 박사의 화력지원이 필요할 테고, 그 지원을 통해 레오나의 디바이스 에너지가 거의 끝나갈 때쯤 전멸시키면 완벽하다.
내가 이 검치호를 내보내서 얻는 건 두 가지.
전투가 끝나면 박사는 디바이스 용량을 늘리려고 할 텐데, 그때 내 손을 빌리도록 하는 것이 첫째요,
캐시 박사가 하고 있는 각국 정부와의 협상이 급속도로 진전되는 것이 둘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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