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0 삼자대면 #2
“그... 인사해. 여긴 지혁이... 송지혁이라고, 날 많이 도와줬던 친... 구야.”
세화야, 연기 좀 잘해봐.
유승현도 네가 얼마나 당황하고 있는지 알겠다.
아닌가? 원체 눈치가 없는 놈이라 그런지 그냥 헤실헤실 쪼개고만 있네.
일단 인사부터 하자.
“안녕하세요? 송지혁입니다.”
내가 손을 내미니 유승현이 벌떡 일어나 손을 맞잡는다.
“유승현입니다. 세화를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제게도 집으로 들어오라는 제의를 해주셔서 감사드리고요.”
감사할 것도 많다. 근데 김칫국을 사발 째로 들이키는구나.
널 들일 생각 따윈 전혀 없었어.
“둘이서 같이 들어왔다면 좋았을 텐데, 아쉽게 됐네요.”
“어우... 아닙니다. 그런데 파전을 좋아하시나 봐요?”
“그냥 비가 온다니까 당기더라고요. 친구랑 같이 먹으려고 했는데... 중요한 약속이 생겨버린 것 같아서 그냥 혼자 먹으려고 합니다.”
세화가 몸을 미세하게 떨었다.
그녀를 향한 말임을 눈치챈 모양.
유승현이 안타깝다는 표정을 짓는다.
“그러시구나... 그럼 저희랑 합석하실래요?”
“아뇨. 세화가 승현 씨를 보지 못해서 아쉽다고 노래를 불러댔는데, 여기 끼면 눈치가 없는 사람이죠.”
“아, 세화가 그랬어요?”
유승현이 세화를 사랑스런 눈으로 바라본다.
그런데 어쩌냐. 세화는 지금 내 눈치를 보느라 혈안인데.
그나저나 이런 멍청한 놈... 내가 지금 널 돌려 까고 있는 것도 모르겠냐?
“그럼요. 보기가 좋더라고요.”
멀리서 종업원이 포장이 끝났다고 날 부른다.
그녀에게 환히 웃어준 내가 말을 이었다.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다음에 날 잡고 식사나 한 끼 해요.”
“다음 휴무가 언제일지 가늠이 안 돼서... 그러지 마시고 앉으세요. 저흰 괜찮으니까.”
이거 참 멍청해도 너무 멍청한 놈이었다.
지금 세화에게 절실히 필요한 사람은 힘들어하는 자신의 고민을 들어줄 믿음직한 한 사람이다.
은혜를 갚으려는, 감사인사를 전하고 싶은 착해빠진 병신이 아니라.
이건 아예 여자친구를 빼앗아달라고 사정하는 수준이구만.
세화에게 시선을 돌린 내가 물었다.
“어떻게 생각해?”
“어...?”
당황해하는 세화의 모습이 너무 가련하다.
넌 무조건 승낙하게 되어 있어.
나한테 일언반구도 없이 유승현을 만나러 가서 미안할 테니.
“난... 괜찮아. 여기 앉아.”
“알았어. 그럼 조금만 있다가 갈게.”
세화가 엉덩이를 움직이더니 구석으로 간다.
포장한 파전을 가지고 와서 식탁에 깐 내가 그녀의 옆에 앉자, 유승현이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둘이 많이 친한가요?”
“대학 내에선 많이 친한 편이라고 생각해요.”
대답을 한 내가 유승현 몰래 세화의 허벅지에 손을 올렸다.
그러니 세화가 크흠 하는 기침소리를 내고는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많이 친한 게 아니라 가장 친해.”
“그래? 그거 다행이네. 근데 송지혁 씨도 막걸리 드시나요?”
세화의 허벅지를 애정 어린 손길로 주물거리던 내가 막걸리 페트를 들었다.
“그럼요. 좋아합니다. 제가 먼저 따라드릴게요.”
“아이고... 감사합니다.”
웃어른을 대하는 것 마냥 공손하게 막걸리 그릇을 든 그.
술을 받고 내게 따라줄 땐 살짝 일어나기까지 한다.
난 유승현에게 공식적으로 무언가를 해준 적이 없다.
물론 집에 들어오라고 하긴 했지만, 그가 고사했으니 지금은 서로 동등한 입장.
마치 세화를 결혼할 여자처럼 생각하고, 그녀를 케어해주니 내게 고개를 숙이며 저자세로 나오는 것 같은데...
유승현이 저럴수록 세화는 나를 절대갑이라고 생각할 터였다.
세화에게도 술을 따라준 유승현이 말했다.
“건배할까요?”
축배지, 축배.
스스로 세화에게서 멀어지려 하는 네 행동을 위한 축배다 이 새끼야.
씨익 웃은 내가 잔을 들었다.
**
[지혁아, 집에 있어? 나 방금 승현이 보내고 돌아가려고 하는데... 너 파전도 제대로 못 먹었잖아. 포장해갈까?]
[혹시 자는 거야? 왜 전화를 안 받아?]
[일어나면 연락 주라.]
[전화 좀 받으면 안 돼?]
휴대폰에서 울려대는 진동.
느긋한 마음으로 침대에 누운 내가 킥킥 웃었다.
지금은 새벽 두 시.
남들이라면 한참 꿈나라에 있을 시간인데도 전화와 문자폭탄이라니. 민폐도 이런 민폐가 없어.
우우웅-!
또 진동음이 울린다. 이번엔 전화다.
문자, 전화 순으로 연락해대는 게 참... 단순하구나.
난 이번엔 전화를 받아주기로 했다.
“끄응... 여보세요.”
잠에 찌든 메소드 연기, 훌륭하다.
-자고 있었구나? 미안해...
“응... 무슨 일이야...?”
-잠깐 들어가도 돼? 문 좀 열어주라.
“비밀번호 치고 들어와... 5584...”
비밀번호를 알려주고 전화를 끊으니, 현관 쪽에서 띡띡거리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또 거실 화장실에서 수돗물소리가 들려온다.
세화가 손을 씻는 모양이다.
얼마 뒤 내 방문이 아주 조용히 열린다.
문틈 사이로 세화의 어여쁜 얼굴이 보이지만, 그녀는 불이 꺼진 내 방을 볼 수 없다.
인기척이라도 내주면 들어오려나 싶다.
“노크는 안 해?”
“미, 미안해...”
“들어와...”
승낙이 떨어지자 세화가 잰걸음으로 다가오더니 침대에 걸터앉는다.
그녀는 잠에서 막 깨어 부스스한 얼굴을 한 내가 휴대폰을 뒤적이는 것을 바라보았다.
끄응... 하고 기지개를 편 내가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다.
“전화랑 문자는 왜 이렇게 많이 했대? 지금 새벽 두 시잖아.”
“보고 싶어서...”
“유승현 씨는? 잘 만났고?”
“응. 방금 호텔까지 보내다주고 왔어. 2차 가자고 하던데... 얼굴이 빨개질 정도로 취해서 그냥 호텔로 보냈어.”
“넌? 얼마나 마셨어?”
“너랑 있을 때 몇 잔 마신 게 다야. 깨워서 진짜 미안해.”
난 말없이 자리를 살짝 옆으로 옮겼다.
그러자 세화가 겉옷을 벗더니 내 앞으로 들어와 누웠다.
은은하게 풍겨오는 막걸리 냄새와 기름 냄새, 그리고 옷의 섬유유연제 냄새가 섞여 오묘한 냄새를 풍긴다.
내가 코를 킁킁거리자 세화가 아차하며 자신의 뒷머리 끝부분을 코앞으로 당겼다.
머리카락에 묻은 냄새를 맡아본 세화가 표정을 구겼다.
“냄새 많이 나네... 나 씻고 올까?”
“상관없어. 그냥 이러고 있어도 돼.”
“아냐. 이불에 냄새 배면 안 되니까 집에 가서 씻고 올게. 조금만 기다려... 알았지? 자면 안 돼?”
“장담은 못하겠는데... 그럼 그냥 여기로 옷가지 가져와서 씻어. 안방 화장실 있잖아.”
“응?”
눈에 띄게 당황해하는 세화.
묘한 말을 들어서 그런 것이 틀림없다.
“오해하지 마. 조용하면 다시 잠들 것 같으니까 그렇게 말한 거야. 여기 문 열어두고 거실 화장실에서 씻어도 돼.”
“아... 난 또... 그럼 5분... 아니, 3분만 기다려.”
“알았어.”
내 대답을 들은 세화는 쿵쿵거리며 집을 나갔다.
방음이 잘 된 건물이라 다행이었지, 다른 곳에서 저러면 층간소음 감이다 세화야.
얼마 지나지 않아 옷가지를 들고 온 세화는, 내가 자는지 확인하더니 화장실에 들어가 샤워기를 틀었다.
문도 살짝 열어놓은 것이 절대 자지 말라고 압박을 하는 것 같다.
내가 엿보면 어쩌려고 저렇게 경각심이 없는지.
잠깐만, 엿보라고 문을 열어둔 것일 수도 있잖아? 이거 꽤 야한데...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천장만 바라보고 있으니, 샤워를 마친 세화가 젖은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닦아내며 나왔다.
“자?”
“.... 아니.”
그에 안심한 그녀는 다시 내 옆에 눕더니, 머리카락 일부를 내 코에 가져다댄다.
“냄새 나는지 맡아봐. 앗...”
인중에서 일어나는 축축한 느낌.
자신의 실책을 알아차린 세화가 화들짝 놀라 머리카락을 빼낸다.
이후 손가락으로 내 인중을 한 차례 쓸어 물기를 닦아주었다.
피식한 내가 말했다.
“냄새 안 나. 재밌게 만나고 왔어?”
“승현이가 자꾸 네 얘기를 했어. 정말 좋은 사람이라고 하더라.”
“그랬어? 서운했겠네.”
“왜?”
“너 지금 전 세계에 나타난 그 괴물들 때문에 심란하잖아. 넌 유승현 씨에게 고민을 털어내고 위로받고 싶었던 거 아니야? 그런데 그분이 날 많이 언급했다니까 서운하지 않아?”
세화가 엄청난 동요를 일으킨다.
네 마음을 정확히 꿰뚫었지?
난 다 알고 있어.
“그래서 나도 조금만 있다가 자리를 피하려고 한 건데... 아쉽게 됐네. 나라도 괜찮으면 들어줄게.”
“.....”
“아니면 그냥 다 잊고 자도 돼.”
세화가 자신의 눈을 닦는다.
갑작스레 눈물이 튀어나왔기 때문.
울컥했구만... 제대로 감동했어.
“말 안 할래... 너도 엄청 고생하고 있잖아...”
울먹이는 말투. 보호해주고 싶은 마음이 샘솟는다.
“아냐. 장비 개발은 거의 다 끝났어. 마무리는 박사님이 하겠대. 이젠 시간 많아졌으니까 괜찮아. 그리고 나중에 변신해서 사용법 익혀보자.”
고개를 주억거리는 세화.
얼굴엔 기뻐하는 표정이 역력하다.
저건 새 장비를 사용해본다는 기대감보다는 내게 시간이 생겼다니까 좋아하는 것이다.
“울다가 웃었다가... 난리도 아니네.”
“크응...!”
코를 먹는 것도 귀엽다.
웃기기도 하고.
세화가 내 가슴에 얼굴을 부벼댄다.
등을 툭툭 쳐주니 기분이 좋아지는지 몸에 힘을 쭉 빼기까지 한다.
“난 네가 정말 강하다고 생각해. 밖에서 온갖 사람들이 네 정체를 까발리려고 하는데, 사람들을 괴물들에게서 지켜내지 못해 힘든데 홀로 묵묵히 버텨내고 있잖아.”
“.....”
“많이 힘들지? 조금만 참아. 이블리언... 그 유치한 이름의 에너지를 탐색할 수 있는 범위도 넓어졌고, 박사님이 그러는데 세계연합과의 대화도 진전이 있대. 괴물이 나오면 네가 언제든 뛰쳐나갈 수 있게 만반의 준비를 해놓을 테... 헙!”
내 입술에 느껴지는 강한 압박감.
세화의 촉촉하고 탱글탱글한 입술이 부딪쳤기 때문이었다.
적극적으로 달려들어 내게 키스한 세화가 내 입 안으로 혀를 밀어 넣으려고 한다.
내 말이 위로가 됐나보다. 아직 할 말은 더 남았는데... 나중에 해야겠다.
오랜 시간 세화와 입을 맞춘 나는, 그만하라는 뜻에서 그녀의 등을 빠르게 여러 번 두드렸다.
그러자 세화가 얼굴을 떼고 아련한 눈빛을 하더니, 나에게 오늘 있었던 일을 솔직히 고백했다.
“지혁아... 나 오늘 승현이랑 손잡았어. 네가 하지 말라고 했는데...”
뭐라고? 내가 당부했는데도 그런 짓을 했단 말이야?
이거 완전 요물이구만. 마르셀라에게 추적용 마물 개조를 빨리 끝내라고 닦달해야겠다.
혼내고 싶지만 며칠간 힘들었을 테니 봐준다.
“적당히 둘러댈 핑계거리가 없어서 어쩔 수 없이 그랬어... 화내지 말아줬으면 좋겠어.”
음... 경고는 하려고 했는데 이 정도면 괜찮겠지.
“괜찮아. 솔직하게 말했으니까 봐줄게.”
“다시는 안 그럴게. 네가 괜찮다고 할 때까지 절대, 절대 안 그럴게.”
이러다 유승현과 헤어지겠다고 말하는 게 아닌가 모르겠다.
아니, 그 정도는 아닌 것 같다.
세화는 내 위로에 대한 보답과, 하지 말라는 일을 했기에 반성을 하고 싶어 하는 것이지, 아직도 유승현에 대한 마음은 크다.
내가 아는 세화는 지금까지의 일로 마음이 확 바뀔 녀석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내가 올라간 저울의 무게가 어마어마하게 늘어난 건 맞다.
어쩌면 동등한 수준까지는 올라오지 않았을까? 아직은 확신이 안 선다.
“알았다니까. 이제 시간도 많아졌으니까... 모레 쇼핑이라도 갈래? 나가서 밥도 먹고 외식도 하다가 들어오자.”
“난 좋아. 뭐든 다 좋아. 그런데 왜 모레야? 내일은 안 돼?”
“내일은 할 일이 있어.”
유리아를 만난 지도 꽤 됐겠다, 슬슬 얼굴을 비춰줘야 한다.
이번에 만날 땐 그녀가 내게 연락할 수 있도록 상황을 만들 생각이었다.
“할 일...? 뭔데? 연구실 가는 거야? 아니면 그 옛날 친구 만나려고 하는 거야?”
질문을 던지는 세화의 눈빛에서 빔이라도 나올 것 같다.
괜히 질투 유발한답시고 더 심란하게 하지 말아야겠다. 며칠간 잘 대해줘야지.
“아니. 아저씨가 내일 퇴원하셔서 같이 밥이라도 먹으려고 해.”
“아저씨...? 아! 그 입원하셨던 비서 분?”
“맞아. 너도 데려가고 싶은데 개인적인 이야기도 해야 돼서... 미안해. 최대한 일찍 올 테니까 기다리고 있을래? 돌아오면 쇼핑하러 갈까?”
“응, 기다릴래. 근데 안 피곤해?”
“너랑 나가는데 당연히 안 피곤하지. 얌전히 기다리고 있어.”
“알았어. 히히...”
금세 해맑아진 세화가 헤픈 웃음소리를 내뱉더니 내 팔에 머리를 기댄다.
나가겠다는 말은 전혀 하지 않는 모습을 보니, 내 반대편 손을 끌어와 깍지를 끼는 모습을 보니 여기서 자려는 것 같다.
오늘 유승현의 행동이 몹시 실망스러웠던 탓이었을까? 애정결핍이라도 있는 것처럼 행동을 하는구나.
난 속으로 그에게 감사를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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