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9 삼자대면
“레오나는 요즘 어때요?”
마르셀라의 물음이었다.
“힘들어하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 마물들이 출몰한 그날부터 며칠 후까지, 세화의 표정은 펴질 줄 몰랐다.
그녀는 자신이 있음에도 사람들을 구하지 못했다는 것에 엄청난 죄책감을 느꼈다.
누구에게 하소연을 하고 싶어도 그럴 수 없어 마음이 점점 더 답답해져갔다.
그녀가 심란한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은 두 명 있었다.
바로 자신의 진짜 모습을 알고 있는 유승현과 나였다.
그래서 세화는 두 사람을 만나 자신의 가슴속에 있는 이야기를 꺼내려고 했다.
하지만 그녀는 둘을 만나지 못했다.
유승현의 경우는 골드퍼퓸 호텔 일이 너무 바빠져 몸이 두 개라도 모자랄 정도라 세화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가끔 전화통화를 하긴 하지만 그마저도 짧았고, 직접 만나는 것보다는 못했으니...
내 경우도 바쁜 건 마찬가지였다.
나는 이번 주 내내 박사의 연구실에 불려가 장비를 개조하는 것을 도와주었다.
첫 날엔 점심에 불려갔지만 그 다음 날부터 아침 일찍 연구실에 가서 밤늦게 돌아오는 수준이었다.
그 사실을 알고 있었던 세화는 학업까지 내팽개치고 자신을 위해 일하는 내게 절대 넋두리를 하지 못했다.
세화는 박사의 연구실에 같이 가서 뭐라도 도와주고 싶어 했다.
그러나 그녀는 미래기술을 알지도 못했거니와, 박사가 절대 오지 말고 학업에나 열중하라며 당부하자 발만 동동 굴렀다.
“정의감이 오히려 정서적인 문제를 불러일으켰군요.”
“비슷하다. 아직 레오나의 강인함과 완전히 동화되려면 멀었을 테니 그럴 만하지.”
“마물을 풀어놓도록 하신 것도 레오나의 가슴에 불안정한 심리를 만들기 위한 계획이었나요? 과연...”
얘는 다 좋은데 가끔 내 의도를 곡해했다.
지금도 마찬가지. 세화에게 불안정한 심리를 만들 생각도, 그것을 이용할 생각도 없었는데 이렇게 말하니 헛웃음이 나왔다.
“넘겨짚지 마라. 캐시 박사가 날 불렀기에 일어난 일이었을 뿐이다. 상황이 우연하게 맞아떨어졌다고 보면 되겠지.”
“하지만 박사의 그러한 행동도 마왕님께서 유도하신 거잖아요?”
이렇게 빨리 내게 장비 개조를 맡길 줄은 몰랐지 이년아.
근엄한 척하자. 얘가 저런 초롱초롱한 안광을 발산하면서 날 째릴 때면 등에 소름이 돋는 기분이다.
“그래.”
“역시... 저 마르셀라는 마왕님께 영원한...”
“그만. 추적용 마물 개조는 어떻게 되어가고 있지?”
“아직 조금 걸릴 것 같아요. 그래도 곧 영상까지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있을 거에요. 금방 만들겠습니다!”
힘찬 걸스카우트마냥 대답하는 마르셀라.
내가 피식 웃었다.
“그래, 알았다.”
“근데 마왕님, 유리아에겐 어떤 식으로 접근하실 건가요? 마왕님께서 그년의 아비와 비슷한 남자로 변장한 건 알고 있지만... 궁금해서요.”
난 마르셀라를 내려다보았다.
하긴, 플레이어가 아니었던 얘는 날 끝까지 보좌하다가 셀린에게 뒈지기만 했지, 유승현과 비스트 슬레이어들의 문란한 성생활은 모른다.
유리아에겐 재미있는 성벽이 있었다.
소프트한 사디즘 플레이를 즐겨 하는 게 바로 그 재미있는 성벽이다.
사디즘보다는 도미넌트라고 말해야 옳겠다.
여기에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과도한 집착을 하는 건 덤.
여왕님 포스를 풀풀 풍기며 도도하게 유승현을 다뤘는데, 놈은 좋다고 유리아를 모시면서 디바이스 충전기 역할을 한다.
난 그런 그녀의 성벽을 증폭시켜주면서 떨어뜨릴 생각이다.
물론 그 전에 성생활을 할 수 있는 상황까지 만들어야겠지만.
“내게 생각이 있으니 걱정하지 마라.”
“네! 저 마르셀라는 마왕님을 믿습니다!”
“사탕발림은 그만하고 박사의 포탈 기술이나 내 뇌에 전달해놓도록.”
원래 이건 캐시 박사가 정부와의 접촉 이후 한동안 고생하다가 1탄 중반부에 만들어내는 물건.
각국의 중심에 포탈을 만들어놓고, 마물이 나타나면 비스트 슬레이어가 바로 출격할 수 있게끔 한다.
발명 초반엔 불안정해서 무기를 놓고 오거나 장비가 사라지는 경우도 있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완벽해진다.
난 캐시 박사의 포탈 발명을 앞당기면서 지대한 공헌을 끼칠 예정이었다.
비스트 슬레이어들 사이에서 필수불가결한 존재가 되어야 하니까.
“알겠습니다, 바로 시작할게요.”
“그리고... 오늘이 금요일이지? 유승현에게 휴가를 줘라. 하루면 된다.”
“네? 휴가를요...? 레오나의 마음이 얼마나 기울었는지 확인해보기 위해서인가요?”
“많은 것을 알려고 할 필요는 없다.”
“히잉... 네... 그럼 지금 실장에게 말해놓고 기술 이전을 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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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휴가를 주신다고요?”
놀라 자빠지기 직전까지 간 유승현의 외침.
골드퍼퓸 호텔 유흥주점의 여실장이 생긋 웃었다.
“사장님께서 그동안 고생했다고 하루 쉬게 해주래. 오늘 팁 나온 것도 너한테 다 돌리고, 일당도 세 배로 쳐주시겠다고 하시네?”
“저, 정말요? 왜 이렇게 잘해주시는 겁니까...?”
“휴일을 보장받지 못하는데 노동부에 신고도 안 하잖니. 이쪽 업계가 그런 경향이 없잖아 있긴 한데... 어쨌든 널 좋게 봐주시는가봐. 오늘은 출근하지 말고, 내일 오후 4시에 나와.”
유승현은 사장에게 어마어마한 감사의 마음이 솟아나는 것을 느꼈다.
일한 만큼 돈도 많이 주는데 휴일까지 챙겨주고, 일당도 세 배, 심지어는 오늘의 팁까지 주려고 한다.
아무리 신고가 두렵다고는 해도 감사한 건 감사한 일이다.
신고할 생각도 없었지만.
“사장님께 전화를 드려야...”
“바쁘신 분이니까 그러지는 마. 오늘 뭐할 거야?”
답은 바로 나와 있었다.
유승현이 망설이지도 않고 대답했다.
“여자친구를 보려고 합니다.”
“그래. 푹 쉬어.”
“네! 내일 뵙겠습니다!”
유승현은 호텔 방으로 올라가자마자 세화에게 전화를 걸었다.
연결음은 무척 길었다.
방을 이리저리 돌아다닌 그가 점점 안달이 나기 시작할 때쯤, 연결음이 끊기더니 휴대폰 너머로 세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응, 승현아.
가라앉은 목소리.
저번에 사람들을 구하지 못해 죄책감이 든다고 말해왔었는데, 그게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 것 같았다.
유승현의 마음이 아려왔다.
“세화야, 수업 중이었어?”
-아니, 방금 끝나서 집에 가려고. 왜?
“나 오늘 휴가 받았어. 당장 갈게.”
-뭐? 진짜?
“진짜야. 사장님이 오늘 하루 푹 쉬라고 하셨거든. 안 그래도 하루만 빼달라고 하려 했는데, 타이밍이 좋았어. 지금 달려갈 건데 시간 돼?”
-음... 잠깐만.
세화가 말을 하다 말고 잠깐 침묵했다.
유승현은 그녀가 여러 젊은 목소리와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들었다.
설마 중요한 일이 있나? 과제 답사 같은 거라도 가야 되나? 라고 생각한 유승현이 손가락 지문을 긁어대며 초조함을 보였다.
-동기들이랑 놀러 가려고 했는데 취소할게. 너 휴가 받았다는데 당연히 그래야지.
원하는 대답이 들려오자 뛸 듯이 기뻐한 유승현이 말했다.
“고마워. 지금 샤워하고 바로 한국대 쪽으로 갈게.”
-아냐, 내가 지금 호텔 쪽으로 가서 기다릴 테니까 샤워하고 바로 나와.
“알았어.”
전화를 끊은 유승현은 콧노래를 부르며 욕실로 달려가 샤워를 끝마쳤다.
이후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옷들 중에서 가장 괜찮은 것들을 골라 입었다.
밖으로 나온 그는 멀찍이서 포니테일 머리를 한 세화가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자신을 기다리고 있자 어깨가 으쓱해졌다.
저기 있는 미녀가 자신의 소꿉친구이자 사랑하는 여자친구라니.
바뀐 머리가 조금... 조금 그렇지만 그마저도 예쁘다.
세화에게 가까이 다가간 유승현은, 그녀가 자신을 발견하자 함박웃음을 지었다.
“세화야!”
하지만 격한 반응을 보인 유승현에 비해 세화의 반응은 그저 그랬다.
“왔어? 오늘 뭐할까?”
“음... 오랜만에 제대로 만나는 건데 안 반가워?”
“당연히 반갑지. 그냥 마음이 좀... 미안해. 처음 받는 휴가인데 내가 이래서...”
유승현은 인자하게 웃었다.
마치 다 이해한다는 표정을 지은 그가 말했다.
“괜찮아. 오랜만에 같이 맥주나 한 잔 할까? 먹고 싶은 거 있어?”
“앞에 파전집 있던데 거기로 가자. 너 파전 좋아하잖아. 내가 살게.”
“네가 왜 사? 나 오늘 돈 갖고 왔어. 어제 팁 많이 받았거든.”
“너 빚 갚아야 되잖아. 나 아직 여유 있으니까... 빚 다 갚으면 네가 사는 걸로 하자. 알았지?”
자신을 배려하는 마음씨가 오롯이 느껴졌기에, 유승현이 참지 못하고 세화를 안으려 했다.
그러나 세화가 손을 앞으로 뻗으며 그를 제지했다.
“잠깐만... 나 오늘 땀 흘려서 냄새나.”
“옛날에 같이 운동했을 땐 잘만 안아놓고선... 왜 그래?”
“다음에... 다음에 안아줄게. 너한테 잘 보이고 싶어서 그래.”
유승현은 문득 저번에 잠깐 세화를 만났을 때, 그녀가 길거리에서 포옹하기 껄끄러워했던 일이 생각났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털어 상념을 날려버렸다.
지금까지 사람이 많은 데서 포옹한 적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던 데다, 괴물의 일로 스트레스를 받았다고 생각해서였다.
“알았어. 그럼 손은 잡아도 되지? 근데 우산을 들고 있네? 오늘 비 온대?”
“저녁에 비 올수도 있대.”
“그래? 그럼 뭐... 가자.”
유승현이 당당하게 손을 내밀었다.
그런 그의 손을 빤히 바라보던 세화는, 고개를 두리번거리더니 누군가를 찾는 모습을 보였다.
유승현은 그런 세화를 보며 그냥 부끄러워하는 거구나... 라고만 생각할 뿐이었다.
결국 세화는 유승현의 손을 잡았다.
입이 함지박 만하게 벌어진 그는, 다소 오버액션을 하며 세화와 함께 파전집으로 이동했다.
많은 인파가 몰려있는 가게 안, 거기 들어온 유승현이 감탄을 터뜨렸다.
“우와... 사람이 왜 이렇게 많아?”
“금요일이기도 하고... 맛집이기도 하고... 근처에 살면서 이런 데도 몰랐어?”
“심부름하는 걸 제외하면 밖에 나갈 일이 거의 없으니까. 심부름으로 파전을 시키는 손님은 없잖아.”
“그건 그렇긴 하겠지. 저희 두 명이요.”
종업원에게 인원수를 말하고 안내를 받은 두 사람이 자리에 앉았다.
코팅한 목재식탁 옆에 놓인 메뉴판을 꺼낸 세화가 그것을 유승현에게 내밀었다.
“네가 보고 시킬래?”
“넌 여기 와봤어?”
“한 번 정도... 그땐 해물파전 먹었어. 이게 제일 잘 팔린대서.”
“그럼 그걸로 먹자. 막걸리도 시킬까? 너 술 마셔도 돼?”
“나도 땡기긴 했어. 조금만 마시자.”
그렇게 두 사람은 주문을 하고 서로 담소를 나누었다.
유승현은 자신을 향해 웃으며 말하는 세화를 보고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을 만나니 세화의 심란한 마음이 조금이나마 치유되고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힘없는 웃음이긴 했지만, 오늘 활짝 웃게 해주리라.
그리 다짐한 유승현이 세화의 말을 들으며 리액션을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파전이 나오자, 세화가 혀에 침을 바르며 젓가락을 비볐다.
그러다가 계산대에서 여종업원과 이야기를 나누는 한 사람을 보고 깜짝 놀라고 말았다.
“5분 전에 해물파전 두 개 포장 시키신 분이요? 전화번호 뒷자리하고 성함 좀 말씀해주실래요?”
“4444에요. 이름은 송지혁이고.”
“아! 4444! 기억하고 있었어요. 근데 아직 요리가 덜 돼서... 조금만 기다려주시면 바로 갖다 드릴게요.”
“네, 감사합니다.”
“근데 전화번호가... 불길한 번호네요.”
“하하! 그렇긴 하죠. 근데 전 마음에 들어요.”
그는 다름 아닌 지혁이었다.
종업원과 하하호호 대화를 나누던 그는, 가게를 이리저리 둘러보다 세화와 눈이 마주쳤다.
“어? 세화야?”
목소리가 꽤나 컸고, 세화의 이름이 언급되었기에 유승현이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는 궁금증이 가득 담긴 표정으로 세화에게 물었다.
“누구야? 대학 동기인가?”
세화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웃는 낯으로 다가오는 지혁을 떨리는 동공으로 응시하기만 할뿐.
이는 지혁의 안배였다.
세화의 일거수일투족을 추적하던 상태였던 그가 계획적으로 접근한 것이다.
두 사람이 앉은 테이블에 온 지혁이 방긋 웃었다.
“여기서 뭐해? 못 보던 분이 계시는데... 혹시 남자친구분이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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