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7 새로운 만남 #2
익숙하고 그리운 얼굴은 곧 친근감을 불러일으킨다.
유리아는 자신의 돌아가신 아버지와 내 얼굴이 닮았다며, 잠깐만 대화를 해달라며 사정을 했고, 그녀를 파헤치려는 목적을 갖고 있던 난 당연히 승낙했다.
그렇게 우린 통성명을 하고 카페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었다.
현재 내 이름은 김태곤, 미혼에 부동산 사업을 하는 나름 잘 나가는 사업가였다.
“제가 이야기하자고 해놓고 얻어먹기가 너무 죄송한데...”
상당히 미안해하는 유리아에게, 내가 인자한 웃음을 보였다.
“신경 쓰지 마십시오. 스웨덴에서 오셨다고요?”
“네.”
유리아는 평소의 도도한 모습으로 돌아와 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커피를 홀짝일 때마다 내 얼굴을 흘깃거리는 것이, 딱 봐도 날 신경 쓴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헌데 길거리에서 제게 이상한 언어로 말을 하시지 않았나요? 그게 스웨덴어인가?”
유리아가 저도 모르게 에란델 공용어를 썼던 일을 말함이었다.
물론 개조된 난 그 언어를 모조리 이해하고 있었지만, 알아듣는 모습을 보일 경우 의심할 테니 모르는 척하고 있는 게 맞았다.
“그... 건... 제가 언어학을 공부하고 있어서 저도 모르게 나온 거에요. 스웨덴어는 아니에요.”
핑계도 참... 그럴싸한 것을 대던가 하지.
“그렇군요. 그나저나 조금 의외입니다. 유리아 씨... 라고 하셨죠? 유리아 씨의 아버지와 제가 닮았다니까 놀랍네요.”
“저도 놀랐어요. 너무 닮으셔서... 다짜고짜 붙잡아서 당황하셨죠?”
“아닙니다. 딸 같은 분이 불러주시니 기분 좋았어요. 물론 미혼이라 딸은 없지만... 기분이 나빴다면 사과드리고 싶네요.”
유리아가 황급히 손사래를 친다.
“전혀 기분 나쁘지 않았어요. 오히려... 아니, 아니에요.”
뒷말을 삼킨 그녀.
딸 같다고 해줘서 기뻤다고 하려 했던 모양이다.
과거의 타이라트... 아니, 내 앞에선 정색과 혐오로 일관하더니...
그 호의적인 눈빛, 무척 아름다우니 앞으로 자주 보여다오.
“한국어가 대단히 능숙한데, 한국에는 언제 오셨는지요?”
“1년 전에 이민 왔어요. 한국어는 10년 전부터 계속 배우고 있었고.”
“그래요? 한국에 관심이 많으신 것 같습니다.”
“그렇기도 하고, 꼭 찾아야할 사람이 있어서...”
꼭 찾아야할 사람이라? 그럼 나겠군.
혹시 모르니 떠봐야겠다.
“그 사람은 찾았나요?”
“아뇨. 아직 못 찾았어요. 하지만 최근 힌트를 얻었죠.”
힌트라... 분명 암두시아스와 악토아를 보고 눈치를 챈 거다.
하지만 혼자 힘으로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도와주는 사람이 수천, 수만 명이나 있다고 해도 내 진짜 모습과 기지는 찾지 못할 거다.
“소중한 사람이라도 되는가봅니다, 스웨덴에서 날아올 정도면.”
“소중한 사람은 아니에요. 따져야할 게 있죠.”
말은 순화해서 했지만 분명 날 죽이기 위해 온 것이 맞았다.
그렇다면 미리 이곳으로 넘어온 것을 빼면, 2탄의 흐름이 달라진 게 별로 없다는 뜻인데... 이러면 일이 무척 쉬워진다.
아니지, 아예 내가 확 바꿔버릴까?
디바이스를 하나 더 만들자고 박사를 꼬셔 빨리 변신시킬까?
레오나와 유리아... 두 명이 동시에 활동하는 모습이라면 나쁘지 않아 보이는데...
온갖 생각이 머릿속을 채운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세요?”
커피를 홀짝이던 내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여기서 더 캐묻는다면 유리아가 의심할 수도 있다.
아무리 아버지와 닮았다고는 해도 우린 지금 초면이었으니까.
또 유리아가 위장하기 위한 거짓말을 계속 해대는 것으로 보아 여기서 무언가를 더 알 수는 없을 것 같았다.
난 유리아와 꽤 오랜 시간동안 시덥잖은 이야기들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녀는 아버지 이야기를 주로 했는데, 말을 할 때마다 목소리에 그리움이 사무쳤다.
보고 싶기는 어지간히 보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난 마치 진짜 아버지가 된 것처럼 행동하며 나에 대한 유리아의 호감을 쌓아갔다.
그렇게 늦은 시간이 되었을 때, 나는 시계를 보았다.
“이만 일어나볼까요?”
“네? 벌써요?”
“벌써라니... 이 커피숍에서 세 시간이나 있었습니다만.”
“아... 그렇죠. 그럼 제가 식사라도 대접할게요. 커피를 사주셨으니까...”
“늦었으니 집에 돌아가고자 합니다. 내일 일이 바쁠 예정이라 푹 쉬고 싶네요.”
“그... 그럼 연락처라도 주세요. 그것마저 곤란하다면 회사 이름이라도...”
“이러시는 건 조금 불편합니다.”
유리아가 고개를 푹 숙였다.
만날 여지를 남기고 싶지만, 불편하다니까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
그녀가 이내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혹시 환생을 믿으세요?”
뜬금없는 질문이구나.
환생이라... 날 아버지의 환생이라고 생각하는 건가?
하긴, 에란델 행성은 그런 쪽에 크나큰 믿음을 갖고 있었으니...
“글쎄요.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은 없습니다만...”
“전 아저씨가 너무 익숙해요. 아저씨는 안 그런가요?”
당돌하구나, 여전히 당돌해.
표정을 굳힌 내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닮은 사람들은 어딜 가나 있는 법이지요. 솔직하게 말할까요? 유리아 씨는 그저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에 잠깐, 아주 잠깐 그런 마음이 든 것뿐이라고 생각합니다.”
“.... 그래도...”
“인연이 된다면 또 보겠지요. 세상은 생각 외로 좁거든요.”
말을 마친 내가 의자를 뒤로 빼고 자리에서 일어나자, 유리아도 마주 일어났다.
그녀의 표정은 몹시 간절했는데, 어떻게든 나와 연락을 이어가고 싶은 것 같았다.
유리아는 품에서 볼펜을 하나 꺼내더니, 냅킨에다가 무언가를 적고는 내게 내밀었다.
“제 연락처에요. 꼭 다시 연락주셨으면 해요.”
“음...”
잠시 고민하는 척하다 그것을 받은 내가 담담하게 손을 내밀었다.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그 손을 맞잡은 유리아가 강조했다.
“꼭 연락주세요. 꼭이요.”
악수를 마친 나는, 대답하지 않은 채 씨익 웃어주고는 커피숍을 나갔다.
걱정하지 마라, 난 다시 네게 찾아갈 테니까.
**
집 앞 현관문 앞에 치킨이 놓여 있다.
한대거리에서 인기가 많은 호프집의 치킨.
세화가 친구들과 맥주 한 잔 하면서 포장해온 모양이었다.
피식한 나는 치킨을 들고 집 안으로 들어왔다.
이후 전자레인지에 그것을 데우면서, 마르셀라가 보낸 동영상을 봤다.
영상엔 웨이터복을 입은 유승현이 세화와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찍혀 있었다.
‘세화의 머리스타일이 바뀌었군.’
옆머리 몇 가닥이 턱 아래까지 내려간 포니테일.
다듬은 것 같은 앞머리가 이마를 덮었고, 묶은 뒷머리는 적당히 휘어진 S자 모양이었다.
뒷머리가 멀끔하게 정돈되지 않은 모습이 내 마음에 쏙 들었다.
특히 여린 목덜미가 드러난 것이 좋았다.
-머리 바꿨네?
유승현의 놀란 말투에, 세화가 묶은 뒷머리를 살살 만지작거렸다.
-응. 앞머리만 살짝 자르고 바꿔봤어. 어때?
-음... 예쁘긴 한데, 예전이 더 좋았다고 생각해. 그리고 너 귀 드러내는 거 싫어했잖아.
-이제 좀만 있으면 여름이잖아. 답답해보여서 바꿨어.
-영웅으로 사는 거에 대해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기는 하는가보다. 오랜 시간 고수해온 머리스타일을 바꿀 정도면. 인천에서 있었던 일... 수고했어. 난 네가 자랑스...
세화의 눈썹이 꿈틀하면서, 그녀가 유승현의 말을 끊는다.
-내가 그거 언급하지 말랬잖아. 안 그래도 사람들 눈치까지 보는데 너까지 그럴 거야? 그냥 예쁘다고만 해주면 되지 꼭 사족을 붙여야 해?
-아... 그랬지. 진짜 미안.
-오늘도 아침 늦게 끝나?
-그럴 거 같아.
-휴무 좀 내달라고 할 수는 없어?
-세화야, 알잖아. 나 돈 벌어야 되는 거... 그리고 일이 너무 바빠서 내가 빠지면 여기가 안 돌아가. 조금 잔잔해지면 한 번 말씀드려볼게.
쩔쩔매는 유승현 앞에서 세화가 한숨을 푹 내쉰다.
-하아... 알았어. 어쩔 수 없지...
-이제 들어가 봐야 돼. 난 언제나 네 편이니까 힘내. 이렇게 얼굴 보니까 진짜 좋다. 오랜만에 한 번 안아보자.
-여... 여기 길거리인데?
-예전엔 그런 건 신경도 쓰지 않았잖아.
그 말에 세화가 마지못해 유승현에게 다가간다.
세화를 부서져라 꽉 안은 유승현은, 그윽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사랑해, 세화야. 난 너밖에 없다.
유승현이 갑작스럽게 세화의 입에 자신의 입을 가져다 댔다.
예상치 못하게 뽀뽀를 당한 세화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이렇게만 말할 뿐.
-일 열심히 해. 무슨 일 생기면 꼭 전화하고.
-사랑한다고 안 해줘?
-사람들 보잖아. 나중에 전화로 할게.
-지금 해주라. 그럼 힘날 거 같은데.
-아... 좀... 알았어, 사랑해.
-억지로 한 것 같지만 뭐... 그래도 힘 나네. 나 일하러 간다? 집 조심히 들어가.
-응.
그렇게 두 사람은 헤어져 각자 갈 길을 갔다.
영상은 거기서 끝.
난 한쪽 입꼬리를 살짝 올린 채 데워진 치킨을 집어 입으로 가져갔다.
그 때, 현관문에서 자그마한 노크소리가 들려왔다.
‘세화로군. 타이밍 죽여주네.’
초인종을 누르기엔 늦은 시간이라 미안했던 모양.
삐빅! 덜컥!
원격으로 문을 열어준 나는 치킨을 마저 먹기 시작했다.
그러다 살금살금 집에 들어오는 세화와 눈을 마주쳤다.
그녀가 헤실헤실 웃었다.
“잠이 안 와서 산책이라도 하려고 했는데... 문 앞에 놔뒀던 치킨이 없어져 있더라. 혹시나 해서...”
“누가 뭐래? 근데 머리 예쁘다. 마음에 쏙 드네.”
세화의 입이 쭉 찢어졌다.
누가 뭐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내 맞은편에 앉은 그녀가 물었다.
“치킨은 어때? 맛있지?”
“맛있어. 너도 먹어.”
“나는 됐어. 아까 많이 먹었거든. 아, 카드는 집에 놔두고 왔는데... 내일 돌려줄게. 아니면 지금 빨리 가지러 갔다 올까?”
“아니, 그냥 네가 갖고 있으면서 필요할 때 써.”
세화의 예쁜 눈이 끔벅인다.
아예 가지고 있으라니 놀란 듯한 모습.
내가 어깨를 으쓱였다.
“오늘 보니까 5만원도 채 안 썼던데, 카드 쓰기 미안해서 네 돈으로 놀았지?”
“아닌데...?”
“아니긴 무슨. 노래방이랑 미용실 빼면 결제내역도 없더만. 치킨은 공짜로 포장해왔냐?”
“.... 함부로 쓰기 좀 그래서...”
“네가 하루에 백만 원씩 쓴다 해도, 내 재산엔 스크래치조차 안 나. 이 얘기는 그만하고... 고개 돌려봐. 머리 좀 잘 보게.”
“이렇게?”
머리를 옆으로 돌린 채 가만히 있는 그녀.
천천히 헤어스타일을 감상하던 내가 만족에 겨워하며 옆 의자를 툭툭 두드렸다.
그러자 세화가 천천히 일어나더니 내 옆으로 와 앉았다.
그녀의 어깨에 팔을 두른 내가 말했다.
“오늘 뭐했는지 말해봐.”
“노래방 갔다가... 미용실에서 머리 조금 다듬고 친구들이랑 치맥 먹었어. 승현이도 만났고.”
“유승현 씨? 만나서 뭐했는데.”
“그냥 잠깐... 잠깐 만났어. 이런저런 얘기하다가 헤어졌고.”
“자세히 말해.”
질투심 가득한 표정을 연기한 나.
세화는 그런 내 모습을 보더니 얕게 웃었다.
그녀가 주도권을 가져올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 잠깐 시간을 끌었다.
“음... 비밀이야.”
“빨리 말해.”
“너는 어디 갔다 왔고 뭐했는데?”
아하, 서로 오픈하자?
누구랑 만났는지 알려주면 너도 대답하겠다?
하는 짓이 여우가 따로 없군.
“그냥 오랜만에 만난 친구랑 이야기를 좀 하다 왔어.”
“친구 누구?”
“오래 전부터 알던 애 있어. 좀 드센 기집애인데 간만에 소식을 들어서 말이야. 그냥 얘기만 하다 온 거니까 걱정하지 마.”
“거, 걱정 안 했는데? 왜 마음대로 착각해?”
당황하는 모습이 참 귀엽다.
“반응이 좀 격하네? 신경 쓰는 거야?”
“아닌데?”
누가 봐도 신경 쓰는 것처럼 보이는구만 아니긴 무슨.
“이제 네가 대답해. 유승현 씨랑 뭐했어?”
세화가 잠깐 머뭇거리면서 내 눈치를 본다.
“그냥... 나도 얘기만 했어.”
“무슨 얘기.”
“이런저런 거...”
“이런저런 거 뭐. 똑바로, 솔직하게 얘기해.”
“그게... 내가 투정을 부리고, 승현이가 미안하다고 하고... 서로 안아주고... 읍!”
세화는 자신의 입에 짜고 단 무언가가 들어오자 당황해했다.
그건 치킨 양념이 묻은 내 손가락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큰 눈을 더욱 치켜뜨고 날 바라보더니, 이내 내 손가락을 사탕처럼 빨면서 굴리기 시작했다.
“안아줬다고? 그럼 얘기만 한 게 아니잖아.”
세화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웃음기가 가득한 그녀의 얼굴, 눈엔 호선마저 그려져 있었다.
내게 질투를 유발하려는 자신의 의도가 성공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 행동을 함으로써 뒤따라올 결과는 생각지도 못했겠지.
“오늘 우리 집에서 자고 가.”
낮게 깔린, 화가 난 듯한 내 목소리에, 세화가 겁을 집어먹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작전이 통했다고 생각했는지 입꼬리를 살짝 올렸고, 눈빛이 몽롱해졌다.
호텔에서 애무를 받았던 것이 기억난 모양.
디바이스를 충전해야 되니까... 이건 어쩔 수 없는 거야.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는 듯했다.
좋아, 원하는 대로 해주지.
이참에 접때 못 다했던 일도 끝까지 해야겠다.
그녀가 발악을 하던 뭘 하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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