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2 덫
이틀 후 금요일 밤, 남극 비밀기지.
나는 마르셀라와 함께 곧 내보내게 될 두 번째 마물을 보고 있었다.
끼이익! 끼익!
물속에 있는데도 울려 퍼지는 소름끼치는 소리.
모니터 너머로도 그 음파가 전해지는 것 같다.
두 번째 마물은 말미잘과 비슷한 생김새를 한 거대 수중생물이다.
수천 개의 길고 찐득한 촉수를 지닌, 인천 앞바다에 나타나게 될 존재.
가운데엔 불길해 보이는 한 개의, 자동차 타이어만한 눈동자가 주변을 이리저리 살피고 있다.
이놈의 이름은 악토아, 촉수로 생명체들의 몸을 잡아채 생명력을 빼앗아가는, 다소 재수 없는 마물이었다.
레오나의 전투력과 판단력을 측정해주는 마물이자, 그녀의 유명세를 본격적으로 상승시켜주는 마물이기도 했다.
‘레오나가 이놈한테 지면 이 촉수들에게 온갖 구멍을 함락당하는 건가?’
플레이할 때는 져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지만, 마법소녀물 야겜의 흐름 상 분명 그럴 것이다.
어쨌든 이놈은 암두시아스와 지능이 비슷하다.
출몰만 하면 온갖 곳을 들쑤시며 생명체를 찾는다.
다만 바다에서 활동하는 놈인 만큼 암두시아스보단 주변에 피해를 덜 끼쳤다.
촉수 때문에 상대하기 힘들어 보이긴 해도, 가운데에 있는 눈알만 쑤시면 무척 쉽게 잡을 수 있었다.
팔짱을 끼고 악토아를 지켜보던 내가 물었다.
“개조로 강화했나?”
“아뇨. 레오나 정도면 빠르게 끝낼 수 있을 거에요.”
“약간 개량해라. 눈알에 보호막을 씌우던지, 촉수를 더 단단하게 만들던지 해서.”
“그럼... 레오나가 위험해질 수도 있는데요?”
“레오나는 나로 인해 위험한 상황을 타개하면서 점점 내게 의지해야 해. 한 번 정도는 위기를 맞이해줘야지. 어차피 악토아는 레오나에게 아무 짓도 못한다. 내가 해결할 테니까.”
마르셀라는 내 말을 이해했다.
그녀가 아... 하는 감탄사를 내뱉더니 말했다.
“레오나가 위기에 빠지는 순간, 마왕님께서 악토아의 약점을 알려줘서 공략하게 한다... 이 뜻인가요?”
“정확하다.”
“아아... 저 마르셀라, 마왕님의 심오한 뜻을 이해했습니다.”
“알아들었으면 바로 시작해라. 캐시 박사가 알아챌 수 있을 정도의 포탈 에너지도 발산해놓고. 다만 너무 크면 아니 된다. 그저 적당히 경계할 정도로만 발산해. 위치는 인천이다.”
“네!”
“그럼 난 돌아가 보겠다.”
포탈을 타고 집으로 돌아온 내가 생각했다.
이제 슬슬 세화에게 활동명을 붙여줄 때라고.
비스트 슬레이어들은 활동명을 사용한다.
레오나, 유리아, 로제, 캐롤라인, 그리고 셀린.
각각 1탄부터 5탄까지의 이름이었다.
유리아를 제외하고 모두 가명을 쓰는데, 현재 세화에겐 레오나라는 이름이 붙어있지 않았다.
원래는 악토아를 처리한 이후 캐시 박사가 붙여주는 이름.
그러나 이번엔 다르다.
먼저 선수를 쳐서 레오나라는 이름을 줄 것이다.
세화의 모든 것은 내가 이끌어줘야 한다.
그녀가 내게 집착하고 또 집착할 때까지.
**
위이잉-!
부드러운 엔진음.
박사의 수송기에 탄 내가 감탄을 터뜨렸다.
“우와...”
그러자 캐시 박사가 나를 나무랐다.
“저번에도 탄 적 있으면서 왜 신기해하고 난리야?”
“그땐 다쳐있었잖아요. 오늘은 멀쩡하고요.”
“그래... 그러시겠지. 기계 사용법이나 제대로 익혀. 특히 이 수송기 안에 있는 것들은 완벽하게 깨우쳐야 돼.”
“제가 왜요?”
“난 널 조수로 고용할 거거든.”
됐다. 연구실에 두 차례 들렀을 때 여러 부품들을 만지작거린 것이 주효한 모양.
기쁘지만 표정관리를 해야 한다.
내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 조수요?”
세화 또한 마찬가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와 캐시 박사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녀의 표정엔 희미한 기쁨이 서려 있었다.
“왜? 싫어? 네가 좋아하는 이 미래기기들을 만지작거릴 수 있는 기회인데?”
“아니... 갑자기 뜬금없이... 게다가 강압적으로 그러시니까...”
“넌 이미 이쪽에 깊숙이 발을 들였어. 내가 왜 세화만이 아니라 널 데리고 연구실에 갔겠어? 소중한 물건들을 훼손해도 가만히 있었던 이유가 뭐라고 생각해?”
“훼손한 게 아니죠. 다시 정상적으로 복구했잖아요.”
“기계광 다운 자존심이네. 네 실력을 인정해줄게. 그러니까 앞으로 잘해보자, 괴짜 조수야.”
난 어이가 없다는 듯, 축구선수가 심판에게 따지듯 양손을 앞으로 뻗어보였다.
그러자 캐시 박사가 말을 이었다.
“난 세계에서 꽤 통하는 다른 이름이 있어. 그 이름으로 너에 대한 추천서를 써주면 네 미래는 탄탄대로일 거야. 보장해줄게. 선심 써서 학교도 겸업으로 다니게 해주지.”
캐시 박사의 다른 이름? 물론 알고 있었다.
세계에서 저명한 미래과학 박사로 이름을 날리는 이사벨 파슨스.
파슨스는 박사의 전(前) 성씨.
지금은 죽은 그녀의 남편과 결혼하기 전에 사용하던 성이었다.
이사벨은 그냥 가명이고.
그녀가 몰래 연구실을 운영할 수 있는 것도 파슨스라는 이름 덕분.
좀 날린다 싶은 박사들도 파슨스에게 연구, 분석 도움을 요청하며 돈을 바칠 정도이니 그 명성은 말해 입 아팠다.
“이름이 뭔데요?”
“얼굴을 자주 드러내고 활동하지는 않아. 하지만 들으면 분명 놀랄 걸? 장담하지.”
“하아...”
한숨을 푹 내쉰 내가 마지못해 승낙하는 척했다.
“급여는 얼마나 주실 거죠?”
“넌 부자잖아. 그냥 공짜로 일해.”
“.....”
“일개 대학생인 네가 절대 보지 못할 물질, 에너지를 다뤄볼 수 있어. 그것만으로도 메리트는 충분할 텐데?”
“그건 맞는 말이지만...”
“네게 선택권은 없어. 이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자.”
난 속으로 그녀를 비웃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 선택권이 없는 게 누구인줄 알고 저러는지.
나중에 후회하지나 마라.
그리 생각한 내가 다시금 한숨을 내쉬었다.
“에휴... 개 팔자가 상팔자라더니. 앞길이 어두컴컴하구만...”
그 말에 이제까지 눈치만 보고 있던 세화가 입을 가리며 웃음을 참았다.
내가 모든 걸 포기한 눈빛으로 세화를 바라보자, 그녀가 한 차례 어깨를 으쓱인다.
방긋 미소 지으며 말이다.
마치 잘 부탁한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내 손을 꽉 잡고 훌쩍대던 때가 엊그제인데 금세 헤실헤실 대다니.
헤프구나, 헤퍼.
그녀에게 힘없이 웃어준 내가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지금 어디로 가는 건가요?”
“인천. 모니터 우측 상단에 해골 막대기가 보이지?”
“네.”
“그때 그 말대가리가 나타났을 때 발생한 에너지의 정보야. 난 이 에너지를 이블리언이라고 이름 붙였어.”
게임과 똑같은 이름을 붙이다니... 더럽게 안 어울리는데 좀 다른 이름을 붙이지.
내가 말했다.
“뭔가 어울리는 이름이네요. 그걸 분석한 건가요?”
“분석은 불가능했어. 그냥 정보만 읽어내는 정도가 다였지. 분석만 성공하면 이런 일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을 텐데... 짜증나네.”
자존심이 상한 듯 한 말투.
하긴, 지구에서 손꼽는 인재라 자부하고 있었는데 분석을 못하니 그럴 만도 했다.
그래도 이 에너지를 읽어낼 수 있을 정도로 파악했다면 상당한 천재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럼 이 해골 막대기는 이블리언 게이지라는 뜻이네요? 1할 정도 찼는데...”
“맞아. 오늘 아침에 강화도와 영종도 사이에 있는 바다에서 발생했고, 딱 거기까지 차오르다가 멈췄어. 말대가리 괴물이 나타났을 당시와 비교해보자면... 이번 괴물은 게이지가 8할 이상 차면 등장할 거라고 예상 중이야. 우린 지금 답사, 탐색하러 가는 거고.”
8할이 아니다.
현재 이블라인 게이지는 상당한 정확도를 가지고 있는데, 오차는 딱 –10%.
90%가 차면 포탈이 열린다.
“그... 그렇구나... 혹시 그 괴물이 갑자기 튀어나오지는 않겠죠?”
“모르지. 각오는 해두는 게 좋아. 그리고... 세화.”
캐시 박사가 세화의 이름을 부르자, 그녀가 어깨를 움츠렸다.
세화는 출발하기 전에 연구실에서 박사에게 꾸지람을 들었다.
왜 디바이스를 충전하지 않았냐고, 괴물이 갑자기 출몰하면 어떡할 거냐고 말이다.
“네...? 네?”
“13퍼센트로는 절대, 절대 불가능해. 무슨 말인지 알겠지?”
“아, 알아요.”
“네가 해결할 방법이 있다고 한데다, 아직 괴물이 나타날 것 같지는 않으니 가만있겠지만... 알지? 우린 지금 급해. 솔직히 네가 지금 이러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아. 네 운명을 따라가고 싶다면...”
“알겠어요, 알겠으니까 나중에... 나중에 얘기해요.”
캐시 박사는 무척 창피해하는 세화를 흘깃 보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나는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들었지만, 천진난만한 얼굴로 수송기 곳곳을 파악하며 듣지 못한 척했다.
**
우린 방 강화도 남쪽 호텔에 가서 방 세 개를 잡고 곧바로 답사에 나섰다.
탐색은 뻔했다.
캐시 박사의 여러 기기들로 에너지가 발생하는 정확한 위치를 찾아내려고 해보거나, 바다 속에 뭔가 수상한 게 있나 살펴보거나.
그게 전부였다.
난 박사의 기기들을 들고 빨빨거리며 움직였다.
땀을 뻘뻘 흘리면서.
하지만 힘겨운 내색은 하지 않았다.
그냥 조수가 됐으니 그 본분에 충실하자라는, 그런 모습을 보였다.
해가 뉘엿뉘엿 졌을 때야 답사는 끝이 났다.
얻은 수확? 당연히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녹초가 되어 포구에 뻗어 헥헥거렸다.
캐시 박사는 그런 날 향해 다가와 말했다.
“수고했어. 이제 호텔에서 저녁 먹고 쉬자.”
“어느 회사든 직원한테 저녁 제공하면 욕먹는다고요. 그냥 집에 보내주세요.”
“시끄러워, 일어나기나 해.”
“하... 이게 웬 날벼락이야...”
투덜거린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 물었다.
“근데 계속 이렇게 몸으로 때울 거에요? 박사님 발명품 몇 개 내보내서 지키게 하면 되잖아요. 예를 들면 접때 저한테 줬던 그 정찰기 같은... 거기다 이블리언의 정보를 넣고 살피면 그만 아닙니까?”
“지금 우린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잖아? 직접 보고 뭐라도 알아내기 전까지는 여러 방법을 써봐야 해.”
“또 세계연합이나 대한민국 정부에 알리고 도움을 받아도 되잖아요. 왜 우리끼리 해결하려고 하는 거에요?”
“그건 나도 생각해봤어. 하지만 우리가 이런 일이 일어날 예정이니 도움 좀 주세요... 라고 말하면 걔네가 무슨 반응을 보일 것 같니?”
“박사님, 박사님이 그랬잖아요. 유명한 다른 이름이 있다고. 연구실 기계들을 보여주고 그 이름을 써서 말하면...”
“그 이름은 이런 초자연적인 일과 관계없어. 또 괴물은 고작 딱 한 번 나타난 상태야. 우리가 다 오픈한다고 해서 믿어줄 것 같아? 이런 일은 신뢰부터 쌓아야 하는 게 먼저야. 그리고 넌 머리 아프게 이런 것까지 신경 쓰지 마.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이제 불평은 그만하고 저것들이나 챙기지?”
“예, 그럽시다.”
난 박사의 기기들을 어깨에 짊어지고 호텔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 때, 세화가 후다닥 달려오더니 내가 든 것들을 나눠메려고 했다.
하지만 내가 거절했다.
“넌 힘쓰지 마. 싸워야 될 때를 대비해서 힘을 아껴놔야지.”
“변신하면 엄청 세지는데? 그냥 줘.”
“엄청 세져? 얼마나 강해지는지 궁금하긴 하네. 근데 진짜 괜찮아. 이건 내 일이니까 내가 할게.”
단호한 내 표정.
세화는 결국 알겠다고 대답하며 내 보폭에 맞췄다.
“오랜만에 오는 바다인데... 제대로 감상하지 못해서 아쉽다.”
“그래? 언제 왔었는데?”
“한 1년 됐을 걸? 너는?”
“난 반 년 정도 다돼가는 것 같아. 제주도 바다에 갔었어.”
“누구랑 갔었는데? 과거의 여자친구?”
벌써 이런 식으로 떠보려고 하다니... 덮치고 싶은 마음이 굴뚝까지 차오른다.
그녀의 귀여운 행동에 속으로 낄낄 웃은 내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부모님 유해랑 같이 갔지.”
“아... 미안해...”
몸 둘 바를 모르며 쩔쩔매는 그녀.
능청스레 웃은 내가 말했다.
“괜찮아. 근데 넌 이 일을 하고 싶어? 진짜 괴물들이나 범죄자들이랑 싸우고 싶은 거야?”
내 물음에 잠깐 무언가를 생각하던 세화가 진지한 얼굴로 대답했다.
“변신했을 때 이런 생각이 들더라. 이건 내 운명이라고. 아직도 그 생각이 잊혀지지 않아. 이유가 좀 웃기긴 한데... 한 번 해보려고 해.”
“결정이 굳건하다면 된 거지 뭐.”
“솔직히 네가 박사님의 조수가 돼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어. 넌 어떨지 모르겠지만... 잘 부탁해, 지혁아.”
솔직한 마음을 말하며 방긋 웃는 그녀의 모습이 노을에 겹쳐 몹시 아름답다.
난 그녀를 향해 씨익 웃어주었다.
“나야말로 잘 부탁해. 그런데...”
“응?”
“만약 변신하면 그... 유명세를 탈 수도 있잖아? 막 사람들의 관심이 쏠리고...”
“그런 생각은 해본 적이 없는데... 내 모습을 드러내고 싶지는 않아. 그냥 뒤에서 사람들을 지켜주고 싶어.”
“야, 시대가 어느 땐데... 네가 원한다고 언성히어로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금방 들킬 걸?”
그에 세화가 한쪽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헤헤 웃었다.
“그... 런가?”
“그래서 가명을 써야 될 것 같은데...”
“가명? 음... 너 뭔가 눈빛이 음흉하다?”
“내가 예전부터 좋아하던 캐릭터가 있는데... 이름이 레오나거든? 레오나 어때? 괴물을 때려잡으니까 몬스터 슬레이어... 아니, 이건 좀 그렇고... 비스트 슬레이어... 이거 좋다. 비스트 슬레이어 레오나.”
세화가 질색하며 손을 흔들었다.
“어우... 유치해... 난 싫어.”
“그, 그러냐?”
머쓱해진 내가 땅을 바라보자, 세화가 내 눈치를 살피더니 말했다.
“근데... 한 번 생각해볼게. 레오나라는 이름은 괜찮아 보인다.”
내 얼굴이 대번에 밝아졌다.
“진짜지?”
“근데 너무 기대는 하지 마. 생각만... 생각만 해볼게.”
말은 저렇게 했지만, 세화는 분명 결정을 내렸다.
그녀가 속으로 내린 답은 무조건 긍정적일 것이다.
왜? 내가 실망하는 모습을 보기 싫으니까.
“그거면 됐어.”
그래, 그거면 된 거다.
저녁을 먹은 우린 방으로 돌아가 내일을 대비해 쉬기로 했다.
그리고 난 청각을 집중해 세화가 방에서 뭘 하는지 들어보았다.
그녀는 아까 정리하지 못한 짐을 푸는 듯했다.
그러려니 한 내가 샤워를 하러 들어가려고 할 때,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위이잉! 하는 기계음이 났다.
-설명서... 설명서... 진짜 미치겠네. 내가 왜 이런 짓까지 해야 돼...?
세화의 중얼거림.
난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다가, 이내 침대에 얼굴을 묻고 대소를 터뜨렸다.
그리고는 생각했다.
‘설마... 자위라도 하려고?’
청순하고 올곧은, 모든 대학교 남자들이 선망하는 세화가 자위라니.
정말 영웅으로 살고 싶긴 한가보구나.
운명이란 게 참으로 가혹하다.
그런데... 박사가 한 말을 제대로 들었다면 자위로 충전할 수 없다는 걸 알 텐데...
뭐, 백날 해봐라.
디바이스가 반응이라도 보이나.
아이테르는 그런 에너지가 아니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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