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법소녀물 야겜 속 최종보스가 되었다-11화 (11/471)

EP.11 미묘한 삼각관계 #2

“세화야.”

여자 동기가 세화의 얼굴 앞에 손을 대고 흔들었다.

“.....”

아무런 반응도 없는 그녀.

여자 동기는 언성을 높였다.

“세화야!”

“어...? 응? 왜?”

화들짝 놀란 그녀.

동기가 걱정스런 눈으로 물었다.

“너 진짜 괜찮아? 병원이라도 가봐야 되는 거 아니야?”

“난... 난 괜찮아.”

“어제 전화해도 안 받길래 엄청 걱정했잖아. 그 말대가리 괴물이...”

“미안... 정신이 하나도 없어서...”

그리 말한 세화가 뒤에 앉은 날 슬쩍 쳐다본다.

그녀는 지금 죽을 뻔한 일 때문에 멍하니 있는 게 아니다.

새벽에 나와 함께 했던 비도덕한 일이 마음에 걸리는 거다.

남자친구가 있는데도 다른 남자랑 길고 긴 입맞춤을 해버린 일 말이다.

세화는 얕은 신음소리를 낸 직후 얼굴을 떼고 내게 몇 번이나 미안하다고 사과하며 이만 가겠다고 했었다.

난 그런 그녀에게 몸 둘 바를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이불과 베개, 방향제를 챙겨줬었고.

그리고 오늘 아침에 같이 등교할 때, 그녀는 아무런 말도 내게 붙이지 않았다.

나 또한 마찬가지, 필요한 말 외엔 딱히 하지 않았다.

‘복잡하지? 복잡할 거야.’

세화는 올곧은 녀석이다.

지금까지 이런 일을 한 적도, 생각해본 적도 없다.

지금 엄청난 배덕감이 찾아왔을 텐데... 뭐, 나중엔 세화도 이 배덕행위를 즐기게 될 것이다.

또 세화는 딱히 날 탓하지 않는다.

나와의 입맞춤은 그녀가 원한 일이었으니까.

여자 동기가 안쓰럽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럴 만도 하지... 그럼 지금은 임시거처에서 사는 거야?”

“응...? 아니, 그...”

세화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공짜로 오피스텔을 내어줬다고는 말하지 못하겠지.

여자 동기는 세화의 그런 반응에 제 멋대로 오해를 했다.

됐다고, 말하지 말라고, 미안하다고 한 그녀가 자리로 돌아갔다.

안절부절 못하는 세화를 보던 내가 순진한 유승현을 생각했다.

그는 결국 내 오피스텔에 오지 않았다.

왜냐? 마르셀라가 실장을 시켜 그에게 호텔 방 하나를 내줬기 때문.

어제 마르셀라에게 말한 명령이 이것이다.

유승현의 월급을 올려주고, 일할 시간을 늘려 거기서 썩게 하라고.

멍청하기 짝이 없는 유승현은 정말 감사하다는 말을 했고, 결국 집이 수리될 때까지 호텔에서 숙식하게 됐다.

물론 내가 직접 유승현에게 집으로 오라고 하긴 했지만, 미쳤다고 세화와 단둘이 있을 기회를 날려버리겠는가?

애초에 예의상 한 말이었을 뿐이다.

이제 유승현은 기존보다 더 세화를 보기 힘들 것이다.

유흥주점 운영시간도 크게 늘렸으니까.

현재 대학은 온통 어제의 사건 얘기뿐이었다.

대학뿐이랴? 한국, 동아시아는 물론 전 세계가 괴물 얘기와 하늘색 섬광 얘기로 가득했다.

온갖 학자들이 나와 토론을 하지만 도출되는 결론 따윈 없다.

그저 추측의 추측만 거듭할 뿐.

그들의 기술력으로는 내 남극기지는 물론, 하늘에서 나타난 포탈도, 이제 나오기 시작할 마물의 정체도 알아낼 수 없을 것이다.

‘그나저나 잔인하네. 휴교도 안 하다니.’

그쪽 동네에 사는 한국대 학생 중에 다친 사람은 있어도 죽은 사람은 없었으니 가능한 일이었다.

한 명이라도 죽었다면 추모 겸 휴교를 했겠지.

어쨌건 어제 무슨 일이 일어났든, 세상의 시간은 흐른다.

사람들은 여전히 바쁘게 일상을 살아간다.

나도 내 시간을 살아가면 그만.

착잡한 표정을 한 교수가 강의실에 들어오자, 내가 책을 폈다.

“미래과학과 학생들 중에서 다친 사람은 없지? 출석이 다 찍혀있는 것을 보니 괜찮은 듯하네?”

-네에에...

힘없이 대답하는 학생들.

교수가 작은 한숨을 내쉬고는 말했다.

“어수선한 분위기인 건 알지만... 수업을 시작하도록 하마. 아직 정확히 나온 답은 없으니 잠자코 기다려보자고. 자, 126쪽...”

**

오후수업이 끝난 학교.

세화는 내게 먼저 가겠다는 문자를 남기고 돌아간 상태였다.

아직도 마음을 추스르지 못한 모양.

난 술이라도 한 잔 마시며 어제 일에 대해 이야기해보자는 동기들의 말에 미안하다고 대답하고는, 분식집에 들러 떡볶이를 포장해 오피스텔로 돌아갔다.

이후 꼭대기 층인 25층에서 세화를 만났다.

의도적으로 만난 건 아니었다.

그저 세화가 복도에서 유승현과 통화를 하고 있었을 뿐.

날 발견한 그녀가 유승현에게 말했다.

“아, 나 지금 일이 좀 생겨서... 나중에 전화할게. 일 열심히 해.”

-알았어. 조금 있으면 바빠지기 시작해서 아마 아침에나 통화할 수 있을 거야.

수화기 너머로 유승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멍청하기는... 그렇게 순진해빠져서야 세화의 반려자라고 할 수 있겠냐?

일단 유승현의 잔잔한 말투를 들어보니, 세화는 새벽의 키스 사건을 말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알았어. 그럼 내일 아침에... 너 시간 될 때 전화해. 응... 나도 사... 랑해.”

말엔 사람의 심정이 잘 묻어난다.

지금의 세화도 마찬가지.

예전이었다면 망설이지도 않고 유승현에게 사랑한다 말했을진대, 지금은 말을 더듬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날 사랑하는 건 절대 아니다.

그저 새벽의 일이 생각나기도 했거니와, 내가 근처에 있으니 괜히 눈치를 본 것일 뿐.

그러나 세화가 날 좋아한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디바이스가 증명해줬으니까.

심란한 표정으로 전화를 끊은 세화가 전화를 끊고 내게 다가왔다.

그리고는 물었다.

“혹시 박사님한테 연락 왔어?”

“아니. 넌?”

“연락해봤는데 오늘은 푹 쉬래. 조만간 데리러 가겠대. 너도 대기하고 있으래. 그리고... 마물이 나타날지 모르니까... 그... 아니, 아무것도 아냐.”

뒷말은 쉽게 예상이 갔다.

유승현이랑 자서 디바이스 에너지를 채워놓으라고 했겠지?

그건 불가능해.

“그렇구나... 그거 기대되네.”

“그 최신 기계들을 볼 수 있어서?”

“응.”

“역시 기계광답네. 손에 든 건 뭐야?”

“이거... 떡볶이. 너 먹으라고...”

세화가 힘없는 웃음을 터뜨렸다.

황당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한 복잡한 웃음.

난 그냥 입술을 이리저리 굴리기만 했다.

그리곤 세화의 웃음이 잦아들자 사과했다.

“미안해.”

세화가 의아한 눈을 했다.

“응? 뭐가...?”

“새벽에 너한테...”

“잠깐... 잠깐만! 우리 일단 들어가서 얘기하자. 그러려고 널 기다린 거야.”

“그럼 그냥 방에 있지... 전화하고 만나면 됐을 텐데.”

설마 나가겠다고 하려는 건 아니겠지?

다행히 이어지는 세화의 말은 내 걱정이 그저 기우였음을 확인시켜주었다.

“얼굴 맞대고 얘기하고 싶었으니까. 네 집에서... 아니, 내 집에서 얘기할래? 시간 돼?”

어제 자기 전에 열심히 사는 로제의 모습도 확인했고, 유리아도 딱히 이상행동은 보이지 않았다.

지금은 세화를 공략해야할 시점이니까... 당연히 내줘야 맞다.

시간이 없어도 만들어서 내줘야지.

“그래. 근데 지금 바로?”

“너 가방 놓고 오면... 아니다, 그냥 네 집에서 얘기하자.”

괜찮겠어? 어제 사건이 막 떠오르고 그럴 텐데?

뭐, 네가 그렇다면야 나야 좋지.

“알았어.”

고개를 끄덕인 내가 카드로 문을 열고 세화를 먼저 들여보냈다.

그녀는 내가 가방을 소파에 놓는 동안, 떡볶이를 받아 자연스레 부엌으로 갔다.

“접시 꺼내도 되지?”

“당연하지. 나갈 때 몇 개 가져가.”

“아냐, 오늘 여기 오면서 좀 사놨어.”

세화는 오랜 시간 자취를 했던 경험으로 능숙하게 식탁을 차렸다.

뭐, 능숙하다고 해봐야 그냥 접시에 떡볶이를 담고 포크만 양쪽으로 놓은 게 끝이지만, 그냥 속도가 빨랐다는 거다.

탄산음료를 꺼내 그녀에게 건네준 내가 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세화가 포크를 집고는 귀엽게 툭툭 두드렸다.

그 때를 틈탄 내가 말했다.

“크림이 아니라서 미안해. 다 나갔대.”

“전혀 상관없어. 나중에 둘이서 먹으러 가도 되잖아. 자, 네가 먼저 먹어.”

둘이서라... 그래, 둘이서 좋지.

세화는 떡볶이 하나를 찍어 내게 내밀었다.

먹으라는 뜻.

난 머뭇거리다가 그것을 받아먹었다.

그러자 방긋 웃은 세화가 떡볶이를 입에 가져갔다.

오물오물 대는 모습이 참으로 예쁘다.

우린 말없이 먹는 데에만 집중했다.

1인분만 사왔기에 떡볶이는 금방 동이 났다.

탄산음료를 마신 세화가 목구멍에서부터 일어나는 톡 쏘는 짜릿함에 캬! 하는 소리를 냈다.

그러더니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난 시선을 내리깔았고 말이다.

잠시 아무 말 않던 세화가 날 불렀다.

“지혁아.”

난 놀라 고개를 들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울먹거리는 말투를 했기 때문.

세화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것도 상당히 많이.

“용기가... 용기가 안 나... 미안해... 흑!”

용기라...

날 냉정하게 쳐낼 용기가 안 난다는 뜻일까?

아니면 새벽의 일을 언급할 용기가 안 난다는 뜻일까?

일단 전자는 가능성이 희박하다.

그럼 후자일 텐데... 혹시 모르니 떠보자.

“너만 좋다면 말하지 않아도 돼. 그냥 무시하고 평소처럼 지내도 된다는 말이야.”

“그래도... 돼...?”

저리 말해오는 것을 보니 후자가 맞았다.

나와 사이가 멀어지는 것을 두려워하는 거다.

난 포근한 미소를 세화에게 보냈다.

“당연하지. 네 의사를 따를게. 나중에 용기가 생기면 그때 말해도 돼.”

그 말에 세화가 안심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난 그녀의 무릎에 있는 어여쁜 손에 내 손을 가져가 덮었다.

커플들이나 할 법한 스킨십.

그러나 세화는 가만히 있었다.

아니, 오히려 스스로 손바닥을 뒤집어 내 손을 맞잡았다.

심지어 깍지를 끼기까지 했다.

그 순간, 나는 엄청난 희열감이 내 전신을 타고 도는 것을 느꼈다.

짜릿하디 짜릿한 기분.

미소가 튀어나오려고 하는 것을 막지 못할 정도였다.

슬쩍 올라가는 입꼬리.

난 간신히 그것을 인자한 웃음으로 포장했다.

“우리 다른 얘기할까?”

순하디 순한 어린 양처럼 날 바라보면서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세화.

띵띵 부어있는 눈이 너무나도 귀여웠다.

“응.”

여태까지의 내가 까마득한 절벽 아래에서 열심히 기어 올라가고 있었다 친다면, 현재의 난 저울에 올라와있는 상태였다.

반대편에 유승현이 있는 저울에.

물론 지금은 무게차이가 어마어마하겠지만, 점점 내 무게가 올라가면서 균형이 맞춰질 것이다.

유승현을 너무나도 사랑하지만 나도 잃기 싫지?

너무나도 이기적이구나 세화야.

그래서야 정의의 용사, 비스트 슬레이어 레오나라고 할 수 있을까.

평소처럼 지내자고 하긴 했지만 난 그럴 생각이 전혀 없어.

난 지금 캐시 박사의 연구실에 무탈히 들어가서 계획에 차질이 없단다.

이제 슬슬 너와 절대, 영원히 끊어지지 않는 실을 만들 거야.

그 누구도 자신의 첫 경험 상대를 잊을 순 없지.

조만간 시작할 테니까 기대해.

도덕과 배덕 사이에서 깊게 번민하다가 스스로의 의지로 나한테 와라.

네게 선택권은 없어.

**

다음 날, 캐시 박사는 암두시아스 때 썼던 수송기를 타고 나와 세화를 연구실로 데리고 갔다.

그리고 나에게 적당한 크기의 기계를 던져줬다.

“이것도 분해해보고, 재조립해봐.”

이번엔 인간들의 위치를 실시간으로 모니터링 할 수 있는 무인 정찰기였다.

그래, 저번 같이 위험한 물건이 아닌 것만으로도 신뢰를 쌓았다는 증거겠지?

난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박사는 내가 집중하기 시작하자 세화를 데리고 저번의 그 방으로 들어갔다.

비밀스런 얘기를 하려는 모양.

뭐, 그런 노력은 소용이 없었다.

나에겐 다 들리니까.

-잠깐만 기다려.

박사가 그런 말을 하면서 방에 침묵이 찾아왔다.

동시에 무언가 딸깍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얼마 후, 박사가 살짝 당황한 말투로 세화에게 물었다.

-너 혹시... 남자친구랑 뭔가 했어? 잤다거나... 아니, 충전량을 보니 이건 아닌 것 같고... 신체접촉 같은 걸 했니?

-네? 무슨 말씀이세요?

-에너지가 1% 정도 충전됐어.

세화는 말이 없었다.

그러자 캐시 박사가 답답했는지 이렇게 말했다.

-이건 무척 중요한 일이야. 괜찮으니까 얘기해봐. 난 입이 무겁다고 자부해. 절대,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을게.

-그게... 네, 했어요.

-그때 조금 흥분했었어? 성욕을 느낀 거지?

-박사님!

-쉿... 목소리 좀 낮춰. 저 괴짜가 궁금해 하겠다.

-꼭 대답해야 돼요...?

망설이는 세화.

크크... 이도저도 못하는 세화의 눈빛이 보이는 것도 같구나.

박사가 말했다.

-그럴 필요는 없어. 답은 이미 나와 있으니까. 하지만 우린 오랜 시간동안 같이 일을 해야 할 수도 있어. 그러니 솔직하게 말해주면 고맙겠네? 방금도 말했듯, 절대 발설하지 않을게.

-.... 네. 맞아요.

-흥분했다는 소리지?

-조... 조금요... 저도 모르게...

기어들어가는 세화의 목소리가 굉장히 귀엽다.

그나저나 거짓말을 했구나? 그것도 아주 큰 거짓말을.

그래, 이제부터 밥 먹듯 하게 될 텐데 미리 적응해두면 좋겠지.

캐시 박사에게 고맙다고 말하고 싶다.

디바이스의 에너지 충전방식을 의심하던 세화에게 사실 확인을 시켜줬으니.

-알았어. 지금 에너지는 13%니까 틈 날 때마다 충전해둬. 그렇지 않으면 무고한 사람들이 또 희생될 수 있어. 네가 변신할 수 있는 시간은 엄청 짧아. 지금 이 에너지로 뭘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오산이야.

-하아...

레오나로 변하기 전에 각성했던 정의감이 살아있는데, 수긍하지 않고선 못 배길 것이다.

죄 없는 사람들을 위해서 말이지.

길고 긴 한숨을 내쉰 세화가 대답했다.

-네, 그럴게요. 근데 요새 남자친구를 잘 못 만나요. 밤새 일하고 아침에 자거든요.

-깨워서 해. 정 안 되겠다 싶으면 마음이 맞는 사람하고...

저 거지같은 년이...

초치지 말고 내가 알아서 하게 둬라.

딸깍!

무인기의 마지막 부품을 끼운 내가 큰 소리로 소리치며 박사의 말을 끊었다.

“박사님! 조립 다 끝났어요! 다른 거 없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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