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9 위장취업을 하려는 나
서울 은평구의 어느 지하.
50평 정도의 크기를 가진 최신식 설비들이 즐비한 이곳은 바로 캐시 박사의 연구실이었다.
나와 세화, 그리고 캐시 박사는 현재 그 누구도 모르게 이곳에 와있는 상태.
연구실을 둘러본 세화가 중얼거렸다.
“서울 지하에 이런 곳이 있었다니...”
세화는 냉철하고 강한 레오나로 변했었기 때문인지 나름 침착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바퀴가 달린 들것에 실려 이동하던 나는...
“다 죽어가는 상황에서도 저런 눈빛을 해? 괴짜 녀석이군.”
캐시 박사가 그런 말을 할 정도로 시설 곳곳에 빠져든 척했다.
세화가 그녀에게 눈총을 보냈다.
“아줌마, 치료나 좀...”
“알고 있어. 그리고 계속 아줌마라고 부르면 이 녀석을 확 던져버린다? 제니퍼 캐시 박사라니까? 박사님, 캐시 박사님, 제니퍼 박사님 중에 하나 골라서 불러.”
“.... 네, 박사님...”
세화가 마지못해 박사님이라는 호칭을 골랐다.
사실 언니라고 불러도 될 정도로 캐시 박사는 동안이었다.
40대 초반이라는 나이가 믿겨지지 않을 만큼.
나에겐 아주 이가 갈리는 년이었지만, 다른 사람들은 박사를 섹시해 보이는 젊은 처자라고 생각할 터였다.
캐시 박사는 나를 MRI처럼 생긴 의료기기에 옮겨 버튼을 조작했다.
난 이게 뭔지 정확히 안다.
비스트 슬레이어들이 상처를 입었을 때 사용하는 의료기기였다.
지이잉-!
원통에 들어간 난, 파란 빛이 내 전신을 감싸고 삐빅 거리는 소리와 함께 몸을 실시간으로 스캔하자 눈을 동그랗게 떴다.
피부에 있는 크고 작은 상처들을 치료해나가는 것까지도 신기해 보이는 척했다.
기기는 상처를 단숨에 치료하는 오버 테크놀로지 급의 물건은 아니었다.
다만 인간들 중에서 손에 꼽는 천재인 캐시 박사가 만든 발명품인 만큼, 2533년 현재 병원에 있는 최신식 의료기기보다 훨씬 빠른 치료속도를 가지고 있었다.
푸쉬익!
연두색 액체가 내 상처에 분사되며 흉터를 빠르게 치료해나간다.
캐시 박사가 개발한 복합항생제와 복원혈청이었다.
“네 조직과 똑같은 혈청을 복사해 상처를 치료했어. 하루 정도는 조금 가려울 텐데 참아. 그리고 천운인 줄 알아. 큰 잔해 사이 공간에 있어서 다행이었지, 그게 아니었다면 쥐포가 됐을 거야. 알겠냐?”
캐시 박사의 다소 강압적인 말이었다.
이제 몸이 꽤나 괜찮아진 내가 고개를 빼꼼 들어 몸을 바라보았다.
이후 반문했다.
“혈청이요...? 뭘로 만든 거에요? 줄기세포? 상처가 빠르게 낫는 것을 보니 역학까지 곁들인 것 같은데... 어떻게 했죠?”
어때? 나에 대한 흥미가 팍팍 솟아오르지?
캐시 박사가 질렸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너 진짜 미친놈이구나?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는 있어?”
“예?”
곰곰히 생각하던 내가 말했다.
“깨어나 보니까 잔해 사이에 있었고... 세화가 도와주려고 왔고... 아줌... 아니, 박사님이 폴리머스 합금 기계팔로 잔해를 치워주셨고요.”
“정신이 나가버린 건지 아닌 건지 모르겠네. 젊은 나이에 여러 권위 있는 대회에서 입상한 괴짜 천재라고 하더니... 그 말이 딱 어울려.”
“그건 어떻게 아셨어요?”
“뒷조사를 좀 했어.”
당당하게 말하는 그녀.
내가 놀란 듯 물었다.
“뒷조사요?”
“네가 깨끗한 놈인지 아닌지 확인해봐야 했거든.”
다른 말을 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의심을 벗어난 모양.
마르셀라야, 잘했다.
위이잉!
기기가 움직이면서 날 천천히 밖으로 뱉어냈다.
팬티만 입고 있던 난, 세화가 보고 있다는 쪽팔림도 무릅쓰고 벌떡 일어났다.
아니, 쪽팔림을 무릅쓴 게 아니라 의도적인 행동이었다.
미친 공돌이를 연기하려고.
“저 기계를 살짝 분해해 봐도 될까요? 아니면 제 몸에 뿌려진 약의 성분 분석이라도...”
“그러려고 하면 손모가지를 잘라버릴 줄 알아. 입 닥치고 옷이나 입어.”
“.... 헉!”
난 그제야 온몸을 가리며 쪽팔린 척을 했다.
그러자 캐시 박사가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구석에 있는 방을 가리켰다.
“저기 들어가면 옷장이 있을 거야. 아무거나 주워 입어라.”
“예...”
**
다소 큰 사이즈의 옷을 입고 나온 난, 박사가 연구실 구석의 TV를 틀어주자 그쪽으로 다가갔다.
모든 채널에서 속보를 알리고 있었다.
말도 안 되는 일이 실제로 일어났으니 그럴 수밖에.
[서울 도심에 정체를 알 수 없는 괴물이 출현해 건물 다섯 채와......]
-크히히히히힝!-
화면은 경찰이 바디캠으로 찍은 듯 한 암두시아스의 모습과, 그가 내지르는 병신 같은 괴성이 들려왔다.
거시기는 모자이크가 된 채였다.
내가 입을 떡 벌렸다.
“저게... 저게 무슨...”
그러자 세화가 내 곁으로 다가와 말했다.
“나도 엄청 놀랐어. 건물이 부서지더니 말대가리를 한 저 괴물이... 나와 승현이를 보고 입맛을 다시고 있더라.”
“.... 그럼 넌 도망친 거야?”
그 말에 세화가 아리송한 미소를 지었다.
“아니... 그건 아니고... 나중에 말해줄게. 일단 뉴스 좀 마저 보자.”
“그, 그래...”
[전설 속 괴물로 보이는 이 생명체는, 하늘색 섬광의 무언가에게 사, 사살... 아니, 죄송합니다. 참살된 듯 보입니다. 그 전에 나타난 갑작스런 백야현상은 전문가들이......]
쯔쯔... 경험 많은 뉴스 앵커로 보이는데 말 더듬는 것 좀 보소.
넌 이제부터 시작될 비스트 슬레이어의 전설적인 행보를 국민들에게 알려줘야 해.
그러니까 힘을 내라.
뉴스는 이후로도 인명피해를 비롯한 온갖 이야기를 하고 끝냈다.
막바지엔 자칭 공상과학 전문가들을 섭외해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토론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명확해지는 건 하나도 없었다.
세화가 지구의 수호자가 되는 건 조금 뒤의 이야기.
본격적으로 마물들이 나타나기 시작할 때부터 명성을 얻는다.
내가 고개를 갸웃하며 세화를 바라보았다.
“잠깐만... 백야현상, 섬광 얘기가 엄청 많잖아?”
“.... 그러네.”
“분명 네가 날 발견하기 전에도 눈부신 빛이 일어났었는데...”
“그것도 맞아.”
“저기 있는 아줌... 박사님은 이 일을 해결하는데 큰 역할을 한 것도 같고, 연구실도 생전 처음 보는 것들뿐이고... 결정적으로 박사님과 네가 아는 사이인 것 같고...”
잠깐 침묵한 내가 실없이 웃어재꼈다.
“흐흐... 설마... 아니겠지...”
내 반응에 세화의 얼굴에 장난기가 서린다.
내 혼신의 연기에 훌러덩 넘어가버렸군.
그녀가 물었다.
“어떨 것 같은데?”
“왜 이래? 무섭게...”
“무섭다고? 방금 전까지 기계에 흥미를 보였던 모습이랑은 완전 딴판이다? 내가 낯설어?”
“야, 장난하지 마. 진짜 무서워지려고 하잖아.”
“그래 보이긴 하네. 팔에 소름 돋은 것 좀 봐.”
그리 말한 세화가 내 팔을 쓱 훑는다.
이런 스킨십, 마음에 들어.
더해줘... 가 아니라, 계속 겁먹은 척해야지.
“이러면 나 그냥 간다...?”
“네가 도망갈 데가 있으려나 모르겠네? 사방이 막혀있는데? 문은 또 어떻게 열 거야? 비밀번호 알아? 지문인식인가?”
“.....”
“풉... 농담이야. 네가 생각하고 있는 게 맞을 거야.”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데?”
“그 괴물을 죽인 사람이 나라고 생각하는 중이잖아. 아니야?”
“.... 아닌데?”
“아니긴 무슨... 난 널 잘 알아. 너라면 알아차릴 줄 알았어.”
고맙다 세화야.
근데 네가 날 잘 안다고?
그건 좀 동의하지 못하겠는데.
내가 가슴에 한쪽 손을 얹고 가쁘게 호흡했다.
그러자 세화가 황급히 다가와 날 부축했다.
“지혁아! 괜찮아?”
“잠깐... 그냥 진정 좀 할게...”
“장난이 너무 심했나봐... 미안해...”
난 잠깐 동안 혼란스러운 행동을 보였다.
떨리는 몸, 가만있지 못하는 눈동자.
하지만 점점 침착해지면서 다시금 총명하게 돌아오는 모습을 연기했다.
내가 수그린 몸을 일으켰을 때, 어느새 근처로 다가온 캐시 박사가 말했다.
“담력이 밴댕이만도 못하네.”
내가 변명했다.
“아니... 이런 상황에서 의연한 모습을 보여주는 사람이 몇이나 있다고 그러세요...”
“너 정도면 충분히 의연해. 자, 기억을 지우고 돌려보낼까... 아니면...”
기억을 지우긴 개뿔.
그딴 게 있을 리가 있냐?
너 지금 나 테스트하는 거잖아.
받아주도록 하마.
“잠깐! 스톱! 기억도 지울 수 있어요?”
“못하지는 않지.”
“나더러 이런 천국을 잊으라고? 안 되죠. 여기 있는 기계들을 연구할 수 있을 때까지 난 눌러 붙으렵니다. 배 째시던가요.”
“알았어. 누워.”
“예?”
“배 째달라며. 째줄게.”
내 동공이 급격하게 흔들렸다.
그러자 세화가 다가와 박사를 만류했다.
“박사님, 장난은 이쯤해요. 지혁이의 기억도 지우지 마시고요.”
“그런 물건은 없어. 그냥 놀려본 거지. 근데 저 녀석은 믿을만한 놈인가? 솔직하게 말해봐.”
“그 누구보다도 믿을 수 있는 사람이에요.”
세화의 단호하고 칼 같은 대답.
그 누구보다도라... 그럼 유승현보다 높은 순위에 둔 건가? 아니면 동급?
이건 꽤나 기쁜데.
그녀의 굳건한 눈을 본 캐시 박사가 수긍했다.
정의감이 없다면 변신할 수 없는 레오나가 됐었기 때문인지, 캐시 박사는 세화의 안목을 신뢰하는 것 같았다.
정의의 용사가 될... 아니, 이미 된 인재이니만큼 믿음을 보내주는 듯했다.
사실 잘 생각해보면 날 의심할 건덕지는 별로 없었다.
내가 무슨 암두시아스처럼 괴물도 아니고... 겉보기엔 선량한 피해자이자 인간이니.
뭐가 됐든 나에겐 좋은 일이었다.
여기 수월하게 잠입할 수 있을 테니까.
“알았어. 거기 너, 이거 한 번 해체해봐.”
그리 말한 캐시 박사가 나에게 자그마한 원기둥 모양의 물건을 던졌다.
그것을 받아 흥미로운 눈으로 살펴본 내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검사도 끝났으니 스캔은 더 이상 안 할 거야.’
난 은밀하게 몸을 다시 개조상태로 돌려놓았다.
그리고는 공구가 잔뜩 있는 연구실 한켠의 책상에 가서 캐시 박사에게 실력을 보여줄 준비를 했다.
‘섬광탄이군. 이걸 나한테 해체하라고 줬어? 저 썅년이...’
이건 내가 게임에서 자주 사용하던 소모품.
대 마물용 섬광탄이라 보통의 섬광탄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위력을 자랑한다.
대 범죄용으로 만들긴 했지만 이제부턴 마물에게 쓸 테니 대 마물용이 맞다.
어쨌든 내가 만약 뭘 잘못 건드려서 섬광탄이 터지기라도 한다면?
눈이 멀지는 않겠지만 시력은 크게 저하될 터였다.
고막도 충격을 받을 테고.
날 아직 못 믿는 건가라는 의심이 들었지만, 캐시 박사는 원래 좀 맛탱이가 간 인물.
이러는 것도 이상하지 않다.
캐시 박사는 해체가 오래 걸릴 거라 생각했는지, 따로 할 말이 있다며 세화를 데리고 방에 들어갔다.
어쩌면 섬광탄이 터질 걸 대비해서 피한 것이든지.
난 내 머릿속에 가득 찬 정보의 파도에서 섬광탄을 분석했고, 곧 해체를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청각을 증대시켜 귀를 쫑긋했다.
두 사람이 들어간 방을 엿듣기 위해서였다.
방에선 캐시 박사의 질문이 시작되고 있었다.
-기분이 어땠지?
-뭐가요?
-네가 그 용... 아니, 전사로 변신했을 때.
-그게... 마치 악을 물리쳐야 한다는 마음이 들었어요. 또 그 괴물을 없애버려야겠다는 생각도 들었고요.
잘 들린다, 잘 들려.
-그럼 다음에도 오늘과 같은 괴물들이 나오거나 흉악한 범죄자가 국민들에게 공포를 일으킨다면... 나설 거야?
-그런 괴물들이 또 있어요?
-없으라는 법 있어? 대답이나 해.
-그야... 나서겠죠. 박사님께서도 그랬잖아요. 그 물건이 제게 귀속되었다고.
-맞아. 디바이스는 이제 너밖에는 못 써. 어쨌든 나선다는 얘기네? 정의의 용사가 되고 싶어서.
-그게 아니라...
-알아, 운명이라고 생각했지? 나도 그렇게 생각해. 방금은 그냥 실없는 농담 좀 해본 거야.
벌써 섬광탄을 해체한 내가 대화를 듣다 말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날 혼자 남겨둔 걸 후회하게 해주마.
내 능력에 감탄하고 조수든 인턴이든 직원이든 고용해서 써줘.
급여는 안 받을게. 난 대한민국에서 손에 꼽는 부자니까.
난 비스트 슬레이어들이 사용하게 될 예정인 여러 소모품들을 몰래 가지고와 분해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귀를 열어두는 것을 잊지 않았다.
-아이테르라고 알아?
-아뇨...
-그게 뭐냐면...
아이테르, 난 알고 있다.
타 마법소녀물 야겜처럼 성적 흥분, 서로에 대한 감정을 매개로 삼는 신비한 에너지이자 만능 에너지.
악의 대척점에 있는 선한 에너지이기도 하고, 비스트 슬레이어들의 힘의 근원이다.
캐시 박사는 이 아이테르를, 폴리머스를 비롯한 여러 희귀물질과 융합해 디바이스를 만들었다.
캐시 박사의 설명을 모두 들은 세화가 놀랐다.
-좋아하는... 사람과의... 서, 성적인 일로 흥분해야 에너지가 찬다구요...? 거짓말하지 마세요...
-좀 그렇지? 근데 그 아이테르란 게 원래 그래. 나도 이런 말을 하는 내가 사이비 교주처럼 보이는데... 진짜야.
맞아, 아이테르는 원래 그래.
마법소녀물은 다 그렇다고! 성적 흥분, 사랑 같은 걸로 힘을 채운단 말이야!
-넌 사정이 나은 편이야. 얼굴도 예쁜데다 정의롭고 사랑스런 남자친구가 있잖아? 네가 믿는 저 놈도 있고.
-지, 지혁이는 제...
-시끄럽고, 나중에 돌아가면 디바이스를 옆에 두고 남자친구와 잠자리를 가져봐. 그럼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게 될 거야. 그런 눈빛으로 보지 마. 커플끼리 하룻밤 보내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잖아.
세화가 침묵한다.
그리고 난 그녀가 왜 머뭇거리는지 알고 있다.
세화는 지금 쪽팔려서 저러는 게 아니다.
유승현과 섹스를 해본 적이 없어서 당황한 거다.
‘네 처녀는 내거야. 유승현 같은 놈한테 줄 수는 없지.’
원래라면 마물의 2차 습격은 지금으로부터 꽤 지난 시점에, 캐시 박사의 말을 마지못해 들은 세화가 유승현과 떡을 쳐댄 이후에 타이밍 좋게 나타난다.
하지만 이번엔 다르다.
왜냐? 난 언제든 마물들을 내보낼 수 있는 마왕이니까.
어쩔 수 없이 나와 잘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주지.
디바이스에 다른 기능도 넣을 거니까 기대해라.
생각을 마친 내가 소리쳤다.
“박사님! 이거 더 없어요!?”
연구실 바닥엔 엄청난 양의 부품들이 널려있었다.
열 개 가량의 소모품들을 정확하게 해체하여 가지런히 늘어놓은 상태.
“뭐야, 벌써 해체했.... 아니!?”
문을 열고 나온 캐시 박사가 놀라 자빠질 정도의 반응을 보였다.
당연하지, 10분도 채 되지 않아서 네가 공들여 만든 것들을 안전하게 분해했으니까.
내가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말했다.
“루틴이 일정해서 쉽던데... 재조립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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