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7 변신해, 세화야!
한국의 날씨는 가정의 달이 다가오면서 포근해져갔다.
밤이라 좀 쌀쌀맞긴 하지만, 노상에서 국수를 먹기엔 충분했다.
우린 아까 왔던 언덕의 벤치에 앉았다.
난 세화가 머리를 정리하며 국수를 먹고, 유승현에 대해 푸념하는 것을 받아주었다.
그냥 아무 말 없이, 다 이해한다는 얼굴로.
“진짜 어이가 없어서... 내가 그런 데서 일하는 걸 열 받아 하는 줄 아냐구.”
국수를 다 씹고 삼키지도 않았는데 재잘재잘 떠드는 그녀.
이런 무방비한 모습, 보기 좋아.
“말 좀 해봐! 목석이랑 대화하는 것 같잖아!”
언성을 높이는 그녀도 귀엽다.
어깨를 으쓱인 내가 말했다.
“위로라도 해주고 싶지만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냐. 너흰 오랜 시간 사귀어오면서 서로를 잘 알잖아.”
“아... 3자는 빠지시겠다?”
“야, 그런 말을 하면 내가 뭐가 돼?”
“처음부터 봤어?”
“그건 아닌데... 대충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알 것 같아.”
“그럼 다 안다는 소리네. 그냥 솔직하게 말해봐.”
“뭘?”
“네가 지금 생각하고 있는 거 전부.”
여기서 유승현을 깎아내릴 수도 있다.
하지만 그건 하수들이나 하는 짓이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세화에게 공감하며 유승현을 욕한다면 그녀는 그를 변호하려 할 것이다.
난 슬쩍 혀에 침을 바르고 입을 장전했다.
“그냥... 유승현 씨가 거짓말을 해서 네가 실망한 것도 이해가 가. 근데 유승현 씨가 그런 것도 이해해 가네.”
“대체 왜?”
“딱 보니까 그 호텔은 룸싸롱도 함께 운영하나본데... 솔직히 어느 누가 여자친구한테 그런 곳에서 일한다고 떳떳하게 말할 수 있겠냐? 인정하지?”
“음... 그건 그래.”
“게다가 널 너무나도 사랑하는 유승현 씨가 거짓말을 하는 것도 감수할 정도라면 돈을 많이 준다는 뜻이겠지. 본의 아니게 빚을 진만큼 빨리 갚고 싶을 거야. 유승현 씨의 입장에선 갑자기 하늘에서 빚이 떨어진 거잖아? 억울하게.”
세화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인다.
국수를 입으로 가져가는 그녀를 보며, 내가 말을 이었다.
“빨리 빚을 갚고 예전처럼 살고 싶어서 조급해졌겠지. 그렇다고 네게 거짓말을 한 게 정당화된다는 뜻은 아냐. 네 마음도 충분히 이해해. 그냥...”
여기서 끊고 세화의 눈치를 슬쩍 봤다.
그러자 세화가 재촉한다.
“그냥 뭐? 계속해봐.”
“좀 오글거리기는 한데, 난 이게 서로를 너무 걱정하고 배려하니까 나온 행동으로 봐. 서로의 마음을 읽어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근데 그런 독심술 같은 건 사람들에겐 없잖아. 그 사람도 아니고...”
“그 사람?”
“누가 기침소리를 내었는가? 마구니가 가득하구나!”
과장을 섞어 과거의 한국에서 엄청난 인기를 자랑했던 드라마의 인물흉내를 내니, 세화가 깔깔거린다.
“푸하하! 하나도 안 똑같은데?”
“그러냐? 어쨌든 주제에서 좀 벗어나긴 했는데, 결론은 그냥 둘 다 한 발 물러서서 서로를 이해해주려고 노력해보면 어떨까?”
난 은연중으로 세화와 유승현, 너희 둘은 서로의 마음을 다 꿰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줬다.
내 말을 경청하는 그녀를 보니 이 의도는 먹힐 터.
유승현의 거짓말과, 내 조언 속에 담긴 이 자그마한 장난은 세화의 마음속에 자리하기 시작한 불신의 도화선이 될 것이고, 크기를 점점 불려갈 것이다.
말을 마친 내가 세화의 일회용 그릇에 손을 가져갔다.
“말을 너무 많이 하니까 국물이 좀 당기네. 한 입만...”
그러자 세화가 젓가락으로 내 손을 탁! 친다.
“어허! 아까 사온 물도 있는데 어디서 장난질을... 이건 다 내 거야.”
“냉정하구만...”
“뻥이야. 잠깐만...”
세화가 엉덩이를 앞으로 살짝 옮기더니, 내게 그릇을 내밀었다.
태연하게 그릇을 받아든 내가 씨익 웃었다.
그러자 세화도 나를 향해 환한 미소를 짓는다.
가까워진 우리 거리.
마음도 분명 이 거리만큼 가까워졌다.
**
[진짜 미안하다고 싹싹 빌더라. 용서해주기로 했어. 고마워 지혁아. 늦었는데 자고 있겠지? 잘 자.]
메시지를 흘끗 본 내가 흐뭇하게 웃었다.
그래, 세화야. 너는 유승현과 그렇게 잘 지내야 돼.
그래야 빼앗는 맛이 있잖아.
마음까지 떨어진 네가 내 곁에 있는 장면을 보면 유승현이 어떤 표정을 지을까?
상상만 해도 고간이 솟아오른다.
예전엔 타락, 배신루트를 선택하는 놈들이 이해가 안 됐는데, 마왕이 된 지금은 이해가 되고도 남는다.
나는 휴대폰에서 눈을 떼고 싸늘한 시선으로 정면을 응시했다.
“푸후욱! 후욱!”
괴상망측한 숨소리.
실험실에 결박된 말의 머리를 가진 인간형 괴물, 암두시아스가 콧김을 훅 내뿜는다.
성인보다 서너 배는 더 큰 몸집, 그리고 온몸이 근육질.
레오나의 각성용 허접 보스인 암두시아스가 맞았다.
그 모습을 만족스럽게 바라본 내가 마르셀라에게 물었다.
“예전 암두시아스 그대로겠지?”
1 ~ 5탄의 기술이 축약된 우리 기지엔 여러 개조용 설비들이 있다.
하지만 이 암두시아스에게 그런 개조를 행한다면 비스트 슬레이어의 전설은 시작되지도 않을 것이다.
주변을 다 때려 부수다 못해 세화마저 뭉개버릴 테니까.
암두시아스는 그냥 개조 없이 내보내는 게 맞았다.
“네, 물론이에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예전의 암두시아스죠.”
“내보낼 준비는 끝났나?”
“당장에라도 보낼 수 있습니다.”
“좋아. 내일 유승현에게 어떠한 이유를 붙여서라도 휴가를 줘라.”
“네. 드디어 시작되는 건가요?”
마르셀라의 두근거리는 마음이 눈에 보이는 것 같다.
나도 마찬가지.
하지만 난 마왕이니만큼 위엄을 보여야지.
“그래. 시작이다.”
아... 목소리가 떨리는 건 어쩔 수 없구나.
“캐시 박사가 과연 나올까요?”
“모르지. 하지만 나올 가능성이 높다.”
무조건 나와야 된다.
안 나오면 도루묵이라고.
진정하자, 진정해.
흥분하면 될 일도 그르친다.
“남은 비스트 슬레이어들은? 아직 찾아내지 못했나?”
“네... 유리아 외엔 없어요...”
“유리아는 지금 뭘 하고 있지?”
“그냥 일상을 살고 있어요. 마왕님을 찾는 기색은 아직 없지만... 방심하면 안 되죠.”
“맞는 말이다.”
나도 내일 암두시아스의 근처에 있을 것이다.
유승현의 자리를 차지하려는 게 아니라, 캐시 박사의 눈에 띄려는 목적이 있어서였다.
그녀는 공순이.
천재 예비 공돌이로 위장한 나를 그냥 지나칠 만큼의 위인이 아니다.
근처에서 골골대는 척하고 있다가, 전투가 끝난 세화가 날 구하려고 하면... 그 때 캐시 박사가 행하는 무언가에 흥미를 보인다면... 그녀도 날 유의 깊게 볼 것이다.
그 뒤 세화가 날 소개하면 끝.
난 이런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계획대로 될지는 모르겠지만.
또 게임 속 지금 시간대였다면 암두시아는 진작 출몰했어야 했고, 비스트 슬레이어 레오나에 대한 뉴스가 전국을 넘어 세계로 퍼져가고도 남을 시기.
세화의 마음속에 자리를 잡느라 이미 조금 늦은 만큼, 캐시 박사가 나타나지 않을 가능성도 상정해야 했다.
만약 나타나지 않는다면 세화를 구해줘야 하니 거기 있는 게 맞았다.
모든 계획을 점검한 내가 마르셀라에게 말했다.
“만반의 준비를 갖춰라. 계획대로 한다. 절대 어긋나선 안 돼. 암두시아스가 떨어지는 위치도 정확해야 한다.”
“네! 맡겨주세요!”
**
비스트 슬레이어의 전설이 시작되는 날 저녁, 세화의 동네에 찾아온 내가 하늘을 바라보았다.
비가 올 것 같은 적당히 우중충한 날씨.
마치 내 대계의 시작점을 축복이라도 해주려는 듯 한 느낌... 은 개뿔.
이건 암두시아스를 내보내기 직전, 마르셀라가 포탈을 열기 위해 마력을 모으고 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다.
캐시 박사라면 분명 이 에너지를 감지했을 터.
‘제발 와라... 제발 와.’
속으로 빌고 또 빌며 애써 속을 감춘 내가 거리를 거닐었다.
지금 유승현은 휴가를 받은 상태.
자신의 집에 세화와 같이 있다.
아마 나갈 준비를 하겠지.
오늘 난 두 사람을 만나기로 약속한 상태였다.
변호사를 소개해준 일과, 다툰 두 사람의 중재자가 된 일을 고마워한 그들은 꼭 식사를 대접하고 싶어 했다.
오늘이 아니라면 언제 또 볼 수 있을지 모른다면서.
둘의 제안을 승낙한 난, 생색내기용 고급 자양강장제 세트를 들고 가는 중이었다.
딱 봐도 월세가 싸 보이는 원룸촌을 가로질러갈 때, 내가 손가락에 붙여놓은 신호기를 조작했다.
마르셀라에게 보내는 일회용 신호기였다.
틱!
내가 버튼을 누르자 신호기가 작은 소리와 함께 소멸되었다.
그와 동시에 하늘에서 큼지막한 소리가 들려왔다.
쿠구궁!
천둥번개가 내리치는 듯 한 굉음.
사람들은 이렇게 착각하겠지만, 나는 저게 마르셀라가 포탈을 여는 것임을 알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허공에 무척 큰 입이 생겼다.
이빨이 수백, 수천 개나 빼곡하게 박혀있는 입이.
마치 괴수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그림이었다.
쩌어어억!
저거 봐라, 아가리를 여니까 찐득한 침이 위아래로 늘어지잖냐.
암두시아스는...?
“크워어어어어!!”
나왔다.
하늘에서 떨어진 암두시아스는 유승현의 집에서 한 블록 떨어진 곳에 사뿐하게 내려앉았다.
쿠웅!
사실 말이 사뿐하게지 온갖 건물들을 다 박살내면서 먼지구름을 피어오르게 했다.
“뭐... 뭐야!?”
“꺄아아아악!!”
거리에 남아있는 사람의 비명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혼란이 시작됐다.
암두시아스는 줄행랑을 치는 사람들을 깡그리 무시하며 건물들을 파괴했다.
콰아아아앙!!
오른손에 든 거대한 몽둥이는 튼튼한 철근으로 지어진 건물을 마치 과자처럼 바스라뜨렸다.
2533년의 경찰들은 신고를 받는 즉시 출동하는 시스템을 가지고 있었는데, 누군가가 신고를 했는지 순식간에 중무장한 차가 왔다.
그러더니 암두시아스를 향해 최첨단 화기를 쏴댔다.
하지만 그들의 무기론 암두시아스에게 상처 하나 낼 수 없었다.
‘마법소녀 각성을 위한 놈인데 저 따위 화기가 통하면 이상한 일이지.’
콰직!
“크히히히힝!!”
경찰차를 엿가락 부서뜨리듯 두 동강낸 암두시아스는, 한 차례 포효를 내뱉고는 드디어 유승현의 집 옆 건물을 후려쳤다.
쾅-!
엄청난 힘에 의해 박살난 파편 중 하나가, 유승현이 사는 원룸 모서리를 부러뜨리며 날아갔다.
이거다, 이거라고.
여기서 꼭대기층에 사는 유승현과 세화는, 부서진 건물을 통해 암두시아스를 발견한다.
그리고 죽을 위기에 처한다.
벌벌 떠는 둘을 발견한 암두시아스가 그들을 잡아먹으려 하기 때문이다.
두 사람과 가까운 건물 근처에서 무너진 잔해의 사이공간에 끼인 척 상황을 만든 나는, 정찰용 마물을 보내 그쪽 건물을 살폈다.
‘어디... 어디... 있다.’
마물이 내 눈에 실시간으로 장면을 송출한다.
보인다, 게임 속처럼 서로를 껴안고 몸을 벌벌 떠는 두 사람이.
또 보인다, 말대가리를 한 암두시아스가 혓바닥을 날름거리는 모습이.
이제 캐시 박사가 나와야 해.
빨리 암두시아스에게 아직 미완성된 미래무기를 발사해라.
그리고 세화와 유승현을 구출하려다가, 두 사람에게 잠재된 정의감이 튀어나오는 것을 보고 마음을 바꿔!
그 뒤 세화를 변신시켜! 그게 네 역할이란 말이다!
내가 이러한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푸슈웅-! 콰앙!
암두시아스의 바로 위에 있는 하늘에서 초록색 레이저가 발사되더니 암두시아스의 어깨를 강타했다.
“푸히히힝!”
알몸의 암두시아스는 레이저포의 엄청난 파괴력에 뒤로 넘어가 건물에 처박혔다.
거대한 자신의 육봉을 흔들거리면서 말이다.
‘씨발... 더럽게도 생겼네.’
바지라도 입혀놓을 걸.
어쨌든 난 속으로 환호를 내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게임 그대로의 모습이 내 눈앞에서 구현되고 있었기 때문.
갑작스레 하늘에서 나타난 미확인 무인 비행체는 쓰러진 암두시아스를 향해 포구를 돌렸다.
하지만...
푸쉬익-!
포구에선 연기만 나올 뿐, 아까와 같은 레이저가 나오지 않았다.
이것도 게임의 모습 그대로다.
미완성된 무기가 오류를 먹은 것이다.
이제 암두시아스가 열이 좀 받을 텐데...
“크르르르...!”
말의 아가리에서 그르렁거리는 소리가 나오는 것을 보니 됐다.
저건 언제 봐도 웃기다는 말이지.
무너진 건물을 지지대삼아 벌떡 일어난 암두시아스가 냅다 비행체를 후려친다.
퍼엉!
속절없이 터져버리는 무인기.
몇 년간 고생해서 만들었을 텐데, 참 아쉽게 됐네.
내가 연구실에 잠입하게 되면 개량해주마.
“이... 이런 제길...! 내 역작이...!”
감각이 증대된 내 귀에 허스키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유승현과 세화가 있는 원룸 근처로 달려오는 소리까지 들린다.
위이잉-!
동시에 하늘에서 나타난 수송기.
그것을 본 내가 마물에게 신호를 보냈다.
‘수송기 아래쪽을 보여줘.’
내 의지에 따른 마물이 시선을 돌려 원룸 아래를 비춰주었다.
포니테일로 묶은 금발머리에 푸른 눈.
그 위에 자리한 무테안경이 상당히 지적이다.
흰색 와이셔츠와 같은 색의 과학자 가운.
화룡점정으로 골반과 다리에 딱 달라붙는 검은색 정장 스커트와 굽이 높은 구두까지.
‘캐시 박사다.’
떴다...! 떴다고!
이제 변신만 하면... 세화가 변신만 한다면 스토리의 흐름이 달라지든 말든 순탄하게 계획을 밀어붙일 수 있다.
나는 가슴속에 있는 무거운 응어리가 시원하게 떨어져 내려가는 것을 느꼈다.
자, 어디 한 번 지켜보자.
세화가 비스트 슬레이어 레오나가 되는 과정을.
다음화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