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6 맘 놓고 있으면 안 돼 #2
“왜 내 주변사람들에겐 안타까운 일만 일어나는 걸까? 그냥 기분 탓인가?”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며 그리 중얼거리는 나.
옆에 있던 세화가 착잡한 표정으로 내 어깨에 손을 올린다.
그래, 아무 말 말고 날 위로해줘.
지금 나는 운치 좋은 서울의 한 언덕에서 심란한 자신을 연기하는 중이었다.
개강파티 때 세화에게 말한 적 있었던, 비서 비스무리한 가상의 사람이 위독하다고 말했기 때문.
날 믿었던 그녀는 홀라당 넘어갔고, 그 결과가 이것.
여기서 두 사람만의 위로회를 가지게 됐다.
한참동안 말없이 하늘만을 주시하던 내가 세화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눈물이 나올 것 같지만 간신히 참고 있는 표정,
의연한 모습을 보이려는 표정.
세화는 지금의 내 얼굴을 보고 안타깝다고 생각하는 중일 터였다.
내가 목이 메인 목소리로 말했다.
“와줘서 고마워.”
“당연히 와야지.”
“늦었으니까 내려가자.”
내 말에 세화가 천천히 고개를 젓는다.
“조금만 더 있자.”
“이제 기분이 좀 풀렸어. 진짜 괜찮아.”
“돌아가면 넌 집에 혼자 있어야 되잖아. 그러니까 내 말 들어.”
복잡한 눈빛을 한 나는, 어깨에 올려진 세화의 손에 내 손을 천천히 얹었다.
그러자 세화가 몸을 아주 미세하게 떨었다.
하지만 딱히 손을 빼거나 하는 반응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다 괜찮다는 미소만 지어줄 뿐.
세화의 지금 행동은 동정심에 의한 것.
그러나 나에 대한 호감도 가지고 있음이 분명하다.
좋아, 이 정도면 됐다.
이제 유승현이 일하는 모습을 보여주러 가자.
나는 손을 내려놓고 세화에게 말했다.
“갑자기 술이 엄청 당기네.”
세화는 픽 하고 웃었다.
그녀가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 손가락 하나를 들어올려 하늘을 가리켰다.
“오늘 밤에 비 온다는데 파전에 막걸리 먹으러 갈래?”
“비가 온대?”
“응.”
파전에 막걸리라... 확실히 비오는 날 먹기엔 그만한 것도 없긴 하지.
근데 오늘은 안 돼.
네게 유승현을 보여줄 거거든.
“그러지 말고 네 남자친구, 유승현 씨가 일하는 술집으로 가자.”
“음... 나도 그러고는 싶은데... 일하는 곳엔 오지 말라고 하더라.”
“방해만 안 하면 되지 않을까? 어디인지는 알아?”
“응. 우리 집 근처야. 한대거리 골드퍼퓸 호텔 앞 술집이랬는데...”
골드퍼퓸 호텔이라면 내가 인수한 곳.
한대거리는 한국대와 그쪽 동네의 상권을 통틀어 말하는 명칭이었다.
그런데 그 앞 술집이라고? 왜 거짓말을 해도 그런 데에서 일한다고 했냐?
이러면 나한테만 좋잖아.
“유승현 씨도 나한테 감사인사를 전하고 싶어 했잖아. 이참에 한 번 가보자.”
“그건 그렇긴 한데... 이건 꼭 따로 자리를 마련해서 만나고 싶어.”
이거 쉽지 않네... 어쩐다...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고민하던 나는, 이어지는 세화의 말에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대신 오늘은 안면 정도는 터도 될 것 같아. 사실 나도 요새 승현이를 잘 만나지 못해서 보고 싶긴 해.”
“그 정도야?”
“응. 주말 없이 일하거든. 톡은 계속 하지만...”
직접 얼굴을 보는 것만 못하겠지.
그래서 네가 나와 급속도로 친해질 수 있었던 거고.
내가 씨익 웃었다.
“그럼 이렇게 하자, 몰래 슬쩍 들어갔다가 바쁜 것 같으면 그냥 나오는 걸로. 바쁜 사람 앞에서 술 마시면 기분이 나쁠 수도 있잖아. 난 열심히 일하고 있는데 니들은 한가롭게 술이나 퍼마셔? 뭐 이렇게 생각하지 않을까 싶다.”
세화의 눈에 호선이 그려진다.
이런 배려가 정말 마음에 드는 모양이지?
또 슬퍼하던 내가 웃으니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같았다.
근데 어쩌냐 세화야.
난 오늘 슬펐던 적이 없는데.
**
술집은 아주 바빴다.
거짓말 좀 보태서 발 디딜 틈 없을 정도로.
하지만 술집 직원은 여러 서빙을 해야 함에도 세화에게 눈을 딱 고정하고 그녀의 질문에 성실히 답해주었다.
왜? 엄청 예쁘니까, 다른 이유는 없다.
“유승현이라는 직원은 없어요.”
“없다구요? 한 달 정도 전에 들어왔었는데... 그만 둔 건가요?”
“제가 여기서 1년 일했는데, 유승현이라는 신입직원은 들어온 적이 없습니다.”
“그, 그래요?”
당황한 세화가 나를 올려다본다.
그러자 직원의 시선이 나에게로 향한다.
저 저 적대감 가득한 면상 좀 보소.
그를 깡그리 무시한 내가 세화에게 어깨를 으쓱였다.
“잘못 찾아온 거 같은데... 골드퍼퓸 앞 술집에서 일한다고 했지? 상호는 안 알려줬고?”
“응.”
“그럼 다른데 가보자. 여기 외에도 두 군데 있으니까...”
골드퍼퓸 앞 술집이라면 딱 여기인 수준.
다른 두 군데 술집은 조금 떨어져 있었다.
세화도 그것을 아는 모양인지 눈동자에 불안함을 담아 굴린다.
“그래...”
벌써부터 당혹해하면 어떡하냐?
조금 있으면 기절할지도 모르겠네.
난 질투심 가득한 직원의 눈초리를 뒤로한 채, 한대거리의 인파를 뚫고 세화와 두 군데의 술집을 더 돌아다녔다.
그리고 세화는 당연히 유승현을 발견할 수 없었다.
“대체 뭐지...? 혹시 다른 호텔인가? 내가 호텔 이름을 착각한 것도 같은데...”
여전히 당황해하는구나.
유승현이 거짓말을 했다고는 생각하지 못하고 있는 건가?
하긴... 굳은 믿음이 있을 테니까 그럴 만도 하지.
내가 물었다.
“전화라도 한 번 해보지 그래?”
“방금 해봤는데 안 받아.”
심부름을 하느라 바쁜가보군.
사실 전화라도 해보라는 건 그냥 예의상 한 말이다.
난 그놈이 지금 어디 있는지 알거든.
지금 유승현은 여기서 몇 블록 떨어진 편의점에 있어.
그나저나 추적용 마물의 효과는 발군이었다.
유승현은 물론이고 유리아의 위치도 알 수 있었다.
아직 실비아는 찾아내지 못했지만, 곧 알 수 있으리라.
“음... 그럼 그냥 아무데나 들어가서 술 먹자. 유승현 씨와는 나중에 인사하는 걸로 하고.”
내 말에 세화가 긴 속눈썹을 늘어뜨린다.
참으로 예쁘다, 예뻐.
“알았어.”
“골드퍼퓸 앞 도로에 있는 포장마차에서 국수 팔던데, 거기서 간단하게만 먹고 가던지 할래?”
“국수 좋지... 근데 포장마차는 언제 봤대?”
“내가 좀 주변 눈치를 잘 보잖아.”
“그건 그래. 갈까?”
그렇게 우린 호텔 앞 도로변에 있는 자그마한 포장마차로 움직였다.
거기서 멸치국수와 소주를 시킨 난, 세화가 귀엽게 나무젓가락을 비비는 모습을 보고 피식했다.
“아직 나오지도 않았는데...”
“국수는 오랜만이라 기대돼서 그래.”
“학식에도 국수 팔잖아.”
“맛없잖아.”
“그건 그렇지.”
두런두런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다보니 후덕하고 인자한 이모가 국수를 내려놓는다.
누가 뭐랄 것도 없이 동시에 감사하다고 말한 나와 세화는, 서로의 소주잔에 소주를 채워 넣었다.
나는 그녀와 술잔을 부딪치면서도 유승현의 위치를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지금 그는 호텔 정문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뭔가 싶어 소주를 홀짝이면서 골드퍼퓸 호텔을 슬쩍 곁눈질하니, 아가씨와 손님이 말다툼을 하고 있는 게 보인다.
진상손님이었군, 딱 봐도 답이 나온다.
그리고 유승현은 두 사람을 말리려 하고 있다.
각도 좋고, 구도 좋고, 거리 좋고.
지금 알려줘야 된다.
순식간에 소주를 입에 털어 넣은 내가 세화에게 손가락으로 호텔을 가리켰다.
“저기서 사랑싸움이라도 하나봐.”
사랑싸움.
신나게 주먹질을 하는 것 다음으로 구경하기 좋은, 원초적인 즐거움을 선사하는 싸움이다.
세화가 궁금증이 가득한 표정으로 내 손가락이 가리킨 방향을 바라본다.
그리고는 잠시 고개를 갸웃하다가, 표정이 굳는다.
‘봤구나.’
아가씨를 보호하는 유승현, 두 사람에게 난리를 치는 진상손님.
완벽한 그림이었다.
속으로 유승현을 잔뜩 비웃어준 내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왜 그래?”
그러자 세화의 손이 살짝 떨리더니,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깐... 잠깐만 저기 좀 갔다 올게. 확인해보고 싶은 게 있어.”
그리 말한 그녀가 내 대답도 듣지 않고 포장마차를 나갔다.
나도 먼발치에서 지켜봐줄게.
일단 국수 좀 먹고.
시각과 청각을 증폭시킨 내가 느긋한 마음으로 유승현에게 다가가는 세화를 지켜보았다.
거리가 점점 가까워지니 유승현도 세화를 발견한다.
그의 표정이 서서히 굳어가면서, 세화가 지척까지 왔을 땐 당황함을 숨기지 못한다.
이야... 저 면상 좀 봐라, 아주 기가 막히는구나!
오늘따라 소주가 달다, 달아.
**
세화는 유승현이 거짓말을 했다는 것을 단박에 알아차렸다.
그렇게 두 사람은 본격적으로 말다툼을 하기 시작했다.
사실 다툰다기보다는 세화가 유승현에게 쏘아붙이는 것이 전부였지만 말이다.
갑작스레 제 3자가 끼자, 당황한 진상손님이 자리를 벗어난다.
그리고 후련한 표정을 짓던 아가씨가 돌연 유승현의 앞을 막아서서 이렇게 말한다.
“넌 뭔데 우리 삼촌한테 지랄이야?”
어? 불난 집에 장작을 마구 쑤셔 넣고 있잖아?
네가 아니었더라면 세화는 유승현의 설득에 마음을 가라앉혔겠지.
넌 내가 마르셀라한테 말해서 보너스 좀 챙겨줄게.
어쨌든 아가씨의 그런 행동에 세화가 더더욱 분노했다.
결국 유승현은 아가씨를 어르고 달래 지하로 내려 보냈다.
그러자 세화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다.
“삼촌? 언제 또 삼촌이 됐대? 조카라도 키우시나봐? 그리고 방금 그 행동은 대체 뭐야! 저 사람 챙길 시간은 있네? 엄청 당당하다 너?”
유승현이 쩔쩔맨다.
“아니... 삼촌은 여기서 직원들을 부를 때 다 쓰는 말인데... 그리고 세화야, 이런 곳에서 일하는 건 미안하지만 돈을 많이 벌려면 어쩔 수 없었어...”
“지금 그게 중요해? 네가 나한테 거짓말을 한 건 안중에도 없나봐?”
“그게 아니라... 일단 따로 조용한 데라도 가서 진지하게...”
“진지하게 대화하자고? 방금 그 여자랑 하면 되겠네!”
그리 말한 세화가 몸을 돌려 포장마차 쪽으로 걸어온다.
유승현은 당연히 세화를 잡으려고 했다.
뭐, 잡든지 말든지.
난 그냥 다툼이 끝날 때까지 지켜보다가, 속상한 세화를 보듬어주면 된...
“삼촌! 실장님이 불러! 지하에서 싸움 났어! 언니들끼리 머리채 잡고 난리도 아니야!”
한 예쁘장한 아가씨가 다급한 표정으로 유승현을 불렀다.
그러자 유승현이 세화와 아가씨를 번갈아 쳐다보며 머뭇거린다.
그리고 그가 내린 선택은...
“세화야, 미안해! 바로 나올 테니까 기다려줘!”
말로 세화를 붙잡아놓고는 지하로 내려가는 것이었다.
그래, 돈을 많이 주는 여기서 잘리면 안 되니까 일단 말을 들어야겠지.
좋은 자세다.
그나저나 이게 웬 횡재?
아니지... 분명 이건 운이 아니라 마르셀라의 안배.
내가 오늘 세화에게 불신을 심으려 하는 것을 알고 있었던 그녀가 저지른 일임이 분명하다.
역시 넌 최고의 참모야.
돌아가면 발가락이라도 핥... 지는 않고, 그냥 칭찬만 해주마.
“하... 진짜 어이가 없어서...”
세화가 유승현을 바라보더니 기가 찬 표정을 짓는다.
속상하지? 하늘이 무너지지?
아, 그 정도까진 아닌가.
어쨌든 여태껏 진실만을 말해온 사람이 거짓말을 하다니, 게다가 오랜 시간 사귄 여자친구를 잡기는커녕 저런 선택까지 하다니.
열 좀 받을 것이다.
두 사람이 싸우고 있을 때 진즉 계산을 마친 난, 어쩔 줄 모르는 표정으로 거리에 나와 있었다.
그런 나를 발견한 세화가 씩씩대면서 다가와 물었다.
“봤어?”
“본의 아니게... 미안해.”
“미안할 필요 없고, 그냥 가자.”
“어... 어딜...?”
“아무데나. 난 지금 화 좀 삭혀야 돼. 아까 우리가 있었던 언덕이라도 다시 가든지.”
고개를 끄덕인 내가 조심스럽게 한손을 들어올렸다.
희끄무레한 육수와 여러 알록달록한 야채들이 담긴 비닐봉지.
그것을 본 세화가 물었다.
“그게 뭐야?”
“국수... 아까워서 포장했는데...”
그 말에 세화가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손에 들린 국수와 나를 번갈아 바라보더니, 이내 못 말리겠다는 듯 픽 웃었다.
내가 철없는 얼굴로 이렇게 물었다.
“일회용 그릇이라도 사서 갈까...? 거기서 먹을래?”
“진짜... 넌 뭐 이렇게 바보 같냐... 그래, 그렇게 해. 가면서 편의점 들려야 되겠다. 다 불어서 맛은 없겠지만.”
“그럼 새로 사갈까?”
“됐거든? 얼른 가자.”
그녀의 말투와 표정이 평상시로 돌아왔다.
여기서 난 세화가 나에 대해 어떠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 알아차렸다.
그녀의 마음속엔 내가 자리하고 있다.
물론 그 크기는 너무나도 작겠지만, 그냥 무의식 속에 자리한 마음일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있긴 있다.
오늘 이후론 그 마음이 더 커질 테고.
나는 이 자리에서 벗어나는 세화의 뒤를, 죄지은 사람마냥 어깨를 움츠린 채 따라가며 생각했다.
‘준비는 끝났다.’
이제 변신만 남았다.
암두시아스여, 조금만 기다려라.
네가 마음껏 활개 칠 수 있도록 해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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