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4 흉계를 꾸미는 나 #3
일주일간, 세화의 표정은 하루하루 좋아졌다.
처음엔 시무룩한 채로 등교하던 녀석이 지금은 밝은 얼굴로 강의실에 들어온다.
당연하지, 나와 마르셀라가 꾸준히 상황을 좋아지게 해주고 있으니까.
그런데 저 모습이 남정네들의 마음을 움직인 모양이다.
오늘 2학년 선배가 세화에게 고백을 했다.
그것도 1학년 강의실에 침입해서.
“저 남자친구 있는데요...?”
“알아. 근데 골키퍼 있다고 골이 안 들어가는 건 아니잖아.”
시발놈의 금발 태닝 양아치새끼가 어디서 저런 케케묵은 멘트를...
그래도 딱 금태양처럼 잘생기긴 했네.
저런 쪽팔림도 무릅쓰고 고백할 정도로.
세화가 정색한다.
“죄송합니다.”
그러면서 딱딱하게 말하니, 2학년 선배의 얼굴이 빨개진다.
강의실을 둘러보던 그는 1학년 동기들의 비웃음 섞인 눈초리가 쪽팔렸는지 황급히 사라졌다.
“너는 진짜 피곤하겠다.”
여자 동기의 말.
이런 일이 한두 번은 아닐 테니... 그럴 만도 하지.
세화가 얕게 웃음을 짓고는 부정하지 않는다.
지가 이쁜 걸 아는 녀석이 유승현 같은 호구랑 사귀냐?
그런 놈이 뭐가 좋다고... 물론 나도 게임을 플레이할 땐 정의감이 가득한 그 유승현을 좋아했지만.
생각을 하다 보니 세화가 내 곁에 오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뭘 그리 멍하니 있어? 오늘 수업 생각해?”
“엉...? 아니, 그냥 어제 제출한 과제 생각. 조금 수정하고 싶은데 이미 내버려서...”
그 말에 세화가 질린 표정을 한다.
“너답다, 너다워. 분명히 A 받을 거야.”
세화는 손에 커피를 가지고 있었다.
저건 분명 내가 일주일 전에 줬던 라떼랑 같은 종류인데...
설마... 설마...
“자, 이거 마셔.”
세화가 커피를 내 책상에 올려놓는다.
이거지! 너 진짜 나한테 고마워하는구나?
방금 2학년 선배에게 대했던 것과는 다른 온도차.
동기들이 오오오... 하며 지랄을 떨어댄다.
시끄러 새끼들아, 니들도 알잖아? 세화 남자친구는 내가 아니라는 걸.
“잘 마실게. 고맙다.”
내 감사에 고개를 끄덕인 세화가 옆자리에 앉았다.
좋은 발전이로구나.
하지만 관심 없는 척하자, 빼곡한 글씨가 가득한 책을 피고 공부하는 척하는 거다.
세화가 내 눈치를 슬쩍 보더니 그녀 자신 또한 책을 꺼냈다.
그리고는 머뭇거리다가 속삭였다.
“혹시 임미진 변호사님한테 연락 안 와?”
임미진은 마르셀라의 위장용 이름이었다.
“연락? 무슨 연락?”
“남자친구 사건 때문에...”
물론 매일 보고를 받는다.
아주 상세하게 말이지.
네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은 내가 다 꿰고 있어.
하지만 모른 척할 거야.
관음하는 걸 들키면 안 되잖아.
“그건 너희들 의뢰잖아. 나한테는 딱히 연락 안 와. 왜? 뭔가 잘 안 되고 있어?”
“일은 잘 되어가고 있어. 근데 좀 죄송해서... 변호사님이 엄청 바빠 보이시더라. 다른 의뢰도 엄청 많은 것 같은데...”
바쁘게 보이는 거지, 실상은 네 의뢰 단 하나밖에 없단다.
“원래 바쁘게 사는 분이셔. 정 걱정되면 자양강장제라도 들고 찾아가봐.”
“그래야겠다. 진짜 고마워.”
“너도 날 도와주겠다고 했잖아. 그러니까 고마워할 필요는 없어.”
“아무리 그래도 고마운 건 고마운 거야.”
단호한 표정의 세화.
내가 희미하게 미소지었다.
“알았어. 그러니까 무서운 표정 좀 짓지 마. 내가 죄지은 것 같잖아.”
“그랬나? 미안... 헤헤...”
실없는 세화의 웃음은 참 예뻤다.
나중에 단둘이 만나게 돼서도 그 미소를 보여줘.
내가 더 힘을 내서 널 빼앗을 수 있도록.
@@
며칠 후 저녁, 어느 놀이터.
“정말 감사합니다.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유승현은 수화기에 대고 몇 번이나 감사를 표했다.
마르셀라를 향한 감사였다.
이후 그녀와 짧은 대화를 나눈 그가 통화종료 버튼을 눌렀다.
그 전에 마르셀라가 먼저 끊는지 확인까지 하는 그였다.
유승현의 얼굴표정이 밝자, 세화가 물었다.
“해결됐어?”
그가 잠시 뜸을 들이다가 새하얀 이를 드러냈다.
“응. 해결됐대.”
“우와... 진짜 다행이다!”
두 사람은 서로를 얼싸안고 방방 뛰며 기쁨을 나누었다.
한참동안 세화를 꽉 안던 유승현이 그녀를 떼어냈다.
“아직 마음 놓으면 안 돼. 신불자나 범죄자만 안 됐을 뿐이지 갚아야할 돈은 많아.”
“그래도 엄청 깎였잖아! 몇 억이나 되는 돈을 갚아야 할 외통수인 상황에서 이천만 원으로 줄어든 것만 해도...”
“그건 맞아. 임 변호사님이랑 송지혁 씨한테 거하게 밥이라도 사야겠어.”
“당연하지. 날 잡자.”
“근데 그...”
유승현이 고개를 갸웃했다.
뭔가 의아한 표정을 한 채로.
세화가 물었다.
“왜 그래?”
“송지혁 씨 말이야... 왜 우릴 이렇게 도와주는 거지?”
“왜긴... 엄청 착하니까 그렇지. 그냥 좀 미련할 정도로 착하더라. 마치 너처럼...”
“그렇다고 해도, 딱 봐도 수임료가 비싼 변호사에게 공짜 상담을 받게 해준다고?”
“하고 싶은 말이 뭔데?”
“혹시 널 좋아하거나... 해서 그런 게 아닐까?”
“글쎄...? 난 잘 모르겠는데... 우리처럼 부모님도 안 계셔. 내가 말했잖아, 교통사고 그거...”
유승현의 얼굴이 안타깝게 변했다.
“그래, 네가 말해준 기사 봤어. 난 그 마음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겠더라. 우리처럼 어렸을 때 부모님이 돌아가신 게 아니니까. 근데 그분 부모님이 왜 나와?”
“요 며칠간 진지한 대화를 나눠봤는데, 그냥 공통점이 많은 것 같아. 공감대가 형성돼서 도와준 거 아닐까?”
“그런가?”
“그렇다고 생각하자. 확실한 건 나쁜 사람은 절대, 절대 아냐. 장담할 수 있어. 또 호의는 좀 호의로 받아들이면 안 돼? 우리 지금 엄청난 시련을 겪었다가 탈출했어.”
유승현이 결국 수긍했다.
여러 남자에게 추파를 받는 세화의 안목을 믿었기도 했거니와, 송지혁이 아니었다면 인생이 완전히 나락으로 떨어졌을 테니까.
“알았어. 조만간 자리 한 번 잡아보자. 일단 일자리부터 다시 알아봐야겠어.”
“응. 우리 같이 힘내자.”
두 사람은 그렇게 일이 해결된 기쁨을 나누었다.
유승현은 방금 전 지혁을 의심했을 때, 세화의 말투에 아주 자그마한 날이 서있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리고 그건 세화 또한 마찬가지였다.
@@
[기쁜 소식! 일이 원만하게 해결됐어!]
이모티콘이 여러 개 포함된 세화의 메시지를 본 내가 킥킥 웃었다.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간신히 빠져나왔으니까 기쁘겠지, 그래.
답장은 안 해야겠다.
지금은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으니까.
“호텔 인수가 끝났어요.”
생글생글 웃는 마르셀라.
나 또한 그녀를 향해 마주 웃어주었다.
“좋아, 지하 유흥주점은?”
“거기도 인수가 끝났죠. 기본급 인상에 떼어주는 비율을 높여주니 아가씨들이 모두 남겠다고 했어요.”
“실장들도 남았고?”
“물론이죠.”
우리 둘은 지금 유승현의 집과 가까운 호텔을 인수했다.
사실 말이 호텔이지 유흥주점을 낀 모텔이라고 보면 됐다.
보통 이런 숙박시설을 낀 유흥주점에선 아가씨들이 2차를 가기 편하다.
그냥 손님들과 술을 마시며 노래를 부르다가, 손님이 2차를 원하면 사람을 시켜 방 카드를 받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면 끝.
호텔 전체가 유흥업을 하는 만큼 들킬 염려도 적었기에 상대적으로 안전했다.
또 들킨다고 해봐야 돈을 펑펑 쏟아 부으면 안 되는 게 없다.
우리가 왜 여길 인수했느냐?
바로 유승현에게 일자리를 주기 위해서다.
한창 아가씨들과 신나게 놀던 손님들은 숙취해소제나 담배를 사러 가기 귀찮아한다.
그렇기에 심부름꾼이 필요하다.
나는 유승현에게 웨이터 역할과 함께 허드렛일을 하는 심부름꾼을 시킬 예정이었다.
일을 안 하면 아까울 정도로 돈을 많이 쥐어주면서.
“아! 마왕님! 유승현이 컴퓨터를 만지고 있어요!”
모니터를 본 마르셀라가 흥분해선 방방 뛰었다.
우린 현재 유승현의 집 컴퓨터를 몰래 엿보고 있었다.
성실한 그놈이라면 일이 해결되자마자 바로 돌아가 일거리를 알아볼 거라 생각했고, 그 생각은 적중했다.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은 내가 물었다.
“조작은 끝났나?”
“진작 끝냈죠. 공고는 유승현의 컴퓨터 외엔 못 봐요.”
“크크... 좋아, 계속 지켜보자고.”
우리가 올린 공고는 일단 단순 서빙, 야간 풀타임 근무로 되어 있었다.
급여는 타 업체보다 약간 많은 정도.
일단 흥미만 보이면 면접에서 구워삶을 수 있다.
그러니 제발 물어다오.
픽!
생각을 하는 사이 모니터 화면이 바뀌었다.
유승현이 공고에 흥미를 느꼈는지 클릭을 한 것이다.
기대감 어린 눈을 한 내가 잠자코 화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얼마 뒤, 마우스 커서가 [이력서 제출] 쪽으로 움직이고, 클릭을 하자 씨익 웃었다.
“됐군.”
마르셀라 또한 무척 기뻐했다.
“저놈 진짜 바보 아니에요?”
“네가 잘 해줬으니 의심을 못한 거겠지.”
“히히...”
“좋아하긴 이르다. 곧바로 위장한 뒤 면접 보러 오라고 해.”
그 말에 마르셀라의 표정이 의아해진다.
“네? 오늘요?”
“당연하지. 지금도 호텔은 영업 중이잖나. 제대로 구워삶아라. 돈을 퍼줘서라도 무조건 하겠다고 만들어.”
“알겠습니다아...”
대답을 길게 뺀 그녀가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어디론가 사라졌다.
원래 악독한 고용주 밑에선 죽어라 일을 해야 하는 법이란다.
좀만 더 고생해라, 고생 끝에 빛이 온다지 않느냐.
일단 유승현이 일을 하기 시작한다면, 아침엔 자고 저녁엔 일을 해야 하니 세화와 겹치는 시간이 매우 줄어들 것이다.
그 틈을 탄 나는 세화의 일상에 파고들어 그녀와 무척 가까운 사이가 될 테고.
또 유승현의 성격 상 세화에겐 야간 술집, 혹은 노래방에서 단순한 서빙을 한다고 말할 터.
그때 세화를 자연스럽게 유도해 유승현의 일하는 모습을 보게 한다.
솔직히 세화는 유승현이 유흥주점의 직원이어도, 그가 다른 여자를 건드리지 않는 이상 사랑하는 마음은 변치 않는다.
요점은 거짓말이다.
유승현이 스스로 찔린다고 생각해 다른 곳에서 일한다고 거짓말을 하고, 세화가 사실을 알게 된다면 그녀의 마음속엔 불신이 자리할 것이다.
물론 이런다고 너희 둘의 사랑이 깨지는 건 아니겠지.
나도 너희가 갈라지는 건 원치 않고.
다만 세화 네가 유승현에 대해 자그마한 불신을 갖고, 내가 그 사이를 파고 들어가 마음속에 자리할 정도면 돼.
그저 좋아하는 감정을 살짝 느끼는 정도로도 충분하다는 거야.
나와의 섹스로 변신 디바이스의 게이지를 채울 수 있다면 끝이다.
그런 상황까지 가게 되면, 디바이스에 내 인자를 섞어 넣어서 서서히 무너지게 해줄게.
‘물론 그 전에 캐시 박사의 연구실에 들어가려는 계획이 성공해야겠지만.’
생각을 마친 내가 다른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캐시 박사를 추적하는 용도의 모니터였다.
하지만 1 ~ 5탄의 기술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캐시 박사는 도무지 발견되질 않았다.
한국에 있는 건 분명하고, 세화의 동네에 있는 것도 분명하다.
세화와 유승현이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진 순간, 캐시 박사가 등장해 세화를 변신시키니까.
위기에 처한 유승현의 그 자리를 내가 차지할 수도 있다.
하지만 가이드라인을 크게 벗어나선 안 된다.
지금도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고 있는 셈이니, 최대한 정석대로 가자.
유승현은 세화의 변신이 일어난 후에 멀리 보내버리고, 내가 쏙 들어가면 된다.
그 계획은 이미 내 머릿속에 있었다.
‘변신만 할 수 있다면 됐지.’
마음 편하게 생각하기로 한 나는 휴대폰의 알림소리가 울리자 고개를 숙였다.
[뭐해? 자는 거야?]
세화가 다시 문자를 보냈다.
빨리 소식을 알려주고 싶어 몸이 근질근질한 모양.
한쪽 입꼬리를 올린 내가 답장을 보냈다.
[아니, 과제하느라 휴대폰을 못 봤네. 축하해!]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바로 답장이 온다.
[고마워!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다 말해. 내일 내가 쏠 테니까 배 터지게 먹자!]
[그건 고마운데 내일은 일요일이야...]
[주말은 밥 안 먹어? 어차피 집도 가깝잖아. 점심에 시간 돼? 약속 있으면 어쩔 수 없고...]
어쭈, 벌써 진도를 빼시겠다고?
나는 좋다 이거야.
내 쪽으로 불러야지.
다음화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