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3 흉계를 꾸미는 나 #2
다음 날, 전공필수수업.
강의실에 들어간 난 세화의 표정이 좋지 않은 것을 확인했다.
분명 유승현의 사정을 들었겠지?
동기들과 밝게 인사를 나눈 내가 세화에게 바나나 우유를 건넸다.
“마실래? 표정이 안 좋아 보이는데.”
“어... 응?”
어깨를 움찔 떤 세화가 고개를 돌렸다.
나를 본 그녀의 표정이 아주 조금 풀렸다.
“언제 왔어?”
“방금. 무슨 생각하고...”
- 오오오!
나는 말을 마치지 못했다.
동기들이 세화에게 바나나 우유를 내미는 나를 보고 장난이 담긴 목소리로 감탄사를 내뱉었기 때문.
여기서 세화가 우유를 받아들인다면 그녀도 놀림을 받을 테지.
당혹스러워하는 그녀가 보인다.
어깨를 으쓱인 나는 어제 가장 친해졌다고 할 수 있는 남자 동기에게 우유를 슬쩍 던졌다.
그것을 잘 캐치한 동기가 껍질을 뜯어내며 말했다.
“뭐야, 창피하니까 나한테 주는 거냐?”
“네 목소리가 제일 크니까 좀 조용히 하라는 뜻에서 준 거야.”
“개이득이네? 땡큐!”
싱글벙글 쪼갠 그가 우유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세화에게 미안하다는 눈빛을 한 내가 빈자리를 찾아 앉았다.
세화와는 조금 떨어진 자리.
수업에 앞서 책을 꺼낸 내가 휴대폰을 꺼냈다.
그리고 어제 받아둔 세화의 번호로 문자를 보냈다.
[어제 잘 들어갔어?]
메시지를 확인한 세화가 슬쩍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그러더니 답장을 보냈다.
[아니. 완전 최악이야.]
내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응.] 혹은 [아니.] 라고 단답을 보낼 줄 알았는데 기분을 말해주다니.
애써 속마음을 감춘 내가 다시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그런가?]
[난 어제 소주 반병도 안 마셨거든? 넌 어때? 괜찮아?]
[뭐가?]
[속 괜찮냐구.]
[아침까진 좀 거북했는데, 해장국 먹고 등교하니까 괜찮아졌어. 맛있는데 있더라.]
[나도 해장국 먹고 싶당...]
세화야, 귀여운 말투 하지 마.
넌 정의의 용사가 될 구세주란 말이야.
그러니까 위엄을 좀 보여 달라고.
근데 귀엽긴 하네.
[먹으면 되지. 점심에 같이 갈래?]
[해장국 먹었다면서.]
[또 먹으면 뭐 어때서. 해장국집이 좀 구석자리에 있는데, 동기들이랑 같이 가자. 애들이 여기에 식당이 있는 걸 모르는 것 같더라. 죄다 출근하는 아저씨들뿐이었어.]
[앞에 봐봐.]
대답은 안 하고 뜬금없이 앞을 보라니.
나는 세화의 말대로 했다.
그리고는 웃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녀가 어깨 너머로 오케이사인을 보내고 있었던 것.
**
여러 수업이 끝나고 점심시간.
약속시간에 맞춰 후문에서 만난 다섯 사람은, 내 안내에 따라 해장국집으로 움직였다.
그리고 그곳에서 해장국을 아예 퍼먹다시피 했다.
“크어어... 이제야 좀 살 것 같다.”
남자 동기의 메인 고구마가 쑥 내려간 표정.
테이블에 놓인 이쑤시개로 이빨을 청소하던 그가 내게 물었다.
“넌 이런 곳을 어떻게 알고 있는 거야?”
“나도 오늘 우연찮게 발견했어. 괜찮지?”
“그냥 괜찮은 게 아니라 존나 괜찮은데? 앞으로 자주 올 것 같다. 가격도 착하고.”
“미래과학과 1학년 외엔 비밀로 하자. 여기가 유명해지는 건 싫다.”
“오... 소속감... 나쁘지 않은데?”
다른 동기들도 만족한 표정.
사실 그들의 표정 따윈 알 바 아니지만, 세화가 만족했으면 됐다.
사람이 많이 모이면 리드하려는 자들이 있기 마련.
동기 한 명이 카드로 계산할 테니 돈을 달라고 했다.
그리고 나는 세화가 지갑에서 돈을 꺼낼 때, 잠깐 머뭇거리는 것을 눈치챘다.
‘음... 유승현이 돈이라도 꿔 달라 했나? 아니, 그럴 놈은 아닌데...’
나중에 캐보자.
동기들은 커피를 마시고 싶은지, 아니면 대화를 나누고 싶은지 카페에 가자고 했다.
하지만 난 그럴 생각이 없었다.
“난 소화시킬 겸 산책이나 할래. 대학 뒤에 작은 산이 있더라. 거기 한 번 가보려고.”
“아... 한 명이 안 간다고 하면 쫑나는 거 모르냐?”
한 동기의 칭얼거림.
내가 미안하다며 사과한 뒤 뒤도 돌아보지 않고 학교 뒷산으로 향했다.
앞으로의 계획을 점검하며 조용한 산책로를 걷고 있는데, 뒤에서 예쁜 목소리가 들려온다.
“지혁아!”
세화의 목소리였다.
솔직히 여기까지 따라올 줄은 몰랐는데... 벌써 이 정도 진도까지 왔나?
뭔지는 모르겠지만 좋은 일이었다.
그녀와 좀 더 가까워질 수 있었고, 두 사람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볼 기회였으니까.
“네가 여기 왜 있어?”
“아, 나도 산책이나 좀 하려고. 해장국집 이모님이 밥을 너무 많이 주셔서 배가 터질 것 같아.”
“그래? 그럼 뭐... 같이 가자.”
세화가 나와 보폭을 맞춰오자, 내가 물었다.
“다른 애들은?”
“남자들은 자체공강 하고 PC방 간대. 여자애들은 카페 가고.”
“넌 카페 안 갔어?”
“딱히... 뭘 마시고 싶은 생각은 없어서.”
딱 보니까 돈 아끼려고 안 가는 거구만.
태연한 척 고개를 끄덕인 내가 가방에서 라떼를 꺼냈다.
뒷산에 오기 전에 마시려고 샀던 커피였다.
난 이걸 세화에게 내밀었다.
“마실래?”
“괜찮아. 마시고 싶은 생각 없다니까?”
“목소리가 갈라지는데 생각 없기는 무슨... 그냥 마셔. 난 아까 물 충분히 마셨어.”
세화가 머뭇거리더니 라떼를 받았다.
“고마워. 나중에 내가 똑같은 걸로 사줄게.”
“됐어. 그나저나 기분은 좀 나아졌고?”
“기분?”
“오늘 오전에 그랬잖아. 기분 최악이라고.”
“아... 그거...”
세화가 잠시 머뭇거렸다.
아무래도 심각한 얘기이니만큼 재는 모양.
편안한 미소를 지은 내가 그녀를 안심시켰다.
“넌 너무 착해서 탈이다. 말하기 싫으면 안 해도 돼.”
“아냐. 딱히 심각한 얘기는 아닌데... 뭐 하나 물어봐도 돼?”
“응, 물어봐.”
“넌 만약 네가 사랑하는 사람이 큰일을 겪었는데, 혼자 책임을 진다고 하면 어떡할 거야?”
아하, 대충 견적이 나오는구나.
분명 유승현은 세화에게 일을 설명하고,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넌 걱정하지 말라고 했겠지.
하지만 유승현을 무척 사랑하는 세화는 같이 갚아나가거나 보험사기로 고소를 하자고 했을 테고.
그럼 세화가 듣기 좋아할 말을 해줘야겠군.
“음... 내가 그 일을 겪었거나, 사랑하는 사람에게 이야기를 들었다면 같이 지려고 하겠지.”
“그치? 맞지?”
“적어도 나는 그래.”
“나도 마찬가지야.”
“보니까 사고 일로 남자친구랑 싸웠네. 맞아?”
움찔한 세화.
그녀가 놀란 낯으로 물었다.
“어떻게 알았어?”
“남자친구에게 사고가 났고, 넌 그 사람을 만나러 갔고, 오늘 기분은 최악이고. 이 정도면 대충 답이 나오지. 그래도 딱 맞출 줄은 몰랐는데... 무당이라도 해야 하나 싶다.”
킥킥 웃은 세화가 라떼를 한 모금 마셨다.
그러고는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하아... 진짜 걱정이야. 앞이 캄캄해. 그냥 사방이 다 꽉 막힌 것 같아.”
저도 모르게 속내를 내비치는 그녀였다.
각성하기 전 세화의 모습은 언제 봐도 신선했다.
이런 녀석이 타이라트... 아니, 나를 매번 곤경에 빠뜨리다니.
“일단 변호사 상담부터 받아보는 게 먼저야. 보험사기라면 어떻게든 캐내야지, 안 그래?”
“그렇긴 한데...”
돈이 없지? 나도 알아.
그러니까 좀 도와줄게.
그러려고 이 흉계를 꾸민 거니까.
그리고 안심해, 난 유승현의 인생을 완전히 망하게 할 생각은 없어.
너와 붙어있는 시간이 아주 적어질 정도로만 조져놓을 거야.
난 품에서 명함지갑을 꺼내 그것을 뒤적거렸다.
온갖 디자인의 명함들이 마구 쏟아져 나오자, 세화가 눈을 크게 떴다.
그 중 하나를 지그시 바라본 내가 세화에게 명함을 건네며 말했다.
“이 사람한테 가봐.”
세화가 명함 내용을 확인해보더니 중얼거렸다.
“변... 호사네?”
“우리 부모님 회사의 전담 변호사였는데, 돌아가시고 나서 개인 사무실을 차렸어. 남자친구랑 거기 한 번 가봐. 상담은 무료로 할 수 있도록 이야기해놓을게.”
“지... 지혁아, 이건 너무 부담스러운데...”
“남자친구 도와줘야지. 안 그래?”
명함을 다시 돌려주려던 세화가 내 말에 굳은 눈빛을 한다.
내가 말을 이었다.
“대신 나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나 좀 도와줘.”
“내가 무슨 능력이 있다고...”
“넌 널 너무 과소평가하는 것 같다. 어쨌든... 할래? 말래?”
“.... 할래. 정말 고마워.”
내가 속으로 음흉하게 웃었다.
지금쯤 마르셀라는 모든 일을 끝마쳐놓았을 테지.
세화는 지적인 변호사로 위장한 내 참모를 만나게 될 것이다.
**
남극 타이라트의 기지.
“내가 왜 이런 하찮은 짓을... 그냥 죽이면 안 되나? 마왕님도 참... 무슨 생각이신 건지...”
불만을 터뜨린 마르셀라가 정장을 집어 던졌다.
지금 등장해야겠군.
“불만이 상당한가보구나, 마르셀라.”
“헉! 마왕님!”
깜짝 놀란 그녀가 바닥에 납작 엎드린다.
허리의 꼬리가 온데간데없어지고, 길었던 귀도 평범해졌다.
엎드리기 전에 얼핏 보니 송곳니도 사라지고 완전히 인간처럼 변했다.
이 정도라면 가능인데...
하지만 뒷담을 깠으니 취소다 이년아.
“상을 줄까 했는데 취소해야겠군.”
“사... 상이요...?”
“그러려고 했는데 말이지...”
여유롭게 걸어간 내가 아무 의자에 걸터앉자, 마르셀라가 후다닥 기어와 내 발치에 머리를 부빈다.
“마... 마왕님... 상이 뭔데요오...?”
“글쎄, 과연 뭐였을까 나도 궁금해지는군. 방금 네 말을 들으니 놀라 기억이 사라졌어. 뭐라고 했더라... 하찮은 짓? 그냥 죽이면 안 되나?”
“마왕님... 죄송합니다...”
시무룩한 표정을 짓는 마르셀라의 인간형 모습은 퍽 귀여웠다.
하긴, 게임 내에서도 콧소리를 내는 것이 귀엽긴 했다.
마물들을 미친 수준으로 개조해 내 이를 갈게 했지만.
“보고해.”
그 말에 마르셀라가 천천히 일어났다.
그리고는 원래 모습으로 변했다.
양쪽 송곳니가 길게 빠지고, 등 뒤에선 거뭇한 날개가 피어났다.
없어졌던 꼬리가 길게 생기면서 그 끝이 뾰족하게 변했다.
손발톱도 길어지면서 날카롭게.
누가 봐도 악마, 서큐버스라고 생각할 만한 모습, 저게 마르셀라의 본모습이었다.
그녀가 내 쪽으로 모니터를 돌려 화면을 조작했다.
그러자 잘 차려진 변호사 사무실 가운데 원탁에 앉아있는 세 사람이 보였다.
위장한 마르셀라, 그리고 언제나 예쁜 세화, 마지막으로 호구 유승현이었다.
잘생겼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누가 봐도 호감을 느낄 만한 순박한 얼굴.
근심이 가득 담긴 표정으로 마르셀라의 설명에 힘없이 대답만 하는 저 모습.
어후... 호구새끼.
저걸 왜 나라고 생각했지? 과거를 생각만 해도 짜증이 치밀어 오른다.
마르셀라는 오랜 시간의 상담을 통해 유승현과 세화가 듣기 싫어할 말만 골라서 했다.
이건 증거가 없다면 해결이 되지 않는다, 녹음한 것도 없고, 가입 서류를 복사해놓지도 않아 완벽한 외통수다.
이런 말로 두 사람의 표정을 점점 절망의 구렁텅이로 빠뜨렸다.
그러면서도 마지막엔 일말의 희망을 주려고 했다.
-지금 해고됐다고 하셨죠? 그래도 입사서류가 남아있을 수 있을 테니 사측에 연락해 면밀히 검토해볼게요.
그 말에 유승현과 세화의 얼굴이 조금이나마 밝아진다.
-송지혁 도련님이 특별히 부탁하셨으니까... 저도 힘내봐야죠. 너무 풀죽어있지 말아요.
마지막엔 날 언급까지.
유승현이 세화에게 송지혁 씨의 시간이 괜찮을 때 같이 만나자고 한다.
감사인사를 전하려는 모양.
세화가 밝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 두 사람은 마르셀라에게 몇 번이고 감사를 표한 뒤 자리를 벗어났다.
화면을 다 본 내가 대소를 터뜨렸다.
그러자 마르셀라의 얼굴이 환해졌다.
“아주 좋아. 아주 좋다고.”
“정말요?”
“잘했다, 마르셀라.”
“감사... 감사합니다, 마왕님.”
“잘 들어라, 지금부터 내가 뭘 노리고 있는지 말해주지.”
나는 오늘 마르셀라에게 내 모든 목적을 말했다.
막강한 비스트 슬레이어들을 수족으로 부리기 위한 장기적인 계획을.
모든 얘기를 들은 마르셀라가 물개박수를 쳤다.
“역시... 역시 마왕님이세요! 저 마르셀라, 마왕님의 패업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이해해줘서 고맙군.
이제 칭얼대지 마라.
네가 뒷담화를 까면 내 심장이 놀란단 말이야. 무섭다고!
“유승현이 몸담았던 회사는? 네 의도대로 조종할 수 있나?”
“그럼요. 중소기업 인간들 정도야 제가 주무를 수 있어요. 뭣하면 아몬을 보내서 모두 최면을...”
“너무 앞서가는구나. 까불지 말고 이렇게 해라. 처음엔...”
나는 마르셀라에게 이후의 가이드라인을 제시해주었다.
마르셀라와 내 덕에 유승현이 한 시름 놓게끔.
그러나 완전한 해결은 아니게끔.
그렇게 되면 유승현은 몇 달간 몸이 부서져라 일을 해야 될 텐데, 그 때 놈에게 접근을 할 생각이었다.
아주 좋은 일자리를 주마.
세화에게 들키면 큰일이 날 일자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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