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 흉계를 꾸미는 나
내가 타이타르가 된 이후 조금 아쉬웠던 건, 타락루트의 스토리를 모른다는 것.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100프로 공략을 시도했겠지.
그래야 세화를 가질 수 있는 여러 방법들이 생각날 텐데...
사실 뭐, 몰라도 딱히 상관은 없었다.
루트는 내가 만들어나가면 되는 거니까.
그저 정석적인 해피엔딩루트만 꿰고 있다면 내가 알아서 할 수 있다.
그게 재미있기도 하고.
어쨌건 유승현은 고졸 이후 취업전선에 뛰어든 성실한 청년이다.
그리고 히로인의 미래와 규모가 커져가는 연구실의 복지를 위해 캐시 박사에게 돈을 갖다 바치는 호구 중의 호구이기도 했다.
내가 왜 저런 주인공에게 감정이입을 했는지...
지금 나는 돈 문제 따윈 걱정 없는 어마어마한 부자인데.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유승현을 자신이라고 생각했던 마음은 멀리 저편으로 날려버린 나였다.
“여긴 오늘 만난 친구, 이름은 송지혁이래. 우리 과야.”
천성이 친절한 세화는 나를 위해 친구들을 소개시켜주었다.
좀 말랐지만 몹시 잘생긴 얼굴.
괜히 외모가 뛰어나면 고시 3관왕이라는 소리까지 나오겠는가.
여자 동기들은 내 주변으로 몰려들... 지는 않고, 그냥 관심 어린 눈을 했다.
순박한 청년을 연기한지 얼마 되지 않아 교수가 등장했다.
저 교수는 세화의 과학지식이 그다지 좋지 않다는 걸 알려주는, 꼰대스러운 엑스트라1.
저명하긴 하지만 중요인물은 아니었다.
하지만 나에겐 제법 중요한 소모품이었다.
내 이미지를 공고히 하기 위한.
수십 명의 학생들이 강의실에 잘 앉자, 교수가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 네가 그 친구구나. 송지혁... 맞지?”
“네, 안녕하세요.”
“좋지 않은 상황에서도 꿋꿋하게 일어난 모습이 참... 보기가 좋아.”
“예, 뭐... 산 사람은 살아야죠.”
“그렇군.”
저명한 교수와 의미심장한 대화를 나누고, 그가 개인적으로 토론까지 하고 싶어 한다.
세화를 포함한 학생들의 눈에 궁금증이 서린다.
궁금하지? 궁금할 것이다.
점심시간에 나와 마르셀라가 조작한 기사를 잘 찾아봐라, 그리고 내게 동정표를 던져라.
출석을 다 부른 교수는 본격적으로 수업을 시작했다.
나는 기지의 기술력 덕분에 엄청난 천재가 되어 있었다.
수업을 경험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을 텐데, 이해가 안 되는 내용은 단 하나도 없었고, 교수가 간간이 질문을 던지면 재빨리 답을 내놓기까지.
마계의 천재, 마르셀라가 2533년의 지구를 비롯한 여러 세계의 기술을 추출한 정보는 모두 내 머릿속에 있다.
이게 바로 진정한 오버 테크라는 거다, 우매한 인간들아.
“다음은 폴리머스에 대해서 설명해볼까? 음... 이세화.”
“네... 네?”
내 옆자리에서 멍하니 빔 프로젝터를 보고 있다가 이름이 불리자 화들짝 놀라는 그녀.
교수가 물었다.
“폴리머스가 뭐지?”
“그...”
세화가 우물쭈물했다.
그녀는 학자금 대출을 받아 대학교를 다니는 평범한 대학생.
미래에 안정적인 직업도 얻고 싶고, 돈도 많이 벌고 싶어 했다.
그리고 나는 세화의 미래를 해결해줄 수 있는 사람이다.
일단 교수에게 잘 보이도록 해줄게.
구해줄 테니까 학식에서 밥이나 사라.
“153년 전, 북극에서 우연찮게 발견한 우주의 물질.”
책을 슬쩍 올려 입을 가린 내가 세화에게 속삭였다.
그러자 그녀가 교수의 눈치를 보더니 자신 없는 말투로 말한다.
“153년 전... 북극에서 우연히 발견한 우주의 물질...?”
“정답이다. 그럼 그 폴리머스의 용도는?”
“음...”
세화가 내게 눈동자를 돌려온다.
빨리 말하라고? 알았어.
“신경계와 융합하는 외골격 장갑의 재료로 들어가는데.”
“시... 신경계와 융합하는 외골격 장갑의 재료로 들어가는데요... 근데...”
“만능 물질이지만 수가 적어서...”
“폴리머스는 거의 만능 물질이지만 그 수가 너무 적어서...”
“세계연합기구에서 중증 장애를 앓는 사람들에게만 사용하자고 합의했어.”
“세계연합기구에서 중증 장애를 앓는 사람들에게만 사용하자고 합의한 걸로 알고 있어요.”
어우 귀도 좋네. 잘 따라한다.
교수가 만족스런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다.
“정답을 말할 줄은 몰랐군. 폴리머스는 보통사람이라면 잘 모르는 물질인데... 미래과학에 관심이 많구나. 잘했다.”
“가, 감사합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쉰 세화가 내게 감사의 눈빛을 보냈다.
나는 슬쩍 웃어주는 것으로 그 감사를 받아주었다.
**
점심시간, 나는 세화와 같이 학식을 먹는 영광을 누렸다.
그녀가 도움을 줘서 감사하다고 점심을 사겠다 했던 것.
예상했던 그대로였다.
아아... 남정네들의 질시가 담긴 시선이 느껴지는구나.
꼬우면 바이오리액터에 들어가서 천재가 되던가.
“잠깐... 나 화장실 좀...”
식판을 받고 테이블에 올린 내가 그리 말하니, 세화가 대답한다.
“음식 받기 전에 다녀오지...”
“미안, 갑자기 속이 좀 안 좋아져서. 금방 다녀올게.”
황급히 자리를 벗어난 내가 품에서 자그마한 태블릿을 꺼냈다.
태블릿을 켜고 화면을 터치하자 한국대학의 모든 감시카메라 목록이 떴다.
식당... 그것도 세화가 있는 테이블 근처의 카메라를 선택한 나는 화면을 확대했다.
이어폰까지 연결한 내가 음성 버튼을 클릭했다.
-미친... 대박...
제대로 들리는구나.
세화의 옆에 앉은, 휴대폰만 잡고 있던 여학생의 말.
내가 예의주시하던 동기이기도 했다.
왜? 나에 대한 기사를 찾아볼 것 같았으니까.
세화가 물었다.
-왜 그래?
-이거 송지혁 아니야?
-지혁이?
-교수랑 이상한 대화를 나눴잖아. 그래서 혹시나 하고 찾아봤는데 수상한 기사가 있어.
-수상한 기사? 어디 봐봐.
세화가 휴대폰 화면으로 눈을 돌렸다.
나도 그 화면을 확대했다.
[한국대 예비 입학생, 과학영재가 탄 승용차 전복. 탑승자 1명 제외 전원 사망.]
기사는 뒤에서 화물차가 들이받아 S씨를 제외한 일가족이 전부 사망했고, S씨는 중환자실에서 중태에 빠져 있다고 쓰여 있었다.
완벽하게 조작된 몇 달 전 기사.
그것을 본 세화의 표정이 굳는다.
그녀와의 첫 만남에서 내가 교통사고를 당했다고, 뒤에서 누가 들이받았다고 했었다.
그러다 한동안 병원신세를 졌다고까지.
이쯤에서 눈치를 채지 못한다면 그냥 대가리가 없는 수준.
다행히 세화는 그 정도로 멍청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일 수도 있잖아.
세화의 말에 동기가 한심한 눈을 했다.
-한국대 예비 입학생이래잖아. 과학영재! 오늘 송지혁이 교수님 질문에 따박따박 대답하는 거 못 봤어?
-이건 지혁이한테 비밀로 하자.
-당연하지. 내가 미쳤다고 말하겠어?
-너 술 좋아한다며. 개강파티 때 혹시나...
-절대, 절대 말 안 할 거야.
-너희들도 지혁이 앞에선 말조심하는 거다?
주변 동기들이 고개를 끄덕인다.
이 정도면 충분.
나는 태블릿을 품에 넣고 식당으로 돌아갔다.
손에 물을 묻히고 옷에다 닦아 손자국을 내는 디테일도 잊지 않았다.
“뭐야? 왜 안 먹고 있었어?”
식당으로 돌아간 내 물음에, 세화를 비롯한 동기들이 살짝 당황해한다.
“너 기다리고 있었지. 밥은 같이 먹어야 맛있어.”
아아... 세화야, 너는 진짜 천사다.
고개를 끄덕인 내가 환하게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
“우웨엑...!”
쯔쯔... 토하는 꼬라지 좀 보소.
주위를 둘러보니 저놈처럼 구역질을 하는 놈들이 한두 명이 아니다.
하긴, 고등학생을 갓 졸업한 고삐 풀린 망아지가 된 시점이니 이해가 갔다.
개강파티는 성황리에 끝났다.
개조된 몸을 가진 난 일부러 술기운을 날려댔고, 얼굴엔 취한 척 홍조를 띄웠다.
술자리에서 혀를 좀 더듬긴 했지만 이건 연기를 한 것.
지금 동기들과 선배들은 내 주사가 아주 얌전하다고 생각 중일 테지.
어쨌든 나는 동기들과 상당히 많이 친해질 수 있었다.
얼굴이 원체 호감형이다보니 접근하는 사람이 많았고, 나는 그들에게 친절히 대해줌으로서 인간관계를 쌓아나갔다.
나에 대한 이미지는 지금까지 보인 모습이 딱 적당하다.
똑똑하고, 얌전하고, 친절한 사람.
묵묵히 밤이 된 하늘을 보며 기지개를 피고 있으니 세화가 접근했다.
술이 좀 들어갔지만 많이는 마시지 않은 그녀가 물었다.
“어땠어?”
“응? 뭐가?”
“개강파티.”
“재미있더라. 왁자지껄해서 좋았어.”
“넌 전혀 그런 표정이 아니었는데...”
일부러 거리를 두고 앉았는데도 내 상황을 살폈다?
점심의 일이 마음에 걸렸나보군, 좋은 징조였다.
내가 말했다.
“그래? 난 계속 웃고 있었는데.”
웃고 있긴 했다.
어딘지 모르게 슬픈 표정을 지었을 뿐.
그래, 마치 오늘 오전에 세화를 처음 만났을 때와 비슷하게.
내가 말을 돌렸다.
“이제 집에 가려고?”
“응. 가야지. 너는 좋겠다, 이 근처에 살아서. 근데...”
세화가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주변을 둘러본다.
그러면서 미심쩍은 목소리로 이렇게 물어왔다.
“지금 생각난 건데... 여기에 원룸촌이 있어?”
한국대 근처는 모두 고급 아파트와 오피스텔 뿐.
원룸촌이라고 불릴 정도의 단지는 없었다.
속으로 낄낄 웃은 내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한 오피스텔을 가리켰다.
“난 저기 살아. 엄청 가깝지?”
내 손가락 끝이 가리키는 곳을 본 세화가 크게 놀랐다.
“저... 저긴 엄청 비싼 데잖아? 월세만 해도...”
고작 이 정도로 놀라?
건물을 통째로 샀다고 하면 아예 기절하겠군.
“글쎄... 나는 잘 몰라. 일처리를 해주시는 분이 따로 있거든.”
“일처리를 해주시는 분? 뭐 비서나 집사 같은?”
“뭐... 굳이 말하자면 그쪽이라고 봐야지. 그밖에도 모든 일을 도맡아서 처리하셔.”
세화가 부럽다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금수저를 타고났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 생각은 맞았다.
이 비스트 슬레이어 속의 나는 금수저가 아니라 다이아몬드... 아니, 폴리머스 수저다 이 말이야.
그녀가 곧 눈빛을 바꾸었다.
“그래... 근데 진짜 슬프겠다. 네 기분을 알 것 같긴 해. 나도 부모님을 잃었거... 앗!”
말을 하다 말고 입을 가린 그녀.
세화야... 입조심하자고 말한 사람이 누군데 네가 그 이야기를 왜 꺼내냐.
나는 네 가슴속에 더 깊숙이 각인될 수 있어서 좋지만 말이야.
역시 술이 웬수지?
그리 생각한 내가 표정을 굳혔다.
“무슨 소리야? 갑자기 너희 부모님 이야기가 왜 나와? 슬프다는 건 또 뭐고?”
“아니... 그게...”
불안한 듯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는 세화는 너무 귀여웠다.
저런 참한 녀석이 지구를 수호하는 정의의 용사가 되다니.
인생사 새옹지마라는 말이 딱 어울린다.
표정을 푼 내가 말했다.
“아... 어디선가 들었구나? 우리 부모님이 돌아가셨다고?”
“어...?”
“교수님이 말씀을 해주셨나보다. 어쩐지 개강파티 때 애들이 날 바라보는 눈빛이 이상하더라고.”
기사를 봤다고 하기엔 조금 뭣할 테니 내가 도와줘야지 어쩌겠냐.
세화가 냅다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을 보니 잘 도와줬다 싶었다.
“맞아. 숨기고 있어서 미안해.”
“넌 맨날 미안하다고만 말하냐? 난 괜찮아.”
“정말?”
“아니, 사실 안 괜찮아. 아직도 틈 날 때마다 부모님이 생각나거든. 그래도 뭐... 시간이 약이라고들 하니까...”
“그래, 시간이 약이야. 나도 우리 부모님을 잃었거든. 아주 어렸을 때지만...”
공감대 형성 좋고.
“본의 아니게 네 과거도 들어버렸네. 나야말로 미안해.”
“아냐, 내가 먼저 말한 주제니까... 잠깐만, 전화 온다.”
세화가 에코백에서 휴대폰을 꺼낸다.
아마 유승현의 전화일 테지.
여친 사랑이 지극한 그놈은 항상 세화를 학교까지 태워다주고, 집에 데려간다.
누가 넘보지 못하게 하려는 듯 말이다.
그런데 어쩌냐 세화야, 넌 오늘 지하철이나 타고 가야될 거다.
유승현의 업무용 자동차는 사고가 나서 정비소에 가있거든.
휴대폰에 귀를 댄 세화가 말했다.
“응, 승현아. 나 방금 개강파티 끝나고 밖에 나왔어... 뭐? 진짜?”
놀란 말투와 행동.
마르셀라가 아주 잘 해냈다는 증거였다.
“다친 데는 없어? 아냐, 나 혼자 갈게. 지하철 타면 돼. 응, 알았어.”
전화를 끊은 세화가 나를 올려다보았다.
“남자친구가 사고 났대서... 이만 가봐야 할 것 같아.”
“사고? 다친 곳은 없대?”
“응. 근데 말투가 너무 불안해. 걱정돼서 만나보려고.”
말투가 불안한 건 유승현이 가해자니까 그렇지.
자동차의 브레이크가 말을 듣지 않아 제대로 정차한 자동차의 뒤를 크게 박았다.
다친 사람은 없겠지만 뼈 빠지게 돈을 벌어야 할 것이다.
박은 차가 고급 외제차였고, 지금의 네놈은 무보험이었으니까.
원래 무보험은 아니고, 마르셀라가 조작해 무보험이 된 거지만 억울함을 호소해봐야 들어주는 이는 단 한 명도 없겠지.
어쨌거나 이로 인해 세화는 방과 후 자유시간이 많아질 것이다.
유승현과도 만날 시간이 적어질 테고.
“얼른 들어가봐. 내일 보자.”
“응, 내일 봐.”
손을 흔든 세화가 총총걸음으로 지하철역을 내려갔다.
내 첫 번째 목적은 세화와 무척 가까워지는 것이다.
거의 날 만능 치트키 정도로 생각할 수준까지, 캐시 박사에게 날 소개할 정도까지.
그래서 박사의 연구실에 인턴이든 뭐로든 들어간 내가 디바이스에 조작질을 할 때까지.
급하게 진행해선 안 된다.
시간을 두고 천천히 하는 거다.
꽤나 친해졌다고 생각이 될 즈음, 암두시아스를 보내 세화를 각성시키자.
그녀의 뒷모습을 쓱 보며 사악한 미소를 짓던 난, 금세 밝은 표정으로 돌아와 친해진 동기들과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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