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프롤로그
전 세계에서 만든 여러 야겜을 섭렵한 나에게 있어, 가장 좋아하는 게임이라면 단연 마법소녀물이다.
다른 말로 전대물, 혹은 변신 히로인물이라고도 한다.
평범하게 살아가는 척하던 히로인이 마물이 나타남과 동시에 변신해 마법소녀로 변하고, 정의의 심판을 내린 뒤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는 야겜.
보통 이런 종류의 게임은 섹스로 힘을 얻는다.
그리고 그 힘의 매개체는 주인공과의 섹스... 즉, 성적 흥분이 대부분.
그렇게 힘을 얻은 히로인은 흉포하고 강대한 악의 무리를 차례대로 쓰러뜨려나가, 결국 최종보스까지 소멸시키고 해피엔딩을 맞이한다.
물론 아닌 경우도 있다.
마법소녀물 야겜은 히로인 타락, 배신루트가 나오기 마련.
사랑의 힘으로 힘을 충분히 얻지 못한 히로인이 여러 마물들에게 따이면서 정신이 붕괴되고, 종국에는 최종보스에게 몸도 마음도 다 내준 채 주인공을 배신하고 지구를 멸망시키는 그런 스토리가 무척 많았다.
그리고 나는 이런 타락루트를 싫어했다.
나는 주인공에 감정이입을 하는 편이다.
아니, 하는 편이 아니라 그냥 완벽하게 동화한다.
주인공인 내가 히로인과 꽁냥꽁냥대도 모자랄 판인데 왜 열 받게 빼앗겨야 하는가?
빌런이 혼자 히로인을 강탈하는 경우라면 또 모르겠는데, 마물이 들어가니 항상 좆같았다.
애널섹스를 좋아하는 괴인부터 시작해서 최면, 촉수, 산란, 수인, 전기충격 같은 장면도 나오니 좋아할 수가 있으랴.
다행히 모든 게임은 루트를 선택할 수 있었다.
때문에 나는 마법소녀물을 플레이할 때면 해피엔딩루트만 타지, 이런 타락루트는 처음 야겜에 입문했을 때를 제외하면 타지 않았다.
솔직히 꼴리긴 하지만 말이다.
어쨌든 내가 가장 좋아하는 야겜인 ‘비스트 슬레이어’를 플레이할 때도 마찬가지.
1탄부터 5탄까지 나온 그 게임의 CG는 타락루트를 제외하면 전부 모았다.
그리고 오늘, 난 6탄을 플레이한다.
야겜 회사에서 1탄부터 5탄까지 나온 히로인들을 전부 모은답시고 마지막 6탄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난 당연히 정품을 구매해 컴퓨터에 CD를 넣었다.
그리고 두근거리는 마음을 한 채 모니터를 주시했다.
6탄의 출시 전 정보를 보면 다섯 명의 히로인이 전부 나온다고 했다.
예전엔 전편 히로인이 다음 편에 잠깐 나오기만 했는데, 아예 칼을 간 모양.
뭐, 나머지는 직접 플레이해보면서 알아 가면 된다.
빠라밤! 빰! 빰!
언제 들어도 신나는 마법소녀물의 경쾌한 배경음악.
시작화면에 다섯 명의 히로인이 변신슈트를 입고 무기를 든 모습이 보였다.
지구를 지키는 영웅들과 알콩달콩 살아가는 나...
월화수목금요일엔 한 명씩과 떡치고, 토, 일요일엔 다섯 명과 난교.
나만을 바라보는 세계관 최고의 미녀 다섯!
그런 생각을 하는 내 얼굴에 저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지고, 마우스에 손이 간다.
“오늘 히로인 다 뒤졌다.”
그렇게 떨려오는 가슴을 애써 진정시키며 스타트 버튼을 누르려 하는데...
파지직!
EP.1 돌아온(?) 나
“.... 왕 님!”
귀에서 제법 고상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끄으응...!”
머리가 찢어질 듯 아파온 내가 낮은 신음소리를 내자, 예의 그 목소리가 말했다.
“마왕님! 타이라트 님! 정신 차리세요!”
그러면서 내 몸을 툭툭 건드리기까지 한다.
그나저나 마왕... 타이라트 님이라니?
내 이름은 따로 있는데 웬 타이라트 님?
그렇게 생각하던 나는 문득 비스트 슬레이어의 최종보스가 타이라트라는 것을 상기해냈다.
‘.....’
잠시 머릿속이 멍해진 난,
“으아악!”
단말마의 비명을 내지르며 벌떡 일어났다.
허겁지겁 주위를 둘러보니 온통 보라색 방.
오버 테크놀로지로 만든 것 같은 침대 옆엔 양 송곳니가 길게 빠져나온, 과학자 가운을 입은 악마가 보였다.
그리고 나는 이 악마의 정체를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넌... 설마... 마르셀라?”
어떻게 모르겠는가.
매번 온갖 마물들을 개조해 히로인을 습격하는 그 썅년을.
공략이 힘든 마물이 나타날 때마다 플레이하기가 무척 힘들었었다.
후반부에는 비스트 슬레이어의 필살기를 쳐맞고 갈기갈기 찢어져 나에게 사이다를 선사하지만.
“네, 마르셀라에요. 마왕님.”
“마왕님...?”
얼빵한 얼굴로 그리 중얼거린 나.
마르셀라가 심각한 표정을 짓는다.
“저런... 생체반응은 정상인데 정신에 문제가 있나보군요. 하긴... 셀린의 일격을 머리에 맞으셨으니 그럴 만도 하겠네요.”
‘셀린... 이라면...’
비스트 슬레이어 셀린, 변신 전 이름은 아델라인.
이세계 출신의 슬레이어로, 5탄의 히로인이기도 했다.
나는 일단 상황을 파악하기로 했다.
잠자코 주위를 둘러보니 익숙한 방 구조가 보인다.
마르셀라를 피해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주변을 샅샅이 살폈다.
온갖 기상천외한 물건들이 있는 실험실, 대형 모니터가 다섯 개나 있는 상황실 등등...
‘익숙하다... 익숙해...’
혼란스런 맘을 정리한 나는 깨달았다.
내가 있는 이곳은 지구를 정복하기 위해 온 타이라트가 흉계를 꾸밀 때 나왔던 배경... 즉, 남극에 있는 그의 기지라는 것을.
인간은 적응의 생물이라고 했던가? 시간이 좀 지나니 머리가 차갑게 식었다.
모니터가 잡아당겼던 느낌은 진짜.
꿈이 아니라고 확신했다.
어떠한 이유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비스트 슬레이어 속으로 들어온 듯했다.
‘그럼... 난 타이라트가 된 건가?’
타이라트는 에란델이라는 이세계에서 온 마계 총수.
지구의 자원을 탐내 수하들을 이끌고 쳐들어와서 매번 비스트 슬레이어를 괴롭히다가, 마지막에 세포 하나 남기지 않고 소멸되는 최종보스였다.
그러다 모종의 방법으로 부활하며 1탄부터 5탄까지 개근하는 근성의 보스이기도 하다.
6탄에서도 당연히 나올 예정이었고.
또 타이라트는 다른 마법소녀물의 빌런에 비해 나름 인간과 가깝게 생긴 편이었다.
플레이어들의 타락 몰입감을 높여주려는 제작사의 안배.
하지만 난 이 타이라트를 수십, 수백 번 죽이기만 했었다.
그런 타이라트의 입장이 되다니...
히로인을 능욕하면서 점점 타락의 구렁텅이로 빠뜨려야하는 그런 타이라트가 되다니.
이건... 이건...
‘이건... 개쩔잖아?’
그 생각대로 개쩔었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났다.
**
그래, 솔직히 씨팔... 히로인의 정액탱크 역할만 하는 수동적인 주인공에게 답답한 마음을 먹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또 다음 편에서 전편 히로인과 꽁냥대던 마음을 뒤로한 채 다른 히로인과 놀아나는 것도 마음에 안 들었다.
물론 비스트 슬레이어의 힘의 원천은 성욕이라 지구를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한 것이긴 해도 말이다.
그래도 긴 순애 끝에 서로의 깊은 사랑을 확인하는 엔딩을 보게 되면 마음이 사르르 녹았지만... 지금의 나는 타이라트.
모든 기술력을 총동원해 히로인을 타락시키거나 죽여야 하는 마계의 총수였다.
다시 말해 나는 주인공이라는 거다.
감정이입을 해야 하는 주인공.
그런 주인공이 됐으니 그에 맞게 움직여야하지 않겠는가?
어쨌든 지금은 5탄의 히로인인 셀린에게 패배했고, 마르셀라가 초월적인 기술을 이용해 시간을 되돌린 시점이었다.
되돌아간 시점은 1탄이 시작되기 직전.
막 지구에 도착한 내가 마물들을 풀어서 세상을 혼란스럽게 만들어야할 타이밍이었다.
과거로 회귀했다는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나와 마르셀라, 두 사람밖에 없었다.
아무래도 이게 지금 6탄의 스토리 시작점인 모양이었다.
“근데 이거 너무 사기 아닌가?”
이건 타이라트가 너무나도 유리했다.
1탄의 타이라트는 오버 테크놀로지 따윈 없는, 그저 판타지스런 마왕이었다.
헌데 1~ 5탄의 경험이 쌓인 채 1탄 시점으로 돌아온 지금은 기지부터 삐까번쩍했다.
기억을 유지한 채 과거 회귀라니... 제작사 이 새끼들, 타락루트가 정석루트라 생각하고 이렇게 만든 모양이지?
돌아가면 존나게 따져야겠다.
‘아니지. 내가 왜 따져?’
따질 게 아니라 감사하다고 절을 박아도 모자랄 판이지.
나는 1 ~ 5탄의 스토리를 모두 꿰고 있으니까.
내 선택에 따라 분기가 달라지겠지만 가이드라인이 존재하는 만큼 상당한 치트키였다.
“네? 마왕님... 무슨 말씀이신가요?”
옆에서 은발을 찰랑거리는 마르셀라가 새끼 고양이 같은 표정을 짓는다.
얘도 좀 예쁘긴 했는데... 생김새가 딱 옷 입은 서큐버스라 내 취향은 아니었다.
난 인간이 좋다 이거야.
“아무것도 아니야... 가 아니라,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지금 에란델의 총수.
그에 맞는 위엄을 보여야 하지 않겠는가.
다행히 타이라트의 말투는 게임 내에서 많이 봐왔기에 따라하기는 쉬웠다.
적응하기는 힘들었지만.
내가 말을 이었다.
“암두시아스의 준비는 끝났나?”
내 마물은 인간을 잡아먹거나 범해 힘을 얻는다.
1탄의 첫 보스는 상반신이 말의 모습을 한, 거대한 육봉을 가진 수인 괴물.
히로인의 각성을 위한 소모품으로 이용되다 죽는 몸풀기용 보스였다.
“네, 그런데... 계속 말씀드려서 죄송하지만 아몬을 내보내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아니면 제니퍼 캐시 박사를 죽이거나...”
아몬은 5탄 끝자락에 나오는 중간보스이자 최면술을 이용하는 덩치 큰 괴인이었다.
마르셀라는 아예 비스트 슬레이어의 싹을 잘라버리려고 강대한 보스를 내보내고 싶어 하는 것이다.
제니퍼 캐시 박사는 1 ~ 5편의 스토리에 핵심인물로 등장하는 천재 과학자이자, 변신기술이 담긴 디바이스를 만든 장본인.
그녀로 인해 비스트 슬레이어의 전설이 시작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쉽게쉽게 풀어가려면 마르셀라의 생각처럼 강한 보스를 내보내거나, 캐시 박사를 죽이는 게 맞았다.
하지만 나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
마법소녀가 된 히로인과 떡치지도 못할 거면 왜 내가 이 야겜을 즐겨 했겠는가?
“아니, 암두시아스로 한다. 개조 따윈 하지 말고 출격 대기만 시켜놓아라. 또 넌 얌전히 여기서 기다리도록 하고.”
처음엔 차근차근 가이드라인을 따라가는 거다.
단, 내가 히로인 틈에 섞여 들어가는 설정을 조금 넣어서.
“알겠습니다.”
참모 마르셀라의 대답을 흡족한 얼굴로 들은 내가 말했다.
“내 가짜신분은?”
“준비되었습니다. 리액터 안에 들어가셔서 겉모습만 바꾸시면 모든 것이 완벽해져요.”
“좋아, 바로 위장하겠다.”
1탄의 히로인은 한국인이자 한국대학교 새내기인 이세화.
‘주인공이었던’ 유승현의 소꿉친구이자, 아직은 평범한 대학생.
바로 시작해주마.
“마왕님의 의도를 전 전혀 모르겠어요...”
“나중에 말해주도록 하지.”
**
개강 날, 한국대학교.
“죄송한데요.”
자신감이 잔뜩 들어간 내 말투에, 캠퍼스를 가로질러가던 한 여학생이 몸을 돌린다.
웨이브가 적당히 들어간, 어깨보다 조금 아래까지 오는 찰랑거리는 갈색 머리카락.
무척 초롱초롱한 갈색 눈, 오똑한 코와 매력적인 입술.
작은 얼굴에 이목구비가 오밀조밀 들어간 완벽한 얼굴.
거기에 옅은 화장까지.
‘장난 아니네...’
사람으로 위장한 내가 속으로 감탄을 내뱉었다.
매번 게임으로만 보다가 실제로, 그것도 코앞에서 보니 마치 주변이 환해지는 기분이었다.
눈앞의 그녀가 바로 이세화였다.
‘비스트 슬레이어 레오나’ 이기도 하고.
물론 아직은 아니지만.
“네?”
목소리마저도 꾀꼬리 같다.
이런 여자가 유승현의 여자친구라니! 분노가 치밀어오른다.
침착하자, 침착해.
일단 계획대로, 내 위장신분대로 하는 거다.
“우와... 아니, 죄송합니다.”
내가 놀란 낯으로 입을 떡 벌리자, 세화가 푸흡!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아무래도 자주 보는 반응인 모양.
머리를 긁적인 내가 말했다.
“제가 새내기인데, 과학기술의 이해 수업을 들어야 되거든요? 근데 강의실이 어디인지 몰라서... 혹시 아시나요?”
“과학기술의 이해요? 제가 지금 들으러 가고 있는데, 같이 가실래요?”
“그래도 되나요?”
“안 될 건 뭐 있나요?”
어벙한 미소를 지은 내가 감사를 표한 뒤 세화의 옆에서 그녀와 함께 걸어가기 시작했다.
아아... 좋은 냄새.
세화는 향기로운 샴푸를 쓰는... 이런 시팔, 이러면 변태같잖아.
물론 변태가 맞긴 하지만.
일단 자기소개부터 하자.
“송지혁이라고 합니다. 미래과학과 1학년요.”
내 말에 세화가 눈을 동그랗게 뜬다.
당연하지, 신입생 환영회에서 본 적도 없을 테니.
“이세화에요, 저도 미래과학과 1학년인데... 왜 환영회에서 못 본 것 같죠?”
“그때 아파서 병원에 입원한 상태였어요. 환영회를 빠지면 동기들과 친해지기 힘들다고 들었는데... 아싸 확정이네요. 단톡방도 못 들어갔고...”
“그렇구나... 근데 아싸는 무슨... 금방 친해질 것 같은데요?”
“예?”
“마스크가... 음... 괜찮잖아요.”
현재의 난 병약한 몸을 가지고 있지만 얼굴 하나만큼은 무척 잘생겼다.
마치 보호해주고 싶은 모습이라고 해야 하나?
어쨌든 세화가 칭찬해줄 정도니 마르셀라의 안배가 제대로 먹혀든 것 같다.
“어우... 면전에서... 그래도 고맙습니다.”
“스무 살이에요?”
“네.”
“저도 똑같은데, 말 놔요. 필수수업 듣다보면 자주 만날 것 같은데... 내가 먼저 놓는다?”
역시 세화는 사교성이 매우 좋다.
그러니까 이 한국대학교에서 인기가 많지.
내가 웃는 낯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붙임성이 좋네.”
“말이 좀 많은 편이야. 근데... 조금 아파 보인다.”
“몇 달 동안 병원신세를 지다보니까 살이 안 붙더라.”
“몇 달씩이나?”
“응. 사고가 났었거든. 교통사고. 뒤에서 누가 들이받더라.”
내가 슬쩍 표정을 바꿨다.
웃는 낯이지만 어딘지 모르게 슬픈 감정이 들어있는 정도로.
그러자 세화가 당황해했다.
“그... 미안해.”
“미안할 게 뭐가 있다고.”
“근데 넌 어디 살아?”
말 돌리는 거 봐라.
너무나도 친절하지 않은가.
“학교 앞 원룸촌에서 자취해. 너는?”
“나도 자취해. 학교 앞은 아닌데 지하철로 두 정거장만 가면 있어. 아, 도착했다. 여기야.”
시선을 위로 하니 으리으리한 건물이 보인다.
역시 돈을 처바른, 비스트 슬레이어 속 최고의 명문대.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되는구나.
내가 기대감 어린 눈을 하자, 세화가 말한다.
“이것도 인연인데 내가 친구들 소개시켜줄게. 단톡방도 초대해주고.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진짜 고맙다. 진심이야.”
“고맙긴 뭘... 들어갈까?”
“참고로 난 건물 구조도 모른다? 네가 안내해줘야 돼.”
“당연하지. 나만 믿어.”
나는 따로 밥이라도 사겠다거나 하는 말 따윈 하지 않았다.
일단은 서서히 친해지는 게 먼저.
기다려라 세화야, 내가 유승현... 그 좆대가리 함부로 놀리는 호구새끼의 마수에서 구해줄게.
변신까지만 시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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