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하신대로 전부 처리했습니다
"그래? 엄청 빠르네. 하루이틀은 걸릴 줄 알았는데."
선우는 놀랍다는듯한 표정을 지었다.
오전에 부탁한 여권발급이 오후에 이뤄졌다.
실로 광속과도 속도이리라
-다름아닌 선우님의 부탁이지 않습니까? 최선을 다해야지요.
"마음에 드네, 고마워. 김실장, 덕분에 한시름 덜었네. "
-모스크바행 티켓도 수배해두었습니다. 물론 등급은 퍼스트클래스입니다.
"그렇게까지 해줄 필요는 없는데."
-아무래도 선우님께서 예약하는 것보단 저희쪽에서 나서는 게 좀더 도움이 될 것 같아서요
"어쨌든 고마워, 호의는 잘 받아두도록 할게."
-도움이 되셨다니 그저 다행일 따름입니다.
"그럼 이만 끊을 게, 이래저래 준비할 게 많아서."
선우는 전화를 마무리하려고 하였다.
-저어기..선우님!
그러자 김실장은 다급히 선우를 불렀다.
"어, 말해."
-혹시.......러시아로..왜 향하는 지..알 수 있을까요?
김비서는 무척이나 조심스럽게 물음을 던졌다.
"뭐야? 추궁하는 거야?"
-아..아니요! 추궁이라뇨! 그냥 목적을 알면...저희쪽에서 도움이 될 수 있는 게 있지 않을까하고...
전화기 너머로 김실장의 당혹스러운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희과 도울 수 있을만한 일이 아니야."
마왕의 존재를 확인하고 섬멸하기 위한 여정이었다.
정부에서 도울 수 있는 일이 있을 리 만무하였다.
-.....그래도...뜻하지 않은 도움이라도..줄 수 있을지도.
"나 두번 말하는 거 싫어하는데."
-....더는 묻지 않겠습니다...부디 즐거운 여행이 되시길 빌겠습니다.
"그래, 너희도 너무 쫄지말고, 스카웃을 받아서가는 것도, 그렇다고 국적변경을 하려고 가는 것도 아니니까."
선우는 담담한 어조로 입을 떼었다.
-그런..걱정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김실장, 생각보다 거짓말을 못하네."
선우는 히죽거리며 말을 이었다.
기계처럼 완벽 일처리를 자랑하는 김실장의 인간적인 면모가 꽤나 재밌게 느껴진 까닭이었다.
"어쨌든 이만 끊는다, 혹시나 해서 말인데, 미행같은 거 붙이지마."
-......알겠습니다.
뚝
이내 선우는 전화를 끊었다.
"아."
그리고 이내 무언가 생각난듯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망할, 통역을 안구했네.'
아무래도 얼굴에 철면피를 깔고 다시금 전화를 걸어야할듯 싶었다.
**************
"그래서 결국 VVIP의 의중을 파악 못한 것인가?"
국가정보원장 강경구는 차가운 눈빛으로 VVIP전담 실장인 김광운을 노려보며 입을 떼었다.
"아무래도 속내를 쉽사리 밝히시는 분이 아니여서..."
김광운 실장, 통칭 김실장은 땀을 뻘뻘 흘리며 입을 떼었다.
한마리 호랑이를 마주한 것 같은 위압감에 절로 주눅이 든 것이다.
"어떻게든 알아냈어야지! 혹여 러시아쪽으로 귀화를 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런 목적이 아니라고 VVIP께서 미리 못을 박으셨습니다. 그러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세상에 100%는 없네! 어떤 일이든 어그러질 가능성이 있다는 말일세! 특히 사람의 마음이라면 더더욱이! 비서실장이라는 사람이 어찌 그걸 모른단 말인가!"
강경구는 언성을 높이며 고함을 내질렀다.
"이보게, 강원장, 진정 좀 하게, 지금 문책을 하려고 모인 게 아니지 않는가? 어쨌든 일이 벌어졌으니 대책을 마련해야지."
잠자코 자리를 지키고 있던 국방장관, 강관철이 담담한 어조로 입을 떼었다.
오늘 이 자리는 비서실장을 문책하기 위한 자리가 아니였다.
앞으로 대책을 마련하기 위한 자리인 것이다.
"죄송합니다. 제가 살짝 흥분한 것 같군요...후우."
강경구는 순순히 사과를 하였다.
스스로도 필요이상으로 흥분했다는 생각이 든 까닭이었다.
"감시를 해야합니다."
이내 마음을 추스린 강경구가 천천히 입을 떼었다.
"..안됩니다...그리 할 순 없습니다."
그러자 김실장이 곧바로 반대하고 나섰다.
"왜 안된다는 거지?"
".....감시를 붙이지말라는 VVIP의 엄명이 있었습니다."
"그럼 더더욱 감시를 붙여야지! 무슨 일을 할 줄 알고!"
강경구는 답답하다는듯한 표정을 지은 채 언성을 높였다.
말도 안되는 소리였다.
무슨 짓을 벌일 줄 알고 감시까지 떼어놓는단 말인가
"오히려 자극하는 모양새가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쪽 요원이라면 들키지 않고 자연스럽게 감시할 수 있을 것이오!"
"상대는 SSS급 실력을 갖춘 각성자입니다! 얕은 수가 통할 리 없습니다!"
"그래봤자 세상 경험없는 애송이일 뿐! 첩보공작을 눈치챌 수 있을 리 없소!"
강경구 원장은 자신있다는듯 언성을 높였다.
운좋게 강한 능력을 각성하였다고는 하지만 상대는 이제 고작 서른 정도밖에 안된 애송이에 불과하였다.
그런 애송이를 어찌 저리 겁을 낸다는 말인가
"다릅니다! VVIP께선 일반적인 또래와는 결이 다른 분이십니다! 국정원의 공작따윈 분명 눈치챌 것입니다!"
"지금 국정원을 무시하는 것이오? 김실장."
"강 원장이야말로 VVIP를 무시하는 것 같습니다. 뒷감당할 자신있습니까?"
"뭣이!?"
"VVIP가 심기를 거스르게 만들어 모든 걸 뒤엎어버리면 그 뒷감당을 할 자신이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두 사람사이에선 언성이 점점 높여지기 시작하였다.
"그쯤하지."
그때 잠자코 자리를 지키고 있던 새로운 여당대표, 조태섭이 천천히 입을 떼었다.
뚝
그러자 불길처럼 치솟아오르던 열기가 금새 누그러지기 시작하였다.
VIP다음 가는 최고 권력자의 한마디는 국정원장과 비서실장마저 가라앉힐 정도의 파급력을 갖춘 까닭이었다.
"너무 과열됐어, 잠시 머리 좀 식히지."
그 말을 끝으로 장내는 무거운 침묵이 자리잡기 시작하였다.
그렇게 얼마나 흘렀을까
"이제 진정이 좀 된 것 같군."
조태섭은 침묵을 깨고 입을 떼었다.
"그럼 이 늙은이의 의견을 넌지시 말해도 되겠는가?"
"말씀하시지요."
"말씀하십시오."
모두가 수긍한듯 동의를 표하였다.
"난 김실장의 말대로 하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하네."
"하지만....대표님! 그는 국가급 인재입니다! 철저한 감시와 통제가.."
국정원장, 강경구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다는듯한 표정을 지은 채 언성을 높였다.
"이보게, 강원장, 내 하나만 묻겠네, 그를 감시한다면 뭐가 달라지는가?"
"네에?"
"요원을 파견하고 감시를 한다고 그를 통제할 수 있느냐고 물었네."
".....그건.."
불가능하였다.
그는 재앙급 괴수마저 제압하는 초월적인 무력의 소유자.
일개 감시원따위가 좌지우지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닌 것이다.
"분명 통제할 수 없겠지."
"적어도......러시아쪽의 접촉만이라도..차단을.."
"러시아가 마음을 먹는다면 본토가 아니라 대한민국에서조차 접촉할 수 있을 걸세, 그만한 힘을 갖춘 국가이니."
조태섭은 담담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결국 우리가 감시를 한다고 해서 무언가 할 수 있는 것 따윈 없다는 말일세, 아니 오히려 역효과가 나겠구만 VVIP의 심기만 거스르게 될테니까 말이야."
"............."
"국정원장, 내 이런 말을 하고 싶진 않지만 우리 주제 파악을 할 필요성이 있네. 국가 최고 권력집단이라고는 하지만 VVIP 앞에선 그 모든 게 무의미하다네, 그는 원하는 모든 걸 스스로 이룩할 힘을 갖추고 있는 존재니."
"우리가 그를 강제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네, 그저 최대한 편의를 봐주며 대한민국의 필요성을 어필하는 것외에 말일세."
"그러니 부디 무언가 컨트롤할 수 있다는 오만은 접어두게 이는 자네 보다 좀더 오래산 늙은이로서 해주는 진실된 충고이니."
조태섭은 차분한 어조로 말을 끝맺었다.
"..........."
".........."
그 말이 끝나자 장내는 무거운 침묵이 흐르기 시작하였다.
내심 인정하고는 있느나 차마 입밖으로 내뱉진 않았던 불편한 진실.
그걸 마주하게 되니 절로 숙연해진 것이다.
"이보게, 김실장."
"말씀하십시오!"
김실장는 재빨리 대꾸를 하였다.
"수행원의 동행조차 허락치 않으셨나? 적어도 위치정도는 공유받았으면 하는데."
"다행히 통역 수행원을 한명을 요청하셨습니다!"
"불행 중 다행이구만."
조태섭은 안심되었다는듯 미소를 지었다.
"가장 유능한 통역관을 수배해두게, 외모 또한 출중해야하고 VVIP의 어떤 편의든 망설임없이 수행할 정도로 프로페셔널한 인재여야하네."
"알겠습니다!"
김실장은 우렁차게 대답을 하였다.
그렇게 비밀스럽게 진행된 회담은 불편한 진실을 직접적으로 마주한 채 끝마무리를 짓게 되었다.
******************
러시아 모스크바의 주요 3개 공항 중 하나인 셰레메티예보 국제공항.
이용객 수가 가장 많은 공항답게 수많은 인파들이 이리저리 짐을 옮기고 있었다.
"선우님! 선우님! 짐 찾았어요!"
VVIP의 통역으로 파견된 이한설은 커다란 짐가방 두개를 들어올리며 언성을 높였다.
"내가 찾아도 되는데."
"아니요! 이런 잡일은 저한테 맡겨주세요!"
이한설은 재빨리 도리질을 쳤다.
어떤 불편도 느끼지 못하게 하라는 엄명을 받은 그녀였다.
짐을 찾는 하찮을 일따위에 신경을 쏟게 만들 수는 없었다.
"어쨌든 이제 내가 들게, 줘봐."
"아니요! 제가 들게요! 선우님은 그냥 마음 편히 움직시면 돼요!"
"아니, 그래도 무거울텐데."
"비록 하급이긴 하지만 저도 엄연히 각성자에요!! 이정도 짐같은 건 낙승이랍니다! 그러니 부디 신경쓰지 말아주세요."
이한설은 씩씩하게 대답을 하였다.
"..알았어, 혹시라도 힘들면 말해, 대신 들어줄테니까."
"네엡!"
이한설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일단 저를 따라오세요! 출입국부터 들려야해서요!"
그리고 뒤뚱거리며 앞장을 서기 시작하였다.
'잡일은 안해도 되는데.'
선우는 고개를 살짝 내저으며 그 뒤를 천천히 따라갔다.
.
.
.
.
.
"왜 안되는데요!"
이한설은 목에 핏대를 세우며 고함을 내질렀다.
한눈에 봐도 분노로 가득 차있다는 걸 인지할 수 있는 모습이었다.
"몇 번이고 말했을텐데? 미스터 장에 대해선 입국 금지 처분이 내려져있다고."
입국심사관 차이콥프는 담담한 어조로 입을 떼었다.
"그러니까 그 이유가 뭐냐구요!"
"자세한 이유에 관해선 저희도 알 수 없습니다."
"그럼 저희는 수긍할 수 없어요! 대사관 직원을 불러줘요!"
"자꾸 이런 식이면 곤란합니다."
"저희야말로 곤란해요! 평생토록 러시아 땅조차 밟아본 적 없는 사람이 입국 금지 처분을 받았다니! 그런 걸 저희가 어떻게 받아들여요!"
이한설은 바락바락 소리를 내질렀다.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다.
평생토록 비행기 한번 안타본 사람이 입국 금지 처분이라니
이런 말도 안되는 일을 어찌 수긍할 수 있겠는가
그렇게 두 사람은 한참동안이나 실랑이를 벌이기 시작하였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어딜 만져! 어딜 만지냐고!"
결국 이한설은 장정들에게 이끌려 출입국 한켠으로 여지없이 연행되고 말았다.
"무슨 문제라도 있는 겁니까?"
그녀가 돌아오자 선우는 의문 어린 표정을 지은 채 물음을 던졌다.
벌써 3시간이나 출입국에 매여있는 게 좀처럼 이해가 가지 않은 까닭이었다.
"그게..아무래도 일이 잘못된 것 같아요."
"일이 잘못됐다구요?"
"네에...왠지 모르지만 선우님에 대해 입국 금지 처분이 내려져있는 것 같아요."
"제가요?"
선우는 어이없다는듯한 표정을 지은 채 되물었다.
제주도 빼곤 비행기 한 번 제대로 타본 적 없던 그였다.
그런데 별안간 입국금지라니?
실로 황당할 수밖에 없었다.
"전 러시아에 처음 왔는데요?"
"저도 그래서 말도안된다고 절대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막 항의하긴 했는데......막무가내예요..다음 비행기로 곧바로 돌아가라고 하네요."
이한설은 짐짓 심각한 표정을 지은 채 말을 이었다.
"일단 대사관쪽에 연락을 취하긴 했는데..그쪽에서도 지금으로서는 도저히 이유를 알 수 없다고..일단 한국에 돌아가있으면...최대한 빨리 입국 금지 처분을 풀어주시겠다고..말씀하시더라구요."
"그럼 지금은 일단 돌아가야한다는 말씀입니까?"
".....네에..아무래도 그래야할 것 같아요."
이한설은 면목없다는듯한 표정을 지은 채 입을 떼었다.
"곤란한데.."
선우는 난감하다는듯한 표정을 지었다.
입국거부로 그간 세워둔 게획이 모두 어그러지게 생겼기 때문이었다.
"일단 돌아가시면..최대한...빨리 재입국할 수 있도록...."
"아니요, 더는 지체할 수 없습니다."
선우는 고개를 좌우로 살짝 내저었다.
더는 지체할 수는 없었다.
언제고 마왕이 강림하여 인류를 멸망시켜버릴 지도 모를 일이니 말이다.
"하지만..방법이.."
도와주고 싶지만 도저히 방법이 없었다.
대사관조차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서
뭘 어떻게 한다는 말인가
"합법적인 방법을 찾는다면 그렇겠죠. 하지만 불법적인 방법까지 염두해둔다면 얘기는 달라지죠"
"불..불법?..설마 밀입국密入國을?!"
"쉬잇....누가 듣겠어요."
선우는 검지 손가락을 입에 가져다대며 목소리를 낮추었다.
"너무 위험해요! 만약 걸리면 국제 문제로 번질 수도 있다구요!"
그러자 이한설 또한 목소리를 낮추기 시작하였다.
"요는 안들키면 되는 거 아닌가요?"
선우는 대수롭지 않다는듯 입을 떼었다.
"하지만 그런 게 가능할 리가.."
"혼자선 무리지만 이한설 통역관님께서 도와주시기만 한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죠."
"제..제가요!?"
"네에, 오직 이한설 통역관님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도와주시겠습니까?"
"하지만..아무리..그래도...밀입국을 돕는 건.."
"만약 이번 일을 도와주신다면 전담 통역관의 자리를 마련해드리겠습니다. 일회성이 아니라 평생 말입니다."
"평..평생동안."
순간 이한설의 눈이 번쩍 뜨여지기 시작하였다.
VVIP의 통역관으로서 평생 근무라니
실로 어마어마한 자리가 아닐 수 없었다.
지급되는 수당과 연금, 복지만 따져도 웬만한 고위 공무원을 뺨을 후려칠 정도일테니
야망 많은 그녀입장에선 마음이 쉴새없이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하실래요? 참고로 두번 묻진 않겠습니다."
"......할게요! 꼭 하게 해주세요!"
결국 이한설은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수락을 하였다.
가난한 하급 통역관에게 있어
이만한 인생역전의 기회도 없을테니
"후회없는 선택이 되실 겁니다."
선우의 입가에는 진한 미소가 지어졌다.
이제 조력자도 확보했으니
남은 건 실행뿐이었다.
'어디 면상 좀 한번 제대로 보자구, 마왕魔王.'
선우의 눈빛이 차갑게 빛나기 시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