킁 킁 킁 킁
용자는 선우가 건네준 옷에 코를 처박은 채 몇번이고 벌렁거리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수많은 냄새들이 콧구멍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아기 특유의 냄새, 쇠냄새, 종이 냄새, 잉크 냄새, 땀냄새 등 셀 수조차 없는 수많은 냄새들이 머릿속에 입력되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푸하아아아~!
코를 처박았던 용자가 고개를 처올렸다.
"어때? 사람 냄새가 맡아져?
-맡아지긴 하는데....문제가 있어요.
"무슨 문제?"
-특정되는 사람의 냄새가 너무 많아요......
"얼마나 많은데?"
-대략..삼백이십정도요.
"그정도면 스쳐지나간 사람들까지 전부 특정한 거 아니야?"
-아마 그런 것 같아요.
"곤란한데, 삼백이십명을 전부 들쑤시기엔 시간이 부족해."
하룻밤안에 일련의 사태를 완전히 종결시킬 예정이었다.
그런데 삼백이십명이라니?
하루가 아니라 며칠은 걸릴만한 숫자였다.
실로 곤란할 수밖에 없었다.
"다른 방법은 없을까?"
-흐음..기준을 잡아준다면 좀더 범위를 좁힐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기준을 잡는다고?"
-네에, 성별이나 나이, 행색, 악세사리나 장신구 같은 걸로 기준을 잡고 말씀해주시면 좀더 자세히 특정지을 수 있을 것 같아요
".....흐음...."
용자의 말에 선우는 고심 어린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머릿속에서 지구대에서 봤던 영상을 리플레이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의 행색을 최대한 자세히 떠올리면서 말이다.
하지만 남자라는 것외에 마땅히 냄새를 구별시킬만한 특징을 떠올릴 수는 없었다.
나이를 특정할 수 있을 정도로 화질이 좋지도 않았을 뿐더러 악세사리나 장신구도 전무하였고 그렇다고 특이한 재질의 옷을 입고 있던 것도 아니였으니
"수컷에...피냄새로는 무리일까?"
-그정도면 팔십명까지 줄어드네요.
"..쯧,"
선우는 가벼이 혀를 찼다.
아무래도 경찰서 내부에서 다른 이들의 피냄새까지 진득하게 배여져있는듯 하였다.
'....좀더 범위를 줄일 수 있는 게......아!'
순간 선우는 눈을 반짝였다.
나름 특정해볼 대상이 떠오른 것이다.
"암컷이고 나이대는 대략 20대 중반정도, 피냄새, 연한 화장품 냄새, 거기에 콘크리트 냄새가 섞여있을거야. "
-잠시만요...흐음..
용자는 머릿속에 기억된 수많은 냄새들 중 조건에 부합하는 냄새를 찾기 시작하였다.
암컷 특유의 냄새를 추가하고
이십대 특유 계집의 젖비린내를 추가
피냄새를 추가
연한 화장품 냄새 추가
그리고 콘크리트 냄새까지 전부 추가하였다.
그리고 이내 완벽히 찾을 수 있었다.
선우가 제시한 조건에 완벽히 부합하는 냄새를
-찾았어요!
"잘했어, 용자야, 네 코는 진짜 개코보다 더 개같은 용코야."
쓰담 쓰담 쓰담 쓰담
선우는 손을 뻗어 용자의 머리를 부드러이 쓰다듬기 시작하였다.
아무래도 이 식충이 녀석이 한건한듯 싶었다.
-헤헤헤헤..헤헤..뭘요.
용자는 기쁜듯 웃음을 흘리기 시작하였다.
애완용이 된 이후 처음 듣는 칭찬이었다.
어찌 기쁘지 않으랴
'....근데 개코보다 더 개같은 용코라는 말이 칭찬인가?'
한켠에는 미심쩍다는 생각이 들긴하였지만 애써 무시하기로 하였다.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웃어주니 그 나름의 칭찬 아니겠는가?
그냥 좋게 좋게 생각하기로 하였다.
********
[그래, 계획한 대로 전부 잘 진행되었는가?]
"네에, 말씀하신대로 진술했습니다."
[혹여 의심하는 기색은 없던가?]
"네에, 전혀요, 오히려 마음 고생 심했을 거라면서 꼭 콩밥을 먹여주겠다고 말씀하시더라구요."
[하하하하하, 이거 우리 민하양이 참으로 잘해줬나보구먼. 경찰이 그리 말할 정도면 말이야.]
"제가 대학교 때 연극동아리를 잠깐 했었거든요, 그 연기력이 아직 남아있나봐요, 후후후"
[역시 민하양에게 맡기길 잘했어, 아니 민하양이 아니였으면 이렇게 성공적으로 끝내지 못했을 거야. 정말 고맙네, 선뜻 허락해줘서]
"고맙긴요, 당원으로서 당연한 일을 한 것 뿐인걸요."
[겸손하기까지 하구먼, 하하하, 내가 아들이라도 있으면 며느리로 삼고 싶을 정도야.]
"아들이 없으면 조카도 괜찮답니다."
[하하하하하하, 내 나이대가 맞는 녀석이 있는지 한번 찾아보지.]
전화기 너머로 활기찬 웃음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하였다.
[그보다 꽤 많이 다쳤다고 들었는데, 그건 괜찮은가?]
"네에, 뭐 상처가 좀 나긴했는데, 참을만합니다."
[안되지, 안돼, 여자가 흉지면 어쩌려고 참아? 내일 당장 제일 비싼 피부과로 가도록 하게, 병원비는 당에서 부담할테니 걱정말고.]
"정말 괜찮은데.."
[아니야, 아니야, 큰일을 한 사람한테 어떻게 그리 박대하게 대한다는 말인가? 말도 안되는 일이지. 아암.]
"신경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차관님."
[개의치말게 당연한 일이니까...그보다...이번 일에 대해서는..]
"잘알고 있어요, 절대로 발설해서는 안된다는 말씀하시려는 거죠?"
[아무래 당내에서도 극비로 진행된 사안인지라...절대로 발설해선 안되네, 만약 다른 사람의 귀에 들어갔다간 우리 의원님의 입지가 흔들릴 수 있어.]
"네에, 걱정마세요, 입 꾹 닫고 평생 모른척하면서 살테니까요."
[그래, 그래, 내가 우리 민하양을 믿지, 누구보다 당에 충성스러운 민하양이 이런 중대사를 함부로 발설할 리는 없지. 아암..]
전화기 너머로 흡족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서민하의 눈치 빠른 맞장구가 꽤나 흡족스러운듯 하였다.
"저기 그런데 보좌관님..."
[그래, 말하게.]
"이번 기초의원 공천건은.....제가 되는 게 확실한 건가요?"
서민하는 조심스레 물음을 던졌다.
자칫 잘못하다간 무례하게 들릴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물론이지, 이번 일만 제대로 마무리 되면 자네가 기초의원으로 공천될 수 있도록 내 힘을 쓰도록 하지, 그러니 아무런 걱정말게.]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래, 그래, 그럼 내일도 바빠질테니, 오늘은 끊도록 하겠네, 뭔가 변동사항이나 특이사항이 생기면 바로 전화하도록 하게, 그리 전화기록은 전부 삭제시켜주게.]
"네에, 그렇게 하겠습니다. 보좌관님."]
뚝
곧이어 통화음이 그대로 끊겨버렸다.
"꺄하아아아~"
그와 동시에 서민하는 침대에 몸을 던지고 방이 떠나가라 환호성을 터트리기 시작하였다.
기초의원 공천이라는 약속이 다시금 확실히 매듭지어진 까닭이었다.
경력도 학력도 부족한 일개 당원인 자신이 정치권에 본격적으로 발돋움하게 된 것이다.
어찌 환호를 내지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
"기초 의원이라니..내가 정치인이라니!"
뒹굴 뒹굴 뒹굴
몇 번이고 침대 위를 뒹굴었다.
평생 꿈꿔왔던 정치 입문이 실현된다는 생각에 절로 기분이 좋아진 까닭이었다.
'어느 지역으로 공천해줄까? C지구? D지구?'
확신할 수는 없지만 분명 유리한 지역으로 공천해줄 가능성이 농후하였다.
확실한 입막음을 위해서라면 한자리 제대로 내어주는 게 가장 최선일테니
'역시 하길 잘했어.'
처음에는 거부감이 들기도 하였다.
무고한 사람
그것도 도와주려는 마음에 나선 호인에게 누명을 뒤집어 씌우는 일이었으니
최소한 양심이 찔려 망설이기까지 하였다.
하지만 그런 양심의 가책을 애써 무시하고 일을 저지르니 이렇게 확실한 보상이 뒤따랐다.
20대 중반의 나이에 기초의원에 공천되어 정치계에 입문할 기회를 얻게 된 것이다.
이런 걸 보면 역시 눈 한번 딱 감고 저지르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양심의 가책은 잠시였지만 정치 입성을 통한 부귀는 평생토록 이어질테니
'기초의원으로 시작해서...광역의원...종국에는 A지구에 있는 국회에 입성하는 거야...금뱃지를 달고...헤헤.'
상상만으로도 절로 행복감이 느껴졌다.
국회 입성이라니
초보 정치인들의 꿈이 아니던가
어찌 기쁘지 않을 수 있으랴
그렇게 한창 기쁨에 겨워하던 그 때였다.
깜빡 깜빡 깜빡
갑자기 전등이 깜빡이기 시작하였다.
"저게 또 말썽이네."
서민하는 눈살을 잔뜩 찌푸렸다
평소에도 저러더니
오늘처럼 기쁜날까지 말썽이었다.
'내일 당장 사람 불러서 바꿔야겠어.'
수고비 및 위로금 명목으로 계좌에 상당한 액수가 입금된 상태였다.
돈을 쓰는 데 거리낌따위는 없었다.
뚝
그때 갑자기 전등이 뚝 끊겼다.
맛탱이가 갈랑말랑하더니
아예 못쓰게 되어버린듯 하였다.
'공천되면 집부터 사야지.'
여성 전용 빌라라서 그런지 집세는 저렴해도 그 시설은 마뜩치는 않았다.
워낙 사람들이 많이 다녀간 탓에 망가진 게 많았으니
기초의원이라는 직함에 어울리지 않는 집이기도 하고 말이다.
'어딜 살까? A지구쪽으로 갈까?....의원들은 대부분 그쪽에 마련한다던데...B지구도 나쁘진 않은데..워낙 졸부 동네 이미지라서..'
그렇게 다시금 장미빛 미래를 꿈꾸던 그때
끼이이익
경첩 맞물리는 소리와 함께 서서히 문이 열리기 시작하였다.
'...뭐지? 헐겁게 닫았나? 그런 것치곤 너무 많이 열리는 것 같은데?'
의아함이 들었다.
헐겁게 닫았다해도 적당히 열리고 멈출 뿐이었다.
저렇게까지 많이 열리진 않는 것이다.
"집이 많이 더럽네, 여자 혼자 사는 집은 다 이런가?"
그때 귓가로 섬뜩한 목소리가 파고들기 시작하였다.
벌떡
서민하는 재빨리 몸을 일으켜세웠다
그리고 곧바로 고개를 돌려 문쪽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볼 수 있었다.
방안으로 침입한 낯선 남자의 모습을
"이런, 내가 잠을 깨웠나봐?"
남자는 부드러이 미소를 지었다.
오싹
그리고 그 미소를 마주한 서민하는 알 수 없는 섬뜩함과 불안감을 느꼈다.
"당..당신 누구야!"
이내 서민하는 언성을 높이며 고함을 내질렀다.
"글쎄? 누굴 것 같아?"
"질문은 내가 했어! 누구야!? 강도야? 그렇다면 번지수 잘못 찾았어! 난 돈 같은 거 없어!"
"착각하지마, 내 목적은 돈같은 게 아니니까."
"설..설마.."
서민하의 얼굴이 거무죽죽하게 변하기 시작하였다.
돈이 아니라면 여자 방에 침입할 만한 이유는 뻔하였다.
강간.
저 남자는 자신을 범할 요량인 것이다.
저벅
그때 남자가 첫걸음을 떼었다.
"아아아아아악!! 살려주세요! 여기 강간범이 있어요! 살려주세요오오!! 401호에!! 강간범이 있어요오오!! 살려주세요오오!!!"
서민하는 격렬하게 소리를 내지르기 시작하였다.
무력으로서 남자를 압도하는 건 무리였다.
여기선 소리를 지르고 도움을 요청하는 게 최선일 것이다.
다행히 이 싸구려 여성전용빌라는 방음이 잘되지 않는 편이니
머지 않아 도움의 손길이 내밀어질게 뻔하였다.
"목청 좋네, 판소리해도 되겠어?"
남자는 그런 서민하를 보며 너무나 여유롭게 농지거리를 던졌다.
걱정따윈 전혀 안된다는듯이
"살려주세요오오오!! 여성전용빌라에 강간범이 침입했어요오!! 절 강간하려고 해요! 도와줘요! 제발 도와줘요!!"
"아무리 소리 질러도 소용없어."
남자는 담담한 어조로 입을 떼었다.
"소리가 새어나가지 않도록 조치를 취해뒀거든."
그리고 히죽거리며 미소를 지었다.
'각성자!'
그러자 소리를 지르던 서민하의 얼굴이 한층 더 창백해지기 시작하였다.
눈앞에 남자가 이능을 가진 각성자라는 걸 인지할 수 있던 까닭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멋대로 소리를 차음할 수는 없는 노릇일테니
저벅
그때 그가 다시금 걸음을 옮겼다.
"오지마요! 오지말라구요! 당신 각성자잖아! 각성자가 일반인을 건들면 가중 처벌당하는 거 몰라!? 그것도 여자를! 남자가 강제로 범하면 가중처벌받게 된다고! 평생 감옥에서 썩고 싶어!? 어!"
서민하는 협박조로 언성을 높였다.
일반 시민을 대상으로 한 각성자의 범죄의 경우
범죄에 대한 처벌이 일반인에 비해 몇배고 가중이 되었다.
오늘날과 같은 여성상위 시대에서 각성자 신분으로 강간이라면 죄목을 저지른다면 무기징역도 불가능한 일이 아니였다.
저벅 저벅 저벅
하지만 그런 협박에도 남자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더 적극적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하였다.
당장에라도 달려들 것처럼
"돈은 달라는 대로 드릴게요! 집에 있는 것도 원하시는대로 가져가도 돼요! 제발 저를 범하지 말아주세요! 제발요!"
결국 서민하는 협박 대신 비굴해지기로 하였다.
자신은 기초의원을 넘어 광역의원
더 나아가 국회의원이 될 몸이었다.
어떠한 흠집도 나서는 안되는 것이다.
자연히 비굴해질 수밖에 없었다.
"널 범할 생각따윈 없어."
"네에?! 정말요?!"
순간 서민하의 표정이 한결 밝아졌다.
"그래, 대신 너한테 몇가지 질문을 할거야, 그에 대한 대답을 아주 잘해야해, 안그러면 아주 큰 벌을 받게 될거거든. 알았지?"
남자는 차분한 어조로 입을 떼었다.
"네에! 질문하세요! 어떤 질문이든 전부 대답할게요!"
겁을 집어먹은 서민하는 곧바로 언성을 높여 답하였다.
강간만 면할 수 있다면 뭔들 못하랴
"좋아, 협조적인 태도가 마음에 드네"
남자는 흡족스러운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럼 첫번째 질문, 누가 시켰어?"
그리고 눈을 가늘게 뜨며 그녀를 노려보았다.
".....네에?"
"손주 장난감 사들고 퇴근하던 내 아버지한테 좆같은 누명을 씌우라고 시킨 장본인이 누구냐고?"
방안에 침입한 남자, 선우는 분노 어린 눈빛으로 서민하를 노려보며 입을 떼었다.
"아버지!? 설마 당신은...그...아저씨의 아들?"
"맞아, 그러니까 사실대로 말하는 게 좋아, 나도 지금 내가 무슨 짓을 할지 모르거든? 누구야? 너한테 그딴 짓을 시킨 사람이."
"누명이라뇨.....무슨 말씀인지 모르겠네요...제 진술에는 한치의 거짓도 없어요!...당신 아버지가 절 강제로 끌어안고 입맞추고 성추행했다구요!"
"틀렸어."
선우는 단호하게 입을 떼었다.
"그건 답이 아니야."
그리고 천천히 오른 손을 들어올렸다.
그 순간 서민하는 볼 수 있었다.
작열하는 태양처럼 새빨갛게 물들여진 붉은 손길을
"벌, 받아야지?"
선우의 눈빛이 한층 더 싸늘하게 빛나기 시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