퍽 퍽 퍽 퍽 퍽
앙증맞은 주먹이 침상을 쉴새없이 두드렸다.
"으아아아아아...!!'
더불어 새된 비명성이 울려퍼지기 시작하였다.
이지적인 인상의 아름다운 귀부인
제갈가의 보옥
제갈주경의 비명이었다.
"그런 짓을 하다니...그런 짓을 하다니!"
지금 그녀는 극도의 수치스러움을 느끼고 있었다.
혼절하기 직전 말도 안되는 짓을 저질렀음을 떠올린 까닭이었다.
-....진심으로...연모하고 있어요...전하.
사랑고백
죽을 때까지 꼭꼭 숨겨둬야할 진심을 입밖으로 내뱉고 말았다.
절대 들켜서는 안될 존재
군왕 장선우의 면전에 대고 말이다.
마지막이라는 생각에 정신나간 짓을 해버리고 만 것이다.
"으아아아아아아!!
퍽 퍽 퍽 퍽 퍽 퍽
사랑고백을 다시금 상기한 제갈주경은 더욱더 격렬히 주먹질을 하기 시작하였다.
너무 수치스러워
주먹질을 하지 않고는 도저히 배길 수 없던 탓이었다.
"바보! 바보! 바보! 죽을거면 말없이 죽을 것이지! 왜 꼴값을 떠냐구!!!! 이 멍청아!"
스스로의 멍청함을 탓하였다.
그깟 후련함이 뭐라고
무덤까지 가져가야할 비밀을 그대로 내뱉는다는 말인가
어리석었다.
너무 어리석어 욕을 한바가지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왜 이렇게 멀쩡한 건데!..왜 하루만에 나은 건데! 그 흐름이였으면 죽는 흐름이었잖아!!!"
제갈주경은 이번엔 애꿎은 건강을 탓하였다.
그대로 죽어버렸다면 이렇게 수치스러움을 느낄 새도 없었을 것이다.
후련하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세상을 떠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눈치없는 육신은 그런 후련함을 허용치 않았다.
원인모를 고열을 고작 하루만에 완쾌시켜버렸다.
일주일이나 앓았던 게 거짓말인 것처럼 너무나 건강해져버린 것이다.
"소향! 소향때문이야!....냅두면 될 것을 괜히 전하를 불러와서!"
이번엔 충성스러운 시비 소향을 탓하였다.
그녀가 선우를 불러오지만 않았더라도 진심을 깨닫지 못하였을 것이다.
자연히 사랑고백을 할 일 또한 없는 것이다.
"으아아아아아아!"
쿵 쿵 쿵 쿵 쿵 쿵
제갈주경은 세상 모든 걸 탓하며 침상을 두드리고 또 두드렸다.
차오르는 수치심이 완전히 가라앉을 때까지 말이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하아...하아...하아...하아..하아..하아."
한창 난동을 부리던 제갈주경이 거칠게 숨을 몰아쉬기 시작하였다.
분풀이 끝에 어느정도 이성을 찾은 모습이었다.
철푸덕
곧이어 그녀는 반쯤 무너져내린 침상 위에 그대로 몸을 맡겼다.
'........이제..진짜..어떻게 하지?'
남탓을 해봤자 변하는 건 없었다.
이미 일은 벌어져버렸고
시간을 되돌릴 수 있는 방법따윈 존재치 않았다.
결국 해결책을 스스로 강구하는 수밖에 없었다.
'.........잘못 말한 거라고 할까?....비몽사몽해서...남편이랑 헷깔렸다고..'
도리 도리
하지만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그런 핑계를 대기엔 전하라는 호칭을 너무 선명히 발음하였다.
통할 리 만무한 것이다.
'.........그럼..사실대로..말할까?'
도리 도리
이 또한 안될 말이었다.
그와 자신은 이뤄질 수 없는 사이였다.
아니 정확히 표현하면 이뤄져선 안되는 사이였다.
'........나도..양심은 있으니까.'
그가 장선우가 아닌 장삼이라고 불렸던 시절
이재원으로부터 방치되고 있음을 알면서도
딸들에게 무시를 당하고 살아왔음을 알면서도
천무맹에서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음에도
사모로서 무엇하나 해준 게 없는 자신이었다.
간살 누명이 씌워졌을 당시에도
그런 짓을 저지를 아이가 아님을 알고 있음에도 그저 침묵만을 유지할 뿐
어떠한 변호도 하지 않았다.
더 나아가 당진설의 암살모의에 동참하여 의뢰비를 지급하기까지 하였다.
딸아이를 맹주로 만들고 말겠다는 야망에 잡아먹혀 인간으로서 못할 짓을 저질러버린 것이다.
그런 천인공노할 짓이 저지른 자신이 무슨 낯짝으로 그와 맺어질 욕심을 부린다는 말인가
그 또한 내색치는 않았지만 속으로는 자신을 경멸하고 있을 지도 몰랐다.
쓰레기 같은 사모를
멍청하기 짝이없는 여자를
'피해다니자..그리고......모른 척하자....그저..아무일도 없었던 것처럼.'
애초에 그 아이의 입장에서도 불편한 주제일 것이다.
나이가 마흔이 넘는 아줌마의 사랑고백이라니
제아무리 혈기왕성한 나이라지만 그런 아줌마의 고백을 달가워할 리 만무하였다.
혐오스럽게 생각할 수도 있었다.
주제도 모른다며
누굴 넘보냐면서 말이다.
'....나만 입다물면..그 아이도....구태여 언급하지 않을거야.'
그렇게 잊혀지면 된다.
처음부터 고백따위는 없었던 것처럼 말이다.
***********
"방문을 어려울듯합니다. 전하."
"오늘도인가?"
"....그 어떤 이도 들이지 말라는 엄명이 있던터라.."
전담시비 소향은 무척이나 송구스럽다는듯한 표정을 지은 채 공손히 허리를 숙였다.
귀한 걸음을 낭비하게 했다고 생각하니
괜스레 미안하고 송구스러워 고개를 들 수 없었던 까닭이었다.
"곤란하구나, 벌써 일주일째 내방을 허락치 않으니 말이야."
이내 선우는 턱을 매만지며 곤란하다는듯한 표정을 지었다.
벌써 일주일째 내방을 허락치 않았다.
제대로 대면할 기회조차 갖지 못한 것이다
주사를 잔뜩 놔줘야할 선우 입장에서는 곤란할 수밖에 없었다.
"그저...죄송할 따름이옵니다."
"아니다, 네가 죄송할 게 뭐있겠느냐? 그저 전해들은 바를 전할 뿐이거늘, 개의치 말거라."
선우는 손사래치며 입을 떼었다.
어디까지나 그녀의 역할은 전령이었다.
구태여 죄송할 이유는 존재치 않는 것이다.
"넓은 아량에 그저 감사할 뿐이옵니다."
.
"그럼 내일 이 시간에 다시오도록 하겠다, 제갈부인께 꼭 전해주거라."
막무가내로 뚫고 들어간다면 대면못할 것도 없었지만
그런 거친 방법을 쓰고 싶진 않았다.
'순애로 시작했으면 끝까지 순애로 가야지.'
거칠게 밀고 들어간다면 오히려 역효과가 나리라
"꼭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잘부탁하마."
탁 탁 탁
선우는 그녀의 어깨를 가벼이 두드려주었다.
그다음 바깥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하였다.
"휴우우우.."
곧이어 그가 나가자 소향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러다간 제명에 못살 것 같다는 생각이 든 까닭이었다.
.
.
.
.
.
.
"전하께서는 돌아가셨나요?"
"네에..돌아가셨습니다."
"순순히..돌아가시던가요?"
"곤란하다는 말씀을 하긴 하셨지만.....이해해주셨습니다."
"후우...별일 없었다니 다행이네요."
제갈주경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무려 일주일째 방문을 거절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사단이 나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건만
다행히 넓은 아량으로 수긍을 해준듯 하였다.
이리 별말없이 돌아가는 걸보면 말이다.
"......저...그리고..."
"무엇인가요?"
"내일도..오시겠다는 말을 전해달라고 하셨습니다."
"......내일도 오시겠다고 하던가요?"
"같은 시간에 오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곤란하네요."
제갈주경은 곤혹스럽다는듯한 표정을 지었다.
벌써 일주일째 내방을 거절했거늘
아직까지도 포기치 않고 계속 방문을 재개하다니
곤란하였다.
어찌 이리도 포기를 모른다는 말인가
".....내일도 내방을 허락치 않으실 건가요?"
"........그럴 생각이에요."
"....혹여 군왕 전하를 만나서는 안될 이유라도 있으신건가요?"
실로 이상하였다.
한번쯤을 허락할 법도 하건만
어찌 이리도 완강히 내방을 거절한다는 말인가
"........네에, 이유가 있어요....그러니까 부탁해요..소향...매번 많이 힘들겠지만...부디 정중히 거절해주세요...."
제갈주경은 부탁한다는듯 입을 떼었다.
중간에 끼어 곤란함을 느끼고 있을 소향의 입장을 모르는 바는 아니였다.
충분히 고마움과 미안함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곤란함을 인지하고 있음에도 내방을 허락할 수는 없었다.
이미 선우와는 접점을 만들지 않겠다고 굳게 다짐한 상태였으니 말이다.
"....명을 받들도록 하겠습니다."
소향은 어쩔 수 없이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아가씨께서 부탁이라는 말을 입에 담았다.
어찌 사용인 입장에서 수긍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고마워요, 소향."
제갈주경은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가벼이 미소를 지었다.
***********
"전하, 소식은 전해들었습니다."
제갈찬은 짐짓 진중한 표정을 지은 채 입을 떼었다.
"무슨 소식?"
"경아가 내방을 거절하고 있다지요?"
"아아, 그거?"
선우는 그제서야 알아먹었다는듯 입을 떼었다.
"제 분명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경아의 이성은 쉽사리 감정에 지배되지 않는다고 말입니다."
제갈찬은 꽤 기분 좋은 모습이었다.
제갈주경의 철벽과도 같은 행동이 썩 마음에 든 사람처럼 말이다.
"너 기분 좋아보인다?"
선우는 눈을 가늘게 좁히며 되물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제갈찬은 재빨리 표정을 굳히며 반문하였다.
"어, 그렇게 보여."
"......잘못 보신 거겠지요...."
"내가 눈이 삐었다는 거야?"
"그렇게 극단적으로 말하진 않았습니다!"
"잘못 봤다며? 그럼 눈이 삔거지."
"......아니..그러니까..그게 아니라.."
"아니긴 아니라, 맞는 거 같은데?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 거 같은데?"
"정말 아닙니다..!"
제갈찬은 필사적으로 부정하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한번 꼬투리를 잡은 선우는 좀처럼 놓아주지 않았다.
이빨이 박힐듯 깨물어 이리저리 흔들어대기 시작한 것이다.
".......죄송합니다."
결국 제갈찬은 백기를 들고 사과를 할 수밖에 없었다.
더 말을 섞었다간 천하의 죽일 놈이 될 것만 같았다.
"뭐가 죄송한데?"
"전부...죄송합니다."
"전부? 대충 넘기려고 그냥 사과하는 것처럼 느껴지는데?"
".......그러니까...그런 게 아니라."
제갈찬은 곤란하다는듯한 표정을 지었다.
뭘 어떻게 말해야 거슬리지 않을 지 감이 잡히지 않은 까닭이었다.
선우는 실실거리며 그런 제갈찬의 반응을 즐겼다.
절대갑이 되는 기분.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뭐, 됐어, 이번만큼은 내 관대하게 넘어가주지."
이내 선우는 태연스레 말을 이었다.
이제 놀릴만큼 놀렸다는 생각이 든 까닭이었다.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제갈찬은 송구스럽다는듯한 표정을 짓고는 재빨리를 허리를 숙였다.
그리고 속으로 굳게 다짐하였다.
다시는 꼬투리 잡힐 짓을 하지 않겠다고 말이다.
"어쨌든 결론부터 말하면 제갈주경의 철벽은 오히려 좋은 신호야."
".....어째서입니까?"
"신경조차 쓰지 않는다면 그렇게 극단적으로 철벽을 칠 일도 없을테니까...명백히 나를 의식하고 있다는 증거라고 볼 수 있지."
".......너무 비약이 아닐까요?"
"비약이 아니야, 나름 확증도 있거든."
예상치 못한 사랑고백까지 받은 상황이었다.
그런데 어찌 비약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어떤 확증인지...물어도 실례가 되지 않으련지?"
"실례야."
선우는 단칼에 거절하였다.
나름 제갈주경의 명예가 걸린 일이었다.
구태여 떠벌리고 싶지는 않았다.
"......알겠습니다."
제갈찬은 마지못해 수긍한듯한 표정을 지었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알려줄 생각이 추호도 없다는건 인지할 수 있던 까닭이었다.
"어쨌든...전하의 말씀처럼..경아가 전하를 의식하고 있다고 해도...만나지 못하면 소용없는 일 아닙니까?...."
무려 일주일째 내방을 거절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의식하고 있다고 해도 만나지 않으면 대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그건 걱정마, 다 방법이 있으니까."
선우는 대수롭지 않다는듯 손사래치며 입을 떼었다.
아무런 걱정도 없다는듯이 말이다.
".....강제로 문을 따고 들어가 대면하실 생각이십니까?"
"설마 내가 그런 야만적인 방법을 쓰겠어?"
".........그렇다면..어떤 방법을..?"
제갈찬은 의문 어린 표정을 지은 채 되물었다.
강제하는 것외에 어떤 방법이 있을지 상상이 가지 않은 까닭이었다.
"제 스스로 찾아오게 만들어야지."
".......그리 완강한데...과연 스스로 찾아올까요?"
"괜찮아, 알아서 찾아올만한 곳에서 기다리면 되거든."
"알아서 찾아올만한 곳?"
제갈찬은 아리송한 표정을 지은 채 되물었다.
외출을 극도로 자제하고 있는 그녀가 찾아올만한 곳이 어디란 말인가
"한 곳 있잖아? 유일하게 그녀가 외출하는 장소."
"...아!"
그 말을 들은 제갈찬은 깨달았다는듯 탄성을 내뱉었다.
까맣게 잊고 있던 곳을 번뜩 떠올릴 수 있던 까닭이었다.
제갈주경이 유일하게 외출을 하는 장소.
매달 주기적으로 발걸음을 하는 장소.
바로 이재원의 위패가 모셔져있는 사당이었다.
그곳에서 제갈주경을 기다릴 심산인 것이다.
"이재원의 위패가 있는....사당에..가실 생각이시군요."
"맞아."
"하지만...요즘은 그곳으로 발걸음을 안한지 꽤나 오래되지 않았습니까?"
선우의 눈치를 보느라
좀처럼 사당으로 향하지 않았던 제갈주경이었다.
언제 그곳으로 가게될지 미지수인 것이다.
"마침 내일이 이재원의 기일이더라구."
선우는 히죽거리며 입을 떼었다.
내일은 이재원이 공식적으로 죽은 날이었다.
남편과의 의리를 꽤나 깊게 생각하는 제갈주경인만큼
그런 날까지 두문불출하진 않을 것이다.
"확실하게 올테니까, 걱정하지말고 주변 통제나 잘해."
"주변 통제?"
"그녀랑 단둘이서 아주 긴 이야기를 해야할 것 같거든."
해야할 이야기가 많았다.
친히 놔줘야할 주사도 많았고
24시간이 모자랄지도 몰랐다.
주변 통제는 필수이리라
"......알겠습니다. 확실히 통제하겠습니다."
"그래, 잘부탁한다."
선우는 진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그 미소를 마주한 제갈찬은 생각하였다.
무림의 영웅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사악하고 음흉하기 짝이 없는 미소라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