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협지 안으로 들어와버렸다-1284화 (1,285/1,419)

"............."

제갈주경은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였다.

마치 넋이 나간사람처럼 말이다.

'......내가...그런 짓을 하다니...아아...아아..'

이유는 간단하였다.

남편을 배반하였다는 죄책감

그리고 정숙함을 삶의 신념을 무시한 채 욕망에 굴복하였다는 자괴감

이 모든 감정들이 맞물려 그녀를 괴롭게 만들었다.

어찌 명가의 귀부인으로서 그런 격 떨어지는 짓을 한다는 말인가

어찌 사별한 남편을 뒤로한 채 원수를 상상하며 자위을 한다는 말인가

"..아아...아아아...아아아..'

자괴감이 물밀듯 차올라 그녀를 더욱더 괴롭게 만들었다.

'....변명거리도..없어.'

애액을 뿜었을 때는 경혈을 자극되었다는 나름 변명거리가 있었다.

때문에 이렇게까지 크게 자괴감을 느끼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상황이 달랐다.

어떠한 접촉도 없이

오직 자신의 의지만으로 자위를 하고 애액을 뿜어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대체 무슨 변명거리가 있겠는가

'.....아무리.....인정에 목말라도...그렇지..조카뻘에 가까운 남자..몇 마디에..흔들리다니..'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인정에 목말라하고 있다는 사실을

어찌보면 당연하였다.

누구보다 사랑하는 남편에게 무려 이십여년의 세월동안 인정받지 못한 채 살아왔으니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이건..아니야......어떻게..그런 짓을....'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해도

조카뻘에 불과한 남자.

그것도 남편을 죽인 원수의 말 몇마디에 흔들리다니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제...그를 대면해선 안돼.'

만날 때마다 스스로가 아니게 되는 기분이었다.

남편만을 그리는 정숙한 귀부인이 아닌 남자에 목메는 탕녀가 되는 기분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만남을 이어간다는 건 너무나 위험하였다.

혹시라도

만에 하나라도

본격적으로 그에게 빠져들게 된다면 더는 되돌릴 수 없게 될테니

자위정도로 끝냈을 때와는 달리 스스로 정절을 바칠지도 모를 일일테니.

'.....고문서 해독은 포기하자.'

다친 허리를 핑계로 댄다면 제갈찬도 이해해줄 것이다.

안된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그저 세가의 규율을 따라 처벌을 받으면 될 뿐이니.

'내 자신을 잃는 것보단 처벌을 낫는 게 훨씬 나아.'

점점 변해가는 자신이 너무 두려웠다.

백년가약을 맺은 남편이 아닌 원수에게 빠져드는 게 너무 두려웠다.

그렇기에 배제할 요량이었다.

일말의 가능성조차 완전히 차단하기 위해서.

'...절대로...절대로...빠져들지..않을거니까..'

그녀는 속으로 굳게 다짐하였다.

결코 군왕에게 빠져들지 않겠다고

남편과의 의리를 지키기 위해

명가의 귀부인으로서 정절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

"전하, 경아가 허리부상으로 인해 더는 고문서 해독을 맡을 수 없다는 전언을 보내왔습니다."

제갈찬은 차분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그래? 아예 배제할 심산인가보네."

선우는 무덤덤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극단적인 방법이긴 하였지만 예상 못한 바는 아니였다.

스스로 바뀌어가는 걸 인지 못할 정도로 멍청한 여자는 아니였으니

"귀여운 짓을 하네."

꽤나 귀여웠다.

어떻게든 내면의 본능을 저항해보려고 하는 발악이 말이다.

"전하, 지금 웃고 계실 때가 아닙니다......아무래도 경아의 경계심이 한층 더 높아진듯 합니다.."

제갈찬은 심각한 표정을 지은 채 입을 떼었다.

무슨 짓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녀의 경계심이 한층 더 높아졌다.

제갈주경을 꼬시는 입장에서는 환영할 만한 일이 아닌 것이다.

"..어떻게 할까요? 묵살하고 강제로라도 해석을 맡기도록 할까요?"

"어떻게 강제하게? 본인이 안하겠다는데 말이야."

"그거야...가법을 들먹인다면.."

"아서라, 가법을 들먹여도 고집을 꺾진 않을테니까."

제갈주경은 지금 정절의 위기를 느끼고 있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는 가법을 들먹인다고 해도 소용있을 리 만무하였다.

"하지만 고문서 해독을 하지 않는다면 전하와 주기적인 만남이.."

제갈찬은 난감한듯한 표정을 지은 채 입을 떼었다.

고문서 해독은 군왕과 제갈주경을 주기적으로 만나게하기 위한 명분이었다.

그 명분이 사라진다면 제갈주경을 꾀여내는데 상당히 곤란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괜찮아."

선우는 태연스레 말을 이었다.

"이제 더는 접촉할 필요가 없으니까."

"......그게 무슨 말씀인지?...설마 포기를?!"

제갈찬은 꽤나 불안한득한 표정을 지은 채 되물었다.

혹여라도 선우가 이대로 물러나는 것은 아닌가

걱정이 된 까닭이었다.

"그럴리가."

선우는 손사래치며 말을 이었다.

이제 다된 밥이나 다름이 없었다.

내재된 욕망의 꽃망울이 터지기 직전인 상황인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포기라니

말도 안되는 일이었다.

"불씨를 던져놨으니 이제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는 말이야.  그녀의 애끓는 마음이 걷잡을 수 없을 때까지 말이야."

달콤하기 그지없는 말로

그녀의 마음 속에 불씨를 던져둔 상황이었다.

이제 남은 건 기다리는 것 뿐이었다.

던져진 불씨가 활활 타올라 걷잡을 수 없을때까지 말이다.

"걷잡을 수 없는 마음이라......좀처럼 상상이 가지 않습니다.....워낙 이성적인 아이인지라.."

누구보다 이성적이고 냉정한 그녀였다.

그런 그녀가 남편도 아닌 외간 남자에게 빠져 이성을 잃고 감정에 지배된다는 건 도저히 상상이 가지 않았다.

"본래 현실은 상상을 뛰어넘는 법이지."

그렇기에 재밌었다.

말도 안되는 일이 간간히 일어나니 말이다.

"어쨌든 그녀가 원하는대로 해줘. 내가 흔쾌히 수락했다는 말도 덧붙여주고 말이야."

"명을 받들겠습니다. 전하."

***********

"...정녕 그리 말씀하섰나요?"

제갈주경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되물었다.

의외라는듯이 말이다.

".....네에, 몸조리 잘하시라는 말씀도 덧붙이셨습니다."

전담시비 소향은 공손한 어투로 대답을 하였다.

"......군왕 전하께서는...별말씀 없다고 하시던가요?"

"군왕 전하께서도 흔쾌히 수락하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가요.."

"네에, 그렇습니다."

"........알겠어요, 이만 들어가보세요. 소식 전해줘서 고마워요, 소향."

"이게 제 일인걸요?"

소향은 가벼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천천히 몸을 돌려 바깥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하였다.

끼이이익

곧이어 문이 닫히고 방안에는 제갈주경만이 홀로 남게 되었다

'.....이렇게..일사천리로..진행될 줄이야...'

홀로 남은 그녀는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설마하니 이렇게 곧바로 승낙이 떨어질 줄은 예상치 못하였기 때문이었다.

'.....게다가..오라버니는 그렇다쳐도..군왕까지 흔쾌히 허락할 즐은..'

듣기로는 꽤나 중요한 일이라고 들었다.

제갈가로 친히 나설정도로 말이다.

그런데 그런 중요한 일을 자신때문에 뒷전으로 미뤄두다니

어찌 놀랍지 않을 수 있겠는가?

'설마......나에..대한..호의가..있어서.??'

화아악

갑자기 얼굴을 새빨갛게 달아오르기 시작하였다.

민망한 생각을 하니

부끄러움이 물밀듯 차오른 까닭이었다.

'....우우우...그럴 리 없잖아......그냥..의원로서..내.상태가 심각했다고 진단한 걸거야....'

애써 부정하였다.

그럴 리 없다고

그저 상태의 심각성을 알기에

내린 판단이라고

'어쨌든...잘됐어...이제는 그와 얽힐 일은 없을테니까.'

잘된 일이다.

얽히지 않는다면 더는 흔들릴 일도

감정에 파문이 일어날 일도

정욕에 불이 지펴질 일도

남편과의 의리를 저버릴 일도

신념을 꺾어버릴 일도

내 자신을 잃어버릴 일도 없었다.

뭐든 게 제자리로 돌아오게 된 것이다.

'......그래..이제 모든 게 원래대로야....'

이제 원래처럼 살면된다.

아침 일찍 일어나 검무를 추고

몸을 씻고 미음을 먹고

하루종일 서책을 읽고

남편을 그리워하고 울다가 잠들면

그러면 된다.

이제 자신의 인생에 장선우라는 존재는 없는 것이다.

욱신

순간 가슴이 한켠이 욱신거리기 시작하였다.

욱신 욱신 욱신 욱신

마치 거대한 철퇴에 얻어맞은 것처럼

욱신거리고 또 욱신거렸다.

'.....잘된 일인데...분명 잘된 일일텐데...'

마음이 아팠다.

주르륵

더불어 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하였다.

'.....도대체 왜 이러는거지?...어째서?'

그녀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잘된 일이거늘

너무나 잘된 일이거늘

어째서 이렇게 아픈 것인지

어째서 이렇게 눈물이 흘러내리는지

어째서 텅빈 느낌이 드는건지

".......어째서?"

방안에는 그녀의 공허한 외침만이 울릴 뿐이었다.

**************

".....하아...하아...하아...하아.."

제갈주경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기 시작하였다.

갑작스럽게 차오른 고열이 그녀를 호흡을 괴롭게 만든 까닭이었다.

"..아가씨, 미음이라도 넘기셔요."

전담시비, 소향은 걱정 가득한 표정을 지은 채 수저를 들어올렸다.

고열에 시달린 지 벌써 일주일째

그동안 제갈주경은 무엇하나 섭취하지 못하였다

뭐든 토해내고 거부하며 고통스러워할 뿐인 것이다.

".....아아....아아아..되었어요.....물러가세요.."

제갈주경은 다죽어가는 목소리로 입을 떼었다.

명백한 거절이었다.

"아가씨...제발요..이러다간..정말 죽을 수도 있어요."

"...제 몸은 제가...제일 잘...알아요....조금만..지나면.....멀쩡히..일어날 수..있어요..그러니..물러가세요.."

"벌써 일주일째 아무것도 먹지 못하셨잖아요! 더 이상은 무리예요!"

"............."

소향의 처절한 외침에 제갈주경은 묵묵부답으로 답할 뿐이었다.

'....어떻게 하지..대체..어떻게..'

소향은 발을 동동 굴렀다.

너무나 심각한 상황이건만

무언가 할 수 있는 게 없었기 때문이었다.

무려 일주일째 고열에 시달리건만 병명는 알 수 없었고 미음조차 거부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난감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대로 가다간...아가씨가 죽을거야.'

무슨 수를 써야했다.

어떻게든 그녀를 살리기 위해선.

"......금방...갔다올게요..아가씨."

이내 소향은 무언가 결심한듯 비장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쏜살같이 바깥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하였다.

이내 방안에는 제갈주경만이 홀로 남게 되었다.

'.........몸에..힘이 점점 빠져.'

홀로 남은 제갈주경은 어마어마한 탈력감을 느꼈다.

더불어 무기력함과 졸음이 쏟아지기 시작하였다.

'......나는 죽는 걸까?'

그럴지도 몰랐다.

일주일 째 원인모를 고열에 시달린 건 물론이고 음식조차 섭취하지 못하였다.

당장 내일 죽는다고해도 이상한 일이 아니리라

'.....남편을 만날 수 있겠네.'

만약 이대로 죽는다면

꿈에서조차 그리워하던

이재원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한많은 현세의 삶을 모두 끝마치게 되는 것이다.

'.....기쁘지..않아.'

그런데 이상하게도 기쁘지 않았다.

너무나 사랑하는 이재원에게

이리도 가까워졌건만

한발자국만 내딛으면 그의 곁에 갈 수 있거늘

기쁘지 않았다.

'어째서?....어째서?'

의문이 들었다.

어째서 이런 심경변화가 일어난 것일까

어째서 더는 그가 보고싶지 않은 것일까

어째서 그가 더이상 그립지 않은 것일까?

'모르겠어..정말..모르겠어...왜 이렇게..된건지..모르겠어..'

정신이 멀쩡하다면 단번에 알 수 있을지도 몰랐다.

자신은 누구보다 자기객관적인 사람이었으니

하지만 지금은 무리였다.

기력이 쭉 빠진 지금 고등적인 사고가 될 리 만무한 것이다.

'......죽고 싶지 않아...이대로..원인도 못찾고...죽고 싶지 않아.'

이를 악물고 버텼다.

알고 싶었다.

어째서 남편이 그립지 않은지

어째서 더는 그가 보고싶지 않은지

추우우우욱

하지만 이내 잇몸조차 힘이 빠지기 시작하였다.

기력이 빠져나갈대로 빠져나가 더는 버틸 힘이 남아있지 않은 것이다.

'.....싫어...죽고 싶지 않아...아직...아직 죽고 싶지 않아...나는...아직...아직....흐으읏...으으윽...흐으윽..'

눈물이 줄줄 흘러내리기 시작하였다.

죽고싶지 않건만

육신이 그 의지를 거부하였다.

끊임없이 그녀의 의식을 흐트려뜨리며 괴롭히고 또 괴롭히는 것이다.

당장에라도 의식을 끊어버리기 위해

너무나 괴롭고 고통스러웠다.

그렇게 얼마나 고통이 지속되었을까

의식이 서서히 흐려지기 시작하였다.

아무래도 이제 한계에 다다른듯 하였다.

그렇게 흐려지는 의식 속에서 무언가 보이기 시작하였다.

'사람?'

사람의 형상

그것도 남자의 형상이었다.

'남편이..날 데리러온 것일까?'

아니.

남편과는 달랐다.

비리비리했던 남편과 달리 꽤나 남성적인 체형이었다.

좀더 집중해보았다.

그러자 너무나 익숙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시원스러운 인상과 극한으로 단련된 육신을 가진 남자.

요근래 자신의 감정을 들었다놨다했던 요망스러운 남자.

군왕 장선우였다.

'....헛것이 보이는구나...그가 여기 올 리가 없거늘.'

하지만 싫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좋았다.

남편이 데리러왔다고 생각했을 때보다 훨씬

'..아....'

순간 머릿속에 번쩍하고 빛이 반짝였다.

깨달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째서 남편이 보고싶지 않았는지

어째서 남편이 그립지 않았는지

'......나는...그 남자를 사랑하고 있던 거야.'

애써 부정하고 부정하였지만

이제는 알 수 있었다.

자신 그 남자를

남편을 죽인 그 남자를 연모하고 있던 것이다.

'.......바보구나...이제서야..그 감정을 깨닫다니.'

아니 사실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신념에 위배된다는 이유로

남편과 의리를 지켜야한다는 이유로

애써 외면하고 있었을 뿐

"....진심으로...연모하고 있어요...전하."

용기내어 간신히 입밖에 진심을 내뱉었다.

애써 부정하고 있던 진심을

'.....후련하구나.'

곧이어 근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품고있던 의문이 풀렸고

비록 환영이지만 죽기직전 속마음을 토로하였다.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으리라

스르르르륵

그렇게 제갈주경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무척이나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은 채로 말이다.

.

.

.

.

.

.

"저어, 아가씨는...?"

소향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은 채 되물었다.

"잠시 탈진한 것 뿐이다. 너무 심려치 말거라."

선우는 대수롭지 않다는듯 입을 떼었다.

"그런가요!?...후우..다행이다..전 진짜..돌아가시는 줄 알았어요.."

소향은 눈물을 글썽이며 답을 하였다.

"무인은 상상이상으로 튼튼한 존재란다. 고작 일주일 앓는 정도로 죽을 일은 없지. 초절정에 닿은 제갈 부인정도라면 더더욱이 말이야."

"......제가 괜히....호들갑을 떨어..군왕 전하께 민폐를 끼친 걸까요?"

"아니, 그렇지 않다, 오히려 탁월한 판단이라고 볼 수 있지."

선우는 고개를 내저으며 입을 떼었다.

"그녀의 열병은 오직 나만의 치료할 수 있으니 말이야."

사랑의 열병

오직 사랑을 통해서만 극복할 수 있는 불치병.

어찌보면 소향의 판단은 정확하다 볼 수 있었다.

오직 자신의 사랑만이 제갈주경의 병을 치료할 약이었으니

'깨어나면 주사를 잔뜩 놔주도록 하지. 제갈주경.'

욱신 욱신 욱신

벌써부터 아랫도리가 욱신거리기 시작하였다.

주사를 잔뜩 놓을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흥분이 차오른 것이다.

'그러니 어서 깨어나라고.'

선우는 히죽거리며 빌었다.

어서 그녀가 정신을 차리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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