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르륵
고운 두눈이 서서히 뜨여지기 시작하였다.
어제와 같은 천장이 시야에 들어왔다.
아니 오늘은 뭔가 달리 보였다.
미세한 흠집이 난 것 같기도 하였고 색이 유난히 짙어보이기도 하였다.
시비인 소향에게 말해 보수를 맡겨둬야할듯 싶었다.
곧이어 천천히 몸을 일으켜세웠다.
그리고 슬며시 창밖을 보니 햇빛이 비춰보였다.
아무래도 평소 늦잠을 잔듯 싶었다.
저벅 저벅 저벅
바닥을 딛고 걸음을 옮기기 시작하였다.
'가벼워.'
천근만근 무거웠던 평소와는 달리 깃털처럼 가벼운 느낌이 들었다.
마치 무거운 짐을 덜어낸 것처럼 말이다.
저벅 저벅 저벅
이내 가벼운 발걸음을 떼어 연무장으로 향하였다.
그리고 평소처럼 검무를 추기 시작하였다.
마치 한마리 제비가 창공을 자유자재로 누비는 것처럼 이리저리 검을 옮겨가며 휘두르고 또 휘둘렀다.
'......달라졌어.'
검을 휘두르면 휘두를 수록 확연한 차이가 느껴졌다.
평소에는 흐느적거리며 갈피를 못잡던 검에는 힘이 들어갔으며 느릿느릿했던 움직임은 더욱더 쾌속해지고 절도가 생겨났다.
'....기분 좋아.'
싫지 않은 느낌이었다.
아니 오히려 좋다고 할 수 있었다.
검을 휘두르면 휘두를 수록 이루말할 수 없는 해방감과 상쾌함이 전신에 그대로 퍼졌으니
그렇게 검을 휘두르고 또 휘둘렀다.
체력이 완전히 떨어져나갈 때까지
.
.
.
.
.
정신없이 휘두르다보니 어느새 속이 내비칠정도로 흠뻑 젖어들었다.
찝찝함에 당장에라도 몸을 닦아내고 싶은 욕구가 치밀어올랐다.
"여기 있습니다."
때마침 전담시비 소향이 수건을 건네주었다.
"고맙구나."
감사를 표하고 수건을 받아들고 전신을 가벼이 닦아내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특유의 찝찝함이 완전히 가시진 않았다.
'.....왠지....오늘은 욕탕에 들어가고 싶네.'
평소라면 그저 물을 끼얹고 땀을 씻어내고 말았겠지만
오늘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따뜻한 물을 받아놓은 욕탕에 들어가 몸을 담구고 싶었다.
"탕에 따스한 물을 좀 받아주겠니?"
"탕에 말인가요!?"
소향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되물었다.
평소와는 전혀 다른 명령에 당혹스러움이 역력한 모습이었다.
"오늘은 탕안에 몸을 좀 담그고 싶구나."
"물론이예요! 당장 준비토록 하겠습니다!"
시비는 꾸벅 인사를 하고는 부리케나 달려가기 시작하였다.
.
.
.
.
.
"미음을 대령하였습니다."
욕탕에 충분히 몸을 담그고오니 평소처럼 미음을 준비되어있었다.
하지만 이상하리만큼 땡기지가 않았다.
좀더 맛있는 걸 먹고 싶은 욕구가 생겨난 것이다.
".......오늘은 미음이 아닌 다른 걸 먹고 싶구나."
"다른 거라면?"
소향은 의아한듯 되물었다.
"........제대로 된 식사말이다."
민망한듯 얼굴을 붉히며 답을 하였다.
"당장 대령토록 하겠습니다."
대답을 마친 소향은 곧바로 몸을 돌려 주방을 향해 내달리기 시작하였다.
무려 일년만에 식욕이 돌아온 아가씨에게 제대로 식사를 대접하기 위해서 말이다.
*********
"정녕...정녕 그게 사실이더냐?"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가주."
제갈주경의 전담시비, 소향은 잔뜩 상기된 얼굴로 입을 떼었다.
이른 새벽에 기상하던 그녀가 늘어지게 늦잠을 잔 것도
언제나 반시진정도만 검무를 추던 그녀가 두시진 가까이 검무를 춘 것도
찬물로 몸만 씻어내던 그녀가 따스한 욕탕에 몸을 담근 것도
미음만 간신히 넘기며 식음전페하던 그녀가 왕성한 식욕을 자랑하며 제대로 된 식사를 한것도
전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모두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한 것들이었으니
"...그렇단 말이지..."
제갈찬의 눈에 생기가 감돌기 시작하였다.
그녀의 대답에 꽤나 마음에 든듯한 모습이었다.
"고생했다. 앞으로도 유의미한 변화가 있다면 곧바로 보고토록 하라."
"알겠습니다, 가주."
소향은 허리를 숙여 인사를 건네었다.
그리고 조심스레 뒤편으로 물러나기 시작하였다.
쿵
곧이어 문이 닫히고 방 안에는 제갈찬만이 홀로 남게 되었다.
"전하...전하의 말씀이 옳았습니다......그 아이에게 필요했던 건..........진실된 공감과 이해였습니다."
홀로 남게된 제갈찬을 허공을 응시하며 읊조리기 시작하였다.
스르르르륵
"그걸 이제야 믿는거야?"
그러자 어느새 모습을 드러낸 선우는 짓궂은 표정을 지은 채 입을 떼었다
"....어느정도 수긍하긴 하였지만...설마하니 이렇게까지 크나큰 변화가 일으킬 줄은 전혀 예상치 못하였습니다."
그의 말을 믿지 않은 건 아니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큰 변화를 기대하진 않았다.
깊은 마음의 상처가 말 몇마디로 해소될 것 같진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예상과는 달리 제갈주경에게는 큰 변화가 생겨났다.
눈앞에 남자
장선우와 몇 마디 나눈 것만으로
시체같던 삶을 청산하고 정상적인 사람다운 생활을 영위해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니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모든 걸 꿰뚫어본 그의 통찰력을
그가 제시한 공감과 이해라는 해결책을
"실로 대단한 일을 이뤄내셨습니다...전하."
"뭐 대단한 일이라고."
선우는 대수롭지 않다는듯 말을 내뱉었다.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피폐해져있던 아이였습니다. 그런 아이에게..살아갈 수 있는 힘을 준다는 건...기적과도 같은 일이옵니다."
제갈찬은 감격 어린 표정을 지은 채 말을 이었다.
"..감사합니다...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감사인사는 넣어둬, 아직 완전히 해결된 게 아니니까."
선우는 손사래치며 입을 떼었다.
"......완전히 해결된 게 아니라뇨?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제갈찬은 이해할 수 없다는듯 그에게 되물었다.
제갈주경이 정상적인 생활을 하기 시작하였다.
예전과 같은 피폐한 모습이 사라진 것이다.
그런데 아직 완전히 해결된 게 아니라니?
"약간 호전되긴했지만 상실감과 허탈함, 공허함은 여전히 그녀의 마음 깊은 곳에서 남아있는 상태야.....만약 이대로 방치해둔다면 얼마지 않아 원래대로 돌아갈 게 뻔하지."
선우는 담담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그녀의 마음 속을 관통했던 진심 어린 공감과 이해는 임시조치에 불과하였다.
근본적인 치료가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처음부터 말했잖아? 너무 아픈 사랑은 새로운 사랑으로 잊는 법이라고."
선우는 부드러이 미소를 지은 채 입을 떼었다.
"...텅 비워져있다면 사랑으로 채워넣으면 될 뿐이야. 얼마나 간단해?"
"...과연 생각처럼 간단한 일인지 판단이 서지 않습니다."
제갈찬은 살짝 부정적인 입장을 고수하였다.
"날 못믿는 거야?"
"그런 건 아니지만....여러모로..상황이 좀..."
"상황이 어떤데?"
"일단 명목적으로....전하께서는 입장상 경아를 과부로 만든 장본인이기도 하고....거기다...경아는 고지식할 정도로 정절을 중요시 여기는 정숙한 아이입니다.......그런 경아가 두 명의 지아비를 섬긴다는 건 도저히 상상이 가지 않는 군요.....게다가 무엇보다 전하께서는 이미 유부남이지 않으십니까?....과연 그런 상황에서...경아를 사랑으로 채우는 게 가능한 일인지...."
제갈찬은 난감하다는듯한 표정을 지은 채 말을 이었다.
입장상 제갈주경과 선우는 원수라고 볼 수 있었다.
이유야 어찌되었든 선우는 하나뿐인 남편을 죽인 불구대천 원수였으니
더불어 제갈주경의 성정은 고지식할 정도로 정절을 중요시하는 성격이었다.
하늘아래 두명의 지아비를 섬기는 걸 용납할 리 만무하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선우는 수많은 처첩들을 거느리고 있는 유부남이었다.
어마어마한 악조건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과연 그런 상황 속에서 제갈주경을 사랑으로 채워줄 수 있을 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확실히 조건만 따진다면 불가능에 가까운 조건이긴 하네."
선우는 살포시 웃었다.
새삼 악조건도 이런 악조건이 없다는 생각이 든 까닭이었다.
"그런데 난 질싸움은 잘 안하는 주의라서."
선우는 히죽거리며 입을 떼었다.
무척이나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제갈주경따위는 얼마든지 꾀여낼 수 있다는듯이 말이다.
"......쉽지는 않으실 겁니다."
"괜찮아, 제갈가주가 도와준다면 훨씬 더 수월해질테니까."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보필하도록 하겠습니다."
제갈찬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입을 떼었다.
사랑하는 여동생이 행복할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자신은 하나밖에 없는 혈육이었으니
"좋아, 그럼 일단 자리부터 마련해줄래?"
"자리라면...무슨 자리를 말씀하시는겁니까?"
"제갈주경과 나와 매일 마주칠 수밖에 없는 자리 말이야."
"......그걸 어떻게?"
은혜를 입긴 하였지만
제갈주경 입장에선 군왕은 껄끄러울 수밖에 없는 존재였다.
그런데 어찌 매일 대면할 수밖에 없는 불편한 자리를 만들어낸다는 말인가
"그거야 제갈가주의 역량이지."
선우는 빙긋 웃으며 입을 떼었다.
"..............."
"표정 풀어, 맞고 싶어?"
"......잠시...코가..간지러워서.."
제갈찬은 당혹스러운듯한 표정을 지은 채 변명을 하였다.
순간적으로 이성을 잃고 표정관리가 안된듯 하였다.
"핑계는."
선우는 피식거리며 입을 떼었다.
"....진짜입니다.."
"됐고, 어쨌든 내일부터 매일 제갈주경이 내 처소로 올 수 있게 만들어."
".......매일..말입니까?"
"어, 하루라도 빠지면 안돼."
선우는 단호하게 말을 내뱉었다.
".............그럼...왕명이라는 걸로..."
"당연히 안되지, 그러면 노리는 게 너무 티나잖아? 어쩔 수 없이 엮이게 된 상황으로 만들어.."
".......제게는 너무나 무리한 요구입니다...전하."
"아니야, 넌 할 수 있어, 난 믿어."
선우는 올곧은 눈빛으로 그를 응시하며 입을 떼었다.
'믿지마! 믿지말라고!'
제갈찬은 믿지말라는 소리가 목구녕까지 치솟았다.
대체 뭘 믿는다는 말인가?
"할 수 있지?"
선우는 확인하듯 재차 그에게 물었다.
"....함께...머리를 맞대고..생각을..."
"왕명이야."
".....명을 받들겠습니다."
결국 제갈찬은 울며겨자먹기로 수락을 할 수밖에 없었다.
왕명이 떨어진 이상
거역한다는 건 선택지따윈 존재조차 하지 않았으니
"그래, 잘 부탁한다. 제갈찬."
선우는 히죽거리며 입을 떼었다.
과연 왕명이 편하긴 편하였다.
인재를 굴리는 게 이렇게 특화되어있는 걸 보면 말이다.
*************
"뭐..뭐라구요?"
제갈주경은 당혹스러운듯한 표정을 지은 채 되물었다.
마치 전혀 믿기지 않는다는듯이 말이다.
"말그대로다, 전하께서 제갈가에 머무는 동안 네가 직접 보필토록 하라."
"진심으로..하시는 말씀이신가요?"
"진심이다."
제갈찬을 표정 하나 변치 않은 채 입을 떼었다.
".....하지만 그는...그분은..."
"네 남편을 죽인 장본인이지."
"그걸 아시는 분이 어떻게 제게!"
제갈주경은 언성을 높이며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불편한 관계를 충분히 인지하고 있음에도 그런 명령을 내리다니
아찌 이럴 수 있다는 말인가
"그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어쩔 수가 없었다. 고문서를 해독할 수 있는 건 세가내 오직 너뿐이니."
제갈찬은 어쩔 수 없다는듯한 표정을 지은 채 입을 떼었다.
"오라버니께서도 가능한 일일텐데요?"
"세가의 밀린 업무를 처리하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빠듯하다...전하를 직접 보필을 하고 싶어도 상황이 여의치가 않지."
제갈찬은 담담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하지만.....전."
"잊지말거라, 세가의 그늘 아래 있는 이상 넌 제갈가의 일원이라는 사실을, 세가를 위해선 삿된 감정따위는 묵혀두어야한다는 사실을."
"............."
제갈주경은 어떠한 반박조차 하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못하였다.
오라버니의 말은 무엇하나 틀린 게 없었으니
"게다가 넌 전하께 은혜를 입지 않았더냐? 그걸 갚을 좋은 기회라고 여기거라, 너 또한 전하의 은혜가 껄끄러울테니 말이야."
"............."
"그럼 받아들인 걸로 알고 전하께는 내일부터 찾아뵙는다고 하겠다. 이만 가보거라."
제갈찬은 곧바로 그녀에게 축객령을 내렸다.
어서 가보라는듯 손까지 휘저으면서 말이다.
빠드드득
그 모습에 제갈주경은 이를 빠드득 갈았다.
휘익
그리고 한치의 망설임없이 몸을 돌려 바깥으로 향하기 시작하였다.
'모두 널 위한 일이란다...이 오라비를 이해해주려무나.'
제갈찬은 그런 여동생의 뒷모습을 무척이나 그저 가만히 바라볼 뿐이었다.
사랑하는 여동생에 대한 걱정을 가득 담은 채로 말이다
********
똑 똑 똑 똑
누군가 일정한 주기로 문을 두드리기 시작하였다.
"들어오시오."
곧이어 허락을 떨어졌다.
끼이이익
그러자 경첩이 맞물리는 소리와 함께 문이 서서히 열리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열린 문틈사이로 한명의 이지적인 귀부인이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누구인지 묻지도 않는군요."
이지적인 귀부인, 제갈주경은 차분히 입을 떼었다.
"청명하면서 날카로운 기파, 경쾌하면서도 균형잡힌 걸음걸이, 특유의 규칙적인 숨소리, 은은한 율금향까지...난 그대에 대해 꽤나 많은 걸 알고 있소....구분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지."
선우는 입가에 부드러이 미소를 지은 채 입을 떼었다.
"......대단하군요...만나는 모든 사람의 특징을 단번에 기억할 수 있다니....."
제갈주경은 담담한 어조로 대꾸를 하였다.
초월에 다다른 존재라 그런지 몰라도
그 기억력 또한 인간의 범주를 벗어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나는 모든 이들을 기억하진 않소, 그랬다간 이 작은 머리가 그대로 폭발해버릴테니."
선우는 머리를 가벼이 손가락질하며 입을 떼었다.
"그대이기에 기억하고 있소."
그리고 입가에 부드러이 미소를 짓기 시작하였다.
화아아악
"..장난이 지나치시군요."
제갈주경은 애써 평정심을 유지한 채 입을 떼었다.
"정녕 장난처럼 보이오?"
선우는 능글맞은 표정을 지은 채 되물었다.
"네에, 그러니 그만둬주세요...전 고문서 해독을 하러온거지..장단을 맞추러 온게 아니니.."
제갈주경은 퉁명스럽게 대꾸를 하였다.
그리고 재빨리 책상쪽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하였다.
더는 상대하고 싶지 않다는듯이
'반응 좋네.'
선우는 그 뒷모습을 보며 미소 지었다.
반응이 나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좋다고 볼 수 있었다.
애써 평정심을 유지하며 퉁명스럽게 대꾸하긴 하였지만 분명히 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새빨갛게 물들여진 그녀의 귓불을
'일단 가벼운 스킨십부터 해보자구, 제갈주경.'
선우의 눈빛이 음욕으로 반짝이기 시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