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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협지 안으로 들어와버렸다-1276화 (1,277/1,419)

털썩

"무례를 저질렀습니다! 전하!"

제갈찬은 재빨리 발을 거둬들였다.

그리고 곧바로 무릎을 꿇고 사죄를 하였다.

천하제일지

제갈가의 가주라기에는 무척이나 비굴하기 짝이 없는 행동이었지만 그에게는 일말의 망설임조차 없었다.

눈앞에 있는 남자.

군왕 장선우 앞에선 그런 망설임따위는 사치에 불과하였으니

"본좌가 원하는 건 제갈가주의 사죄가 아니다. 지금 상황에 대한 설명이지."

선우는 차분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정신이 온전치 못한 아이가...그리움에 못이겨.크나큰 죄악을 저질렀습니다......천하에 다시 없을 악인을 기리기 위해 사당을 만들고 그곳에 위패를 세워두었지요.......이는 천지가 뒤바뀐다해도 납득할 수 없는 죄악 중에 죄악...지금이라도 그 죄악을 바로 잡기 위해....위패와 사당을 부수고 있었나이다.."

제갈찬은 무척이나 떨리는 목소리로 차분히 말을 잇기 시작하였다.

혹여 심기라도 거스르는 게 아닐까

무척이나 조심스러워하는듯한 모습이었다.

"부디 노여워하지 말아주십시오.....당장 이 추악스러운 사당과 위패를 박살내버리겠습니다..그리고 이런 끔찍한 짓을 저지른 제갈주경의 근맥을 잘라 평생토록 밖으로 나갈 수 없도록 하겠습니다....그러니...부디....용서를...부디...자비를.."

제갈찬은 땅바닥에 머리를 처박은 채 간절히 애원하기 시작하였다.

무척이나 치욕스러운 행동이었지만

가문을 책임지는 입장이었기에

그는 일말의 망설임조차 내비칠 수 없었다.

그의 노여움에 따라 가문의 운명이 달라질테니

'...모든 게 끝이구나..'

한편 그의 말을 들은 제갈주경은 절망 어린 표정을 지었다.

이제 이재원을 기렸던 사당과 위패는 박살나버릴 것이다.

더불어 근맥이 잘려 평생 출입이 제한당한 채 살아가게 될 것이다.

오직 죽는 날만을 기다리면서

'그런 삶이라면.....차라리...차라리..죽는 게...나아.'

남편을 기리는 이 순간은

비참한 삶을 살고있는 그녀에게 있어

유일한 안식이엇다.

그 안식이 없어진다면 더 살아갈 용기가 없었다.

이대로 생을 마감하는 게 더 나은 선택이리라

우드득 우드득

제갈주경은 손가락 마디마디에 힘을 주기 시작하였다.

천령개를 내리꽂아 그대로 생을 마감할 심산이었다.

"그럴 필요없다."

그때 뜻밖에 대답이 귓가로 파고들기 시작하였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제갈찬은 멍청한 표정을 지은 채 되물었다.

전혀 이해할 수 없다는듯이

"사당과 위패를 부술 필요도, 제갈주경을 벌할 필요도 없다는 말이다."

선우는 담담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순간 천령개로 향하던 제갈주경의 손이 귀신처럼 멈춰섰다.

더불어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선우를 응시하였다.

도저히 믿기지가 않았다.

그 누구보다 이재원을 끔찍하게 생각할 그가

그 누구보다 이재원을 혐오하는 그가

어찌 저런 말을 내뱉을 수 있다는 말인가

".......전하...하지만..이곳은.."

제갈찬은 당혹스러움이 역력한 표정을 지었다.

그 또한 갑작스러운 선우의 말을 전혀 예상치 못한듯 보였다.

"이곳은 그저 죽은 남편을 기리게 위해 만든 사당에 불과하다. 제갈주경 또한 죽은 남편을 그리워하는 가련한 여인 불과하지."

선우는 담담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그런데 그녀의 정성이 담긴 이곳을 멋대로 부술 수 있겠는가? 어찌 가련한 그녀를 벌할 수 있겠는가? 어불성설이다."

"하지만 전하....경아의 남편은 이재원입니다....무림 역사상 다시없을 최악의 위선자이자 흉악스러운 살인귀! 이재원이란 말입니다!"

"우리에게는 위선자이며 살인귀일지는 모르지만 그녀에게는 세상에 오직 하나뿐인 반쪽이자 그리운 사랑일 것이다. 그런데 어찌 그 감정을 멋대로 옥죌 수 있겠는가? 만약 그게 가능하다 믿는다면 그건 오만일 것이다. 신조차 인간의 감정을 멋대로 주무를 수는 없으니."

선우는 올곧은 눈빛으로 제갈찬을 응시하기 시작하였다.

"냅두거라, 무엇도 하지말거라, 이는 왕명이니라."

그리고 단호하게 말을 내뱉었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제갈찬은 땅에 머리를 처박았다.

위대한 군왕의 명이었다.

일개 가주따위가 어찌 거절할 수 있겠는가

"좋다, 내 그대를 믿어보도록 하지, 제갈찬."

선우는 담담한 어조로 말을 받았다.

"그럼 이제 그만 가보도록 하게, 나는 제갈주경과 긴히 나눌 말이 있으니."

그리고 축객령을 내렸다.

어서 나가보라는듯이 말이다.

"..경아와..말입니까?"

제갈찬은 의아한듯한 표정을 지은 채 되물었다.

별안간 제갈주경과 무슨 나눌 말이 있는 건지

의문이 든 까닭이었다.

"아아, 그대는 들어서는 안될 말이다, 그러니 이해하도록 하라."

"당연한 말씀입니다! 들어서 안된다면 마땅히 자리를 비켜야지요!"

제갈찬은 재빨리 몸을 일으켜세웠다.

그리고 허리를 꾸벅 숙이고 정수리를 내보였다.

그다음 한치의 망설임없이 몸을 돌려 사당 바깥으로 향하기 시작하였다.

위대한 군왕의 명을 훌륭히 완수하기 위해서 말이다.

쿠우웅

이내 문이 닫히고 사당 안에는 오직 선우와 제갈주경만이 남게 되었다.

"................"

"..............."

단둘이 남게된 두 남녀사이에선 어색한 침묵이 흐르기 시작하였다.

누구 하나 입을 여는 이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침묵이 이어졌을까

"......무슨...생각이신거죠?"

이내 잠자코 있던 제갈주경이 천천히 입을 떼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듯한 표정을 지은 채로

"무엇을 말이오?"

"......어째서...사당과 위패를...내버려두신거죠?.......어째서..절 구해주신 거죠?....이재원은 당신의 원수잖아요?...저 또한 당신을 죽이려했던 전력이 있구요..그런데...왜?...어째서?"

"이유는 그대로 듣지 않았소? 구태여 또다시 묻는 저의를 알 수 없구려."

"......제 남편은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었어요...."

"잘알고 있소."

"억울한 누명을 씌우고 몇 번이고 당신을 죽이려고 했어요."

"그 또한 잘알고 있소."

"그런데...그런데...고작 연민때문에.....그런 흉악스러운 악인을 기리는 사당을 내버려둔다는 말인가요?"

"그저 작은 변덕일 뿐이오."

"...당신은 물러요....저라면...그런 동정따위가 아닌 철저한 파멸을 선사했을거예요...다시는....다시는....허튼 생각 못하도록...일벌백계가 될 수 있도록.."

"난 그대가 아니기에, 그리 할 수 없었소."

선우는 담담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나 또한 사랑을 알기에 그리 할 수 없었소, 소중한 이를 잃는 상실감과 공허함은 이루 말할 수 없다는 걸, 너무나 잘알고 있으니."

그 또한 소중한 이를 잃을 뻔한 경험이 있었다.

그렇기에 누구보다 제갈주경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녀가 가진 상실감과 공허함

그리고 끝없는 그리움과 고통까지

전부 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물러터진 덕택에 그대가 살지 않았소? 아마 내가 단호했다면 그대는 분명 그 고운 손으로 천령개를 내리쳐버렸을테니......."

".........알고 계셨군요."

제갈주경은 착잡한 표정을 지은 채 입을 떼었다.

나름대로 은밀히 행동했다고 생각했건만

이 남자의 눈을 벗어날 수는 없었던듯 하였다.

"본좌의 눈에는 만물의 흐름이 보인다. 그대가 가진 힘의 흐름 또한 마찬가지지."

".........절 살리기 위해...오라버니께..그리 말씀하신건가요?"

"그 또한 이유라고 할 수 있지."

"......어째서죠?...어째서 저 같은 걸 살리려고 하신거죠?"

"이 또한 무른 성정 때문일테지....눈앞에서 그대가 죽는 걸 보고 싶지 않았으니."

".............."

제갈주경은 무척이나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남편을 죽인 장본인이

어찌보면 원수라고 할 수 있는 존재가

자신의 목숨을 구해주었다.

뿐만 아니라 심정을 헤아려주고 사정을 봐주기까지 하였다.

부지불식간에 은혜를 입은 것이다.

복잡할 수밖에 없었다.

원수인 그가 은인이라니.

".......당신은...당신은 정말...물러요."

"무른 면모도 싫지는 않구려, 결국 그 또한 나의 일부일테니"

선우는 부드러이 미소를 지은 채 입을 떼었다.

언뜻 보면 장난기 가득한 것처럼 보이기도

또 다르게 보면 초탈한듯한 모습이 무척이나 인상적인 미소였다.

"......현기玄機가 느껴지는 말이로군요."

"딱히 그런 거창한 말은 아니요, 그저 느낀 바를 그대로 말할 뿐이니."

선우는 대수롭지 않다는듯한 표정을 지은 채 입을 떼었다.

".......그런가요."

"그런 것이오."

이내 다시금 침묵이 자리 잡았다.

그전보다는 덜 어색한 침묵이

".........제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이내 제갈주경을 침묵을 깨고 그에게 용건을 물었다.

"그대의 잘못이 아니오."

선우는 차분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그러니 스스로 탓하지 말고 미워하지말고...죽지마시오."

"..............."

제갈주경은 말없이 선우를 응시하였다.

당장에라도 울것 같은 표정을 지은 채로 말이다.

선우는 한참동안이나 그녀를 응시하더니

이내 천천히 몸을 돌려 바깥을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하였다.

일말의 미련조차 없는 사람처럼 말이다.

"..............고마워요."

그때 귓가로 개미가 기어가는듯한 목소리가 파고들기 시작하였다.

"별말씀을."

선우는 구태여 되묻지 않았다.

그녀가 내뱉은 고맙다는 말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지 짐작해볼 수 있던 까닭이었다.

아마 어마어마한 결심을 통해 나온 말이리라

끼이이이이익

곧이어 문이 닫히고

사당에는 오직 한 사람

제갈주경만이 홀로 남게 되었다.

"......흐으윽...으윽...으윽...흐으윽....흐아아아아앙!!"

이내 홀로 남게된 제갈주경은 서럽게 울음을 터트리기 시작하였다.

꾹꾹 눌러놨던 감정이 북받쳐올라 그대로 터져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녀 항상 생각하였다.

스스로 잘못되었다고

백년가약을 맺은 남편이라고는 하지만

흉악스러운 범죄자였고 영웅의 탈을 쓴 채 딸같은 아이들을 쉴새없이 간살한 추악스러운 위선자였다.

그런 이재원을 잊지 못해

슬퍼하고 그리워하고 기도하며 그를 기리다니

어찌 잘못이라 생각지 않을 수 있겠는가?

잘못이라는 걸 알기에

그녀는 스스로 탓하고 미워하며 원망하였다.

끔찍스러운 살인마를 그리워하는 자신을

감정에 휘둘린 채 허송세월을 보내 자신을

인적 드문 곳에 사당까지 차리고 그의 왕생을 바라는 자신을

스스로 미워하기에

자진하는 것조차 두렵지 않았다.

제어할 수 없는 감정의 끈 때문에 고통을 받는다면 차라리 죽는 게 나을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가히 벼랑 끝에 몰렸다해도 과언이 아닌 상태였던 것이다.

그런데 오늘 저 남자가 말하였다.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고

탓하지 말고 미워하지 말라고

누굴 사랑하는 마음이 죄가 되지 않는다고

그러니 죽지말라고

"흐그윽...흐으윽..그그극...흐으윽...으극....극."

감정이 북받칠 수밖에 없었다.

텅빈 세상에 홀로 내팽겨쳐진 것 같았던 자신의 유일한 이해자를 만나게 되었으니

"흐으윽...미안해요...정말...미안해요...여보...오늘만...오늘만...그에게 감사하며....울게요...정말 죄송해요."

제갈주경은 이재원의 위패를 품에 안은 채 연신 사과를 하였다.

남편의 위패 앞에서 그를 죽인 원수의 이해와 위로에 감격하여 눈물을 흘린다고 생각하니

이루 말할 수 없는 배덕감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죽은 이재원에게 크나큰 죄를 짓는 것만 같았다.

"죄송해요..흐으윽...흐으윽...정말..죄송해요.."

하지만 그녀는 사과하는 와중에도 눈물을 그치지 않았다.

그의 이해와 위로를 통해 전해진 벅차오름은 그녀가 제어할 수 있는 영역을 이미 벗어나있었다.

의지만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것이다.

".....흐아아아아아앙!!"

그렇게 제갈주경은 죽은 남편에게 사과를 하며 울고 또 울었다.

사당 전체가 눈물바다가 될 때까지 말이다.

.

.

.

.

.

사당과 꽤나 멀리 떨어진 곳.

"...이게 맞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제갈찬은 꽤나 고민스러운 얼굴로 입을 떼었다.

"뭐가?"

선우는 의아한듯한 표정을 지은 채 되물었다.

이제와서 이게 무슨 소리란 말인가

"....경아를 속이는 게...영.."

"연기를 그렇게 잘해놓고?"

선우는 어이없다는듯한 표정을 지은 채 되물었다.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기깔난 열연을 펼치던 제갈찬이었다.

그런데 이제와서 저게 무슨 소리란 말인가.

"그건 그렇지만...역시...경아가 괴로워하는 걸 보니..마음이 영 편치 않습니다."

"그럼 이대로 평생 죽은 시체만 붙들고 살게 할래?"

"...그건 또 아니지만.."

"마뜩치 않는 건 이해하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제갈주경은 언젠가 스스로 죽음을 택했을 거야. 방금도 봤잖아? 천령개 내리치려고 한거? 언제든 죽을 준비가 되어있는게 아니면 저런 결단이 나오기 쉽지 않아."

선우는 단호하게 말을 내뱉었다.

".......확실히 위험하다는 느낌이 들긴했습니다."

제갈찬은 동의하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 또한 그녀의 돌발행동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던 차였다.

필시 선우의 말한마디가 아니였다면 그대로 절명해버렸으리라

"그러니까 죄책감갖지말고 잘 따라, 다 네 여동생을 살리려고 하는 짓이니까.."

"......혹여 역효과가 나진 않겠죠?"

제갈찬은 불안한듯한 표정을 지은 채 되물었다.

안그래도 불안한 그녀가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건 아닐까 걱정이 된 까닭이었다.

"걱정하지마, 그런 일은 없을테니까."

선우는 단호하게 말을 내뱉었다.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시는 겁니까?"

"지금 그녀에게 필요한 건 공감과 이해거든, 그게 어느정도 충족되었으니까 허튼 생각을 하진 않을거야."

"공감과 이해라니.....그런 게 부족했다면....이 오라비에게..상담해줬으면..좋았을 것을."

"너로는 무리다. 제갈찬."

"어째서입니까?"

"상실감과 공허함을 아는 사람만이 공감할 수 있는 영역이거든."

선우는 담담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군왕 전하께서는.....연기를 하신 게 아니군요....진심으로...그 아이에게 공감하고..이해해주신 거군요."

"제갈가에서 제일 똑똑한 여자라며? 진심이 아니였다면 대번 눈치챘을거야."

"전하....."

제갈찬은 당장에라도 울것처럼 눈시울을 붉히기 시작하였다.

이루 말할 수 없는 감격이 차오른 까닭이었다.

"제 절을 받으십시오!"

털썩

쿠우웅

곧이어 제갈찬은 망설임없이 땅에 머리를 처박았다.

위대한 군왕의 은혜로움이 너무나 경건하고 송구스러워 도저히 두 다리로 몸을 지탱할 수 없던 까닭이었다.

"넌 가주라는 자가 머리를 몇 번이나 박는거야?"

선우는 어이없다는듯 웃으며 그를 가벼이 타박하였다.

가주라는 작자가 어찌 저리 무릎이 가볍다는 말인가

"전하를 위해서라면 천번 만번도 박을 수 있습니다!"

"알았으니까 그만 박아."

"그럴 수는 없습니다!"

쿵 쿵 쿵 쿵 쿵

제갈찬은 쉴새없이 머리를 박고 또 박기 시작하였다.

이마 가죽에 핏물이 흘러나올 정도로

"왕명이야."

선우는 고개를 절레 절레 내저으며 입을 떼었다.

얘는 꼭 왕명을 내리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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