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모 관찰일지 1일차.
묘시쯤 되는 이른 시간에 기상을 한다.
곧바로 개인 연무장으로 향한 뒤 전신이 땀에 흠뻑 젖을 정도로 검무를 춘다.
검무를 끝내면 목욕을 하고 옷매무새를 단정히 한다.
소량의 미음을 섭취한다.
제갈가의 서고를 향하여 서책을 몇 권 고른다.
점심때까지 서책을 읽는다.
점심이 되면 미음을 먹는다.
그리고 밤늦게까지 서책을 읽는다.
축시 정도에 잠이 든다.
-고모 관찰일지 2일차.
대체로 어제와 비슷한 일상을 보낸다.
묘시에 기상하여 검무를 추고
몸을 씻고 미음을 먹는다.
그리고 서고에서 서책을 고른 뒤 하루종일 독파를 한다.
다른점이 있다면 오늘은 그녀의 딸이 찾아와 말상대를 해준다.
수심 가득한 모습이 인상적이다.
-고모 관찰일지 3일차.
어제와 다를 바 없는 일상이다.
그녀는 매일 규칙적인 생활을 한다.
항상 정해진 시간에 맞춰 행동을 한다.
표정은 언제나 생기가 없다.
아마도 내면의 깊은 상처가 아직 치유되지 않은듯 보였다.
그런 못된 남자는 잊는 게 고모님께도 좋은 일일텐데....실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고모 관찰일지 4일차
오늘은 평소와 다를 게 없었다.
-고모 관찰일지 5일차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고모 관찰일지 6일차
언제나 똑같다.
-고모 관찰일지 7일차
이하생략.
따악
"끄아악!"
경쾌한 타격음과 함께 앳된 비명성이 울려졌다.
더불어 이지적인 외모를 가지고 있는 아리따운 여인.
제갈지아가 울먹이는듯한 표정을 한 채 정수리를 매만지기 시작하였다.
정수리로부터 전해져온 충격이 깨질듯한 고통을 선사한 까닭이었다.
"죽을래? 누가 이렇게 대충 쓰래?"
한편 그녀의 정수리를 가격한 장본인
선우는 눈살을 찌푸린 채 그녀를 타박하였다.
"대..대충 쓴 게 아닌데..."
제갈지아는 억울하다는듯한 표정을 지었다.
대충 쓴 게 아니였다.
정녕 있는 그대로 쓴 것이다.
"첫날만 제대로 쓰고 나머진 날림으로 썼잖아? 근데 대충 쓴게 아니라고?"
"..하지만 정말 하루하루가 똑같았는걸요?"
"매일 똑같아도 제대로 양식을 갖췄어야지! 이하생략이 뭐야! 이하생략이! 성의가 없어도 너무 없잖아!"
".......그..뭔가 같은 글을 반복하면.....종이 낭비일 것 같기도 하고.....왠지..선우님이라면 이해할 줄 같기도 해서....흐갸갸갸갹!!"
쭈우우욱
아쉽게도 제갈지아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그녀의 말랑한 볼이 좌우로 쭈욱 늘어진 까닭이었다.
"이해 못해."
양볼을 쭉 잡아당긴 선우는 눈살을 찌푸린 채 입을 떼었다.
"아허오...아허...흐그갸갸갸갹.."
제갈지아는 눈물을 글썽이며 고통을 토로하기 시작하였다.
이러다간 볼때기가 떨어져나갈 것만 같았다.
"아프라고 잡아당기는 거야."
"제헤로...재헤호...쓰..께..여...제해호...하헤요.!!"
"이미 막장으로 썼으면서 뭘 다시 제대로 해?"
"다..다..기허하호 이허호....져후 기허하호 히허호!!!"
그녀는 필사적으로 애원하기 시작하였다
이러다간 볼따구가 찢어질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좋아. 믿어주지."
선우는 볼을 놓으며 입을 떼었다.
전부 기억하고 있다면 다시금 맡겨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아우우우...우우우..볼에..불타는 것 같아요."
제갈지아는 새빨개진 양볼을 매만지며 말을 이었다.
타는듯한 고통이 양볼에 치밀이오른 까닭이었다.
"더 태워지기 전에 제대로 작성해."
털썩
선우는 그녀 앞에 서류뭉치를 던지며 입을 떼었다.
"....예에.."
제갈지아는 수긍한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리고 다시금 일지를 작성하기 시작하였다.
머릿속에 있는 차근차근 기억을 되뇌이면서 말이다.
.
.
.
.
.
"..여기..있어요."
작성을 끝낸 제갈지아는 선우에게 일지를 넘겼다.
촤르르르륵
일지를 받아든 선우는 빠르게 훑어보기 시작하였다.
"이제야 보고서같네."
그리고 이내 흡족스러운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과연 각을 잡고 제대로 쓰니 꽤나 볼법한 보고서가 나왔다.
똑똑한 애는 똑똑한 애라는 생각이 들었다.
"헤헤헤...감사합니다."
제갈지아는 헤헤 거리며 기분 좋은 웃음을 흘렸다
이제 더 맞을 일 없다는 생각에 안도감이 든 것이다.
따악
"하으으윽!"
하지만 그 예상과는 반대로 선우의 꿀밤이 그녀의 정수리를 정통으로 가격하였다.
불시에 기습을 당한 것이다.
"어..어째서.."
그녀는 믿기지 않다는듯한 표정을 지은 채 되물었다.
"이렇게 잘쓸 수 있으면서 누가 꼼수 부리래?"
더 괘씸하였다.
어찌 두번이나 일을 하게 만든다는 말인가
"..........."
제갈지아는 반박을 할 수는 없었다.
대놓고 꼼수를 부렸다는 걸
그녀 또한 충분히 인지하고 있던 까닭이었다.
"자꾸 이런식이면 이천오백냥이고 뭐가 없어."
"....명심할게요."
제갈지아는 시무룩한 표정을 지은 채 답을 하였다.
거액이 걸린 문제였다.
아무래도 진지함이 조금 부족했던듯 싶었다.
"그나저나 엄청 단조롭네, 연무장이나 서고를 가는 것 외엔 두문불출할 뿐이니.. "
제갈주경의 하루는 무척이나 단조로웠다.
누구를 만나거나
특별히 어딘가를 가지 않았다.
정해진 시간에 연무장과 서고를 가는 것외엔
그 어디에도 가지 않는 것이다.
실로 단조롭다 여길 수밖에 없었다.
"...아무래도...심적인 충격이 크셔서..그러실 거예요...가문으로 되돌아온 뒤로는 쭉 저 상태였거든요."
제갈지아는 씁쓸한 표정을 지은 채 입을 떼었다.
남편인 이재원의 만행이 온세상에 밝혀지고 죽음을 맞이한 이후부터 쭉 저 상태였다.
누구도 만나길 원치 않았고
어디도 가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저 미음만 간신히 넘긴 채 가만히 서책만을 탐독할 뿐
참으로 기구한 삶이 아닐 수가 없었다.
재혼을 해도 충분할 정도로 아름답고 이지적인 고모님이 스스로를 가둬둔 채 살고 있는 걸 보면 말이다.
"그만큼 죽은 남편에 대한 사랑이 지극하다는 증거겠지."
"솔직히 전 이해할 수 없어요...저 였다면 그런 끔찍한 인간따위는 잊어버리고 제 행복에만 집중할텐데."
제갈지아는 입술을 삐죽거렸다.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재원이 어떤 인간이란 말인가
성인군자의 탈을 쓴 채
셀 수조차 없이 많은 여인들을 간살한 위선자이자 추악스러운 흉악범이 아니던가
그런데 어찌 그런 놈을 잊지 못하여 스스로 인생을 옥죈 채 살아간다는 말인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자신이라면 그런 똥수레 같은 남자는 잊고 팔두마차같은 남자로 갈아탔으리라
"너 사랑 안해봤지?"
선우는 히죽거리며 그녀에게 되물었다.
".....무슨 소리예요..당연히 해봤죠!"
제갈지아는 발끈하며 언성을 높였다.
벌써 스물다섯에 다다른 자신이었다.
사랑같은 걸 안해봤을 리 없지 않은가?
"그냥 단순히 좋아하는 거 말고, 밤만되면 떠오르고 그 사람이 떠오르고 그 사람이 없으면 죽을 것 같은...매일매일 애가 타는..그런 사랑말이야."
"........그런 경험은..없긴하지만.."
그렇게 누군가를 열정적으로 좋아해본 적은 없었다.
지금껏 사랑이라고 여겼던 것들은
그저 조건에 맞춘 계산된 호감이었으니
"그럼 아마 평생 이해할 수 없을 거야. 사랑이라는 건 이성으로 해결되는 게 아니거든."
사랑은 어찌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
멍청하다 욕해도
이성적이지 못하다 손가락질 당해도
어쩔 수 없었다.
가장 비이성적이고
가장 비효율적이고
가장 어려운 게 바로 사랑이였으니
"저렇게 비이성적인 게 사랑이라면 전 평생 안할 거예요."
제갈지아는 고개를 좌우로 내저었다.
재녀로서 무림을 뒤흔들던 고모님이 저리 비참하게 변하였다.
"그게 하기 싫다고 안되는 게 아니야, 어느 순간 자신도 모르게 찾아오는 법이니까."
선우는 귀엽다는듯 바라보며 입을 떼었다.
연모의 감정은 제 멋대로 조절할 수 있는 게 아니였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그 어떤 감정보다 강렬하고 뜨거웠으니
가소로우면서 귀여웠다.
사랑 한번 해본 적 없는 처녀가
저리 단언하는 걸 보니 말이다.
"..선우님....아저씨 같아요."
이제 서른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말만 들어보면 한 마흔정도는 먹은 것 같았다.
"죽을래?"
쭈우우욱
선우는 눈살을 찌푸린 채 볼따구를 잡아당겼다.
나름의 명언을 내뱉은 것 같은데
귀담아 듣지 않다니
참으로 괘씸하기 그지없었다.
"으갸갸갸갸가가가!!!!!"
제갈지아는 고통 어린 비명성을 내질렀다.
볼따구의 통증이 한층더 심화된 까닭이었다.
"자..자모..헤써여...자모..해..어어어!"
그녀는 글썽이며 애원하기 시작하였다.
이이상 잡아당겼다간 볼따구가 영구적인 손상을 입을 것만 같았다.
"다음엔 국물도 없어."
적당히 그녀를 괴롭히던 선우가 이내 손을 풀었다.
그리고 그녀가 제출한 일지를 다시금 읽어내려가기 시작하였다.
그녀의 관찰기간 총 열흘이었다.
아직 사흘의 분량이 남아있는 것이다.
"...어?"
그리고 이내 선우의 눈에 이채가 띄기 시작하였다.
예상치 못한 구절이 눈에 들어온 까닭이었다.
"제갈지아."
선우는 차분히 입을 떼었다.
".....네에.."
제갈지아는 빵빵해진 볼따구를 매만지며 답을 하였다.
"여기 외출기록 있네?"
정확히 열흘 째 되던 날
두문불출한 제갈주경은 세가밖으로 외출을 하였다.
그것도 꽤나 오랫동안 말이다.
"네에.....열흘 째되던 날 밖으로 외출을 하셨어요."
"어디로 간거지?"
"....글쎄요?"
"그걸 네가 모르면 어떻게 해!"
빠아악
"아아아악!!"
제갈지아는 다시금 정수리를 움켜쥐었다.
꿀밤에 다시금 작렬한 것이다.
"제대로 감시 안해?"
"그치만.....뒤를 밟는 걸 눈치채고....절 따돌리셨다는 말이에요....."
제갈지아는 억울하다는듯한 표정을 지었다.
고작 일류 수준에 불과한 자신으로서는 초절정에 다다른 제갈주경을 도저히 뒤쫓을 수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어딜 가는지 어떻게 알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럼 적어도 나한테 알렸어야지!"
".......저 혼자 쫓을 수 있을 줄 알았죠.."
"그게 될거라고 생각했어?"
선우는 어이없다는듯 되물었다.
고작 일류수준밖에 안되는 주제에
초절정 고수를 미행할 생각을 하다니
자기객관화가 안되어도 너무 안되어지 않은가?
"......고모님은..나이가 드시기도 했고...현역에서 물러난지도 오래됐고....건강도 많이 안좋아지셨으니까...잘하면..되지 않을까 싶어서.."
"근데 안됐네?"
".....그러게요..어떻게 하죠?"
"어떻게하긴."
덥석
선우는 양손이 제갈지아의 팅팅부은 새빨간 볼을 붙잡았다.
쭈우우우우욱
그리고 사정없이 좌우로 늘리기 시작하였다.
그녀에 대한 마음을 듬뿍 담은 채로
"으갸갸갸갸갸가가각!!!!!"
이내 제갈지아의 비명성이 사방에 울려퍼지기 시작하였다.
**********
"여기서부터 놓친 게 맞아?"
선우는 산길을 가리키며 입을 떼었다.
".........네에."
제갈지아는 퉁퉁 부운 양뺨을 연신 매만지며 입을 떼었다.
"확실한 거겠지?"
선우는 의심스럽다는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워낙 뻘짓을 많이해서 쉽사리 믿음이 가지 않은 까닭이었다.
"확..확실해요! 제 전재산을 걸 수 있어요!"
"너 돈없잖아?"
"그럼...그러니까..몸이라도.."
"볼품없는 네 몸을 어디다쓰게?"
"볼품없다뇨! 나름 나올 때 나오고 들어갈 때 제대로 들어간 뇌쇄적인 몸매라구요!"
제갈지아는 반박하듯 언성을 높였다.
"넌 뇌쇄의 의미를 잘못 알고 있는 것 같아."
선우는 고개를 절레 절레 내저었다.
똑순인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자기객관화가 안되는 여자인듯 하였다.
누가봐도 슬렌더체형을 뇌쇄라고 칭하는 걸 보면 말이다.
"...이게 옷에 가려져있어서 그렇지! 속살은 엄청난게 숨어있다구요!"
"그래, 그래, 알았어, 알았으니까 이제 조용히해라, 집중해야되니까."
"......하나도 안믿잖아요!"
제갈지아는 반발을 하였다.
알긴 뭘 안다는 말인가
하나도 믿지 않는듯한 태도를 보이면서 말이다.
스르르륵
선우는 그녀의 반발을 무시한 채 눈을 감았다.
놀리는 반응이 좋다보니
말장난하면 시간이 가는 줄 몰랐다.
본격적으로 일하기 위해서라도 자제할 필요가 있었다.
우우우우우우우웅
이내 선우 주위로 커다란 무형의 반원이 펼쳐지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산 전체를 뒤덮기 시작하였다.
나뭇잎 하나 하나
자갈 하나 하나
짐승의 털까지
모든 게 감지가 되기 시작하였다.
'......제갈주경은 흔적을 찾는다.'
수많은 짐승과 인간들의 발자국 중
제갈주경과 일치할만한 걸 찾는다.
폭이 좁고 가느다란 여인의 발자국
가장 최근에 찍힌듯한 것들로
빠르게 대조하기 시작하였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찾았다.'
이내 선우는 눈을 반짝였다.
제갈주경의 것으로 추정되는 발자국의 흔적을 찾을 수 있던 까닭이었다.
저벅 저벅 저벅
곧이어 선우는 거침없이 걸음을 옮기기 시작하였다.
"같..같이가요!"
그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제갈지아는 다급히 뒤쫓기 시작하였다.
걸음이 빨라 자칫하면 놓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까닭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산길을 올랐을까
뚝
이내 선우의 걸음이 완전히 멈춰서게 되었다.
목적지에 당도해버린 것이다.
"....하아...하아...하아...하아..."
그와 함께 걸음을 멈춰선 제갈지아는 거친 숨결을 몰아쉬기 시작하였다
너무 달려 폐부가 터질 것만 같았다.
"하아....하아..도착..한건가요?"
"아아, 도착했다. 아무래도 제갈주경은 이 사당에 들른 것 같더군."
"....사당?"
그 말에 제갈주경은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볼 수 있었다.
한쪽 마련된 조그마한 사당을
"이렇게 깊은 산속에 사당이라니..."
그녀는 의아한듯 입을 떼었다.
자세히 기억안나지만 꽤나 험준한 산길이었다.
그런 곳에 사당이라니
의아함이 들 수밖에 없었다.
"떳떳치 않은 사람을 모시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군."
선우는 담담히 말을 내뱉었다.
덥석
끼이이이익
그다음 사당의 문고리를 잡고 서서히 열어젖히기 시작하였다.
그 순간 볼 수 있었다.
받침대 위에 올려져있는 위패 하나를
"이...이재원!?"
그 위패를 마주한 제갈지아의 눈이 휘둥그레지기 시작하였다.
정파무림의 오점이자 최악의 위선자
수많은 여인들을 간살한 흉악한 살인마.
이재원의 이름 석자가 위패에 그대로 쓰여져있던 까닭이었다.
"거봐, 맞지?"
일이 꽤나 재밌게 돌아가게 되었다.
설마하니 무림공적 이재원을 이렇게 몰래 기리는 앙큼한 짓을 하고 있었을 줄이야.
'공략이 좀더 수월해질 것 같네.'
선우의 눈빛이 별빛처럼 반짝이기 시작하였다.
공략이 보였다.
저 철옹성과 같은 미망인을 함락시킬 공략이
이제 남은건 실행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