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협지 안으로 들어와버렸다-1271화 (1,272/1,419)

형주

호북성, 호남성 전체 하남성 일부를 포함한 고대 왕조의 옛지명

형주는 이래저래 자랑거리가 많은 지역이다.

장강 중류의 풍부한 수자원과 수운 활동을 통한 경제적 부유함.

농사에 적합한 비옥한 토지와 온후한 기후

넘치는 일자리들과 몰려드는 사람들

볼거리가 넘쳐나는 역사적인 명소들까지

전략적 요충지는 물론이고 관광지로서도 무엇하나 손색이 없는 자랑거리 넘쳐나는 지역.

그게 바로 형주였다.

그렇다면 여기서 의문이 생긴다.

이런 형주에서 가장 큰 자랑거리는 무엇일까?

의외로 답은 명확하였다.

수많은 자랑거리를 퇴색시킬 정도로

누구나 인정할만한 자랑거리를 하나 가지고 있던 까닭이

다.

그건 바로 중원 누구나 인정할 수밖에 없는 지혜의 화신.

와룡臥龍 제갈량을 천하기재로 키워냈다는 자부심이었다.

제갈량은 과거 전란을 피해 융중산에 초막을 짓고 십년간 기거한 전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실에 주목한 호북사람들은 침을 튀기며 말한다.

융중산의 풍수가 제갈량을 천하기재로 키워내어 역사 속에 그 이름 당당히 남기게 해주었다고 말이다.

사실 관계는 알 수 없지만

이는 호북인들의 자부심과 다를 바 없었다.

제갈량은 그들의 고장을 대표하는 위대한 영웅이었으니

그리고 그런 호북사람들의 자부심은 제갈세가가 호북성에서 급격히 성장하여 터줏대감으로서 자리를 잡을 수 있는 토대가 되어주었다.

제갈량의 후예라는 사실만으로도 수많은 호북사람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제갈주경."

이내 선우는 천천히 입을 떼었다.

형주에서 떠올릴 수 있는 단 하나의 무림세가.

제갈세가

그곳에서 이재원과 깊은 관계를 맺은 이라면 한명외에는 떠올릴 수 있는 이가 없었다.

이재원의 부인이자 끝까지 그를 사랑했던 순정 깊은 여자.

뛰어난 지모와 이지적인 외모로 주목을 받으며 한때나마 지봉智鳳이라 불렸던 여인

제갈주경.

그녀밖에 없는 것이다.

"맞아요, 진마정을 가진 건 제갈주경, 그녀예요."

독고령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동의를 표하였다.

".......어째서 그녀가 진마정을 가지고 있는거지?"

선우는 모르겠다는듯한 표정을 지은 채 되물었다.

분명 진마정은 성화를 피우는 핵심 원료이자 마교의 신물이라고 들었다.

그런데 어찌 그런 걸 정파의 귀부인께서 지니고 있다는 말인가

"이재원이 그녀에게 선물로 줬거든요."

"..마교의 신물을?"

"네에, 신물이긴 하지만 겉보기엔 희귀한 보석처럼 생긴터라 여인들이 꽤나 좋아할 법한 모양새거든요."

영롱한 빛깔을 자랑하는 진마정이었다.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희귀한 보석쯤으로 생각할 것이다.

"....그 새끼 미친놈 아니야? 그런 중요한 걸 왜 선물로 줘? 당장 부숴도 모자랄 판국에."

선우는 어이없다는듯한 표정을 지은 채 입을 떼었다.

성화聖火는 엄연히 마교의 상징이었다.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마교도에게 힘을 주는 정신적인 지주나 다름 없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성화를 피울 수 있는 마교의 신물을 냅다 선물로 전해주다니?

정상인보다는 미친놈에 가까운 모습이 아닐 수 없었다.

"당시 제갈주경이 이재원에게 꽤나 쌀쌀맞게 대했거든...그래서 확실히 꼬시려고 그런게 아닐까 싶네요."

"아무리 여자가 좋아도 그렇지, 그런 짓을 한다고?"

"......그러게요...그땐 별생각 못했는데..지금 생각해보니까 살짝 저능아 같기도......."

독고령은 선우의 말에 동의하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당시에는 마교의 신물마저 선물하는 그의 모습이 담대하면서도 호탕해보였는데

지금 생각보면 왠지 저능아처럼 느껴졌다.

여자가 아무리 좋아도 그렇지

성화를 다시 피우면 어쩌려고 그런 겁대가리 없는 짓을 한다는 말인가

"미친놈이야, 미친놈."

선우는 고개를 좌우로 내저으며 혀를 찼다.

다시 생각해도 도통 미친놈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도 덕택에 진마정이 확보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선우님 입장에선 오히려 좋은 게 아닐까요?"

"그건 또 틀린 말이 아니긴하네."

상황만 놓고보자면 오히려 이쪽입장에선 희소식이라고 볼 수 있었다.

덕택에 핵심 재료인 진마정이 멀쩡할 수 있었으니

'나중에 향이라도 하나 피워주자.'

물론 언젠가 기억이 난다면 말이다.

"금방 구해오도록 하지, 필요한 게 있으면 시종을 시키도록 해라."

이내 선우는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하였다.

진마정을 위치를 파악한 이상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형주로 가시게요?"

"아니, 남창으로 간다."

선우는 고개를 내저으며 입을 떼었다.

"네에?! 어째서요?"

독고령은 이해할 수 없다는듯 표정을 지었다.

제갈세가가 있는 곳은 형주였다.

그런데 어찌 아무 연관없는 남창으로 향한다는 말인가

"그녀의 오라비인 제갈찬을 만날 생각이다."

"..제갈주경이 아니라요?"

독고령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물었다.

진마정을 품고 있는 장본인은 제갈주경이거늘

어찌 그녀의 오라비를 만나러 간다는 말인가

"직접 마주하기에는 좀 껄끄러운 사이거든."

애증만을 품고 있던 다른 여인들과 달리 제갈주경은 이재원을 지고지순하게 사랑하고 있었다.

함께 중원을 주유했건 과거에도

이십여년동안 방치된 세월동안에도

그리고 무참히 죽어나간 현재까지도

그런 그녀가 이재원을 몰락시킨 장본인인 자신에게 좋은 감정을 품고 있을 리 만무하였다.

분명 크게 원망하고 있으리라

"그냥 뺏으면 되는 거 아닌가요?"

이해할 수 없었다.

그가 누구란 말인가

창조신의 신격마저 얻게된 위대한 초월자가 아니던가

그가 원한다면 모든 만물은 그의 의지에 따라야했다.

그는 만물 위에 서있는 위대한 자였으니

그런데 어찌 일을 그리 어렵게한다는 말인가

머리통을 터트린 뒤 강제로 빼앗거나 남몰래 훔치면 되는 것을

"힘의 논리에 지배된다면 짐승하고 뭐가 다르겠어?"

그녀의 말은 분명 틀리지 않았다.

자신은 일을 어렵게 만들고 있다.

원한다면 남몰래 진마정을 가져오는 것도

그녀를 죽이고 강제로 빼앗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였다.

그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절대적인 힘을 가지고 있으니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힘의 논리대로 세상을 굴린다면

자신은 짐승과 다를 바가 없는 존재가 될 것이다.

장선우라는 존재는 사라지고

힘에 취하여 마구잡이로 휘두르는 한마리의 괴물이 완성되는 것이다.

그러고 싶지 않았다.

힘에 취한 괴물이 아닌

장선우로서 살며 모두와 부대끼고 싶었다.

".....이해가 안돼요, 힘이 있는데 휘두르지 않는다니."

"그건 니가 나쁜년이라 그래."

선우는 히죽거리며 답을 하였다.

힘을 숭상하는 마교의 출신인 그녀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사상일 것이다.

그들에게 힘은 절대적인 기준일테니

"...어쨌든 진마정은 알아서 구해올테니까. 그때까지 얌전히 숙소에 처박혀있어. 어디 나가지 말고."

".......나가면 안돼요?"

"당연히 안되지."

선우는 단호하게 말을 내뱉었다.

성화를 만들어낼 유일한 인력이었다.

조심 또 조심스럽게 다뤄야하는 것이다.

".....꽃을 따러가고 싶으면 어떻게 하죠?"

"구석퉁이에 요강 있을거야."

"......그런 곳에서 어떻게 볼일을 봐요!"

독고령은 언성을 높이며 반발을 하였다.

어촌에서조차 고급지게 변소를 만들어 볼일을 봤던 그녀였다.

그런데 요강을 쓰라니!

그런 무도한 말이 어디있다는 말인가

"못봐?"

"못봐요!"

"진짜?"

선우는 천천히 주먹을 들어올렸다.

".............폭력을 쓰신다해도...양보할.. 수 없어요..요강은..진짜..진짜..아니예요."

독고령은 겁을 잔뜩 집어먹으면서도 용기내어 말을 내뱉었다.

깔끔하기 그지없는 그녀로서는 도저히 수용할 수 없는 조건이었던 까닭이었다.

"정말?"

스르르륵

선우는 가벼이 허리춤을 매만졌다.

그러자 바지가 서서히 아래로 내려갔다.

그리고 거대하기 짝이 없는 흉기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무식할 정도로 두껍고 크고 거대한 하나의 철괴.

"................."

그리고 그 철괴를 마주한 독고령은 얌전히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또다시 반항하면 저 철괴로 몽둥이 찜질을 당할 게 자명하였기 때문이었다.

"수긍한 걸로 안다?"

".............네에."

독고령은 마지못해 답을 하였다.

'개새끼...고자나 되버려라.'

물론 속으로 깊은 저주를 하였지만 말이다.

"착하네."

선우는 흡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그녀를 향해 슬금슬금 걸음을 옮기기 시작하였다.

"...왜....이쪽으로 오시는 거죠?"

"착해서 상주려고."

까딱 까딱

선우는 철괴를 위아래로 까딱이며 입을 떼었다.

"....안주셔도 되는데요?"

독고령은 사색이 된 채 뒷걸음질을 치며 말을 이었다.

그가 줄 상이 무엇인지

어림짐작할 수 있던 까닭이었다.

"내가 주고 싶어."

"......싫어요...주지 마세요."

"거절하지."

곧이어 선우는 벼락같은 움직임으로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꺄아아아아아악!!"

이내 방 안에는 독고령의 처절한 비명성이 울리기 시작하였다.

***********

콰앙 콰앙 콰앙 콰앙

수많은 서류 위에 새빨간 도장자국이 쉴새없이 찍혀지기 시작하였다.

과연 내용을 제대로 파악을 하고 있는지

의문이 들 정도로 빠른 속도가 아닐 수 없었다.

그렇게 얼마니 도장이 찍혀졌을까

"후우."

이내 도장을 찍던 장본인

의천맹의 총군사 제갈찬은 땀이 송글송글 맺혔던 이마를 닦아내며 가벼이 한숨을 내쉬었다.

어느정도 일단락되었다고 생각하니

이제서야 한숨 돌릴 수 있던 까닭이었다.

"......어째...일이 끊이지 않는구나."

제갈찬은 혼잣말로 중얼거리기 시작하였다.

마교가 완전히 패망한 뒤

그 전보다 오히려 일거리가 더욱더 늘어난듯하였다.

거대한 대적이 사라지니

문파간의 이권 다툼이 더욱더 활발해진 까닭이었다.

매번 중립을 지키며

중재자의 역할을 하려니 그 부담이 가중될 수밖에 없었다.

".....아무래도...조직을 좀더 개편할 필요가..."

이미 팽창할대로 팽창된 상태였다.

좀더 효율적으로 굴리기 위해선 어느정도 개편할 필요성이 있을 것이다.

그렇게 개편에 대한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차였다.

"밤도 늦었는데 열심이네."

그때 제갈찬의 귓가로 낯선 목소리가 파고들기 시작하였다.

'침입자!?'

제갈찬은 재빨리 품안에 비수를 쥐었다.

그리고 곧바로 목소리를 따라 시선을 돌렸다.

무척이나 긴장한 표정을 지은 채

".....아."

하지만 얼마지 않아 그의 표정이 그대로 풀어지기 시작하였다.

너무나 익숙한 남자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온 까닭이었다.

"내가 사람하나는 잘 뽑았어, 그치."

무림을 구한 위대한 영웅이자

만민 위에 군림하는 왕.

장선우의 등장이었다.

"군왕 전하를 뵙습니다!"

철푸덕

선우를 마주한 제갈찬을 다짜고짜 무릎을 꿇고 머리를 처박았다.

감히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송구한 존재였다.

머리를 처박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과례는 되었어, 오늘은 왕으로 온게 아니니까."

선우는 손사래를 치며 입을 떼었다.

".....하지만.."

왕에게 예우를 갖추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과례라고 할만한 게 아닌 것이다.

"왕명이야."

"명을 받들겠습니다!"

벌떡

말이 끝나기 무섭게 제갈찬은 곧바로 몸을 일으켜세웠다.

한낱 필부가 어찌 위대한 왕의 명령을 거부하겠는가?

천부당만부당한 일이었다.

"잘지냈지?"

"전하께서 친히 보살펴준 덕택에 무탈하게 보낼 수 있었습니다!"

"......딱히 보살펴준 기억은 없는데?"

"이재원의 곁에 있던 죄를 묻지 않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보살펴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너도 그놈한테 속은 거잖아? 딱히 죄를 물을만한 사안도 아니였어."

"몰랐다하여 그 중죄가 사해지는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그저 전하의 아량에 감사할 뿐이옵니다!"

".....뭐, 그렇게 생각한다면야."

선우는 수긍한듯 입을 떼었다.

이런 먹물냄새 진한 샌님은 고집이 상상이상이었다.

차라리 수긍한 척 넘어가는 게 좀더 원활한 대화가 되리라

"그보다 내가 부탁할 게 있는데...혹시 들어줄 수 있어?"

"물론이옵니다! 전하의 명이라면 저 뜨거운 용암 속에서만 산다고 전해지는 만년화리라도 잡으러 갈 것이고 만년설에서나 볼 수 있다는 만년설삼을 캐러갈 것입니다!"

"그렇게까지 어려운 부탁은 아니야."

선우는 가벼이 손사래를 쳤다.

"그냥 보석 하나만 가져다주면 돼."

"말씀만 해주십시오! 뭐든 원하시는 보석을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기둥뿌리를 뽑아서라도 마련해드리겠습니다."

제갈찬은 의욕 가득한 눈빛으로 그를 응시한 채 말을 이었다.

"그렇게 비싼 건 아니야, 제갈세가에 있는 보석이니까."

선우는 차분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제갈세가에 있는 보석 말씀입니까?"

"아아, 제갈가에만 있다고 하더라구."

".......흐음.....제갈가에만 있는 보석이라...도통 감을 잡혀지지 않는군요, 희귀한 보석같은 게 있진 않은데 말입니다."

제갈찬은 모르겠다는듯한 표정을 지은 채 입을 떼었다.

부유한 제갈가에 보석이 없진 않겠지만

그렇다고 선우가 탐낼만한 특별한 보석이 있진 않았다.

그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값비싼 보석뿐인 것이다.

"하나 있다고 하더라구, 네 동생인 제갈주경에게 말이야."

"........경아...말이십니까?"

순간 제갈찬은 당황스럽다는듯한 표정을 지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대답에 당혹스러움을 느낀 것이다.

"소싯적 이재원이 그녀에게 한가지 보석을 선물했다고 하더군, 내겐 지금 그 보석이 필요하다. 제갈찬."

선우는 간단히 용건을 말하였다.

더 뜸들일 필요없다는 생각이 든 까닭이었다.

"가져와줄 수 있는가? 내 값은 부르는대로 주도록 하지."

제갈찬이 거절할 리 없다고 생각하였다.

자신에게 큰 은혜를 입었다 느끼고 있던 제갈찬이었다.

보은을 하는 건 물론이고

큰돈을 벌어들일 기회를 날려버릴 리 없었다.

"......죄송합니다...그건 힘들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예상과 정반대였다.

거절을 표방한 것이다.

'에!?'

선우는 당혹스러움을 느꼈다.

그의 거절을 전혀 예상치 못한 까닭이었다.

".......어째서지?"

선우는 짐짓 진중한 표정을 지은 채 되물었다.

".....이재원이 선물해준 보석이라면 저도 잘알고 있습니다....영원한 사랑의 증표라고...오직 자신에게만 준 선물이라고...매번 자랑하던 물건이었으니까요...."

언제나 자랑하던 물건이었다.

언제나 냉정하고 침착했던 그 아이가

한껏 들뜬 모습을 한 채.

"그러니 확신할 수 있습니다....경아는 그 보석을 넘겨주지 않을 것입니다..."

이내 제갈찬의 표정이 한층 더 어두워지기 시작하였다.

"...경아는 아직까지도 이재원을 사랑하고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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