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르르르르르
혼돈은 전신을 짓누르고 있는 파편들을 거칠게 헤치며 강제로 몸을 일으켜세웠다.
[끄아아아아아아악!!!!!]
그리고 추악스러운 괴성을 내지르기 시작하였다.
그 괴성에는 불시의 일격으로 자신을 날려버린 백월에 대한 분노가 가득 들어차 있었다.
[백워어어어어어어얼!!!!!!!!!!!!!]
이내 혼돈은 자신을 날려버린 장본인, 백월을 바라보며 고함을 내지르기 시작하였다.
별안간 기습이라니
이게 대체 무슨 짓이란 말인가
"으으으윽...귀 아파...바보야...그만 소리질러."
백월은 듣기 싫다는듯 양귀를 부여잡으며 눈살을 찌푸렸다.
영혼마저 진동시키는 추악스러운 괴성에 짜증이 치밀어오른 까닭이었다.
[대체 이게 무슨 짓이더냐!]
".....무슨 짓이긴...보는 그대로인데?"
[뭣이!?]
"너 눈치 없어? 상황파악이 그렇게 안돼? 여우불로 조지고 옆통을 후려쳤잖아?"
백월은 눈살을 찌푸린 채 입을 떼었다.
멍청하기 짝이 없는 혼돈에 대한 짜증이 치밀어오른 까닭이었다.
어쩜 저리 상황파악을 못한다는 말인가
[배신했구나!!! 백워어어어얼!!!!]
"난 배신한 게 아니야!"
백월은 억울하다는듯한 표정을 지은 채 고함을 내질렀다.
"그저 적의 입장에서 충성을 다한 거 뿐이라고!!"
[그게 뭔 말같지도 않은 소리더냐! 그게 배신이지 않더냐!]
"인간계에선 이런 걸 이직이라고 부른대!"
백월은 요랑으로부터 합리화를 그대로 전해주었다.
[네년은 마물이지 않더냐!]
"생긴 게 인간이니까?......괜찮은 게 아닐까?"
더불어 백월 스스로 또한 합리화를 하였다.
배신 행위를 인정하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든 까닭이었다.
[농질과 구영이 네년을 살려둘 성싶더냐!]
농질과 구영은 옛 지배자 답게 잔인하기 짝이 없는 성정을 지니고 있었다.
배신자 따위를 묵과할 수 있을 리 만무하였다.
"하지만 당장 죽는 것보단 나중에 죽는 게 낫잖아?"
백월은 태연스레 말을 받았다.
분명 배신한다는 사실을 드러나게 된다면 자신을 죽게 될 것이다.
구영과 농질 모두 후환을 남겨두는 성격이 아니였으니
하지만 그게 어쨌다는 말인가
일단 지금 당장 목이 달아나게 생긴 판국에 말이다.
[이년! 명예로운 죽음 대신 치욕스러운 생존을 택하였구나!]
혼돈은 깨달을 수 있었다.
그녀가 목숨을 구걸하였다는 사실을
"명예가 딱히 먹잇감을 주는 건 아니잖아?"
[역시 네년은 마경의 지배자로서 턱없이 부족한 년이었다! 명예도 수치도 모르는 더러운 암캐년!]
"마경에 명예가 어딨어? 짐승보다 나은 놈들밖에 없는 주제에, 그리고 내가 강해서 됐지? 명예로워서 됐어? 말똑바로 해, 늙다리 새끼야. "
백월은 신랄하게 혼돈을 비난하기 시작하였다.
그간 요랑으로부터 받은 정신적인 고통을 한풀이하듯 쏟아내고 있는 것이다.
[크아아아아아아아! 추악스러운 년! 내 친히 너를 죽여! 마경을 배신한 이의 최후를 알려주겠다!]
"죽여봐, 어디 죽여지나."
화르르르륵
백월은 주위에 푸른 빛의 불길이 치솟기 시작하였다.
고련을 통해 도달하게 된 여우들의 최상위 불꽃
여우불이었다.
쩌어어어어억
혼돈은 쏟아지는 여우불을 바라보며 아가리를 쩌억 벌렸다.
쇄애애애애애액
그러자 치솟던 모든 여우들이 모조리 빨려들어가기 시작하였다.
"....예나 지금이나 잘처먹네."
백월은 눈살을 찌푸렸다.
혼돈이 잘처먹는 건 알고 있었다.
탐욕을 상징하는 사흉의 마물이었기에
하지만 설마하니 자신의 장기인 여우불마저 저리 쉽사리 먹어버릴 줄은 예상 못하였다.
'.....꼬리가 없어서...화력이 부족한가?'
아마 그럴 확률이 높을 것이다.
요랑에 의해 꼬리가 잘려나가 요력이 현저히 약해진 상황이었다.
혼돈이 탐하기 수월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못 이길 것 같은데...'
만전을 기해도 이길까말까한 상대였다.
지금처럼 약해질대로 약해진 상태로 이길 수 있을 리 만무하였다.
'튈까?'
절레 절레
하지만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인간 하나를 구하긴 하였지만 전서응을 잡아먹은 걸 만회하게엔 턱없이 부족하였다.
요랑에게 맞아죽지 않기 위해선
무언가 눈에 띄는 전공을 세워야하는 것이다.
그렇게 한창 생각에 잠겨있던 찰나
[말이 없구나, 어린 여우야, 겁을 집어먹은 것이냐?]
혼돈은 흉악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백월이 품고 있는 깊고 어두운 불안감을 느낀 까닭이었다.
분명 자신에 대한 두려움에서 파생된 불안감이리라
"흥, 너 같은 건 하나도 안무서워. 똥개새끼야."
그 말에 백월은 가소롭다는듯한 눈빛으로 혼돈을 바라보며 코웃음을 쳤다.
그녀가 진실로 두려워하는 존재는 오직 요랑 하나뿐이었다.
그런데 어디 냄새나는 똥개따위가 맞먹으려고 든다는 말인가
가소로웠다.
너무 가소로워서 코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건방진 년! 네년의 왕인 농질조차 네게 이리 함부로 대하지 못하거늘!]
혼돈은 눈살을 찌푸린 채 고함을 내질렀다.
여우들의 왕조차 자신 앞에선 숨을 죽였다.
자칫 서로 맞서게된다면 승패를 떠나 극심한 피해를 입을 걸 너무나 잘알기에 서로 조심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런 농질 휘하에 있었던 어린 여우가 이리도 건방지게 굴다니
어찌 부아가 치밀어오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어쩌라고? 누구 물어본 사람? 누구 궁금한 사람? 아무도 없죠? 아무도 안궁금하죠? 혼자 화났죠? 열받죠? 그런데 어쩌죠? 약오르는데 아무것도 못하죠? 나 못죽이죠? 죽일 수 없죠? 죽이려고 하면 환술 써서 도망치죠? 못잡아먹죠? 배곪고 뒹굴뒹굴해야죠? 바보죠? 멍청하죠? 음식물 쓰레기나 뒤져먹어야하죠?"
백월은 그런 혼돈의 반응을 즐기며 더욱더 약을 올리기 시작하였다.
[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죽인다!]
쾅 쾅 쾅 쾅 쾅 쾅
이내 혼돈은 참지 못하고 그대로 내달리기 시작하였다.
저 얄미운 여우에게 끝을 알 수 없는 거대한 분노를 토해내기 위해
"히이익!"
그 모습에 백월은 재빨리 몸을 돌려 그대로 줄행랑치기 시작하였다.
달려드는 속도가 상상이상으로 빨랐다.
자칫 잘못하다간 한 방에 잡아먹힐 수도 있는 것이다.
[거기서라! 건방진 여우년아!]
쿵 쿵 쿵 쿵 쿵 쿵
"너 같으면 서겠냐? 멍청아!"
도도도도도도
이내 두 마물은 끈질긴 추격전을 벌이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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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도도도도도도
백월은 쾌속하게 달리고 또 달렸다.
험준한 마경의 지형에서 단력된 지근과 속근이 그녀를 보좌하여 보다 빠르고 날렵하게 만들어준 까닭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내달렸을까
슬쩍
이내 백월은 슬며시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여전히 흉악스러운 눈빛을 반짝이며 내달리고 있는 혼돈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헤헤헤헤...굼벵이 녀석.'
그 모습에 백월은 히죽거리기 시작하였다.
혼돈 또한 빠르긴하였지만 딱히 위협적인 속도는 아니였다.
'....공도 세우고 아프거나 목숨이 위험하지도 않아......이게 인간들이 말하는 일석이조라는 건가!?'
혼돈의 이목을 끈 뒤 도망침으러서 인간들이 대피할 시간을 벌어주었다.
더불어 기동성으로서는 확연히 앞서기 잡아먹히거나 다칠 걱정 또한 덜 수 있었다.
안전과 공적을 동시에 세울 수 있는 최적의 상황을 만들어낸 것이다.
'헤헤헤헤, 역시 난 천재야. 똑똑해 똑똑해.'
쓰담 쓰담 쓰담 쓰담
백월은 손을 뻗어 스스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런 기가 막힌 방도를 마련한 스스로가 너무나 대견스러웠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백월이 자화자찬하고 있을 때였다.
뚝
내달리던 혼돈이 걸음을 멈춰세웠다.
[언젠가는 죽여주마....백월.]
그 다음 저 멀리 있는 백월을 노려보며 으르렁거렸다.
그리고는 미련없이 몸을 돌려버렸다.
쓸데없이 힘빼기 보단 먹잇감을 탐식할 요량이었다.
"어..어디가!?"
그가 몸을 돌리자 백월은 당황한듯한 표정을 지은 채 언성을 높였다.
별안간 어디를 간다는 말인가
[네년은 나중에 상대해주지. 지금은 만찬을 즐겨야하니 말이야.]
"....가지마! 내가 인간들보다 훨씬 더 맛있을 걸?..요력이 가득한 특식이라고!"
[되었다, 어차피 이대론 잡지도 못할 거, 나중에 여유롭게 잡도록 하지.]
"아니야! 나 완전 지쳤어! 좀더 힘을 내면 잡을 수 있을지도..."
백월은 혼돈의 주위를 끌기 위해 필사적으로 호소하였다
아직도 대피하지 못한 인간들이 한가득이었다.
이대로 혼돈이 시선이 돌려지게 된다면 저 탐욕스러운 식탐에 수많은 인간들이 잡아먹히고 말 것이다.
쿵 쿵 쿵 쿵 쿵
하지만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혼돈은 결코 몸을 돌리지 않았다.
이미 마음을 굳힌 것이다.
'안되는데..안되는데..안되는데..'
백월은 울상이 되기 시작하였다.
이러다간 기껏 세운 공적이 수포로 돌아가게 될 것이란 생각이 든 까닭이었다.
그렇게 백월이 한창 안절부절 못하고 있던 때
우와아아아아아앙
멀지 않은 곳에서 아이의 서러운 울음 소리가 터져나오기 시작하였다.
휘익
그 순간 혼돈은 곧바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한 무리의 피난행렬이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먹잇감들이 한데 모여있구나]
줄 줄 줄
혼돈은 입가에 침을 줄줄 흘리기 시작하였다.
쿵 쿵 쿵 쿵 쿵 쿵 쿵
그리고 곧바로 내달렸다.
저 수많은 피난민들을 한 입에 집어삼키기 위해서
"......안돼! 혼돈아! 이 똥개새끼야! 나한테 와! 나한테 오라고!"
백월은 다급히 고함을 내지르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소용없는 짓이었다.
목표를 정한 혼돈의 귀에는 그 어떤 도발도 먹혀들지 않았으니.
'..어떻게...대체..어떻게..'
환술을 쓰기엔 거리가 너무 멀었다.
그렇다고 여우불로 저지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어찌할 도리가 없는 것이다.
".............히잉.."
이내 백월은 울상을 지었다.
우우우우우우웅
그리고 남아있는 요력을 모조리 집중시키기 시작하였다.
그다음 피난민 행렬에 손을 뻗었다.
파팟
그 순간 이변이 일어났다.
그녀의 위치와 피난민들의 위치가 그대로 뒤바뀌어진 것이다.
"아아아아아아악!!!"
콰지지지지직
이내 혼돈의 거대한 아가리가 백월을 씹어버렸고 그녀는 몸뚱이는 완전히 두동강 나버렸다.
[아니!?]
그 모습에 혼돈은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설마하니 그녀가 인간을 위해 몸을 바꿔치기 할 줄은 상상조차 못한 까닭이었다.
그렇게 한창 당황하던 사이
파스스스슥
두 동강났던 백월이 몸이 서서히 수복되기 시작하였다.
"후에에에엥...아파아아아...너무..아파아아..하아아앙..."
이내 몸을 완전히 수복시킨 백월이 울음을 터트렸다.
몸이 두 동강난 고통이 너무나 끔찍한 까닭이었다.
[대체 이게 무슨 짓이지? 여우.]
"흐아아아아앙......나쁜..새끼....이렇게..세게..물다니...흐아앙..내 고운 몸을 두동강 내다니...흐으윽.."
[무슨 짓이냐고 물었다!]
"인간..훌쩍..구했..잖아!...바보야! 보면 몰라!?"
[미쳤구나.....정녕 미쳤어! 인간을 구하기 위해 반백년의 요력이 담긴 꼬리를 희생해!?]
구미호의 꼬리 하나에 담긴 요력은 반백년의 세월이 담겨있었다.
그런데 어찌 그런 걸 인간을 위해 희생한다는 말인가
"훌쩍...훌쩍..몰라! 나도 지금 후회 중이니까! 윽박지르지마! 똥개야! 개새끼야!"
[마물 망신은 네가 다 시키는구나.....백월.]
혼돈은 이를 갈았다.
인간을 위해 제 스스로 희생한 백월에 대한 분노가 치밀어오른 까닭이었다.
어찌 마물의 본질에 벗어난 짓을 저지른다는 말인가
"어쩌라고! 누구 물어본 사람! 누구 궁금한 사람! 아무도 없죠! 또 혼자 지랄났죠!"
[끝까지 주둥아리를 간수 못하는구나! 백월!]
쩌어어어어어억
곧이어 혼돈은 아가리를 쩌억 벌리기 시작하였다.
이 마경을 배신한 추악스러운 배신자에게 끔찍한 최후를 선사할 요량이었다.
질끈
"히이이익."
백월은 눈을 질끈 감았다.
이제 남아있는 꼬리는 하나 뿐이었다.
더는 살아날 여력이 남아있지 않는 것이다.
이번에 죽는다면 진짜로 죽게 되리라
'그냥 튈껄..'
그녀는 후회하였다.
그냥 무시하고 튀어버릴 걸 하면서 말이다.
그렇게 한창 후회하는 사이
혼돈의 숨결이 느껴졌고 백월은 최후를 직감하였다.
인간 대신 죽어버리는 말같지 않은 최후를 말이다.
"끄아아아아아악!"
콰아아아아아앙
그 순간 이변이 일어났다.
끔찍스러운 고통 대신 혼돈의 비명성이 느껴지기 시작한 것이다.
번쩍
백월은 재빨리 눈을 떴다.
그리고 볼 수 있었다.
혼돈의 머리통에 궁기를 처박아버린 아리따운 여인의 모습을
"아세이芽世爾, 기합."
아리따운 여인, 요랑은 백월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이제부터 넌 아세이가 아니라 백월이다."
그리고 입가에 진한 미소를 지었다.
"후에에에에에에엥! 요라아아아앙!"
이내 백월은 북받쳤던 눈물을 터트리기 시작하였다.
그녀가 자신을 인정해주었음을 알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제 노예가 아니라 부하가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