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로 굴러."
"악惡!"
데구르르르르
"우로 굴러."
"악惡!"
데구르르르
"동작 봐라. 제대로 안해? 좌우로 굴러."
"아아아아아악惡!"
백설은 온 열정을 다해 바닥을 구르고 또 굴렀다.
곱게 빗은 흑단과 같은 머리가 미친년처럼 풀어헤쳐졌고 엄선하여 고르고 고른 비단옷이 흙투성이가 되었지만 전혀 개의치지 않았다.
몸이 더럽혀지는 것보다 죽통이 후려쳐지는 게 더욱더 무서웠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구르고 또 굴렀을까
"기립."
이내 요랑이 담담히 말을 내뱉었다.
"악惡!"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백설은 곧바로 몸을 일으켜세웠다.
"다시 물을게, 이번에도 우물쭈물거리면 지금보다 더 빡세게 굴러야할 거야, 알겠어?"
"악惡!"
"너희들의 왕, 구영九嬰은 어디있지?"
요랑은 눈을 가늘게 뜨며 되물었다.
"모르겠습니다!"
"정신 못차렸네, 다시 누워."
요랑은 눈살을 찌푸린 채 입을 떼었다.
그렇게 굴렀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정신을 못차린듯 하였다.
이리 모르쇠 일관을 하다니 말이다.
"아니..정말..정말 몰라...진짜..진짜로.."
백월은 억울한듯한 표정을 지은 채 애원하기 시작하였다.
모른 척하는 게 아니였다.
진실로 구영의 위치를 모르는 것이다.
"거짓말하지마. 지배자급인 네가 구영의 위치를 모르는 게 말이 돼?"
물론 요랑은 그런 백월의 말을 전혀 믿지 않았다.
백월은 엄연히 구영으로부터 인정받은 마경의 지배자 중 하나였다.
인간 사회에 비유하자면 핵심 간부급이라는 소리였다.
그런 그녀가 어찌 구영의 거취를 모를 수 있다는 말인가
"진짜야요. 저 뿐만 아니라 다른 지배자들에게도 어디로 갈건 지 안가르쳐줬어어...."
"내가 그걸 어떻게 믿어?"
"다른 지배자들의 위치는 말할 수 있어! 전부 말해줄게."
비록 구영의 거취에 관한건 알 수 없었지만 다른 간부들은 달랐다. 각각 어디로 향하는 지 누구보다 정확히 알고 있는 것이다.
"그래?"
요랑은 여전히 의심스럽다는듯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되물었다.
"응! 말할 수 있어! 전부 말해줄게! 일단 농질님은..."
그리고 그 눈빛을 마주한 백월은 지배자들의 거취를 좔좔 불기 시작하였다.
어떻게든 요랑의 의심을 지우고 신뢰를 얻기 위함이었다
'잘 말하네.'
요랑은 흡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묻지도 않은 말을 좔좔 부는 백월의 태도가 꽤나 만족스럽게 느껴진 까닭이었다.
'역시 겁박만큼 사람을 진실되게 하는 것도 없다니까.'
일부러 겁박하며 굴린 보람이 있는듯 하였다.
이렇게 효과가 탁월한 걸 보면 말이다.
"불가살이는 여기! 여기로 보냈어!! 정면돌파해서 전선을 무너뜨리라고 했어! 그리고 뇌수는 여기! 여기 중간지점으로 갔어! 보급을 벼락으로 전부 태워버리라고 명령했어! 그리고 도올이랑 도철은 여기! 여기로 같이 움직였어! 압도적인 힘으로 전부 쓸어버리라고 했어!"
백월은 지도까지 펼쳐가며 혼신의 힘을 다해 열정적으로 설명을 하기 시작하였다.
위치는 물론이고 구영이 내린 직접적인 명령까지 전부 말이다.
"궁기랑 혼돈이 빠졌는데?"
그 이야기를 잠자코 듣던 요랑이 의문을 표하였다.
옛 지배자들 중 궁기랑 혼돈의 거취가 빠져있었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란 말인가
"걔네는 구영이 따로 데려간다고 했어!"
"어째서지?"
요랑은 의문 어린 표정을 지었다.
사흉 중 궁기와 혼돈만 콕 찝어 데려간 구영의 행동에 의문이 든 까닭이었다.
"응! 궁기는 창공을 마음껏 날수 있고 혼돈은 땅속으로 이동할 수 있어서! 데려가기 편하다고 했어!"
백월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구영의 말을 그대로 전해주었다.
"창공과 땅속이라.."
그 말을 들은 요랑은 아담한 손으로 턱을 매만지며 고심에 빠져들기 시작하였다.
궁기와 혼돈이라는 단서들을 통해 구영의 거취를 유추하기 위함이었다.
"궁기와 혼돈외에 다른 마물들은 데러가지 않았어?"
이내 요랑은 의문 어린 표정을 지었다.
"응! 오히려 걸리적거린다고 데려가지 않았어!"
"그래?"
요랑은 머리를 굴리고 또 굴리며 단서들을 조합하기 시작하였다.
궁기와 혼돈을 통해 확보한 은밀함과 기동성.
구영과 궁기 혼돈
단 세 마리의 마물들만으로 구성된 소수 정예 전력.
'......애초에 정면돌파할 생각이 없는거야...'
만약 정면돌파할 생각이었다면
은밀함과 기동성을 살린 소수정예를 구성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어마어마한 물량으로 밀어부치는 게 더욱더 유리할테니
'...그렇다면 뒤를 노린다는 건데...어디지?'
덥석
이내 요랑은 붓을 쥐었다.
스윽 스으윽 스윽
그다음 지배자들이 투입된 곳을 차례대로 연결하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한 지역이 유난히 눈에 띄기 시작하였다.
연결된 선들이 그 지역을 완전히 감싸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서녕.'
청해성에서 가장 큰 도시이자
피난민들이 모여드는 최후의 보루
최후방인 해동시로 넘어갈 수 있는 중간지점이자 최전선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을 정도로 가장 군사력이 낮은 곳.
바로 서녕이었다.
'......여기야.'
확신할 수 있었다.
구영과 사흉의 마물들이 향하는 곳이 바로 이곳이라는 걸
최전선에 시선이 팔린 틈을 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민간인 학살을 저지를 요량이었던 것이다.
'역겨운 새끼.'
요랑은 눈살을 와락 찌푸렸다.
구영의 음험하고 역겨운 속내에 짜증이 절로 치밀어오른 까닭이었다.
어찌 이런 추악스러운 짓을 아무렇지 않게 저지를 생각을 한다는 말인가
"아세이芽世爾!"
"악惡!"
"전서응, 가져와."
"전서응이..요?"
"구영이 어디로 향하는 지 알아냈어. 당장 다른 애들에게 전서를 보내야해."
요랑은 침중한 표정을 지은 채 입을 떼었다.
구영의 음험한 속내를 알아낸 이상
가만히 있을 생각따윈 없었다.
최선을 다해 그 끔찍스러운 계획을 저지해야하는 것이다.
"....그..그게.."
요랑의 말에 백월은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은 채 몸을 배배꼬기 시작하였다.
마치 똥마려운 개새끼마냥 말이다.
"뭐해! 빨리 가져와!"
요랑은 눈살을 찌푸린 채 언성을 높였다.
한시가 급한 와중에 뭐하는 짓이란 말인가
"남아있는 전서응이...없어.."
"그게 왜 없어!? 아까 여섯 마리나 남아있었잖아!"
전서응은 차고 넘쳤다.
원활한 소식 전달을 위해 거금들여 대량으로 구매해둔 까닭이었다.
".......있었는데...이젠..없어.."
"아세이, 똑바로 말해...전서응 어쨌어?"
요랑은 살기 어린 눈빛으로 그녀를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사실은...아까...배고파서...맛만 본다는게......."
백월은 필사적으로 눈을 돌리며 말을 이었다.
그녀 스스로도 일이 단단히 잘못됐음을 인지할 수 있던 까닭이었다.
빠아아악
"끄에에에엑!"
데구르르르르
곧이어 찰진 타격음이 울려퍼지고 백월이 머리통을 부여잡은 채 바닥을 구르기 시작하였다.
머리가 빠개지는듯한 고통이 두개골에 그대로 전해진 까닭이었다.
"그걸 왜 처먹어! 이 등신아!"
요랑은 바닥을 구르는 백월을 바라보며 고함을 내질렀다.
유사시 이용하려고 냅뒀던 걸 왜 처먹는다는 말인가
"하으으윽......그게...마경에.....크으윽...나온 이후에..아무것도..못 먹어서.."
인간들을 시식할 생각에 몇 날 며칠을 굶었던 그녀였다.
하지만 요랑에게 제압당하고 인간을 먹을 수 없게 되었고 결국 해서는 안될 선택을 하게 되었다.
대기하고 있던 전서응을 모조리 잡아먹어버린 것이다.
"그럼 밥을 달라고 하지! 왜 전서응을 먹냐고! 이 바보야! 바보야!"
"......그게...밥달라고 하면...맞을까봐."
없는 이유도 만들어 때리는 요랑에게 괜스레 꼬투리를 잡히고 싶지 않았다.
"전서응 먹고 맞을거라는 생각은 안해봤어?"
".....안들킬 줄..알고.."
"근데 들켜버렸네?"
"..........살려주세요.."
넙죽
백월은 한치의 망설임도없이 땅바닥에 머리를 처박았다.
살고자하는 의지가 지배자로서의 자존심이고 뭐고 모조리 날려버린 것이다.
"안죽여."
요랑은 담담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정..정말?!"
백월은 희망 어린 눈빛을 반짝였다.
"죽이진 않아. 죽이지는."
꽈아아악
요랑은 조막만한 주먹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빠아아아아악
그리고 한치의 망설임없이 머리통을 후려쳐버렸다.
"아아아아아아악!!!"
이내 백월의 고통 가득한 비명성이 사방에 울려퍼지기 시작하였다.
************
"땡중들 집합!"
요랑은 고함을 내지르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무너져내린 도시를 복구하고 있던 소림의 승려들이 구름처럼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부르셨습니까!"
그리고 그들의 우두머리는 광해가 우렁차게 답하였다.
"니들 중 누가 제일 발이 빨라?"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소승이 가장 빠른 발을 지니고 있습니다!"
광해는 손을 번쩍 든 채 고함을 내질렀다.
"그 다음은?"
"다른 소림승은 엇비슷한 편입니다!"
"그래? 니가 확연히 빠르다 이거지?"
"그렇습니다."
"잘됐네, 너 심부름 좀 해라."
"........네에?"
순간 광해는 멍청한 표정을 지은 채 되물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그녀의 말에 당혹스러움을 느낀 까닭이었다.
별안간 심부름이라니!?
저게 대체 무슨 소리란 말인가
"당장 과락으로 소양이랑 하윤이한테 말 좀 전해줘."
".......제가..말입니까!?"
광해는 의심스럽다는듯한 표정을 지은 채 되물었다.
"그래, 너."
요랑은 확정짓듯 말을 내뱉었다.
"....그..단순히 말을 전달하는 일이라면... 전서응을 쓰시는 게.."
"아쉽게도 남아있는 전서응이 없어. 쟤가 다 처먹었거든."
요랑은 엄지 손가락으로 뒤쪽을 가리켰다.
훌쩍 훌쩍 훌쩍 훌쩍 훌쩍
그곳에는 여기저기 쥐어터져 만신창이가 된 모습으로 훌쩍이고 있는 백월이 시립해있었다.
"그렇다면...다른 소림승을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소림의 고승으로서 무림에서도 존경받는 명사가 바로 자신이었다.
이런 자신이 전령을 짓이라니
말도 안되는 일이었다.
"니가 가라, 과락시."
요랑은 광해의 말을 단호하게 거절하였다.
"어..어찌하여..?"
말을 전하는 거면 자신외에 다른 이를 보내도 충분한 일이 아니던가
그런데 어찌 자신을 콕 집어 지목을 한다는 말인가
"이게 엄청 급해서 발빠른 사람이 필요하거든."
한시가 급한 상황이었다.
조금이라도 발빠른 이를 보내는 게 최선의 선택인 것이다.
"하지만...저는..."
광해는 무어라 반박을 하려고 하였다.
"너는 뭐?"
그러자 요랑이 눈살이 찌푸린 채 되물었다.
알았습니다
한마디하면 될 것을 끝까지 반박하려는 광해의 태도에 짜증이 치밀어오른 까닭이었다.
"...소림의 명사인데.."
"그게..뭐?"
"전령짓을 하기엔 모양새가..."
"너 뒈질래? 한시가 급한데 모양새가 문제야?"
요랑은 있는대로 눈살을 찌푸리기 시작하였다.
전쟁 중 체면을 찾는 그의 태도에 짜증이 치밀어오른 까닭이었다.
"지천이는 갔다오라니까 군말없이 가던데, 넌 뭔데? 뭐가 그리 잘났길래. 안간데?"
"갈지천 대협 말씀입니까!?"
광해는 놀란듯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되물었다.
갈지천이라 하면 청수검왕이라고 불리우는 초극의 고수가 아니던가
그런 그가 전령이 되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니?
"급하다니까, 성치 않은 몸으로 냅다 달렸어. 근데 넌 뭔데? 모양새? 뒈질래? 니 자존심이 민간인 수천 수만명 보다 소중해? 부처가 그렇게 가르쳤어?"
".........소승이 생각이 짧았습니다. 죄송합니다..."
광해는 부끄러움을 느끼고 고개 숙여 사과를 하였다.
체면치레에 얽매여 협의를 잃었음을 깨달은 까닭이었다.
"죄송한 거 알면 바로 출발해. 지체하지 말고."
"그리 하도록 하겠습니다. "
광해는 공손히 어투로 답을 하였다.
체면치레따위는 신경치 않고 훌륭히 전령으로서 역할을 수행할 심산이었다.
"천무맹주와 봉황대주께는 무슨 말을 전하면 되겠습니까?"
"구영九嬰이 노리는 곳이 서녕이라고 전해줘. 그럼 알아서 할거야."
"알겠습니다. 그리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휘익
광해는 허리숙여 인사한 뒤 그대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 곧바로 무거우면서도 쾌속한 신법을 발휘하기 시작하였다.
소림에 전해져 내려오는 절정의 신법.
대나이신법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아세이芽世爾."
그런 광해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요랑이 입을 떼었다.
"훌쩍...훌쩍...악惡..."
그러자 뒤편에서 훌쩍이던 백월이 곧바로 답하였다.
"우리는 서녕으로 간다."
"...악惡"
백월은 힘없이 답을 하였다.
"너, 서녕에 가서 제대로 만회하지 못하면 뒈지게 맞을 줄 알아."
요랑은 살벌한 눈빛으로 그런 백월을 노려보며 입을 떼었다.
"....악惡."
끄덕 끄덕 끄덕
그 살벌함에 겁을 잔뜩 집어먹은 백월은 연신 고개를 주억거리기 시작하였다.
저 흉악스러운 거미라면 자신을 충분히 뒈지게 팰 수 있을거란 생각이 든 까닭이었다.
"가자."
이내 요랑은 몸을 돌려 그대로 걸음을 옮겼다.
전령도 보내놨으니 더는 지체할 이유가 없다고 여긴 까닭이었다.
졸 졸 졸
백월은 그런 요랑의 뒤를 졸졸 따라가기 시작하였다.
마치 어미를 뒤따르는 오리새끼마냥 말이다.
그렇게 두 요물은 서녕으로 향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