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배신해라."
요랑은 악의적인 미소를 지은 채 입을 떼었다.
"배..배신!?"
백월의 눈이 화등잔만하게 커지기 시작하였다.
예상치 못한 제안에 당혹스러움을 느낀 까닭이었다.
"응, 그럼 살려줄게."
요랑은 가벼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배신이라면...뭘 어떻게 해야요?"
백월은 떨리는 목소리로 그녀에게 물었다.
존댓말인지 반말인지 모를 어투로 말이다.
"간단해, 마경魔境의 전력과 전략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앞으로는 구영이 아니라 내게 충성하고 명령을 충실히 이행하면 돼. 간단하지?"
요랑은 순진한 어린 여우에게 배신에 대해 상세히 설명해주었다.
"........그..그런...짓을 하면 구영이 나를...죽일텐데?"
그 말을 들은 백월은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은 채 말을 이었다.
마물들의 왕, 구영은 비열하고 잔혹하며 철저한 마물이었다.
만약 자신이 배신하였다는 사실을 알게된다면 결코 관대하게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지금 죽는 것보단 낫지 않겠어?"
요랑은 악동과같은 미소를 지은 채 협박을 하였다.
".........."
그 악의적인 미소를 마주한 백월은 입을 다물었다.
그녀의 말이 진심임을 인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만약 여기서 거절을 한다면 지체없이 죽여버릴 것이다.
끔찍한 고통을 선사한 채로 말이다.
"어떻게 할래?"
"............"
백월은 곧바로 답하지도 못하였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놓인 까닭이었다.
만약 배신을 한다면 지금 당장은 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 후였다.
만약 살기위해 배신하였다는 사실이 알려진다면
구영은 물론이고 자신을 끔찍히 아끼는 농질조차 미련없이 자신을 죽여버릴 것이다.
두 존재 모두 배신이라는 중죄를 묵과할 정도로 관대한 성격은 아니였으니.
"...그냥...살려주면 안될까?... 놔주기만 하면 얌전히 마경으로 돌아가서 평생 처박혀서 나오지 않을 게....인간도 절대 잡아먹지 않을게. 응?"
백월은 애처로운 표정을 지은 채 말을 내뱉었다.
그냥 돌아가고 싶었다.
아무도 배신안하고
누구 밑에도 들어가지 않고
조용히 영역으로 돌아가 왕처럼 군림하고 싶었다.
"당연히 안되지. 놔줄 이유가 없잖아?"
요랑은 단호하게 거절하였다.
"선배 마물로서......아량이나 배려같은...이유로는 안될까?"
"될 것 같아?"
요랑은 되려 물었다.
정녕 가능할 것 같냐고 말이다.
"....안될 것 같아아.."
백월은 울상이 된 얼굴로 입을 떼었다.
"잘아네."
"히잉....근데..나..정말 배신하면..죽어...구영이..나 죽일거야...아홉 대가리로 이리저리 물어뜯은 뒤 찢어서 죽여버릴거야..그리고..또...또...농질님도..가만두지 않을 거야...날 제일 예뻐하긴 하는데...그래도 죽일거야...여우 일족에게 있어서 배신은...엄청엄청 큰 중죄란 말이야....그러니까...그냥..한 번만..봐줘어...응?"
백월은 울먹이는 목소리로 애원을 하기 시작하였다.
"그건 네 사정이잖아?"
하지만 요랑에게는 어림도 없었다
백월이 찢겨죽던 말던 그녀에겐 전혀 상관없는 일이였기 때문이었다.
"내가 왜 네 사정을 일일히 봐줘야하지?"
"......흐윽...흐윽...흐윽...우와아아아앙!"
북풍한설처럼 차가운 말에 결국 백월은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왠지 모를 설움이 가슴속에 폭발한 까닭이었다.
"시끄러워."
따아아악
요랑은 눈살을 찌푸리렸다.
그리고는 백월의 이마에 가벼이 손가락을 튕겼다.
"아아아아악!!!!!"
데굴 데굴 데굴 데굴
울어제끼더 백월은 이마를 부여잡고 땅바닥을 데굴데굴 구르기 시작하였다.
손가락을 통해 전해진 충격이 두개골을 넘어 뇌까지 전해진 까닭이었다.
어찌 이리도 아프단 말인가
"일어나. 또 맞기 싫으면."
요랑은 그런 백월을 바라보며 입을 떼었다.
벌떡
그 말을 들은 백월은 빨갛게 부어버린 이마를 양손으로 부여잡은 채 재빨리 몸을 일으켜세웠다.
마음같아선 이 끔찍한 고통을 온몸으로 표현하고 싶었지만 또 맞고 싶진 않은 까닭이었다.
"한 번만 더 떼쓰고 울면 배신이고 뭐고 그대로 저승길로 보내버릴거야. 알았어?"
끄덕 끄덕 끄덕 끄덕
백월은 차오르는 눈물을 최대한 꾹 참으며 격렬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죽음에 대한 위협이 두려움이 그녀의 참을성을 대폭 늘려준 것이다.
"자아, 그럼 결정해, 배신할 거야? 말거야?"
요랑은 차분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참고로 마지막으로 물어볼 거야. 만약 이번에도 선택안하고 징징대면 그냥 죽여달라는 걸로 알고 머리통을 터트려버릴거야."
그리고 살벌하기 그지없는 말을 덧붙였다.
"......결..결정할게!"
그 흉흉한 말에 백월은 곧바로 답을 하였다.
"좋아, 그럼 당장 대답해."
요랑은 눈을 가늘게 뜬 채 되물었다.
"나는......그러니까....나는..!"
찰나의 순간
백월은 머리를 최대한 빠르게 굴리기 시작하였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을 하기 위해서
"배신할게! 전부 배신할테니까! 나...나는 죽이지마!"
그리고 결정하였다.
요랑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결국 살기위해 배신을 결정한 것이다
"그 말 진심이야?"
요랑은 의심스럽다는듯한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진짜야! 전부 말해줄게! 마경에 전력이 어떻게 되는지! 괴물들의 특징은 물론이고 약점이 무엇인지! 어떤 꿍꿍이를 가지고 중원에 침략했는지!"
백월은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내기 시작하였다.
신뢰를 주지 못한다면 그대로 죽음을 맞이할 것이란 생각이 든 까닭이었다.
"그래?"
요랑은 그런 백월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혹여 거짓이 있는 건 아닌지 생각하며.
"믿어줘어...진짜야.."
백월은 애처로운 눈빛으로 요랑을 바라보며 애원을 하였다.
그녀는 진심으로 배신을 생각하고 있었다.
훗날 구영과 농질의 분노가 두렵긴 하였지만
지금 배신하면 적어도 당장 죽을 일은 없었다.
생존률은 이 편이 훨씬 더 높은 것이다.
그런데 어찌 배신치 않을 수 있겠는가
"좋아, 믿어줄게."
그 진심이 닿은 것일까
곧이어 요랑은 수긍한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진짜!? 진짜지!? 고마워! 고마워! 나 잘할게! 훌륭한 배신자가 되기 위해 노력할게!"
울먹이던 백월은 환한 미소를 지었다.
요랑의 신뢰에 기쁨이 물밀듯 차오른 까닭이었다.
"그래, 그래 훌륭한 배신자가 되렴. 그렇다고 날 배신하면 안돼. 알았지?"
'응! 응! 절대 배신안할게! 충성을 다하는 배신자가 될게!"
백월은 모순적인 말을 지껄이며 충성을 맹세하였다.
"흐음, 좋아."
요랑은 흡족스러운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정도로 군기가 바짝 들어갔다면 쉽사리 배신하지 못할 것이란 생각이 든 까닭이었다.
"그럼 나는 살려주는 거지?"
"살려줄게, 약속은 약속이니까."
요랑은 태연히 말을 내뱉었다.
"고마워...정말 고마워....진짜 실망시키지 않을게."
백월은 감동 어린 표정을 지었다.
살 수 있다고 생각하니 절로 감격이 차오른 까닭이었다.
그렇게 두 마물사이에서 훈훈한 분위기가 흐르고 있을 때였다.
"안된다!"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광해가 다급히 고함을 내질렀다.
"마물을 받아들이다니! 이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넌 뭐야?"
요랑은 눈살을 찌푸린 채 되물었다.
자신의 결정에 불복하는 대머리가 마음에 들지 않은 까닭이었다.
"소림의 광해라고 한다! 다시 생각해야한다! 저건 구미호다! 사람에게 해악을 끼치는 구미호란 말이다! 당장 죽여야한다!"
광해는 열변을 토해내기 시작하였다.
어떻게든 백월을 죽이기 위해
"사람한테 해악끼쳤어?"
요랑은 백월은 돌아보며 물었다.
"아니?"
도리 도리
백월은 고개를 좌우로 내저었다.
"안했대잖아?"
요랑은 광해를 돌아보며 물었다.
"전부 시뻘건 거짓말이다! 구미호는 본디 인간을 홀려 간을 빼먹는 흉악스러운 존재란 말이다!"
"그렇다는데?"
"나는 마경에 처박혀서 인간을 마주한 게 오늘이 처음인걸?"
백월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구미호긴 하지만 마경에 처박힌 탓에 아직까지 인간을 잡아먹은 적 없는 그녀였다.
"그럼 괜찮겠네."
요랑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아니된다! 죽여야한다! 죽여야한다는 말이다!"
광해는 끈덕지게 불복하기 시작하였다.
저 요망한 구미호는 소림의 정수를 가로챈 장본인이었다.
여기서 죽이지 않는다면 소림의 근간이 흔들릴지도 모를 일인 것이다.
"야, 대머리."
요랑은 짜증 어린 표정을 지은 채 입을 떼었다.
"뭐..뭣?!"
"네가 뭔데 자꾸 이래라 저래라야?"
"난 소림의 광해이다!"
"그게 어쨌는데?"
".........?!"
광해는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보통 소림의 제자임을 드러낸다면 무인이든 관리든 존경을 표하기 마련이었다.
소림의 명성은 결코 낮지 않으니 그런데 어찌 저런 날선반응을 보인다는 말인가
"설마 소림을 모르는 것인가!"
"알아, 대머리들 모여있는데."
"단순히 그런 곳이 아니다!"
소림은 불법을 설파하고 수련을 통해 해탈에 도달하기 위해 모여든 중생들의 거취였다.
단순히 대머리가 모여있는 곳이 아닌 것이다.
"어찌됐든 거기 소속됐다고 나한테 명령할 권리는 없을텐데?"
"저 구미호는 소림의 근간을 흔들었다. 당장 처죽여야한다는 말이다!"
"그럼 네가 직접 하던가? 난 얘 죽일 생각 없어."
"너는 우리의 아군이 아니던가!"
"난 내가 사랑하는 이들 편이야.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이들 중엔 소림의 대머리들은 없어."
"역시 너도 저 구미호와 다를바 없는 마물이구나! 대의따윈 안중에도 없이 제 안위만을 살피는 걸 보면 말이야!"
광해는 연신 고함을 내지르기 시작하였다.
마물이라곤 하나 나름대로 아군이라고 굳게 믿었던 그녀였다.
그런데 저런 말을 지껄이다니
역시 마물은 마물이란 생각이 들었다.
"마물한테 인간의 명분을 강요하지마. 그런 것따윈 나한테 눈꼽만큼도 중요하지 않으니까."
그녀에게 중요한 건
선우
그리고 소중한 친구들뿐이었다.
인간들이 부르짖는 대의따위는 아무래도 좋은 것이다.
"그나저나 생각해보니까 꼴받네. 너 뒈질래? 기껏 구해줬더니 말을 그따위로 개같이 해? 목숨 여러벌이야? 몇 개 없애줘? 응?"
곧이어 요랑은 눈살을 와락 찌푸린 채 입을 떼었다.
대충 맞장구쳐주긴 했는데 생각해보니 열받았다.
뒈질뻔한 걸 기껏 구해줬더니 저게 무슨 개같은 소리란 말인가
"...........그..그건...네가...구미호를 죽이지 않으니까.."
그 말에 뜨끔한 표정을 지은 채 광해는 말을 잇지 못하였다.
다급함에 목숨을 구함받았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었던 까닭이었다.
"까고 있네, 그게 이유가 된다고 생각해? 부처가 은혜따윈 저버리라고 가르치디? 머리 없는 짐승은 거두지 말라고 하던데 그 이유가 있었네."
"그건...검은 머리짐승이 아니던가?"
"오늘부턴 대머리도 마찬가지야."
요랑은 사나운 표정을 지은 채 입을 떼었다.
"....크으윽....은혜는 고맙게 생각한다...평생 잊지 않도록 하겠다..하지만 저 짐승을 감싸겠다면 은혜와 별개로 소림은 널 적대할 수밖에 없다!....저 짐승은 소림의 정수를 전부 앗아갔으니!"
"해봐."
"뭣이!?
"적대해보라고"
"소림이 두렵지 않다는 말인가!"
"안무서우니까 적대한다고 하지. 너 바보야?"
요랑은 한껏 비웃으며 말을 내뱉었다.
"소림은 무림의 태산북두! 네가 아무리 강해도 소림 전체를 적으로 돌린다면 결코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온 무림은 물론이고 황실조차 소림과 함께할테니!"
광해는 살벌한 협박을 하기 시작하였다.
소림은 정파무림의 정신적 지주이자 황실과도 연이 깊은 곳이었다.
그런 마음먹고 적대를 한다면 제 아무리 절대적인 강자라해도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재밌는 말을 하네."
요랑은 재밌다는듯한 표정을 지었다.
광해의 협박이 꽤나 우습게 들린 까닭이었다.
"너 내가 누군지 모르지?"
"모른다!"
"그래?"
스르르륵
요랑은 물흐르듯 자연스레 걸음을 떼었다.
그러자 이내 신형이 광해의 코앞에 닿게 되었다.
소근 소근 소근
곧이어 요랑은 광해의 귓가에 대고 작게 소근거렸다.
화아아악
그 순간 광해의 눈이 화등잔만하게 커지기 시작하였다.
전혀 예상치 못한 말에
결코 믿을 수 없는 말에
경악스러움이 차오른 까닭이었다.
"정...정말...이십니까?"
광해는 사뭇 공손해진 어투로 말을 내뱉었다.
"뭣하면 나중에 당사자들한테 물어보든가."
"............"
광해는 입을 다물었다.
그녀의 말이 거짓이 아님을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던 까닭이었다.
"멸문은 당하기 싫지?"
털썩
곧이어 광해는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자신이 어떤 존재에게 무례를 범하였는지 인지할 수 있던 까닭이었다.
"부디...이 한 목숨으로 모든 걸 끝내주십시오....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광해는 간절히 빌었다.
자칫 잘못하다간 소림의 멸문당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까닭이었다.
"대머리 목숨 받아서 어디다 써?"
요랑은 태연히 말을 받았다.
"봐줄테니까, 앞으론 입 함부로 놀리지마. 마물 혐오 멈추고. 수련을 쌓으면 나름 선계에 들 수 있는 영물이 되니까."
"감사합니다...정말 감사합니다. 명심하겠습니다! 천일간의 묵언 수행으로 진심을 내보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광해는 감격 어린 표정을 지은 채 감사를 표하였다.
"그래, 지켜본다. 너."
휙
말을 마친 요랑은 그대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하였다.
"와아아아.."
백월은 그 모습을 반짝거리는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저 꼬장꼬장한 땡중을 말 몇마디로 제압하였다.
굴복보단 죽음을 부르짖었던 땡중의 머리를 땅에 처박고 비굴하게 빌도록 만들었다.
'....멋지다.'
멋졌다.
같은 마물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그렇게 백월은 한참동안이나 요랑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동경으로 가득한 시선으로 말이다.
"안와?"
그때 앞서가던 요랑이 걸음을 멈추고 입을 떼었다.
"갈...갈게!"
그 말에 백월은 다급히 요랑의 뒤를 쫓기 시작하였다.
꽤나 경쾌한 걸음으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