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몇 년 묵었어?"
요랑은 싸늘하기 그지없는 눈빛을 반짝이기 시작하였다.
"내가 몇 년 묵었든 네가 무슨 상관인데!"
백월은 인상을 와락 찌푸린 채 언성을 높였다.
"상관할 만하니까, 물어본 거 아니겠어? 대답이나 하는 게 어때?"
요랑은 차분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싫어! 안말해줄거야! 메롱!"
백월은 혀를 쭉 빼내밀었다.
"너, 버릇이 없네."
"버릇없으면 어쩔건데? 이 바보야! 멍청아! 해삼아 멍게야! 말미잘아!....."
백월은 잔뜩 뿔난 표정으을 지은 채 거침없이 쏘아붙였다.
그녀가 알고 있는 가장 심한 욕을 내뱉기 시작한 것이다.
"너 마경魔境에서 왔지?"
요랑은 그런 그녀의 말허리를 단번에 끊어버렸다.
"........!?"
그 순간 악의적인 말을 쏟아내던 백월의 화등잔만하게 커지기 시작하였다.
전혀 예상치 못한 말에 당혹스러움을 느낀 것이다.
마경은 아주 오랫동안 은폐된 금지禁地.이자
교인들조차 존재여부에 대해 의문을 품고 있는 비경秘境이었다.
그런데 마경의 존재를 언급하다니?
대체 어떻게 된 일이란 말인가
"......마경魔境을....알아?"
백월은 사뭇 긴장 어린 표정을 지은 채 물었다.
"왜 모르겠어? 내가 나고 자란 곳인데."
요랑은 태연스러운 표정을 지은 채 입을 떼었다
그녀 또한 마경 출신이었다
비록 구영때문에 서식지를 옮길 수밖엔 없었지만
그 근원을 잊을 리 없었다.
".......너 마물魔物이구나?"
백월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마경에서 나고자랐다는 건
즉 마물이라는 걸 의미하였다.
마경魔境의 지독한 환경을 버텨낼 수 있는 건 오직 마물뿐였으니.
"그럼 인간인줄 알았어?"
요랑은 재밌다는듯한 표정을 지은 채 되물었다.
"마물이라면 어째서 날 방해하는 거지? 날 모르는 거야? 나 백월이야! 구영에게 인정받은 마경의 신흥강자! 구미호 백월!"
백월은 모르겠다는듯한 표정을 지은 채 언성을 높였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이 누구란 말인가
마물들의 왕, 구영으로부터 인정받고 영역을 하사받은 마경의 강자이자
이름없는 일반적인 마물들따위는 감히 말조차 못섞는 격이 다른 존재.
구미호 백월이 아니던가
그런데 감히 이름없는 마물따위가 자신을 거스르려들다니
말도 안되는 일이었다.
이는 마물들의 왕, 구영이 만든 위계를 거스르는 명백한 하극상인 것이다.
"너 어디 출신이야!? 대수림? 바위산? 화산지대? 고원? 아니면 얼음동굴? 붉은 호수? 대체 어디 출신이길래! 이렇게 버릇이 없어! 네 직속 포식자에게 따끔하게 한마디 해야겠어! 대체 애들 교육을 어떻게 하길래 이렇게 버릇이 없어!"
백월은 짜증 가득한 표정을 지은 채 언성을 높이기 시작하였다.
이건 담당 포식자에게 따질 문제였다.
대체 영역 관리를 어떻게 하길래
이런 듣도 보도 못한 잡스러운 마물이 천지분간조차 못한 채 멋대로 군다는 말인가.
"검은 늪."
요랑은 담담한 어조로 입을 떼었다.
"거짓말!
백월은 즉각적으로 고함을 내질렀다.
생각할 가치조차 없는 거짓말이라 느낀 까닭이었다.
검은 늪이 어디란 말인가
마물들의 왕 구영이 서식하는 장소이자
그외엔 어떤 생명체도 살 수 없는 죽음의 지대가 아니던가
그런데 그곳의 출신이라니?
말도 안되는 소리였다.
"거짓말 같아?"
요랑은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은 채 되물었다.
"당연히 거짓말이지! 검은 늪은 구영이 서식하고 있는 곳이야! 구영 외에 다른 모든 존재들은 발을 내딛는 것만으로 소멸되어버리는 죽음의 땅이라고! 그런데 네가 검은 늪 출신이라고? 귀신이 아닌 이상 불가능한 일이라고!"
백월의 태도는 확고하기 그지없었다.
무자비한 구영의 성격을 너무나 잘알고 있던 탓이었다.
"검은 늪이 처음부터 죽음의 땅이였던 건 아니야."
요랑은 차분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뭐?"
"아주 오래 전엔 그곳도 생기가 넘쳐나는 장소였어. 포악한 구영이 자리를 잡기 전까지는 말이야."
요랑은 가라앉은 눈빛으로 그녀를 응시하며 입을 떼었다.
"대체 언제적 이야기를 하는 거야! 구영이 검은 늪에 자리 잡은 게 벌써 칠백 년........아."
순간 백월은 머릿속에 무언가 번뜩이기 시작하였다.
아주 오래 전 여우들의 왕 농질로부터 전해들었던 이야기가 전두엽을 스쳐지나간 것이다.
"..........너, 마경에서 도망친 거미들 중 하나구나."
곧이어 백월은 깨달았다는듯한 표정을 지은 채 말을 이었다.
어느정도 유추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그래.....예전에 전해들었던 적 있어, 칠백 년전 구영과 영역싸움에서 패배해서 도망친 멍청한 거미들에 대한 이야기를 말이야."
구영이 등장하기 전까지 검은 늪은 주인은 다름아닌 인면지주들이었다.
타고난 무력과 단합력 그리고 웬만한 마물따위는 단숨히 녹여버리는 독기를 바탕으로 검은 늪의 주인으로서 군림하고 있던 것이다.
하지만 화무십일홍이라고 했던가
언제까지나 검은 늪을 군림할 것 같았던 인면지주들은 갑작스레 서식지를 옮겨버린 구영에게 패해 검은 늪을 빼앗기게 되었고 그대로 마경 내에서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감히 마물들의 왕에게 대항한 죄를 물어 척살령이 내려졌고 모든 마물들의 표적이 된터라 더는 마경에 머물 수 없게 된 것이다.
"맞아, 내가 그 도망친 거미들 중 하나야."
요랑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동의를 표하였다.
뼈아픈 과거긴 하였지만 엄연한 사실이었다.
부정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패배자면 패배자답게 조용히 숨어 지낼 것이지. 마경의 행사를 방해하는 이유가 뭐지?"
백월은 눈살을 찌푸린 채 입을 떼었다.
"아니꼬와서."
요랑은 태연히 말을 내뱉었다.
"죽고 싶은거야?"
백월은 살기 어린 눈빛을 반짝였다.
모든 게 장난스러운 그녀지만
구영이 정해놓은 위계 질서에는 무척이나 예민하게 반응하는 그녀였다.
위계질서를 어긴다는 건 곧 마물들의 왕을 거스르는다는 하극상이였으니
"죽일 순 있고?"
요랑은 가소롭다는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너 말야, 너무 주제를 모르는 거 아니야?"
백월은 짜증 어린 표정을 지은 채 입을 떼었다.
"마경에서 도망친 겁쟁이주제에 말야."
"같은 상황이였다면 여우들의 왕인 농질도 꽁지빠져라 도망쳤을 걸?"
"웃기지마! 농질님은 달라!"
"다르긴 뭐가 달라? 구영을 이길 수 없는 건 매한가지일텐데."
요랑은 얄궂은 표정을 지은 채 말을 이었다.
"아니야!"
"그럼 물어보자, 만약 구영이 척살령을 내리면 농질이 살아남을 수 있을 것 같아? "
"............."
백월은 답하지 못하였다
제 아무리 농질이 여우들의 왕이라고 해도 마물들의 왕인 구영과는 현저한 격의 차이를 보였다.
구영이 마음먹고 척살령을 내려버린다면 결코 살아남을 수 없는 것이다.
"왜 대답이 없어? 입에 아교라도 바른거야? 응?"
"닥쳐! 구영이 농질님에게 척살령을 내릴 리 없잖아!"
"그러니까 만약이라는 가정을 붙였잖아? 말귀 못 알아들어? 너 바보야? 아니면 지능이 좀 딸려?"
"일어나지도 않을 일을 뭣하러 가정해? 그런 건 시간낭비야! 그리고 나 바보 아니야! 천재야! 소림의 무공까지 전부 따라했다고!"
백월은 잔뜩 흥분한 채로 언성을 높이며 고함을 내질렀다.
그녀의 말이 실로 모욕적으로 느껴진 까닭이었다.
자신이 누구란 말인가
농질을 제외한 모든 여우중에서
독보적인 천재성을 갖춘 최고의 여우가 아니던가
그런데 바보라니?
지능이 딸리다니?
"원래 바보는 스스로 바보인 줄 모르는 법이야. 자책하지마렴."
요랑은 실실 웃음을 흘리기 시작하였다.
"아니라고!"
우우우우우우웅
곧이어 백월의 주위로 강맹한 요기가 뿜어져나오기 시작하였다.
내단 속에 담긴 요기가 분노에 반응해 그대로 방출되기 시작한 것이다.
"헤에, 요기는 좀 쎄네."
요랑은 감탄했다는듯한 표정을 지었다.
예상보다 강대한 요기라는 생각이 든 까닭이었다.
"허세부리지마, 지금 속으로는 엄청 쫄리는 거 다 아니까."
백월은 요랑이 허세를 부린다고 생각하였다.
웬만한 마물따위는 기가 죽어 눈깔을 내리깔 정도의 요기를 발산하였다.
그런데 저런 여유라니?
필시 얕잡아보이지 않기 위해
여유로운 척 태연함을 가장한 게 분명하리라
"허세처럼 보여?"
"당연하지! 너 같은 하급마물따위가 내 요기를 견뎌낼 리 없잖아!"
"나도 참 많이 얕보였네."
요랑은 살포시 웃었다.
그리고 내단에 집중하기 시작하였다.
우우우우우우우웅
그 순간 그녀 몸 주위로 어마어마한 요기가 뿜여져나오기 시작하였다.
백월의 요기따윈 비교조차 안될 정도로 농밀하고 커다란 요기가 말이다.
멍
".............."
그 광경을 지켜본 백월은 눈을 화등잔만하게 치켜뜬 채 멍한 표정을 지었다.
도저히 믿기지가 않은 광경에 넋이 나가버린 것이다.
눈앞에 거미가 내뿜는 요기는 자신따위는 비교조차 되지 않을 정도로 강맹하였다.
요기의 농밀함부터 크기까지 무엇 하나 모자람이 없는 것이다.
'.....이정도면...농질님...못지..않아.....'
이정도 요기라면
여우들의 왕
마경의 오래된 지배자들 중 하나
농질과 비교해도 전혀 밀리지 않을 것이다.
마경에서 도망간 겁쟁이가
옛 지배자와 맞먹은 힘을 갖고 있는 것이다.
어찌 믿을 수 있겠는가
이런 말도 안되는 광경을 말이다.
"그거 알아? 어린 여우야?"
요랑은 멍한 표정을 짓고 백월을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떼었다.
"농질과 내가 같은 세월을 흘려보냈다는 사실을."
"....같은...세월이라면!? 설마?"
"나 또한 마경의 옛 지배자 중 하나라는 소리지."
요랑은 차가운 눈빛이 반짝이기 시작하였다.
"다시 한 번 물을게."
요랑은 차분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너, 몇 년 묵었어?"
".........."
요랑의 물음에 백월의 눈빛이 쉴새없이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전과 같은 질문이었지만
느낌이 전혀 달랐다.
그녀와 자신 사이에 높다란 세월의 격차를 여실히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었으면 대답은 해야지? 농질이 그렇게 가르치든?"
요랑은 재밌다는듯한 표정을 지은 채 입을 떼었다.
"....농질님을 거론하지마!"
"그럼 폐급廢級짓을 하지 말던가"
"폐급? 내가 폐급이라고!?"
백월은 눈살을 사정없이 일그러뜨렸다.
폐급이라는 말이 분노가 치밀어오른 것이다.
"농질이랑 내가 같은 연배인 걸 알면서도 이렇게 오만방자하게 굴잖아? 그게 폐급이 아니면 뭐겠어? "
"농질님과 같은 세월을 보냈다고해서! 널 깍듯이 대우해줄 이유는 없어! 마물이 마물에게 예의를 차리다니 바보 아니야?"
백월은 짜증 가득한 표정을 지은 채 소리를 내질렀다.
"어린 여우야, 넌 선배에 대한 예우가 전혀 없네."
요랑은 차분한 표정을 지은 채 말을 이었다.
그리고 앙증맞은 주먹을 천천히 들어올렸다.
"아무래도 예절을 강제로 주입해야할 것 같네."
그다음 붕붕 돌리기 시작하였다.
마치 몸을 푸는 것처럼
"어디 할 수 있으면 마음대로 해봐!"
백월 또한 앙증맞은 주먹을 들어올렸다.
언제고 대응할 수 있도록 준비 자세를 취한 것이다.
"겁먹고 도망갈 줄 알았는데 의외네?"
요랑은 재밌다는듯한 표정을 지었다.
요기를 내뿜어 현격한 격의 차이를 몸소 느끼게 해주었다.
그런데도 득달같이 달려드려는 백월의 모습이 꽤나 재밌게 느껴졌다.
"싸움은 요기로 하는 게 아니야! 기술로 하는 거지!"
비록 요기의 총량은 처참하게 밀렸지만
그렇다고 확실히 패배한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요기는 승부에 영향을 끼치는 하나의 요소에 불과하였다.
기술이라던가 신체능력같은 또다른 요소들을 앞선다면 충분히 승산이 있는 것이다.
"기술로 날 앞설수 있을 것 같아?"
요랑은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은 채 되물었다.
"난 소림의 무공을 완벽히 구현해낼 수 있어! 기술로는 정점에 다다랐다고!"
백월은 자신하였다.
광해로부터 뽑아먹은 소림의 무공과 자신의 요기 그리고 단단한 육신을 합친다면 거미를 충분히 상대해낼 수 있을 것이라고 말이다.
"넌 패배할 거야! 칠백 년전 그날처럼!"
백월은 적의로 가득한 눈빛을 반짝이기 시작하였다.
"나쁜 말하네."
요랑은 빙긋 웃었다.
물론 눈을 웃고 있지 않았다.
핏덩이같은 년이 뼈아픈 과거를 들먹이니 나름 부아가 차오른 까닭이었다.
"더 나쁜 말해줄까? 너희 거미일족들은 하나같이 멍청한 족속들이야! 그냥 구영에게 머리를 조아리면 되는 걸! 꼴같지 않은 자존심 세운다고 그렇게....."
퍼어어어억
우두두둑
그와 동시에 백월의 목이 옆으로 꺾이면서 그대로 뒤쪽으로 돌아가버렸다.
어느새 지척까지 다가온 요랑이 머리통을 후려쳐버렸기 때문이었다.
털썩
백월은 그대로 주저앉아버렸다.
단번에 사망을 하게 된 것이다.
"터전을 지키고자 했던 일족의 긍지를 멋대로 폄하 하지마."
요랑은 싸늘한 눈빛으로 백월의 시체를 바라보며 입을 떼었다.
퍼어어억
그리고 한치의 망설임없이 백월의 복부를 그대로 후려쳐버렸다.
주르르르륵
그러자 백월의 신형에 미끄러지듯 뒤편으로 쭉 밀려나버렸다.
콰아아앙
곧이어 백월의 시체가 커다란 담벼락에 그대로 처박혀버렸다.
"일어나. 살아있는 거 다 아니까."
요랑은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입을 떼었다.
우두두두둑
그러자 이변이 일어났다.
돌아가있던 백월의 목이 원래대로 돌아오기 시작한 것이다.
".....우웨에에에엑!"
그리고 목이 제 위치를 찾은 백월은 그대로 토악질을 하기 시작하였다.
강대한 복부강타에 위액이 역류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게 얼마나 토악질을 했을까
"하아...하아....하아...하아.."
백월은 눈물 콧물에 토사 잔여물까지 질질 흘리며 거칠게 숨을 몰아쉬기 시작하였다.
어느정도 토악질이 멈춘듯한 모습이었다.
"이제 목숨이 여덟 개 남았지?"
요랑은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구미호는 꼬리 하나당 목숨이 하나씩 늘어가게 된다.
한 번은 목이 돌아가 죽었으니
이제 남은 목숨은 여덟 개 일 것이다.
"일곱 번만 더 죽자. 알았지?"
요랑의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그 미소를 마주한 백월의 동공이 쉴새없이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형용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두려움이 차오른 까닭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