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벅 저벅 저벅
뚝
걸음을 멈춰세웠다.
"후우우우우."
가벼이 심호흡을 내뱉기 시작하였다.
전신을 휘감은 긴장감을 어느정도 다독이기 위함이었다.
쓰으으윽
똑 똑 똑 똑
손을 뻗어 가벼이 문을 두드리기 시작하였다.
거슬리지 않을 정도의 적당한 힘으로
"누구인가?"
그러자 근엄한 목소리가 귓가로 파고들기 시작하였다.
꿀꺽
침을 꿀꺽하고 삼켰다.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압도되는 느낌이 든 까닭이었다.
"소관이옵니다."
견희는 문을 바라보며 우렁차게 답을 하였다.
"자네였군, 들어오게."
그러자 안쪽에서 출입 허가가 떨어졌다.
끼이이이익
허락이 떨어지기 무섭게 견희는 곧바로 문을 열어젖혔다.
그리고 열려진 문틈 사이로
중후한 인상의 남자를 마주할 수 있었다.
꿀꺽
견희는 침을 꿀꺽하고 삼켰다.
그를 직접 마주하니 간신히 억눌렀던 긴장이 다시금 전신을 휘감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는 부끄러운 일이 아니었다.
승상 한재선.
황제를 보필하고 제국에 속한 모든 관원들을 지휘하고 감독하는 관료들의 우두머리.
황실의 녹을 먹고 있는 수많은 관료들이라면 누구도 부정치 못할 것이다.
승상 한재선이야말로
실질적인 제국의 2인자라는 사실을
천자의 핏줄을 이은 황족들조차 그의 눈치를 살피며 몸을 사렸다.
그런 절대적인 권력자를 정면으로 마주하며 독대하게 되었거늘
어찌 긴장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비록 자신이 황태자의 스승이라고는 하나 직함을 지니고 있긴 하지만
제국을 주무르는 승상과 비교한다면 달빛아래 반딧불처럼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긴장을 하는 건 당연한 일이지 부끄러운 일이 아닌 것이다.
"태자태부 견희! 승상을 뵙사옵니다!"
곧이어 신색을 회복한 견희는 땅에 닿을 듯 허리를 숙인 채 우렁차게 인사를 건네었다.
"그래 반갑네, 태자태부, 그간 잘지냈는가?"
한재선은 태연자약하게 인사를 받았다.
과례가 익숙하다는듯이 말이다.
"신경써주신 덕택에 아주 잘지내고 있습니다!"
"내가 뭘 한 게 있다고."
한재선은 담담한 어조로 입을 떼었다.
"승상께서 지금껏 훌륭히 국정을 운영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소관이 무탈하게 지낼 수 있었던 건 승상의 훌륭한 국정 운영 덕택입니다!"
견희는 매끄럽게 혀를 놀려 노골적으로 한재선의 비위를 맞추기 시작하였다.
그가 기뻐할 수 있도록 말이다.
"하하하하, 자네가 내 얼굴에 금칠을 해주는 건."
한재선은 가벼이 너털 웃음을 터트리며 입을 떼었다.
콧대 높은 태자태부가 극도의 저자세를 취하며 매끄럽게 혀를 놀리니
절로 기분이 좋아진 까닭이었다.
"이만 허리를 들게, 계속 그러고 있다간 늙은 몸이 무리가 올걸세."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견희는 서서히 허리를 들어올렸다.
그리고 상석에 앉은 한재선을 마주보기 시작하였다.
무척이나 긴장 어린 표정을 지은 채 말이다.
"그래, 내게 독대를 요청했다지?"
한재선은 그런 견희를 바라보며 물음을 던졌다.
"그렇습니다. 승상 어르신."
견희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입을 떼었다.
"그럼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도록 하지. 자네가 무슨 일로 독대를 요청한 것인지 궁금하니 말이야."
한재선은 곧바로 본론부터 물었다.
독대를 요청한 그의 저의가 궁금하였기 때문이었다.
지금껏 그는 단 한 번도 자신에게 독대를 요청한 적이 없었다.
할 말이 있다면 언제나 정기 회의 때 말을 끝마쳤던 것이다.
그런 그가 독대를 요청하니 의문이 들 수밖에 없었다.
대체 무슨 의도를 품고 있는지 말이다.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견희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입을 떼었다.
"시원, 시원해서 좋구만."
한재선은 그의 태도가 마음에 든다는듯 흡족스러운 미소를 지은 채 입을 떼었다
"도와주십시오! 승상 어르신!"
곧이어 견희는 다시금 땅에 닿을 듯 허리를 숙이기 시작하였다.
스스로 할 수 있는 최선의 예를 표한 것이다.
"도와달라니? 대체 무엇을?"
한재선은 모르겠다는듯한 표정을 지은 채 그에게 되물었다.
앞뒤를 잘라도 너무 잘라버렸다.
저리 말한다면 저의를 어찌 알아들을 수 있다는 말인가
"군왕과 경화 군주의 혼인이 파기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딱 딱
순간 한재선의 입가에 지어져있던 미소가 서서히 사그라들었다.
더불어 표정이 딱딱하게 굳기 시작하였다.
부탁을 할 것이라고 예상하긴 하였지만
설마하니 군왕과 관련된 부탁을 할 줄은 전혀 예상치 못한 까닭이었다.
".............."
"............."
곧이어 두 사람 사이에는 무거운 침묵이 흐르기 시작하였다.
승상 한재선과 태자태부 견희
두 사람 모두 입을 꾹 다문 채 침묵을 고수한 까닭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군왕과 경화 군주의 혼인을 파기하게 도와달라...."
잠자코 있던 한재선이 천천히 운을 떼기 시작하였다.
"그렇습니다!"
그러자 견희는 벼락치듯 맞받아치며 의지를 표명하였다.
"의문이 드는군. 어찌하여 그들의 파혼시키고자하는 거지?"
한재선은 의문 어린 표정을 지은 채 그에게 물었다.
구태여 혼인을 파기코자하는 그의 저의에 의문이 든 까닭이었다
"군왕이 경화군주의 베필로서 자격이 없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자격이 없다? 군왕이?"
"그렇습니다!"
"이해할 수가 없군, 군왕이 누구란 말인가? 폐하께서 인정한 사천의 군주이자 민중들이 우러러 받드는 위대한 영웅이 아니던가? 그런 그가 어찌 자격이 없다고 말하는 겐가?"
한재선은 이해할 수 없다는듯한 표정을 지은 채 그에게 물었다.
군왕은 혜성처럼 나타난 불세출의 영웅이자
황실뿐 아니라 무림, 일반 민중들까지
모두가 우러러보는 위대한 군주였다.
그런 그가 경화군주의 베필로서 자격이 없다니?
그렇다면 대체 누가 자격이 있다는 말인가
"군왕이 위대한 영웅이라는 사실은 저 또한 부정치 않습니다. 지금껏 이뤄낸 업적만 놓고봐도 충분히 구국의 영웅으로서 대접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훌륭한 군주이지요."
견희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입을 말을 이었다.
"하지만 경화군주의 베필이될 자격과는 별개라고 생각합니다."
"별개라?"
"위대한 영웅이기는 하나 그는 평민 출신입니다. 검증된 귀한 핏줄이 아닌 천한 핏줄을 타고났다고 할 수 있지요. 그런 숭고하고 고결한 천자의 핏줄이 어찌 어울릴 수 있겠습니까? 말도 안되는 일이지요."
견희는 군왕이 자격이 없다는 의견을 열렬히 피력하기 시작하였다.
"본디 천賤과 천天은 섞일 수 없는 법입니다. 이를 바로잡지 않는다면 제국의 근간이 흔들릴 것입니다."
견희는 차분히 가라앉은 눈빛을 반짝이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그 정통성을 바로잡고 제국의 근간이 흔들리는 걸 방지하기 위해 군왕과 경화군주의 혼인을 파기시킬 심산 것인가?"
"'그렇습니다."
"군왕은 폐하의 총애를 한 몸에 받고 있는 자이다. 뿐만 아니라 경화군주와 서로 깊게 연모하고 있는 연인사이기도 하지. 그런 상황에서 혼인 파기가 가능하다고 생각하는가?"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견희는 차분한 눈빛을 반짝이며 말을 이었다.
"물론 승상의 도움이 있다는 뒷받침되어야겠지만 말입니다."
"일단 들어나보지. 대체 어떻게 할 생각인가?"
한재선은 의문 어린 표정을 지은 채 그에게 물었다.
대체 뭘 어떻게 할 심산이길래
저리도 자신이 넘치는 지 의문이 든 까닭이었다.
"계획은 간단합니다. 정통성을 걸고 넘어져, 그가 자격이 없음을 피력하는 것입니다."
"그게 폐하께 통할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주저없이 기각시킬 걸세."
한재선은 실망 어린 표정을 지었다.
군왕을 총애하는 황제라면 저딴 주장 따윈 단번에 기각시켜버릴 것이다.
"물론 저 혼자 주장한다면 어림 반푼어치도 없겠지요."
견희는 동의한다는듯 고개를 주억거리며 입을 떼었다.
"하지만 모든 대신들이 반대한다면 상황은 달라지지 않겠습니까?"
견희는 차가운 눈빛을 반짝이기 시작하였다.
"모든 대신들이 반대한다면 그렇겠지. 하지만 불가능한 일이라는 걸 자네도 알지 않은가? 그들을 모조리 포섭하지 않고서야.....어찌..의견을..."
순간 한재선은 말을 멈추었다.
불현듯 무언가 머릿속을 스쳐지나간 까닭이었다.
"설마 대신들을 전부?"
그리고 떨리는 눈빛으로 견희를 바라보았다.
끄덕
그 눈빛을 마주한 견희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의 예상이 틀리지 않았음을 피력한 것이다.
"모두 저와 뜻을 함께하기로 하였습니다."
"말도 안되네, 어찌 그들을 전부 포섭하였다는 말인가?"
한재선은 믿을 수 없다는듯한 표정을 지은 채 그에게 되물었다.
각 관료들을 서로 정치적 성향과 이념에 따라 대립을 하기 마련이었다.
물과 기름처럼 도저히 섞일 수 없는 성질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어찌 그들을 모조리 포섭할 수 있다는 말인가
"모두 절묘하게 이해 관계가 맞아떨어진 까닭이지요."
견희는 부드러이 미소를 지은 채 말을 이었다.
"....이해 관계라.."
그리고 그 말을 들은 한재선은 가벼이 눈을 감았다.
대신들이 담합할 만한 매력적인 먹잇감이 무엇인지 생각에 잠긴 것이다.
"황권약화인가."
그리고 이내 유추할 수 있었다.
그 이기적인 위정자들이 담합할 만한 매력적인 먹잇감을
"정확합니다. 어르신."
견희는 부드러이 미소를 지었다.
과연 명재상이라고 소문난 한재선다운 통찰력이었다.
단편적인 조각들로
정답에 도달하니 말이다.
"꽤나 머리를 썼군."
"저 나름의 최선을 다한 것뿐이지요."
견희는 담담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감당할 수 있겠나?"
한재선은 그런 견희를 바라보며 물음을 던졌다.
침중하기 그지없는 표정을 지은 채 말이다.
실패한다면
황제의 미움을 받아
목이 달아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특히 맨 앞에서 총대를 맨 삼공이라면 그 위험도가 수 배는 될 것이다.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면 판을 키우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견희는 야망 가득한 눈빛을 반짝거리며 입을 뗴었다.
한재선은 그런 견희를 가만히 응시하였다.
마치 그 야망의 깊이를 들여다보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하하하하하하하하"
한재선은 너털 웃음을 터트리기 시작하였다.
무척이나 유쾌하다는듯이 말이다.
"몸은 노쇠하였지만 그 눈빛만큼은 전혀 노쇠하지 않았군."
"과찬이십니다. 승상 어르신."
견희는 담담한 어조로 입을 떼었다.
"좋네, 나도 가담하지. 자네의 눈빛을 믿고 말이야."
곧이어 한재선은 신뢰 가득한 눈빛으로 그를 마주보며 말을 이었다.
"감사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승상 어르신!"
견희는 몇 번이고 허리를 숙이고 또 숙이기 시작하였다.
자신을 믿고 한 배를 타준 한재선에 대한 감사함을 느낀 까닭이었다.
방관만해도 상관없거늘
이리 몸소 나서준다니
천군만마를 얻은 것처럼 기쁠 수밖에 없었다.
"자네만 믿겠네, 태자태부."
한재선은 부드러이 미소를 지은 채 말을 이었다.
"맡겨주십시오! 실망시켜드리지 않겠습니다!"
견희는 우렁차게 답을 하였다.
그는 자신있었다.
제국의 2인자
한재선까지 포섭한 이상
황제조차 쉬이 멋대로 굴 수는 없을테니.
'파혼이 머지 않았다.'
모든 게 계획대로였다.
이대로 간다면
파혼도 일사천리도 진행되리라
'난 권력의 중심에 들어가겠다!'
그의 눈빛에는 다시금 야망이 반짝이기 시작하였다.
*******
"베필로서 자격이 없다고?"
날선 목소리가 울려퍼지기 시작하였다.
움찔
"분명 그리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한재선은 몸을 움찔 떨며 답을 하였다.
알 수 없는 위압감에 완전히 압도당한 것이다.
"그리고 뭐? 천賤과 천天은 섞일 수 없다고? "
"......그런 말 또한 하였습니다."
한재선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공손히 답하였다.
"미쳤네."
우우우우우웅
더불어 어마어마한 무형의 기운들이 방 안 전체를 감싸기 시작하였다.
차오르는 분노에 심상이 발현되기 시작한 것이다.
덜 덜 덜 덜
그 분노를 마주한 한재선은 온몸을 벌벌 떨기 시작하였다.
감히 대항할 수조차 없는 거대한 기운에 극심한 두려움을 느낀 까닭이었다.
"이봐, 한 승상."
"하...하명하십시오."
한재선은 떨리는 몸을 간신히 진정시킨 뒤 천천히 입을 떼었다.
"그대도 내가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는가?"
군왕, 선우는 분노 어린 눈빛을 반짝이며 입을 떼었다.
"천부당만부당한 말씀입니다! 전하께서 자격이 없다면 세상 누구도 자격이 없을 것이옵니다!"
한재선은 다급한 어조로 말을 내뱉었다.
심기를 거스리지 않기 위한 발악이었다.
"그치? 걔들이 잘못한 거지?"
"그렇습니다! 모두 그자들의 잘못입니다!"
"그럼 벌을 받아야겠네."
선우는 싸늘한 눈빛을 반짝이며 말을 이었다.
"왕을 능멸한 죄로 말이야."
고요하기 그지없는 분노가 방 안 전체에 은은하게 퍼지기 시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