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101 1102. 씨앗을 심다.
"네가 선우의 여자가 되면 돼."
요랑은 반짝이는 눈빛으로 운설을 바라보며 입을 떼었다.
"어때? 간단하지?"
곧이어 그녀의 입가에는 진한 미소가 지어지기 시작하였다.
"그게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예요!"
그리고 그 말을 들은 운설은 곧바로 반발을 하며 언성을 높였다.
선우의 여자가 되라니?
별안간 이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란 말인가
"왜 말이 안돼?"
요랑은 모르겠다는듯한 표정을 지은 채 그녀에게 되물었다.
"전 그를 가르치고 있는 선배의 입장이예요! 어찌 선배로서 후배를 위하지는 못할 망정! 연인이 된다니!"
"연인이 되는 것도 후배를 위하는 선배야...운설."
요랑은 배시시 웃음을 흘리며 말을 이었다.
"그런 식으로 위하고 싶지 않아요!"
"되게 까다롭네."
"까다로운 게 아니라 당연한 거예요!"
운설은 발끈하며 고함을 내질렀다.
"거기다 저랑 후배님의 나이 차가 몇살인줄은 아시는 건가요? 무려 백 년! 한 세기가 차이가 난다구요!"
운설은 말도 안된다는듯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과 선우는
무려 백년
한 세기에 가까운 세월의 격차를 가지고 있었다.
연인이 되기엔 세월의 장벽이 높아도 너무 높은 것이다.
"쯔쯧, 운설은 나이가 많아서 그런지, 사고방식에 틀에 박혀있구나."
그 말을 들은 요랑은 고개를 좌우로 가벼이 내저으며 혀를 차기 시작하였다.
"뭐..뭐라구요!?"
"운설, 사랑이라는 건 위대한 거야. 국경도 나이도 종족조차도 모두 초월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지. 백 년정도 되는 나이 차이? 그런 것 따윈 사랑 앞에선 아무것도 아니야..."
요랑은 과거 옥령으로부터 들었던 사실들을 그대로 읊기 시작하였다.
그녀의 말이 꽤나 감명깊게 다가온 까닭이었다.
"아, 참고로 성별은 초월 못하니까 알아둬야해. 동성을 좋아하는 건 정신병자들이나 하는 생각이니까. 만약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는 도태된 년놈들을 만나면 반드시 목을 따버려야해. 알았지?"
요랑은 혹시나 운설이 헷깔릴까 첨언을 하였다.
잘못된 사상이 잡히면 안된다는 의무감이 든 까닭이었다.
"하아아...요랑, 무슨 말씀하시는 지는 알겠어요. 확실히 사랑 앞에선 국경이나 나이 같은 건 중요치 않죠. 동성애가 정신병이라는 것도 동의해요, 섭리를 거스르는 도태된 짐승들이니까요."
운설은 차분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렇다해도 저는 선우와 연인이 될 수 없어요."
그리고 곧이어 단호한 표정을 짓기 시작하였다.
"어째서?!"
요랑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듯한 표정을 지은 채 그녀에게 물었다.
"그를 사랑하지 않으니까요."
연인이라는 건
사랑이라는 전제가 깔리고 나서야 비로소 성립되는 것이었다.
사랑이 없다면
연인조차 될 수 없는 것이다.
"사랑 안해?"
"안해요."
운설은 단호히 말을 내뱉었다.
"하는 것 같은데?"
요랑은 의심 어린 표정을 지은 채 그녀에게 되물었다.
"그럴리가요?"
"선우만 보면 호흡이 가빠지고 얼굴을 붉어지며 심장이 두근거리고 전신이 떨리고 식은 땀이 흐른다고 하지 않았어? 하루종일 선우 생각만 나고 말이야."
"네에...분명 그리 말하긴 했지만..."
"사람들이 그러더라....그런 게 사랑이라고."
요랑은 별빛처럼 반짝이는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입을 떼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호흡이 가빠지고
얼굴이 붉어지고 심장이 두근거리며
전신이 떨리고 식은 땀이 흐른다니
하루종일 머릿속에서 한 사람이 떠나지 않는다니
사랑이 아니라면 대체 무엇이라 설명할 수 있겠는가
"달라요...그건 부끄러움과 창피함이예요..사랑과는 달라요."
운설은 가로 저으며 부정을 하였다.
사랑과 달랐다.
그저 창피함과 부끄러움에
얼굴을 붉히고 전신이 떨리며 호흡이 가빠지는 것 뿐
사랑하여 그런 반응을 내보이는 게 아닌 것이다.
"글쎄...내가 보기엔 같은 것 같은데..."
요랑은 미심쩍다는듯 말을 내뱉었다.
"착각이겠죠."
운설은 말도안된다는듯 입을 떼었다.
"그럴리가 내 촉이 얼마나 좋은데?"
"애정사는 생각보다 복잡해요. 요랑님. 촉만 으로는 판단할 수 없어요."
"애정사가 복잡한 건 너보단 내가 더 잘 알 것 같은데? 운설은 교접 한 번 안해본 처녀잖아?"
요랑이 헤실거리며 말을 이었다.
"교...교접 얘기가 왜 나와요!"
운설은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은 채 언성을 높였다.
별안간 교접 얘기는 왜 나온다는 말인가
"경험에 있어선 내가 앞선 다 이거지. 뭐."
요랑은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은 채 입을 떼었다.
"후우우.....어쨌든 요랑님이 생각하는 그런 건 절대 아니예요. 제가 후배님을 좋아할 리 만무하잖아요?"
"선우가 싫어?"
"싫은 건 아니지만..사랑하진 않는다는 말이죠."
"왜 사랑하지 않는데?"
요랑은 모르겠다는듯한 표정을 지은 채 되물었다.
"네?"
"선우는 중원에서 가장 우월한 남자잖아? 그런 남자를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어?"
요랑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암컷의 본능이 무엇이란 말인가
우월한 수컷의 씨앗을 품고
발아시켜 명맥이 끊어지지 않도록
안전히 보존시키는 것이 아니던가
그런 본능적인 관점에서 봤을 때
선우는 더할나위 없이 우수한 짝이었다.
그는 세상 그 어떤 수컷보다
우월하였고 잘난 남자였기 때문이다.
시원스러운 외모
꽉 들어찬 근육
육척에 다다르는 장신의 키
커다란 손
두터운 허벅지
우월한 생식기
현경 상경에 다다른 압도적인 무력
군왕이라는 만인지상에 가까운 직위
황금을 물쓰듯 쓸 수 있는 어마어마한 재력까지
선우에게 부족함따윈 없었다.
모든 걸 전부 갖춘 남자인 것이다.
암컷이라면 자궁이 떨릴 수밖에 없었고
씨앗을 받고 싶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어찌 그런 선우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후배님이 여러모로 우월한 남자라는 건 사실이지만....사랑은 그런 것만으로 성립되는 게 아니예요....."
"그럼 뭐가 필요한데?"
요랑은 모르겠다는듯 그녀에게 물었다.
"사랑이라는 건...그러니까..막...막...뜨겁고...달아오르고...계속 보고 싶고.......그러니까..분위기라던가 중요하고..관계성이라던가..친밀도라던가.."
운설은 얼굴을 붉힌 채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말을 잇기 시작하였다.
한 세기에 가까운 삶을 살아왔지만
사랑에 대해선 무지하기 그지없는 그녀였다.
지금껏 누군가를 마음에 품어본 적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그녀가 사랑을 명확히 정의를 내릴 수 있을 리 만무하였다.
"먹물로 사랑 배운 티가 너무난다."
그 모습에 요랑은 히죽거리며 말을 내뱉었다.
어딘가 연애소설에서나 볼법한 말을 주절거리는 운설의 모습이 꽤나 유쾌하게 느껴진 까닭이었다.
".........어쨌든 후배님은 아니예요! 부인만 열명이 넘는 그런 난봉꾼을 제가 사랑할 리 없잖아요!"
"그럼 난봉꾼이 아니였다면 어땠을 것 같은데? 사랑했을 것 같아?"
"난봉꾼이 아니라면..."
요랑의 물음에 운설은 곰곰히 생각해보았다.
만약 그가 난 난봉꾼이 아니라는 가정을 한다면
자신만을 바라만준다면
자신을 그를 사랑했을까
하고 말이다.
".....무리예요."
"어째서?"
"전 등선을 코앞에 두고 있는 몸이예요. 그런 제가 인간의 감정에 얽매일 리 없잖아요!"
"그건 핑계야. 운설."
요랑은 별빛처럼 반짝이는 눈빛으로 그녀를 응시하며 입을 떼었다.
"지금도 인간의 감정에 얽매여있잖아. 수치심과 창피함이라는 감정의 굴레에 말이야."
"그...그건.."
운설은 반박치 못하였다.
확실히 자신의 말은 모순되었다.
인간의 감정에 얽매이지 않겠다며
누구보다 인간의 감정에 충실하고 있으니 말이다.
"진실을 마주한다는 건 두려운 일이지, 하지만 두렵다고 피하기만한다면 결국 훗날엔 후회할 수 밖에 없어."
요랑은 차분한 눈빛으로 운설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좀더 네 감정에 솔직해져봐, 운설."
"제 감정에...솔직하라구요?"
"그래, 내가 볼 땐 넌 자질구레한 걸 신경쓰느라 네 감정을 스스로 속이고 있는 것처럼 보여."
"아니예요..그렇지 않아요.. 제 감정을 속인다니...그럴 리가.."
"자꾸 좋아하면 안될 핑계만 찾고 있잖아? 너만 안바라봐준다느니.....인간의 감정따윈 버렸다느니 하면서 말이야."
요랑은 담담한 표정을 지은 채 말을 이었다.
"그냥 단순하게 생각해봐. 선우랑 있을 때 즐거워?"
".......즐거워요."
"선우만 생각하면 얼굴이 붉어지고 가슴이 쿵쾅거려?"
".........그렇긴 한데....그건 창피함때문에.."
"토달지말고 예 아니요로만 대답해."
".....예, 얼굴이 붉어지고 쿵쾅거려요."
"만약 선우가 널 경멸하고 싫어한다면 어떨 것 같아?"
"........슬플 것 같아요."
"얼마나?"
"엄청...엄청 많이요."
"정답 나왔네."
그 대답을 들은 요랑은 부드러이 미소를 지은 채 입을 떼었다.
"넌 선우를 사랑하고 있어. 운설. 말로는 싫다 싫다하지만 네 안의 암컷으로서 본능이 그를 원하고 있는 거지."
"......그렇지 않아요."
"아니, 내가 맞아, 잘 생각해봐, 누구보다 무심해야할 네 마음에 파문을 일으키는 장본인이 누군지 말이야...만약 다른 이한테 가슴을 내보였어도 지금같은 반응을 보였을 것 같아? 아닐껄? 무심하게 넘어갔을 거야. 거죽따윈 중요치 않다면서 말이야."
요랑은 한없이 진지한 눈빛으로 운설을 마주하며 말을 이었다.
"............"
그리고 그 말을 들은 운설은 어떠한 말도 할 수 없었다.
무어라 반박을 하고 싶었지만
마땅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현경에 오르고 무심해진 자신이라면
저런 반응을 내보일만도 했기 때문이었다.
"넌 대상이 선우니까 신경쓰는 거고 선우니까 수치스러워하는 거고 창피해하는 거야. 좋아하는 사람에게...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 네 가장 부끄러운 모습을 들키고 말았으니까. "
그녀가 말이 없자 요랑은 더욱더 기세등등하게 말을 잇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몇 번이고 되뇌이기 시작하였다.
넌 선우를 좋아한다고
넌 선우를 사랑한다고
그리고 그 반복되는 발언은
운설의 머릿속에 콕콕 스며들기 시작하였다.
'정말 그런 걸까?'
그리고 속으로 의심마저 피어오르게 만들었다.
진실로 그에게 사랑하지 않는 것인지 말이댜.
아니면 그녀말대로 스스로 감정을 속이고 좋아하면 안될 핑계만을 찾고 있는 것인지 말이다.
'모르겠어.'
머리가 복잡했다.
너무 복잡하여 도저히 명쾌한 답을 내릴 수가 없었다.
"운설, 스스로를 속이지말고 받아들여, 넌 선우를 사랑해, 그리고 선우의 우월한 씨앗을 받고 싶어, 그건 암컷으로서 당연한 본능이니까. 그 본능은 거부하지마...솔직해지는 거야..본능에 모든 걸 맡기고....네가 원하는 바를 이루는거야."
요랑은 속삭이듯 읊조리듯 말을 잇기 시작하였다.
흡사 석가모니를 유혹하는 마귀와 같은 속삭임을 말이다.
"............."
그리고 그 속삭임은 운설의 머릿속을 더욱더 복잡하게 만들었다.
스스로 감정에 확신을 할 수 없게 되버린 것이다
벌떡
곧이어 운설이 자리에서 벌떡 몸을 일으켜세웠다.
"....저.....이만 가봐야겠어요..요랑님...머리가 너무 복잡해서.."
"그럴 만도 하지. 생각이 많아졌을테니까."
요랑은 태연한 어투로 말을 이었다.
"이만 가봐, 그리고 돌아가서 곰곰히 생각해봐. 네 솔직한 감정이 뭔지 말이야."
".....네에...생각해보도록 할게요...고마워요..요랑님"
운설은 가벼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인사를 건네었다.
그리고 곧바로 바깥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요랑은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악동같은 미소를 지은 채 말이다.
끼이이이익
쿵
곧이어 문이 닫히고 방 안에는 악동같은 미소를 짓고 있는 요랑만이 남게 되었다.
"씨앗은 잘 심어지긴 했는데....."
홀로 남은 요랑은 혼잣말로 중얼거리기 시작하였다.
사랑할지도 모른다는 의심의 씨앗은 성공적으로 심어졌다.
이제 운설은 그전보다 더욱더 복잡한 심경으로
선우를 바라보게 될 것이고
민감하고 예민하게 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잘 발아하려나?'
씨앗을 심은 건 자신이였지만
무조건 발아한다고 확신할 수 없었다.
씨앗의 발아여부는 온전히 선우에게 달렸으니
'뭐, 이정도면 알아서 잘 꾀여내겠지.'
하지만 그리 걱정이 되진 않았다.
천하제일의 호색한으로
누구보다 연상을 잘꼬시는 이가
바로 선우였다.
분명 알아서 잘꾀여내리라
'헤헤헤헤, 분명 잘했다고 칭찬해주겠지.'
요랑은 함박웃음을 지었다.
만약 선우가 운설을 성공적으로 꼬시게된다면
분명 큰 칭찬과 더불어 자신을 더욱더 어여삐 여겨줄 것이다.
'운설이랑도 가족이 되고 말이야...히히히.'
뿐만 아니라 친한 친우와 이제 끈끈한 가족마저 될 것이다.
어찌 미소짓지 않을 수 있겠는가
'빨리 꼬셨으면 좋겠다.'
요랑은 속으로 간절히 빌었다.
어서 빨리 운설이 꼬셔지기를
선우에게 칭찬을 받고
운설과 한 가족이 되기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