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034 1035. 약속을 하다.
서걱 서걱 서걱 서걱
서역에서 들어온 촉이 달린 필기구가
사각거리는 소리와 함께 화선지 위를 거침없이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무척이나 빠른 속도로 말이다.
그렇게 얼마나 움직였을까
톡
이내 필기구가 천천히 떼어지기 시작하였다.
제 할 일을 다했다는듯이 말이다.
스으윽
필기구의 주인, 요랑은 그 화선지를 천천히 들어올려 살펴보기 시작하였다.
"흐으음..."
그리고 이내 침음성을 흘리며 눈살을 찌푸리기 시작하였다.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처럼 말이다.
"저어...많이..틀린..겁니까?"
그 모습에 불안감을 느낀 남자, 모용계는 걱정 어린 표정을 지은 채 되물었다.
몇 번이고 검산하긴 했지만
재경각주의 심각한 표정을 보니
괜스레 불안감이 치솟은 까닭이었다,
무척이나 기초적이고 초보적인 실수를 하여
재경각주의 심기를 거스른 게 아닐까하고 말이다.
"없어."
그 물음에 요랑은 즉답을 하였다.
그리고는 화선지를 모용계쪽으로 내보이기 시작하였다.
"만점이야. 모용계."
그러자 수많은 원들이 가득 차 있는 화선지가
모용계의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그 모습을 본 모용계는 알 수 있었다.
재경각주가 내어준 계산식들을 전부 맞췄다는 사실을 말이다.
"흐윽...흐윽...감사..합니다."
이내 모용계는 눈시울을 적시며 감격 어린 표정을 지었다.
참을 수 없는 감격이 차오른 까닭이었다.
재경각에 배치된 지
무려 세 달만에 이뤄낸 쾌거였다.
어찌 감격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감사할 것 없어, 모두 맞춘 건 순전히 네 능력이니까."
요랑은 대수롭지 않은 표정을 지은 채 말을 이었다.
"아닙니다! 재경각주님의 완벽한 교육이 없었다면 여기까지 올 수 없었을 것입니다! 모두 재경각주님 덕분입니다!"
모용계는 고개를 빠르게 내저으며 말을 내뱉었다.
"참나, 누가보면 무슨 큰 상이라도 받은 줄 알겠네."
요랑은 헛웃음을 터트리며 말을 이었다.
과할 정도로 감격해하는 모용계의 모습이
꽤나 어이없던 까닭이었다.
"만점이라는 성취가 제게 있어선 가장 큰 상입니다! 감사합니다! 사람 구실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셔서!"
모용계는 연신 허리를 숙이며 감사를 표하기 시작하였다.
"뭐, 사람처럼 만들긴 했지."
요랑은 수긍하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닭대가리에 가까운 모용계를
갈굼과 협박 그리고 조련을 통해 정상 지능까지 끌어올렸다.
사람 구실을 하게 만들었다고
과언이 아닌 것이다.
"이 은혜는 평생토록 잊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모용계는 다시금 감사 인사를 전하였다.
"알았어, 알았으니까 이제 머리 그만 숙여."
요랑은 손사래치며 말을 이었다.
감사 인사도 한 두번이지
몇 번이고 반복하니
이제는 귀찮은 감정마저 생겨났다.
"알겠습니다!"
요랑의 명령에 모용계는 곧바로 머리를 들어올렸다.
충성스러움이 절로 느껴지는 모습이었다.
"좋아, 그럼 이만 가봐."
"...저기.....그...일거리는?"
"퇴근하라고 바보야."
요랑은 눈살을 찌푸린 채 말을 내뱉었다.
말귀를 한 번에 못 알아듣는 모용계에 대한 짜증이 슬며시 차오른 것이다.
"지..지금 말입니까!?"
모용계는 경악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지금이 언제란 말인가
각원들이 퇴근하는 정시가 아니던
그런데 그런 정시에 퇴근을 하라니
어찌 경악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처음부터 말했잖아, 할당된 분량만 끝낸다면 얼마든지 퇴근시켜주겠다고"
요랑은 차분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넌 할당된 일을 전부 끝냈어. 퇴근하는 건 당연한 수순이지."
".....믿기지가 않습니다...제가..제가..정시 퇴근이라니.."
모용계는 어벙벙한 표정을 지은 채 말을 이었다.
정시 퇴근이라니
잔업과 야근이 일상이였던 그로서는
꿈조차 꿔보지 못한 일이었다.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다는 말인가
"그간 잔업하면서 일하느라 고생했어. 오늘은 일찍 들어가서 푹 쉬도록 해."
요랑은 어벙벙한 표정을 짓고 있는 모용계의 어깨를 가벼이 토닥여주었다.
"감..감사합니다...재경각주님..정말..정말 감사합니다.."
모용계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은 채 말을 이었다.
그녀의 토탁임과 인정에
그간의 울분과 설움이 그대로 녹아내리는듯한 느낌이 든 까닭이었다.
"그만 질질짜고 빨리 가. 나 바빠."
"알겠습니다! 이만 나가보도록 하겠습니다!"
모용계는 허리를 숙인 채 우렁차게 답을 하였다.
그리고는 곧바로 몸을 돌려 그대로 바깥으로 나가버렸다.
무척이나 가벼운 발걸음으로 말이다.
끼이이익
쿵
이내 경첩이 맞물리는 소리와 함께 문이 완전히 닫혀버렸다.
추우우욱
그리고 문이 닫히자 요랑은 책상에 그대로 추욱 늘어져버렸다.
김이 새버린 까닭이었다.
원래 계획은 틀린 계산식을 꼬투리 삼아
모용계를 찰지게 갈구며 놀 심산이었다.
그런데 그 계획이 초장부터 완전히 어긋나버렸다.
모용계가 계산식을 전부 맞춰버린 까닭이었다.
저 닭대가리가 말이다.
"한 평생은 걸릴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자신이 모용계를 너무 얕본듯하였다.
학습이란 걸 하고
이렇게 적용하는 걸 보면 말이다.
'이제 갈구는 것도 못하겠네.'
모용계가 풀어낸 계산식은
재경각의 기본이 되는 계산식들이었다.
그것들만 풀줄 알면
나머지는 응용의 영역이기에
어지간하면 갈굼당할 일이 없는 것이다.
초과근무나 야근이라면 모르지만 말이다.
"..........하아...내 낙인데.."
요랑은 상심한 표정을 지은 채 한숨을 내쉬었다.
모용계를 갈구는 일은
지루한 재경각 생활을
좀더 윤택하게 만들어주는 낙 중 하나였다.
타격감 좋은 모용계를 갈구다보면
하루의 피로와 노곤함이
풀리는 것은 물론 후련함과 상쾌함마저 느껴지는 까닭이었다.
그런데 그런 모용계를 더는 갈굴 수 없게 되었다.
각원 수준까지 성장한 이상
그를 갈굴 명분이 사라져버렸기 때문이었다.
상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아쉬운데....명분을 만들어서...억지로 갈굴까?'
자신 정도 위치면
견습각원 하나 조질 명분을 만드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그럴만한 입김을 가진 까닭이었다.
'아니야....그런 식으로 갈궈봤자...하나도 재미없어..'
하지만 이내 요랑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그런 식으로 갈궈봤자
제대로된 타격감을 느낄 수가 없을 것이다.
합당한 명분이 없다면
갈굼 또한 시들해지기 때문이다.
"......뭐...재밌는 건 없나..."
데굴 데굴
요랑은 책상 위에 머리를 기댄 채 이리저리 구르기 시작하였다.
지루함을 타파할 만한 무언가를 떠올리기 위해서 말이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똑 똑 똑 똑
누군가 방문을 두드리기 시작하였다.
"들어와도 돼."
요랑은 서서히 고개를 들어올린 채 말을 이었다.
끼이이이익
그러자 서서히 문이 열리더니
날카로운 눈매가 매혹적인 여인이 그 모습을 드러내었다.
"바쁘신데 방해한 게 아닌가 싶네요."
날카로운 눈매를 가진 아름다운 여인, 당서윤이 차분한 어조로 입을 떼었다.
"괜찮아, 어차피 퇴근하려던 참이였으니까."
요랑은 대수롭지 않은 표정을 지은 채 말을 이었다.
"그럼 다행이네요."
당서윤은 가벼이 미소를 지었다.
방해를 한 게 아니라는 생각에
안심을 한듯한 모습이었다.
"그나저나 무슨 일이야?"
요랑은 대뜸 용건부터 물었다.
빙빙 돌려말하는 건
그리 선호하지 않은 까닭이었다.
"긴히 부탁 드릴 말이 있어 이렇게 걸음을 옮기게 되었어요."
당서윤은 곧바로 용건을 꺼내었다.
"부탁?"
"네에, 요랑님만이 들어줄 수 있는 부탁말이에요."
당서윤은 차분히 가라앉은 눈빛으로 요랑을 응시하며 입을 떼었다.
"그게 뭔데?"
요랑은 궁금하다는듯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만 들어줄 수 있다는 그녀의 말에
궁금증이 물밀듯이 차오른 까닭이었다.
대체 무슨 부탁이길래
실질적으로 가주나 다름없는
당서윤이 자신을 직접 찾아온다는 말인가
"언니를......당진설을 재경각에서 맡아주셨으면 해요."
당서윤은 한없이 진지한 표정을 지은 채 입을 떼었다.
"......당진설을?"
그리고 그 말을 들은 요랑은 의외라는듯한 표정을 지었다.
설마하니 당서윤이 당진설을 언급할 줄은 전혀 예상치 못한 까닭이었다.
"의외라는 표정이네여."
그 표정을 읽은 당서윤이 담담한 어조로 입을 떼었다.
"의외일 수밖에....설마 당진설을 재경각에 기용시킬 줄은 전혀 예상치 못했거든."
선우에 의해 조련되었다고는 하지만
당진설은
당가의 재정을 털어먹은 전력이 있는
당가의 경제사범이었다.
그런 그녀를 당가 재정의 중심지인
재경각에 근무토록하라니
어찌 의외가 아닐 수 있겠는가
"잘드는 칼은 휘두르는 사람에 따라 그 쓰임새가 달라지기 마련이지요."
당서윤은 차분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당진설은 직접 유령상단을 만들고
당가의 재정을 수십 년 간 털어먹을 정도의
지략과 배포를 가진 여자였다.
잘만 사용한다면 재경각에 큰 보탬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나보고 당진설을 휘둘러보라는 거야?"
요랑은 재밌다는듯한 표정을 지은 채 답을 하였다.
제 언니를 도구로 비유하는
당서윤의 어투가 꽤나 재밌게 들린 까닭이었다.
"요랑님만큼 당진설을 잘 휘두를 수 있는 사람이 없을테니까요."
당서윤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을 이었다.
과거 요랑은 당진설에게 악연으로 얽힌 몸이었다.
오만방자한 그녀에게
원초적인 폭력의 공포를
직접 각인시켜준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요랑이라면
당진설이라는 칼을
잘 휘두를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표독스럽고
악독한 당진설이었지만
요랑 앞에선 고양이 앞에 쥐나 다를 바 없을테니 말이다.
"뭐, 틀린 말이 아니긴 하지."
요랑은 당서윤의 말을 부정치 않았다.
당진설은 자신을 무서워한다.
수틀리면 대화가 아닌
원초적인 육체의 대화를 나눈다는 사실을
뼛속 깊이 각인시킨 까닭이었다.
"근데 꼭 그렇게 위험을 감수하면서 일을 시켜야해? 그냥 금옥에 가둬두면 안되는 거야?"
요랑은 궁금하다는듯한 어조로 물었다.
당진설을 요직에 앉히는 건
꽤나 위험부담이 큰 일이었다.
선우에게 조련되었다고는 하지만
그 표독스러움과 악독함이 어딜 가는 건 아닐테니까 말이다.
그렇기에 의문이 들었다.
꼭 그녀에게 일을 시켜야하는 지 말이다.
"지은 죄가 많아서 그래요."
당서윤은 차분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죄가 많아서?"
"네에, 아시다시피 당진설은 수많은 죄를 지었어요. 평생 옥에 갇힌다해도 용서받을 수 없을 정도로 말이에요."
당진설은 그간 수많은 죄를 지었다.
유령상단을 만들어 당가의 돈을 빼돌린 횡령죄.
입수한 마공서를 신고하지 않고
본인이 그대로 사용하여 마인들을 육성한 죄.
마인들을 앞세워 가주 대리 신분의 당서윤은 납치하려고 한 죄.
납치가 실패하자 가주 대리이자 혈육인 당서윤을 죽이려고 한 죄.
독왕 당진철의 비자금을 빼돌리려고 한 죄 등
일일히 따진다면 세는 것조차 힘들 정도로
수많은 죄를 지은 것이다.
그런 그녀를 옥에 가둔 채 얌전히 내버려두는 건
무척이나 관대한 처사였다.
죗값에 전혀 걸맞지 않는 것이다.
"이대로 옥에 얌전히 가두는 건 너무 관대하다고 생각지 않나요?"
당서윤은 눈을 빛내며 말을 이었다.
"옆에서 직접 조지면서....죗값을 치르게 만들라고?"
그리고 그녀의 의도를 파악한 요랑은 마찬가지로 눈을 빛내며 답을 하였다.
"네에, 제가 원하는 게 바로 그거예요."
당서윤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을 이었다.
재경각은 인력을 아무리 보충해도
항상 인력난에 시달리는 곳이었다.
일이 너무 힘들어
신입이라면 얼마 버티지 못하고 그대로 때려치기 때문이다.
이현경이나 이화영, 모용계처럼
노예 계약으로 묶지 않는 이상 살아남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런 재경각에
당진설을 배치한다면
그 꼴이 꽤나 볼만해질 것이다.
그녀가 가장 무서워하는 요랑이
코앞에서 직접 감시 및 감독을 한다면
반항을 할 수도
도망을 칠 수도
투정을 부릴 수도 없을테니까 말이다.
"흐으으음.....직접 조지라.."
요랑은 침음성을 흘리기 시작하였다.
무언가 생각에 빠진듯이 말이다.
"그거 재밌겠는데?"
그리고 이내 맑은 미소를 짓기 시작하였다.
새로운 갈굼의 대상
당진설의 등장이
지루해진 재경각 생활에 활력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까닭이었다.
"......그렇다면 맡아주는 건가요?"
요랑의 말에 당서윤은 화색은 띈 채 되물었다.
"대신 한 가지만 약속해줘, 내가 무슨 짓을 하든 묵인하겠다고, 그럼 맡도록 할게."
"네에, 약속할게요, 숨만 붙어있다면 무슨 짓을 하셔도 돼요."
당서윤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답을 하였다.
"자아, 그럼 새끼손가락 걸자."
요랑은 작고 어여쁜 새끼 손가락을 꼬물거리며 그대로 뻗었다.
당서윤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새끼손가락을 꼬물거리는 요랑의 모습이 꽤나 귀엽게 느껴진 까닭이었다.
그리고 이내 그녀 또한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꾸우욱
이내 두 새끼손가락이 맞닿았고
서로를 감싸기 시작하였다.
완벽히 약속을 맺은 것이다.
당진설을 마음대로 해도 된다는
당사자만 모르는 약속을 말이다.
씨익
약속을 마친 요랑은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지었다.
당진설이 온다고 생각하니
벌써부터 기대감이 치솟은 까닭이었다.
'어서와, 진설아...많이 예뻐해줄게.'
요랑의 입가에 지어진 미소가 더욱더 진해지기 시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