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12화 〉 1013. 전수 조건.
"전언을 가지고 왔어요."
운설은 심유한 눈빛으로 선우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당신의 스승인 음양마 어르신의 전언을 말이에요."
순간 선우는 표정을 싹 굳혔다.
그리고 진중하기 그지없는 눈빛으로 그녀를 마주하였다.
그녀가 찾아온 용건이 가벼이 넘겨들을 사안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 까닭이었다.
"......혹여 자연검의 전수에 관한 이야기입니까?"
이내 선우는 침중한 표정을 지은 채 입을 데었다.
"어.....알고 계셨나요?""
운설은 놀랐다는듯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되물었다.
설마하니 그가 이미 전언에 대해 알고 있었을 줄은 예상치 못한 까닭이었다.
"당가에 오기전 의천맹에서 곤륜파의 장문인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스승님과 관련된 일화를 전해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럼 처음부터 전부 알고 있었다...이런 말인가요?"
"그렇지요."
"그렇다면 어째서 절 곧바로 찾아오지 않으신거죠?"
운설은 황당하다는듯한 표정을 지은 채 되물었다.
자연검 전수에 관한 음양마의 전언을 전해들었다면
당가에 오자마자
마땅히 자신을 찾아와야하는 게 정상이 아니던가
어찌 두어 달에 가까운 시간동안 자신을 방치하다시피했다는 말인가
"............"
그녀의 물음에 선우는 곧바로 답을 할 수 없었다.
차마 잊었다는 말을 내뱉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음양마는 말했었다.
자연검自然劍은
불가해不可解의 존재
천마를 상대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무기라고
세상을 구할 수 있는 마지막 희망이라고 말이다.
그런데 선우는 그런 최후의 희망을 말끔히 까먹고 있었다.
사랑하는 연인들과 행복한 나날을 보내느라 말이다.
어찌 이런 사실을 이실직고할 수 있겠는가
'뭐라고..변명하지..뭐라고..'
선우는 맹렬히 머리를 굴리기 시작하였다.
무슨 변명을 내뱉어야할지
고심하고 또 고심하기 시작한 것이다.
운설은 그런 선우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무척이나 의심스럽다는듯이 말이다.
"까먹었군요."
그리고 이내 천천히 입을 떼어내었다.
"......아..아닙니다!"
선우는 다급한 어조로 부정을 하였다.
"아니긴요, 표정에서 다 티가 나는데."
운설은 택도없다는듯한 어조로 말을 내뱉었다.
표정에서 다 드러나건만 어디 부정을 한다는 말인가
"진짭니다. 무림의 명운에 걸린 중대사를 까먹었다니....그럴 리가 없지 않습니까?"
"그럼 말해주세요. 어째서 저를 꿔다놓은 보릿자루 취급을 하며 방치했는지 말이예요."
"........그...직접 찾아올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마음에.."
"그걸 지금 변명이라고 하는 거예요?"
운설은 어이없다는듯한 어조로 되물었다.
변명이 조잡하였다.
"...........조금 그렇습니까?"
선우는 뻘쭘한 표정을 지은 채 되물었다.
"많이 그래요. 차라리 사실대로 뉘우치는 게 덜 쪽팔릴 것 같네요."
운설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입을 떼었다.
".......사실 까먹었습니다."
선우는 그녀의 응원에 힘입어 사실대로 이실직고하였다.
무림의 명운따위는 까먹은 채 행복한 나날을 보냈다는 사실을 말이다.
"쓰레기"
그리고 그 말을 들은 운설은 한마디로 정의해주었다.
제약을 감수하여 현신한 참스승의 전언조차 새까맣게 잊어버린 이 막돼먹은 제자를 말이다.
그리고 그 말을 들은 선우는 얼굴을 슬며시 붉혔다.
부끄러움이 치솟아올랐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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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이런저런 사정이 있던터라.."
"맨날 놀러다닌 거 밖에 못 봤는데요?"
"노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업무에 치중하느라.."
"요랑님이 그러더라구요. 본인도 꿀보직인데 선우야말로 참된 꿀꿀이라고 말이예요. 먹고 자고 노는 게 일이라고 말이에요. 그런 분께서 업무에 치중했을 것 같진 않네요."
운설은 담담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
그리고 그 말을 들은 선우는 어떠한 답도 하지 못하였다.
틀린 말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죄송합니다...사실 노느라 까먹었습니다."
선우는 사실대로 이실직고하였다.
무슨 변명을 하든
씨알도 먹히지 않을 것이란 걸 인지한 까닭이었다.
"뭐, 제게 죄송할 필요는 없어요. 딱히 피해를 받았던건 아니니까요."
안일함에 답답함이 느껴지긴 하였지만
자신이 사과받을 만한 일도 아니었다.
그 안일함에 피해를 받은 것따윈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선배님을 오랫동안 기다리게 하지 않았습니까?"
"괜찮아요, 덕분에 나름 재밌는 일상을 구가할 수 있었으니까요."
운설은 태연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오랫동안 방치된 게 짜증나긴 하였지만
마냥 싫었냐고 물어보면 그것도 아니었다.
방치된 덕택에 여러가지 경험을 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그리 생각해주신다니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선우는 공손한 어투로 말을 이었다.
"별게 다 감사하네요."
운설은 담담한 어조로 입을 떼었다.
".............."
"............."
그리고 그 말을 끝으로 두 사람의 사이에는
어색한 침묵이 흐르기 시작하였다.
일단락되긴 하였지만 뭔가 더 이어갈 말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궁금한 게 있습니다."
이내 선우가 운설을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떼었다.
"말씀하세요."
운설은 차분한 어조로 말을 받았다.
"선배님께서는.......자연검을 이미 익히고 계신 것입니까?"
"바보네요."
운설은 부드러이 미소를 지은 채 말을 이었다.
"익히고 있으니 당신을 가르칠 수 있는 게 아니겠어요?"
당연한 말이었다.
자신조차 모르는 것을
누군가에게 전수해줄 수는 없는 노릇이니 말이다.
".....이해가 안되는군요."
하지만 선우는 이해할 수 없다는듯한 표정을 지은 채 입을 떼었다.
"뭐가 이해가 안된다는 거죠?"
"자연검은....오직 선계에 들어선 신선만이 익힐 수 있는 초월의 검이라고 들었습니다....그런데 어찌 그런 검을 반선인 선배님께서 익히고 있는 것입니까?"
선우는 모르겠다는듯한 표정으로 물음을 던졌다.
본디 자연검은
신선의 경지에 다다른 초월자만이 다룰 수 있는
초월의 검이었다.
그런데 어찌 아직 등선도 못한 반선이
그런 검을 익힐 수 있다는 말인가
"백 여년의 집념이 만들어낸 결과예요."
"백 여년의 집념?"
선우는 의아한듯한 표정을 지은 채 되물었다.
"현경에 도달한 곧바로 폐관에 들어가 강산이 몇 번이고 바뀔 세월 동안 오직 자연검만을 생각했어요. 초월자의 검을 인간의 몸으로 구현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서 말이에요. 그리고 강산이 열 번정도 바뀔 때쯤 소기의 성취를 이룰 수 있었어요."
운설은 별빛과 같은 눈빛을 반짝이기 시작하였다.
"완벽하진 않지만 인간의 몸으로 자연검을 이룩할 수 있게 된 거죠."
운설은 뿌듯한 표정을 지은 채 말을 이었다.
뿌듯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인간의 몸으로 자연검을 구현해낸다는 것은
지금껏 그 어떤 누구도 시도하지 않은 일이었다.
자연검을
오직 신선만이 익힐 수 있다는
고정관념이
자연검을 익히겠다는
도전욕구조차 완전히 앗아가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런 운설은 그런 고정관념을 부정하고
백여 년의 세월을 바쳐 인간의 몸으로 초월자의 검을 구현시켰다.
세간의 인식을 뛰어넘는 위대한 업적을 이룩한 것이다.
그런데 어찌 뿌듯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대단하군요.."
선우는 감탄했다는듯한 표정을 지은 채 입을 떼었다.
그녀의 거대한 집념이 만들어낸 결과에
감탄이 절로 터져나온 까닭이었다.
인간은 자연검을 익힐 수 없었다.
모든 자연을 따르게 하는 그 힘은
인간을 벗어난 신의 영역에 도달하였다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인간이 자연검을 익힐 수 없다는 사실은 어찌보면 무림에서는 상식에 가까운 당연한 발언이었다.
인간의 몸으로 신의 힘을 발현시킬 수는 없는 노릇일테니 말이다.
그런데 운설은 그런 신의 힘을 스스로 발현시켜버렸다.
백 여년의 세월을 바쳐 정해진 한계를 타파하고 위대한 업적을 이뤄낸 것이다.
어찌 감탄을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금칠을 해주시니....그리 싫지는 않네요."
운설은 흡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본디 사람이란
인정 욕구로 가득 찬 동물이다.
누군가로부터 인정받는다는 느낌으로부터
크나큰 만족감과 충족감을 느끼며 쾌락을 느끼는 것이다.
그리고 그건 운설 또한 마찬가지였다.
비록 반선에 경지에 올라 감정이 무뎌지긴 하였지만
본능적인 인정 욕구마저 사라지진 아닌 것이다.
"그것보다 선배님........그런 위대한 업적을 제게 그리 쉽사리 나눠주셔도 되는 겁니까?"
선우는 궁금하다는듯한 표정을 지은 채 물음을 던졌다.
무려 백여 년의 세월을 바쳐 이룩한 깨달음의 정수였다.
그 가치를 따진다면 중원에 존재하는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녀가 그런 깨달음의 정수를 아낌없이 나눠주려고 하고 있었다.
어찌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있겠는가
"쉽사리 나눠준다는 말.....안했는데요?"
"네에?"
순간 선우는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은 채 되물었다.
"전수하기 위해 왔다고 했지. 곧바로 전수해준다는 말은 한 적은 없는데요?"
"........같은 말 아닌가요?"
"다르죠, 제 기준에 따라 자연검의 전수여부가 달라질테니까요."
운설은 태연한 표정을 지은 채 말을 이었다.
"......그 스승님과 약속하시지 않으셨습니까? 태사조의 목숨과 곤륜의 멸문을 막아준 대신 제자인 제게 자연검을 전수해주라고 말입니다."
선우는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은 채 되물었다.
듣기론 그녀가 자연검을 전수를 수락한 이유에는
음양마로부터 받은 은혜가 있다고 들었다.
그런데 어찌 이렇게 태세전환을 하며 간을 본다는 말인가
"자연검 전수 조건을 하나 말씀드리지 않았나보네요. 인성이 검증되지 않는다면 자연검 전수도 물건너간다는 조건을 말이예요."
운설은 담담한 어조로 말을 내뱉었다.
자신이 음양마에게 내건 자연검 전수조건을 말이다.
"..........인성 말입니까?"
"네에, 인성이요."
운설은 고개를 작게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자연검은 인간이 갖기엔 너무나 위험한 힘이예요. 한순간의 선택으로 인간계에 어마어마한 재앙을 선사할 수도 있을정도로 강대한 힘을 내포하고 있으니까요."
불완전하긴 하지만 자연검은 재앙이라고 칭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힘을 품고 있었다.
자칫 잘못하다간 인간계에 돌이킬 수 없는 재앙을 선사할 수 있는 것이다.
때문에 전수에 있어서 신중에 신중을 기할 수밖에 없었다.
재앙에 가까운 힘이
악인 손에 들어가는 것만큼 위험한 일도 없었으니 말이다.
"그러니 신중을 기할 수밖에 없어요. 전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모르니까요."
"한달이면 저에 대해 판단하기 충분한 시간이지 않으셨습니까?"
"그 한달동안 많이 만나고 대화를 나눠봤다면 충분한 판단이 되겠지만 아쉽게도 한달내내 마주치지 못해서요."
운설은 담담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아니 그럼 왜 저를 찾아오시지 않으신겁니까?"
"낮밤 가리지 않고 부인들과 교접하면서 시간 보내는 사람을 어떻게 다짜고짜 찾아가요?"
운설은 불만 어린 표정을 지은 채 말을 이었다.
그의 정력적 활동때문에
늦춰진 일정에 대해 불만이 치솟은 까닭이었다.
".............낮밤을 가리긴 했습니다.."
"거짓말마세요, 낮밤으로 마누라를 바꿔가면서 교접했잖아요?"
운설은 코웃음을 치며 말을 이었다.
만물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운설이었다.
그런 그녀에게 선우의 문란 성생활의 폭로따윈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지금 제 사생활을 엿들으신 겁니까!? 그건 도청입니다!"
민망함을 느낀 선우는 발끈하며 언성을 높였다.
"소리를 그렇게 크게 내는 데 어떻게 안듣고 배겨요? 애초에 이쪽은 소음공해를 잠조차 못잤다구요!"
"아니 상시 기막을 쳐놨는데 어찌 엿들을 수 있다는 말입니까? 이건 선배님께서 작정한 게 아니고서야 불가능한 일입니다!"
"누가 그런 낯부끄러운 소리를 대놓고 엿들어요! 모용 부인도 아니고!"
"그건 또 어떻게 아셨습니까!?"
선우는 뜨억하는 표정을 지은 채 되물었다.
"제 귀에는 만물의 소리가 들려와요. 기막으로 막아봤자 모든 이야기가 그대로 전해들려온다구요."
운설은 태연한 표정을 지은 채 말을 이었다.
"................"
그리고 그녀의 말을 들은 선우는 입을 꾹 다물었다.
만물의 소리를 다듣는건
기막 따위로는 그녀의 청각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그리고 그 의미는
'내 조련 과정을 전부 전해들었다는 거 아니야!?'
그간 당가에서 일어났던 음탕한 조련들을 모조리 알고 있다는 말과 일맥상통하였다.
화아아아아악
'..........망할..'
선우는 얼굴을 잔뜩 붉힌 채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나름의 치부를 적나라하게 보였다고 생각하니
참을 수 없는 수치심이 치솟은 까닭이었다.
"부끄러운가봐요? 얼굴이 되게 빨갛네요."
그 모습을 본 운설은 재밌다는듯한 표정을 지은 채 말을 이었다.
부끄러워하는 선우의 모습이 꽤나 재밌게 느껴진 까닭이었다.
"부끄럽지요....사생활이 드러났는데..."
"걱정마세요, 어디서 떠벌리고 다니진 않을테니까."
운설은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은 채 말을 이었다.
"어쨌든 당신을 만나고 한달 동안 교접소리만 들었던터라 인성을 검증할 수가 없었어요. 지금 당장은 자연검을 전수해주는 게 무리란 말이죠."
이내 운설은 신색을 회복한 채 말을 이었다.
"제겐 시간이 없습니다. 선배."
선우는 그녀에게 간청하기 시작하였다.
천마가 언제고 쳐들어올 지 모를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그에게 맞설 유일무이한 무기조차 존재치 않다니
불안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시간이 없다해도 안되는 건 안됩니다. 전 당신의 인성을 모르니까요."
운설은 단호한 표정을 지은 채 말을 이었다.
"그럼 인성을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주십시오. 어떻게든 인성을 증명하여 당신의 기준을 통과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선우는 단호한 표정을 지은 채 말을 이었다.
"인성을 증명할 기회라......"
선우의 말을 들은 운설은 고민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천천히 뜸을 들이기 시작하였다.
무언가 고심을 하듯이 말이다.
"방법이 없진 않네요."
그리고 이내 천천히 입을 떼었다.
"그럼 말씀해주십시오, 대체 어떻게 하면 되는 겁니까?"
선우는 의문 어린 표정을 지은 채 그녀를 재촉하기 시작하였다.
"비무를 하죠."
운설은 부드러이 미소를 지은 채 말을 이었다.
"검을 맞대는 것만큼 서로에 대해 제대로 파악할 수 있는 일도 없을테니까요."
운설의 별빛같은 눈동자가 더욱더 반짝이기 시작하였다.
그 눈빛에는 호승심이 잔뜩 묻어나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