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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협지 안으로 들어와버렸다-976화 (977/1,419)

〈 976화 〉 977. 빈털털이가 되다.

선우와 당서윤

마주보고 있는 두 사람 사이에는 오래토록 침묵이 흐르기 시작하였다.

그저 서로를 바라 볼뿐.

둘 중 누구하나 입을 여는 이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오랜 시간동안

침묵이 흘렀을까

"왜 대답이 없지?"

북풍한설과 같이 시리디 시린 눈빛을 빛내던 당서윤이 무미건조한 어투로 말을 내뱉었다.

오싹

그리고 그 무미건조한 목소리를 들은 선우는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꼈다.

본능이 경고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어마어마한 분노를 품고 있다는 사실을

".......서윤아...그러니까...이게..어떻게..된거냐면.."

선우는 머리를 필사적으로 굴리기 시작하였다.

그녀가 납득할 만한 변명을 설득력있게 내뱉기 위해서 말이다.

본디 말이라는 건 꾸미기 나름이었다.

같은 말이라도 꾸미기에 따라

질타를 받을 수도 있고

용서를 받을 수도 있는 것이다.

'할 수 있어...그럴려고..깔아놓은 포석이니까.'

포석을 깔기 위해

일부러 모용란에 대한 동정을 유도하였다.

그녀의 속사정을 과장될 법하게 느껴질 정도로

부풀리고 안타까운 피해자로 포장한 것이다.

오직 지금 이 순간의 포석으로 활용하기 위해서 말이다.

'그러니 해낼 수 있을 것이다...'

계획은 완벽했다.

질타와 비난이 아닌

용서를 구현해낼 수 있는 것이다.

"됐고, 결론부터 말하자면 모용란과 잤다는 거지?"

당서윤이 말허리를 그대로 끊어버리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그렇지?"

선우는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은 채 말을 이었다.

결론부터 말하면 그녀의 말이 맞았다,

모용란과 동침한 사실은 속일 수 없는

엄연한 진실이였으니 말이다.

"그런데...여기에는...깊은 사정이.."

선우는 변명을 이어가기 위해

말꼬리를 필사적으로 잇기 시작하였다.

이대로 끝내선 안되었다.

제대로된 변명으로 내뱉어

위기를 벗어나야하는 것이다.

"됐어, 무슨 상황인지 알겠으니까."

당서윤은 손사래치며 말을 이었다.

수 많은 업무처리를 하며 효율과 합리성을

우선시하는 합리주의자로 성장한 그녀였다.

그럴듯한하게 같은 말을 여러번 반복하는

변명은 사양이었다.

"결론만 말하면 모용란을 살리기 위해 동침했다는 말 아니야?"

"......맞아."

선우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동의하였다.

결론만 말하면 틀린 말이 아니었다.

아니 어찌 보면 본질에 가까운 핵심적인 내용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럼 더 변명할 필요 없어, 어떤 상황인지, 어째서 그녀와 동침했는 지 충분히 이해했으니까."

".........그..그래."

선우는 마지못해 고개를 주억거렸다.

결론을 지어버리니

할 말이 궁색해진 까닭이었다.

'이러면..나가리인데.'

그야말로 나가리였다.

힘들게 깔아놨던 포석이 완전히 무용지물이 된 것이다.

"..............."

선우는 슬며시 시선을 올려 당서윤의 눈치를 살피기 시작하였다.

말이 없으니 괜스레 불안감이 차올랐다.

"뭘 봐?"

그 모습을 본 당서윤은 담담한 어조로 입을 떼었다.

"그...아무 말도 없길래..."

"왜 욕이라고 해줘?"

당서윤은 담담한 표정을 지은 채 입을 떼었다.

"화 안났어?"

"화났어."

당서윤은 차분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내 남편이 다른 여자와 동침했다는데 어떻게 화가 안날 수 있겠어?"

"근데...왜..가만히 있어?"

선우는 모르겠다는듯한 표정을 지은 채 입을 떼었다.

본디 화가나면 언성을 높이며 고함을 내지르거나

거칠고 과격한 행동을 하기마련이었다.

그런데 눈앞에 당서윤은 그런 것이 전혀 없었다.

차분하기 그지없는 것이다.

"이해가 되니까."

당서윤은 담담한 표정을 지은 채 입을 떼었다.

"이해가 된다고?"

"솔직히 네가 그녀와 동침을 선택했다는 사실이 화가 나긴 해, 모용란의 이기적인 억지를 그대로 들어준 네 물렁함에 말이야."

당서윤은 속내를 털어놓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이해가 안되는 것도 아니야, 너도 모용란도 다른 선택지따윈 없었을테니까."

당서윤은 차분히 가라앉은 눈동자로 선우를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다른 선택지따윈 없었을 것이다.

두 사람 모두 말이다.

불명예스러운 치부를 들킨 모용란에게 확신이 필요하였을 것이다.

선우가 발설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모용가를 대표하는 그녀 자신의 치부가 드러나게된다면

그녀 뿐만아니라 모용가 전체가 오명을 뒤집어쓸 수밖에 없을터이니

그러니 동침이라는 천박하면서도 저열한 수단을 선택하였을 것이다.

서로의 약점을 쥐는 것만큼 비밀 유지에 효율적인 방법도 없을테니까 말이다.

방법이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한 편으로는 그녀의 입장이 이해가 되었다.

어찌 보면 가문의 존망을 위해

그 높은 자존심을 굽히고 외간 남자에게 몸을 허락했다고 할 수 있으니 말이다.

그리고 이 눈앞에 있는 외간 남자, 선우의 입장 또한 이해가 되었다.

모든 일의 원인은 모용란의 음행이었다.

그녀가 처소에 찾아와 지청술을 쓰지 않았더라면

처소 안을 엿들으며 자위를 하지 않았더라면

자위를 하다 선우에게 들키지 않았더라면

찾아와 목에 칼을 들이밀고 협박을 하지 않았더라면

두 사람이 동침을 하는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을테니까 말이다.

어찌보면 선우는 일에 휘말린 피해자 입장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마냥 질타와 비난을 할 수는 없었다.

개인적인 감정은 차치해두고

상황만 본다면 선우는 인류애적인 마음으로

모용란은 구제해준 것이나 다름없으니 말이다.

"...그걸....이해..해주는거야?"

선우는 놀랍다는듯한 어조로 물음을 던졌다.

뺨 몇 대 맞을 각오는 충분히 하고 온 선우였다.

나름의 명분이 있다지만

감정적으로 충분히 화낼 수 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든 까닭이었다.

"네가 욕망을 주체하지 못해서 일어난 일이 아니잖아? 어찌보면 너도 사건에 휘말린 피해자라고 할 수 있지. 사람 하나 살리자고 원치 않은 여자와 동침하게 되었으니까 말이야."

"............."

선우는 입을 다물었다.

살리고자 한건 맞았지만

원치 않은 여자와 동침했다는 건 전혀 맞지 않은 사실이었다.

몇 번이고 즐기면서 모용란과 밤을 지새운 까닭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화내? 욕망에 휘둘려서 아랫도리 휘두르던 때와 달리 생명구제라는 명분이 있잖아? 그게 마음에 안든다고 화내봤자, 나만 속좁은 년이지."

당서윤은 태연한 표정을 지은 채 말을 이었다.

'.......대인배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본 선우는 감탄을 하였다.

아무리 생명구제라는 명분이 있다해도

모용란과의 동침은 엄연히 불륜이었다.

사랑하는 부인들이 있는 상황에서 다른 여자를 품에 안게된 것이니 말이다.

그런데 그런 불륜마저 이해해주었다.

물렁한 선택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서

그런 선택을 한 자신의 상황과 심정을 존중해준 것이다.

어찌 대인배라고 칭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서윤..."

선우는 감격 어린 눈빛으로 당서윤을 바라보며 입을 떼었다.

"뭐야, 그 눈빛은? 징그러우니까 저리 치워."

선우의 눈빛을 마주한 당서윤은 눈살을 찌푸리며 날카롭게 말을 내뱉었다.

"널 만난 건 최고의 행운이야."

"그걸 이제 알았어?"

당서윤은 코웃음치며 고개를 옆으로 돌려버렸다.

'부끄러움 많네.'

그 모습을 선우는 부드러이 미소를 지었다.

말은 날카로웠지만 그녀의 귓불이 상당히 붉어져있었다.

그 모습에 선우는 알 수 있었다.

그녀가 부끄러워 시선을 피했다는 사실을 말이다.

참으로 귀여운 여자가 아닐 수 없었다.

"...........서윤아."

"말해,"

"물어볼 게 있는데......."

"말해."

"이번 건 사람을 살리기 위해........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한거니까......그...계약에 대해서는..살짝........조정이....."

"계약은 그대로 이행될거야."

당서윤은 단칼에 선우의 말을 끊어버렸다.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말이다.

"그.....이해한다고...하지 않았어?"

"이해해, 하지만 계약은 별도의 이야기야."

당서윤은 담담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계약은 오직 계약서에 쓰여진 내용을 바탕으로 이행여부가 결정돼, 그리고 계약서에는 이렇게 쓰여있었지. 네가 모용란과 밤을 보내거나 음행에 가까운 짓을 한다면 토지와 건물, 현물을 포함한 전재산, 사백만냥을 부인들에게 위자료로 균등히 지급한다고 말이야."

당서윤은 조목조목 따지며 말을 내뱉었다.

"........그..상황에 따라..조정할 수 있지 않을까?"

"미안해, 조정하고 싶지 않네."

당서윤은 단호한 표정을 지은 채 말을 이었다.

"어..어째서?!"

"속상해서."

"속상해?"

"무척이나."

당서윤은 단호함이 서린 눈동자를 반짝이며 말을 이었다.

"내 남자가 다른 여인과 동침하게 되었고 같이 밤을 보낼 시간이 또다시 줄어들게 되었어, 그런데 어떻게 속상하지 않을 수 있겠어?"

"..........."

"아마 나뿐 아니라 다른 부인들도 같은 심정일거야....모두 착한 사람들이니까......너를 이해하고 화를 내진 않겠지만 속이 많이 상했을거야........사랑하는 낭군이 또다시 다른 여자에게 공유되는 거니까."

당서윤은 차분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조정치 않을거야, 위자료를 받게된다면 그 속상한 마음에 심심한 위로가 될테니까."

위자료는 본디

비물적인 손해, 즉 정신적 손해를 배상하기 위한 금액이었다.

어찌보면 마음껏 화를 낼 수 없지만 속이 상할대로 상한 지금 같은 상황에서

가장 도움이 되는 방도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심심한 위로가 될터이니 말이다.

"................."

선우는 어떠한 반박도 할 수 없었다.

그녀의 태도가 너무나 단호하였기 때문이었다.

바늘 하나조차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말이다.

"그러니까, 사백 만냥, 내놔."

당서윤은 그런 선우를 바라보며 손바닥을 폈다.

단호한 표정을 지은 채 말이다.

"......그...이게....토지랑...건물이랑....사업체랑...현물이....각각 일정 비율로 나눠져있어서...갑자기 줄 수는...."

사백만 냥이 갑자기 뚝딱 나올 수는 없었다.

재산을 일정 비율로 분산해둔 까닭이었다.

본디 재산이란 나눠서 소유하고 있어야하는 법이었다.

한쪽에 쏠려있을 경우

예기치 않은 일로 상당한 손해를 입을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 사실을 잘아는 선우였기에

무림에서도 완벽한 분산분배를 해놓은 상황이었다.

토지와 건물, 사업체, 현물까지

다양한 방법으로 말이다.

그런 상황에서 사백 만냥이라는 거금이 뚝딱 나올 리 만무하였다.

"괜찮아, 서류에 수결만 찍으면 되니까."

그 말을 들은 당서윤은 대수롭지 않은 표정을 지은 채 입을 떼었다.

"응?"

그 말을 들은 선우는 의아한듯한 표정을 지은 채 되물었다.

저게 별안간 무슨 소리란 말인가

수결이면 충분하다니?

드르륵

그때 당서윤이 책상 밑 서랍장을 열어젖혔다.

그리고 한 뭉텅이의 서류를 꺼내들더니

그대로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자아. 읽어보고 수결해."

스으윽

당서윤은 그 서류 뭉텅이를 선우 쪽에

밀어내며 말을 내뱉었다.

"이게...뭔데?"

"네가 가진 토지, 건물, 사업체의 양도증명서와 돈을 맡겨놓은 모든 전장의 명의 이전 증명서야."

당서윤은 담담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뭐..뭐라고?"

그녀의 말을 들은 선우는 놀란듯한 표정을 지은 채 재빨리 서류를 훑어보기 시작하였다.

과연 그녀가 말한대로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토지와 건물, 사업체는 물론 분산 투자해둔 수많은 전장들과 관련된 양도증명서들이었다.

"이..이걸..언제?"

선우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자신의 재산은 이리저리 상당히 복잡하게 분산되어있었다.

그걸 한번에 구비해둔 걸 보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계약서를 작성한 당일, 혹시 몰라, 구비해두었어."

당서윤은 대수롭지 않은 채 말을 내뱉었다.

".......이렇게 될 줄 알고?"

"혹시 몰라서. 그런데 그 혹시가 역시가 되어버렸네."

당서윤은 안타까운 표정을 지은 채 말을 이었다.

그녀또한 웬만해선 이 재산 양도증명서를 꺼내들 일이 없기를 희망하였다.

다른 여자와 또다시 선우를 공유하는 일은 끔찍히도 싫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일은 이미 벌어져버렸고

양도 증명서를 꺼내들 수 밖에 없게 되었다.

실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수결만 찍어, 나머진 내가 알아서 할테니까."

당서윤은 담담한 표정을 지은 채 입을 떼었다.

"............."

그리고 선우는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계획과 전혀 다른 상황이었다.

사실 재산 양도를 준비하면서 딴주머니를 찰 생각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남자가 땡전 한 푼도 없이

살아가는 무척이나 곤혹스러운 일이 될테니 말이다.

그런데 그런 계획이 완전히 차단당하였다.

모든 재산을 확인하고 양도 증명서까지 준비한 당서윤의 철저함에 의해서 말이다.

'곤란한데..'

곤란하였다.

이대로 수결을 찍어버리면

자신의 모든 재산은 양도되며

어떤 접근도 할 수 없게 될 것이다.

딴주머니를 찰 수 없게되는 것이다.

곤란할 수밖에 없었다.

"서윤아....그...모든 재산을 전부 가져가는 건.."

"난 계약한대로 이행할 뿐이야."

"그럼...개평이라도."

"여기가 무슨 도박장인 줄 알아?"

"......그럼...만 냥만.."

"싫어."

".......천 냥만.."

"싫어."

"이 돈이 없으면 난 뭐 먹고 살라고!"

"집에서 먹고 살아, 밥나오고 옷나오고 다 나오는데 돈 쓸데가 어디있어?"

"나도...당과라던가.....우리 사랑하는 부인들 선물이라던가...연우 선물이라던가...이런 건 사주고 싶다고!"

"돈 많을 땐 한 번 사준 적 없으면서, 돈 없어지니까 갑자기 사주고 싶어져?"

"............."

"용돈 받아써. 매달 챙겨줄거니까."

"사십 냥."

"사십 냥는 너무 적어! 사백 냥은 줘야지!"

"사십 냥."

"그래....타협해서 이백냥만 줘....이게 사회생활하다보면 남자가 전낭이 두둑해야한단 말이야."

"사십 냥."

"그럼..백 냥...많이..양보했다..백냥이면 군말없이 수결찍을게!"

"사십 냥."

".......오십 냥만이라도.."

"사십 냥."

당서윤은 단호하기 그지없는 표정을 지은 채 말을 내뱉었다.

"............"

그 모습을 본 선우는 고개를 푹 떨궜다.

그녀의 단호한 태도를 꺾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든 까닭이었다.

"........돈은..오늘..바로...주는 거지?"

"수결만 찍는다면."

당서윤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을 이었다.

"후우우우우."

선우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쓰윽 쓰윽 쓰윽

그리고 붓을 들어 손바닥에 먹물을 바르기 시작하였다.

꾸우우욱

그다음 재산 양도증명서에 수결을 완전히 찍어버렸다.

'내 돈.....'

속으로 피눈물을 흘리면서 말이다.

그렇게 선우는 한순간의 쾌락을 전재산과 맞바꿔

빈털털이가 되고 말았다.

존경받는 대영웅의 재산이라고 하기엔

초라하기 그지없는 몰골로 전락해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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