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21화 〉 922. 거대한 악의.
"진맥을 좀 짚어봐도 될까?"
선우는 주소양을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떼었다.
"..여기요."
그 말을 들은 주소양은 한치의 망설임없이 오른 팔을 내밀었다.
덥석
선우는 내밀어진 오른팔을 살며시 붙잡았다.
그리고 검지와 중지를 쭉 편 후 그녀의 손목에 가져다대었다.
그다음 눈을 감고 느끼기 시작하였다.
맥을 통해 전해져오는 고동을 말이다.
".........."
주소양은 그런 선우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걱정 어린 표정을 지은 채 말이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스르륵
이내 선우가 천천히 눈을 뜨기 시작하였다.
"소양."
그리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던 주소양을 불렀다.
"..네에.."
주소양은 긴장 어린 눈동자로 그를 응시하며 답을 하였다.
"고생했어..."
선우는 양팔을 뻗어 그녀를 부드러이 감싸안았다.
"..그....그...말은?"
선우의 품 안에 안긴 주소양은 떨리는 목소리로 물음을 던졌다.
"임신했어.....우리..아이가...생긴 거라고."
선우는 기쁜듯 함박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그녀를 더욱더 강하게 껴안기 시작하였다.
"...정..정말..정말인가요?...정말..제..뱃속에...아이가..들어선 건가요?"
주소양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몇 번이고 확인하기 시작하였다.
자신이 들은 말이 정말로 사실인지 말이다.
"맥에서 태동이 두 개 느껴졌어....임신한거야....진짜로...애가 들어선거야!"
선우는 확신에 찬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확인시켜주었다.
진실로 아이가 들어섰음을 말이다.
"그..그럴수가.....흐윽.."
그 확신에 찬 눈동자를 마주한 주소양은 감격 어린 표정을 지은 채 눈물을 짓기 시작하였다.
정식 부인으로 인정받은 이후 그녀는 항상 임신하기를 간절히 원하였다.
선우와의 사랑의 결실을 만들기를 언제나 희망해왔던 것이다.
하지만 그럼 바램과 달리 아이는 쉽사리 들어서지 않았다.
나이가 든 탓인지
아니면 정성이 부족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배가 불러올 기미따위는 전혀 보이지가 않았던 것이다.
그렇기에 더욱더 간절하였고
더욱더 염원하였다.
사랑의 결실이 맺어지기를 말이다
그런데 오늘 그 사랑의 결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아이가 생겨버린 것이다.
"흐으윽..흐윽...흐윽.."
이내 주소양은 격정적인 눈물을 흘리기 시작하였다.
차오른 감격과 행복감이 그녀의 눈물샘을 쉴새없이 자극한 까닭이었다.
쓰윽 쓰윽
선우는 손을 뻗어 그녀의 눈물을 부드러이 닦아주었다.
그리고 말없이 그녀를 품안에 꼬옥 안아주었다.
누구보다 아이를 원하였던 그녀의 간절함이 십분 이해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말은 하진 않았지만 아이가 들어서지 않았던 것에 대한 심적 고생이 심하였을 것이다.
그렇기에 어떠한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모든 감정을 토해낼 때까지 기다릴 뿐이었다.
토닥 토닥 토닥
선우는 그녀의 등을 부드러이 토닥여주었다.
그녀의 벅차오른 감정이 사그라들 때까지 말이다.
"흐아아아아아아앙!!!"
이내 주소양은 결국 울음을 터트리기 시작하였다.
말없이 토닥여주는 선우의 따스한 위로가 마음 속 깊이 그대로 전해졌기 때문이었다.
.
.
.
.
.
그렇게 얼마나 울음을 터트렸을까
"죄송해요...선우님..제가..추태를 부렸네요."
어느새 마음을 진정시킨 주소양이 물기 어린 눈빛으로 선우를 바라보며 사과를 하였다.
감정이 격해졌다고는 하지만 너무나 과한 추태를 보였다는 생각이 든 까닭이었다.
"그간 힘들었잖아?.......충분히 울만했지.......그러니까 신경쓰지마, 소양."
선우는 손사래치며 말을 이었다.
"선우니이임..."
주소양은 감동에 젖은 눈빛으로 선우를 바라보며 입을 떼었다.
자신의 심정을 공감해주는 선우의 태도에 다시 한 번 감동을 한 까닭이었다.
"대신 이제부터는 기쁠 땐 웃기로 하자, 우리 아가도...엄마가 우는 것보단 웃는 걸 더 좋아할거야."
선우는 부드러이 미소를 지은 채 말을 이었다.
"우리..아가요?"
선우의 말을 들은 주소양은 떨리는듯한 어조로 물음을 던졌다..
"그래, 우리 아가.....너와 내 핏줄을 이은 하나뿐인 결실 말이야."
"맞아요.....저..엄마가..됐어요.....선우님을 핏줄을 이은.......아기의..엄마가 되었어요."
주소양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두 아이에 엄마가 되었다는 사실에 벅찬 감격이 차오른 모습이었다.
"그러니 이제 웃을게요.....울지..않고...즐겁게..웃으며 살아갈게요.."
주소양은 환하게 웃음을 지었다.
저 하늘 위에 떠있는 햇빛보다 찬란한 눈부신 미소를 말이다.
그 미소를 마주한 선우는 마찬가지로 애정 가득한 미소를 짓기 시작하였다.
자신의 아이를 품고 있는 주소양의 모습이 너무나 사랑스럽게 느껴진 까닭이었다.
'소양, 꼭 행복하게 해줄게.'
선우는 속으로 다짐하였다.
무슨 일이 있어도 주소양과 뱃속의 아이를 행복하게 해주겠다고 말이다.
그렇게 한창 감격스러운 감정을 나누고 있을 때였다.
쿵 쿵 쿵 쿵
갑자기 누군가 문을 두드리기 시작하였다.
"맹주님! 맹주님!"
곧이어 팽가련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하였다.
"아무래도...그만해야겠는데?"
그 목소리를 들은 선우는 어색한 표정을 지은 채 말을 이었다.
"......그러게요."
주소양은 아쉬운듯한 표정을 지은 채 답을 하였다.
격정적인 순간을 오래토록 나누지 못하였다는 사실에 진한 아쉬움이 차오른 까닭이었다.
주소양은 천천히 몸을 떼어내었다.
"들어오세요..."
그리고 문쪽을 바라보며 천천히 말을 내뱉었다.
끼이이이익
그녀의 허락이 떨어지기 무섭게 곧바로 문이 열리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고혹적인 느낌의 귀부인, 팽가련이 그 모습을 드러내었다.
"맹주를 뵙습니다."
안으로 들어선 팽가련은 정중한 태도로 인사를 건네었다.
"무슨 일인가요? 집법당주."
주소양은 차분히 가라앉은 어조로 입을 떼었다.
좀더 선우와 감정적 교류를 나누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맹주로서의 업무를 소홀히 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공과 사는 확연히 구분되어야하는 것이다.
"구파에서 사람을 보내왔습니다!"
"구파에서 말인가요?"
주소양은 다소 놀란듯한 어조로 물음을 던졌다.
전혀 예상치 못한 그들의 등장에 당혹스러움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렇습니다."
"무슨 일이라고 하던가요?"
"........점창의 멸문 원인을 찾기 위해 운남으로 파견 된 조사단에 대한 소식을 가지고 왔다고 합니다."
"조사단에 대한 소식을요?"
주소양은 침중한 표정을 지었다.
운남으로 향한 조사단이라면 의천맹의 원로인 계상득이 자원하였던 곳이 아니던가
"...그렇습니다."
"바로 가보도록 하겠습니다....지금 어디에 있죠?"
"접객실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팽가련은 공손히 말을 이었다.
스르륵
그리고 그 말을 들은 주소양은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도 가지."
그 모습을 본 선우는 그녀를 따라 몸을 일으켜세웠다.
"...이건..무림의 일이에요...선우님... 구태여 신경쓰시지 않으셔도...돼요"
주소양은 걱정스러운 어조로 물음을 던졌다.
이제는 무림인이 아닌 군왕君王이 된 선우였다.
무림 일로 그를 신경쓰게 하고 싶지 않았다.
"아니, 단순히 무림의 일이 아닐지도 몰라."
선우는 의심 어린 표정을 지었다.
화룡도를 든 괴인으로부터 마교의 음모를 전해들은 선우였다.
만약 남만야수궁이 점창파를 멸문시킨 흉수가 맞고
그 뒤에 마교가 암약하고 있는 것이라면
이건 단순히 무림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마교는 결국 무림인뿐 아니라 일반 백성들까지 처참히 학살하고 말테니까 말이다.
'직접 실상을 들어야겠군.'
선우는 눈빛이 차분히 가라앉기 시작하였다.
냄새가 났다.
진한 음모의 냄새가 말이다.
*********
접객실
한 명의 거지가 손가락을 쉴새없이 물어뜯은 채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새로운 맹주가 들어오기를 말이다.
그렇게 얼마나 기다렸을까
끼이이익
이내 문이 서서히 열리면서 눈부시게 아름다운 여인이 그 모습을 드러내었다.
의천맹의 차기 맹주로 취임한 여중제일인.
주소양이었다.
"맹주를 뵙습니다."
그녀가 들어오자 거지는 무척이나 공손히 인사를 건네었다.
한 단체의 수장에 대한 극진한 예를 취한 것이다.
"개방의 협사를 뵙습니다."
주소양은 차분히 가라앉은 어조로 인사를 건네었다.
"운남으로 파견된 조사단에 관한 소식을 가지고 오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곧바로 본론을 건네었다.
숙부처럼 따랐던
가장 큰 지지자 계상득에 대한 소식이 궁금한 까닭이었다.
"..어떤 소식인지 들을 수 있을까요?"
주소양은 의문 어린 표정을 지은 채 물음을 던졌다.
"....당연히 말씀드려야지요."
그 말을 들은 거지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입을 떼었다.
"전해드릴 소식은 세 가지입니다."
거지는 침중한 표정을 지은 채 입을 떼었다.
"첫 번째는 점창을 멸문시킨 흉수가 남만야수궁이라는 사실입니다."
".......제대로 검증이 된 사실인가요?"
"그렇습니다.....과거 야수궁과 손속을 겨루었던 경험이 있던....계상득 원로께서...점창파 내부에 있던 흔적들을 보고 직접 확인해주신 사실입니다..."
".....그렇군요."
주소양은 침중한 표정을 지은 채 고개를 주억거렸다.
내심 남만야수궁이 흉수가 아니길 바랬던 그녀였다.
마교를 견제하는 것만으로도 벅찬 상황에서
야수궁까지 합세하게 된다면 이래저리 골치아파질 것이 뻔하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런 바램은 무참히 부숴져버렸다.
"다음 소식은 무엇인가요?"
주소양은 진지한 표정을 지은 채 입을 떼었다.
"그리고 두 번째 소식은......조사단이 전멸하였다는 소식입니다."
거지는 무거운 어조로 입을 떼었다.
"뭐..뭐라구요!?"
주소양은 놀란듯 되물었다.
전멸이라니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란 말인가
"....흉수를 알아낸 이후 조사단 측에서는 남만야수궁에게 사절을 보냈습니다.......전쟁을 피하고 싶다면....사건에 연루된 모든 이들을 내어놓으라고 말입니다."
"......내놓지 않았군요."
주소양은 알겠다는듯이 말을 내뱉었다.
어떤 반응을 보였을 지 대충 상상이 갔기 때문이었다.
전쟁을 작정한 그들이 흉수들을 내놓을 리 만무하였다.
오히려 조롱하고 적의를 보였을 게 명백하였다.
"그렇습니다......그들은 오히려 사절로 보낸 이들을 죽이고.....목을 잘라 되돌려보내었습니다."
거지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을 이었다.
"......그 모습에 비분강개한 조사단은....소식을 전하고 곧바로 야수궁에 쳐들어갔습니다......전쟁을 각오하고 말입니다......그리고 그 길로 연락이 완전히 두절되었습니다......."
"........계 원로....그 분도...남만야수궁으로...곧바로 쳐들어간건가요?"
"조사단 모두가 남만으로 향하였습니다.......계상득 원로님도 마찬가지였구요."
"살아..있을 확률은..없는 건가요?"
"구파에서는 사실상...전멸하였다고 보고 있는 실정입니다."
"..............."
주소양은 깊은 슬픔을 느꼈다.
사실상 사형선고나 다름없는 거지의 말에 깊은 슬픔이 차올랐기 때문이었다.
어린 나이에 아비를 잃었던 그녀에게 가장 큰 후원자이자 지원자이자 후견인이었던 이가 바로 계상득이었다.
그런 계상득이 죽어버린 것이다.
어찌 슬프지 않을 수 있겠는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당장에라도 엉엉 울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안돼.'
하지만 이내 마음을 다잡았다.
이곳에서 자신은 숙부를 잃은 주소양이 아닌 의천맹의 대표하는 맹주 주소양이었다.
눈물을 보이거나 약한 모습을 보여선 안되었다.
울기보단 물기를 택하는 독심을 보여야하는 것이다.
"......남은 소식은 무엇인가요?"
주소양은 차오른 감정을 절제하며 입을 떼었다.
완벽한 맹주직을 수행하기 위해서 말이다.
"........남은 소식은 종남의 멸문 소식입니다."
".........그들도 남만 야수궁에게 당한 건가요?"
주소양은 차분히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미 하룻밤새 점창이 멸문한 상황이었다.
다른 구파가 당했다고 해도 이상할 일이 아닌 것이다.
"아닙니다."
거지는 고개를 살짝 가로 저으며 말을 이었다.
"종남을 멸문시킨 건......초원에서 건너온 몽고의 기병들입니다."
"몽고라면.....저 흑륭강 너머있는.....이민족들을 말하는 건가요?"
"그렇습니다.......그들의 왕과 기병들이.....종남을 쑥대밭으로 만든 뒤 완전히 멸문시켜버렸습니다."
거지는 침중한 표정을 지은 채 말을 이었다.
"명분은....그들을 멸문시킨 명분이 무엇입니까?"
"모르겠습니다.......도저히 알아낼 수 없었습니다..그들의 의도가 무엇인지...어째서 구파의 일원들을 그렇게 잔혹하게 멸문을 시킨 것인지.......어째서..두 세력이 동시에..득세하게 된 것인지 말입니다.........구파에서는 일단...남만야수궁과...몽고의..중원침략이.....우연히...겹쳤다고 관망하고 있는..."
"우연이 아닙니다."
그때 잠자코 듣고 있던 선우가 천천히 입을 떼었다.
무척이나 침중한 표정을 지은 채 말이다.
그러자 개방의 거지와 주소양의 시선이 그에게 쏠리기 시작하였다.
대체 그게 무슨 말이냐는듯한 눈빛이었다.
"마교, 그들이 개입하였습니다."
선우는 차분한 눈빛으로 그들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뭐..뭐라!?"
"네에!?"
거지와 주소양은 경악스러운듯한 눈빛으로 선우를 바라보며 되물었다.
마교가 개입하였다니
이게 대체 무슨 소리란 말인가
"모두 아실 것입니다.일주일 광서성을 불바다로 만들었던 괴인에 대해서 말입니다."
선우는 담담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그리고 그 말을 들은 두 사람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모르지 않았다.
광서성 전역을 불바다로 만들었던 괴인을 어찌 모를 수 있겠는가
"그자가 말하더군요,"
"광서성을 불태운 이유는 명령을 하달받은 것이라고 말입니다."
선우는 차분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마교로부터말입니다."
"뭐...뭣이!?"
"아니 어떻게..!"
개방의 거지와 주소양은 경악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사실이었다.
설마하니 광서성을 불태운 괴인이 마교와 관련이 있었을 줄이야.
"그리고 말을 덧붙였습니다.......광서성뿐 아니라....다른 성에도 자신처럼 명령을 하달받은 이들이 난동을 부릴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렇다면....지금까지..일어났던..모든..일들이?"
선우의 말을 들은 개방의 거지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끄덕
그녀의 물음에 선우는 말없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
그 모습을 본 개방의 거지는 탄성을 내뱉었다.
모든 조각들이 전부 짜맞춰지는듯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광동성을 쑥대밭으로 만든 해왕海王의 선단
광서성을 불바다로 만든 괴인
점창파를 멸문시킨 남만야수궁
종남파를 멸문시킨 몽고기병
우연처럼 느껴졌던 모든 사태들이
사실은 거대한 악의惡意에 의해 치밀하게 주도되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개방 거지의 얼굴이 더할 나위 없이 심각해지기 시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