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87화 〉 888. 해방하라, 흑야黑夜
세상을 뒤엎어버리는 재앙의 불길이 피어오르기 시작하였다.
모든 것을 집어삼키려는듯이 말이다.
'뜨거워.'
그러자 이내 선우는 온몸에 타는듯한 고통을 느꼈다.
그저 피어올랐을 뿐이건만 재앙의 열기가 수화불침의 신체조차 그대로 뚫어버린 까닭이었다.
뜨거웠다.
당장에라도 바닥에 뒹굴며 요란스러운 비명성을 내지르고 싶을 정도로
두려웠다.
당장에라도 모든 걸 내던지고 도망치고 싶을 정도로 말이다.
꽈아악
하지만 그런 생각과는 상반되게 선우는 꿈쩍조차 하지 않았다.
바닥을 뒹굴며 요란스러운 비명성을 내지르지도
모든 걸 내던지고 도망치지도 않았다.
그저 굳건한 다리로 신체를 지탱한 채
그 자리 그대로 서서
있는 힘껏 검을 말아쥘 뿐이었다.
여기서 물러선다면 모든 게 끝이라는 사실을 너무나 잘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선우는 시선을 올려 정면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멸망의 불꽃이 보이기 시작하였다.
선우는 인지할 수 있었다.
저 불꽃에 담긴 의지는 지금의 자신으로서는 도저히 감당치 못할 힘이라는 사실을
닿는 순간 온몸이 녹아내릴 것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하지만 개의치 않고 검을 치켜들었다.
그러자 검신이 미약하게 빛나기 시작하였다.
남아있는 모든 의지가 검 속으로 전부 모여든 것이다.
'지켜다오!'
꽈드드득
선우는 그대로 검을 휘둘렀다.
모두를 지키고자하는 마음을 담아서
그리고 그 순간
세상이 반전되었다.
************
'....뭐..뭐야?'
선우는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암전이 된듯 모든 것이 시야에서 사라져버린 까닭이었다.
자신을 향해 날아들던 멸망의 불꽃도
낄낄거리며 죽음을 선고하였던 괴인도
내빈성에서 자신들의 싸움을 지켜보던 백성들도
모두 사라진 것이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것이란 말인가
두리번 두리번
선우는 재빨리 고개를 돌려 주위를 두리번 거리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여전히 어둠만이 존재할 뿐
무엇하나 존재치 않는 공간이었다.
'익숙하다.'
그 모습에 선우는 익숙함을 느꼈다.
몇 번이고 와본듯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익숙할 수밖에. 이미 와봤던 곳이잖아?"
그때 그의 귓가에 청아한 음성이 파고들기 시작하였다.
선우는 그 음성을 따라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볼 수 있었다.
칠흑처럼 어둔 빛깔의 예복을 입고 있는 고혹한 여인의 모습을 말이다.
".......흑야黑夜."
그 모습을 본 선우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입을 떼었다.
그녀는 흑야黑夜였다.
모든 마검들의 근원이며
흉악이자 극악이며 최악이라고 불리우는
최초의 마검魔劍말이다.
"오랜만이구나, 아가."
그녀는 도도하기 그지없는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정신이 완전히 나갔을 때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깨어난건가?"
"완전히 깨어난 건 아니다, 네놈이 무너뜨린 정신이 완전히 재구축되지 않았거든."
그녀는 담담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왜 깨어난 거지?"
선우는 모르겠다는듯 그녀에게 물었다.
분명 모든 상처를 완전히 수복시키고 깨어난다고 하지 않았던가
어찌 회복이 덜 된 상태에서 눈을 뜨게 되었다는 말인가
"생명의 위협을 느꼈기 때문이다. 이대로 냅뒀다간 네놈과 함께 녹아버릴 것 같았거든."
그녀는 차분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내가 자고 있던 새 꽤나 위험한 상황에 처해있더구나, 아가 본디 누울 자리를 보고 다리를 뻗어야하는 법이거늘. 어찌 그리 무모하게 달려든다는 말이더냐? 상대가 안되면 도망칠 줄도 알아야지."
".............."
그녀의 타박에 선우는 입을 다문 채 침묵을 하였다.
틀린 말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 까닭이었다.
"뭐, 그래도 그리 낙심하지는 말거라, 본디 화룡은 내 자식들 중에서도 가장 특출 난 놈이다, 그 힘을 감당치 못하는 게 부끄러운 일은 아니지."
"화룡도가...네 자식이었어?"
"그렇다, 저 녀석 또한 나를 모태로 하여 만들어진 녀석이다. 그렇기에 저리도 강대한 힘을 품고 있는 것이다. 어미가 뛰어나면 자식도 뛰어나기 마련이니 말이야."
그녀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저 놈이 너보다 강한건가?"
"나를 너무 무시하는구나, 난 모든 마검들의 근원이자 최악이자 흉악이며 극악인 마검魔劍이다. 나보다 강한 병장기 따위가 존재할 리 만무하지 않는가?"
그녀는 오만한 표정을 지은 채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힘을 빌려줘.......난 여기서 질 수 없어."
선우는 뜨거운 눈빛으로 그녀를 응시한 채 입을 떼었다.
질 수 없었다.
지고 싶지 않았다.
모두를 지키고 싶은 것이다.
"부탁치 않아도 된다, 애초에 네놈을 심상 세계로 끌고 온 이유가 힘을 전달하기 위해서였으니까."
흑야는 담담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애초에 힘을 빌려주기 위해
데리고 온 것이다.
심상이 완전히 연결된 이상
그가 죽는다면 자신 또한 무사하지 못할테니까 말이다.
"너도 내게 의지를 빌려줄 생각이야?"
"아쉽게도 내겐 빌려줄 의지따위는 없다, 검은 본디 휘둘려지는 존재이지, 휘두르는 존재가 아니니"
"그렇다면.......겁화의 의지를 어떻게 상대할 수 있지?"
선우는 모르겠다는듯한 어조로 그녀에게 물음을 던졌다.
이미 자신의 의지는 미약하기 그지없었다.
화룡을 상대하면서 상당부분 소실된 까닭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어찌 화룡보다 수십 배는 거대한 겁화의 의지를 상대하라는 말인가
"걱정말거라, 내 생각이 없지는 않으니."
흑야는 입가에 부드러이 미소를 짓기 시작하였다.
"난 네놈의 잠재력을 일시적으로 해방시킬 것이다."
"잠재력을?"
"그래, 아직 완전히 해방되지 않은 네놈의 잠재력을 말이다."
"....그걸로 겁화의 의지를 극복할 수 있는 것인가"
"그건 네놈의 잠재력에 달렸다."
그녀는 차분히 가라앉은 눈빛으로 선우를 바라보며 입을 떼었다.
"만약 네놈의 한계가 명확하고 잠재되어있는 힘이 얕다면 겁화에게 그대로 먹혀버릴 것이다. 없는 것을 만들어낼 수는 없는 노릇이니 말이야."
흑야는 진중하기 그지없는 어조로 말을 이었다.
"그 반대라면?"
"뭘 당연한 것을 묻는가?"
흑야는 입가에 진한 미소를 지은 채 말을 이었다.
"무적자無敵者"
그녀는 확신 어린 눈빛으로 선우를 마주보며 입을 떼었다.
"만약 그 반대라면 천하에 네놈을 위태로이할 수 있는 자는 존재치 않게 될 것이다."
**************
파앗
화아아악
순간 온몸에 뜨거운 열기가 느껴졌다.
정면을 마주하니 불타오르고 있는 겁화의 의지가 보이기 시작하였다.
'돌아왔다.'
선우는 알 수 있었다.
자신이 검을 휘두르기 직전으로 돌아왔다는 것을 말이다.
심상세계에서 벗어난 것이다.
선우는 천천히 시선을 내려 흑야를 바라보았다.
흑야은 여전히 미약한 의지에 감싸여져있었다.
'잘부탁한다.'
선우는 흑야에게 의지를 전달하였다.
우우우웅
그러자 흑야가 가볍게 떨기 시작하였다.
마치 알아들었다는 듯이 말이다.
"잘가거라, 호적수여."
그때 귓가에 사나운 음성이 파고들기 시작하였다.
선우는 시선을 올렸다.
그러자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멸망의 불길에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감히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몸서리치게 두려운 재앙의 불길이 말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무섭지가 않았다.
전과는 명백히 다른 감정변화였다.
스으으윽
선우는 검을 높이 들어올렸다.
"해방하라, 흑야黑夜."
그리고 가벼이 읊조리듯이 말을 내뱉었다.
그 순간
솨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그전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어마어마한 빛이 뿜어져나오기 시작하였다.
마치 온세상을 환하게 비춰줄 정도로 찬란하게 말이다.
'이게.....내 잠재력..?'
선우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믿기지 않을 정도로 거대한 힘에 완전히 압도된 까닭이었다.
선우는 정면을 바라보았다.
날아드는 겁화의 의지가 그 전처럼 압도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초라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꽈악
선우는 검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부우우웅
그리고 곧바로 검을 휘둘렀다.
날아드는 겁화의 의지를 향해서 말이다.
솨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이내 온 세상은 찬란하기 그지없는 광명光明으로 물들기 시작하였다.
************
찬란하기 그지없는 광명이 지나간 후
선우는 시선을 올려 앞을 응시하였다.
앞에는 무엇하나 존재치 않았다.
쉴새없이 불길을 뿜어내던 괴인도
겁화의 의지를 피어올렸던 화룡도도
모든 게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처음부터 존재치 않았던 것처럼 말이다.
'이게....내가...최종적으로 도달할 수 있는 잠재의 끝....'
파르르
선우는 온몸을 파르르 떨기 시작하였다.
온몸에 전율이 차올랐기 때문이었다.
해방된 잠재력을 눈으로 목격하고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이 더 강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아직도 한참 성장 중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잠재의 끝에 도달할 경우
흑야가 말하던 무적자無敵者가 될 수 있음을 말이다.
'....나는...더 강해질 수 있어..'
그렇게 선우가 한창 벅찬 감격을 느끼고 있을 때였다.
스으으윽'
휘청 휘청
갑자기 선우의 신형이 휘청거리기 시작하였다.
무척이나 위태롭게 말이다.
'어..어?'
선우는 중심을 잡기 위해 다리에 힘을 주었지만
소용없었다.
어마어마한 탈력감이 다리의 힘을 완전히 앗아가버린 까닭이었다.
털썩
이내 선우는 바닥에 그대로 주저앉게 되었다.
다리가 완전히 풀려버린 것이다.
'이..이게 대체.?'
선우가 의문 어린 표정을 짓고 있을 때 였다.
[당연한 결과이다.]
선우의 머릿속에 고혹적인 여인의 목소리가 울리기 시작하였다.
자신의 힘을 일시에 개방해준 흑야의 목소리였다.
[아직 개발되지 않은 잠재력을 강제로 해방했는데 반동이 없을 줄 알았는가?]
'........죽는거야?'
[죽지는 않는다. 그저 강제적으로 휴식을 취하게 될 뿐.]
'...............얼마나?'
[대충 일주일정도는 꼼짝없이 누워있어야할 것이다.]
'그렇게 오래?'
[이 또한 네녀석 경지가 높기에 가능한 일이니라. 만약 경지가 더 낮았다면 몇 달은 요양했을 것이다.]
흑야는 담담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애초에 일주일만에 자리를 털고 일어날 수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 대단하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만약 경지가 일천하거나 확연히 낮았다면 수명이 깎여버릴 일이었으니 말이다.
'안돼.....나는...할 게..남아있다고..'
감겨지는 눈을 억지로 뜬 채 격렬히 거부를 하였다.
화룡도를 휘두르던 괴인은 말하였다.
다른 지역 또한 광서성과 마찬가지로
침략을 받고 있다고
천마의 중원침략이 시작되었다고 말이다.
당장 저지해야했다.
모두를 지켜야했다.
이대로 누워있을 수는 없는 것이다.
[어쩔 수 없어, 몸에 쌓인 부하를 내가 어찌해줄 수 있는 건 아니니까. 그러니까 그냥 빨리 자. 빨리 쉬고 빨리 깨는 편이 좀더 나은 선택일테니까.]
그녀는 담담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안..돼.......진짜...안되는데..'
선우는 격렬히 저항하였지만 소용이 없었다.
마치 태산을 올려놓은 눈꺼풀이 무겁기 그지없게 느껴진 까닭이었다.
스르르륵
머지 않아 선우의 눈빛이 완전히 감기고 말았다.
털썩
그리고 곧이어 선우의 신형이 그대로 바닥에 쓰러져버렸다.
결국 잠에 빠져들고만 것이다.
걱정 가득한 표정을 지은 채 말이다.
********
광동성
"약탈하라!"
수 많은 해적들이 거칠게 검을 휘두르기 시작하였다.
무척이나 재밌다는듯이 말이다.
그들에게 약탈은 일상이었고 유희였으며 생활수단이었다.
그렇기에 너무나 당연하였고 죄책감따위는 느끼지 않았다.
타인에게 무언가를 빼앗는 행위자체에 대해서 말이다.
여인의 순결을 빼앗는 것도
유부녀의 정절을 빼앗는 것도
애써 모은 재산을 빼앗아도
하나 뿐인 목숨을 빼앗아도
전혀 미안하지도 부끄럽지도 않았다.
그들에겐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전부 범하고 빼앗고 죽여라! 하하하하하하!"
해왕海王 선단의 1번 대 대장 마고는 기쁜듯이 웃음을 터트리기 시작하였다.
내륙 지역까지 진출하여 약탈을 자행하니
그 기쁨이 배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모든 것이 색달랐다.
따가운 햇빛에 피부 살갗이 거뭇거뭇하게 타버린 해안 지역의 계집과는 달리 내륙 지역의 계집들은 살결이 뽀얗기 그지없었다.
따먹을 맛이 나는 것이다.
거기다 가난한 어부들이 대다수인 해안 지역과 달리 내륙지역에는 알짜배기 부자들이 수두룩 하였다.
황금이 쉴새없이 쌓이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기쁨이 차오를 수밖에 없었다.
해안 지방과는 전혀 다른 재미가 생기니 말이다.
"꺄아아아아악!"
"살려주시오!"
"아아아악...어머니..!...어머니!'
여기저기서 비명소리가 난무하기 시작하였다.
약탈의 소리였다.
'행복하구나.'
그 소리를 들은 마고는 입가에 진한 미소를 흘렸다.
언제 들어도 즐겁기 그지없는 소리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한창 약탈의 소리를 감상하고 있을 때였다.
"네놈이 이들의 대장인가?"
어디선가 옥 구르는듯한 목소리가 귓가를 울리기 시작하였다.
스으윽
마고는 목소리가 들려오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주인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허어.'
그리고 그는 넋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아랫도리가 절로 불끈거리는
절세의 미녀가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무척이나 작은 얼굴에 오밀조밀 반듯이 박혀있는 이목구비
왠지 모를 우아함이 느껴지는 눈매와 오똑한 콧날
매혹적이게 빛을 내는 붉은 입술,
투명하다는 말이 떠올려질 정도로 깨끗하기 그지없는 피부
그리고 압도적이라는 말밖에 할 수 없는 거대한 젖봉우리와
순산형이라는 말이 절로 나오는 거대한 엉덩이.
절세미녀라는 말이 아까울 정도로 아름다운 여인인 것이다.
'어찌...이런 여인이..'
마고는 단언할 수 있었다.
평생토록 이보다 아름다운 여인을 본적이 없다고 말이다.
그렇게 한창 넋놓고 그녀를 훑고 있을 때 였다.
"네놈이 이자들의 대장이라고 물었을 텐데?"
다시금 귓가에 그녀의 목소리가 울려퍼지기 시작하였다.
"..그..그렇다..내가 이들의 대장이다...흐흐흐.....잡졸들보단 대장에게 박히고 싶어서 그런 것이냐?"
그녀의 말에 정신을 차린 마고는 음흉한 미소를 지은 채 말을 이었다.
정신을 차리니 음욕이 미친듯이 차오른 까닭이었다.
"그렇다면 죽거라."
여인은 가벼이 손을 휘저었다.
그러자 새하얗게 빛나는 륜輪 하나가 마고를 향해 쾌속하게 날아들기 시작하였다.
"어...어?"
펑
이내 빛나는 륜輪에 닿은 마고의 머리통이 그대로 터져버렸다.
형체도 남김없이 말이다.
순식간에 목숨을 잃게 된 것이다.
".................."
"................."
순간 온사방에 무거운 침묵이 흐르기 시작하였다.
자신들의 대장이 순식간에 죽음을 맞이했다는 사실이
도저히 믿기지가 않았기 때문이었다.
"투항한다면 죽이진 않겠다."
무거운 침묵 속에 여인이 천천히 말을 이었다.
"하지만 반항한다면 머리통이 터져나갈 것이다."
무척이나 위엄있는 목소리로 말이다.
그리고 그 말을 들은 해적들의 표정은 사색이 되기 시작하였다.
대장이 단 한수에 죽은 현실이 이제서야 제대로 실감된 까닭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