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69화 〉 870. 연왕을 만나다.
쓰담 쓰담
능소화는 매끈하기 그지없는 배를 부드러이 쓰다듬기 시작하였다.
행복하다는듯한 미소를 지은 채 말이다.
'이곳에...사랑스러운 우리의 아이가....'
행복하였다.
너무 행복하였다.
이 조그만 뱃속에 선우와 자신의 결실이 자라나고 있다니
어찌 행복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어서....어서....자라다오...사랑스러운 우리 아가....너와 만날 날이 벌써부터 기대가 되는구나.'
능소화의 입가에 지어진 미소가 점점 진해지기 시작하였다.
모성애가 물밀듯 차오른 까닭이었다.
그렇게 한창 아이와 교감을 나누고 있을 때였다.
똑 똑 똑
누군가 조심스레 문을 두드리기 시작하였다.
"들어와도 되니라."
그녀는 해맑은 미소를 지은 채 말을 이었다.
끼이이익
그녀의 허락이 떨어지기 무섭게 문이 곧바로 열리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시원스러운 인상을 가진 육척 장신의 남자.
선우가 말이다.
"이야기는 끝난 것인가?"
능소화는 궁금하다는듯한 표정으로 물음을 던졌다.
"응.....어느 정도..."
선우는 하얗게 질린 표정을 지은 채 고개를 주억거렸다.
"혹여 태자 전하께 한 소리 들은 것인가? 표정이 좋지 않도다."
능소화는 걱정 어린 표정을 지은 채 선우에게 물었다.
선우의 표정이 심상치 않은 까닭이었다.
"아니야, 혼나지 않았어."
선우는 고개를 좌우로 살짝 내저으며 입을 떼었다.
"그런데 어찌 표정이 그리도 창백하단 말인가?"
"........약혼을 한다는 말을 들었거든..."
"약혼 말인가?"
"응, 남편없는 미혼모로 만들 수 없다며....약소하게 약혼식을 치르자고 하셨어."
"......폐하께서 크나큰 배려를 해주셨구나.."
선우의 말을 들은 능소화는 감격어린 표정을 지었다.
황제가 자신을 배려하여 선우를 공식적인 배필로 인정하려고 한다는 것을 인지한 까닭이었다.
원치 않는 것이다.
자신이 남편없는 미혼모로 소문나는 걸 말이다.
"맞아, 폐하께서 큰 배려를 해주셨어...세력을 일구지도 않았는데 약혼자임을 드러내도록 해주었으니 말이야."
선우는 동의하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런데 그게 그대의 얼굴이 창백해진 것과 무슨 연관이 있다는 말인가?"
능소화는 곧이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듯한 표정을 지은 채 물음을 던졌다.
"..............."
그러자 선우가 입을 꾹 다문 채 침묵을 하였다.
이걸 뭐라고 설명해야할지 고민이 든 까닭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침묵이 이어졌을까
".......혹여....본녀와 약혼하기 싫은 것인가?"
그가 쭉 말이없자 능소화는 시무룩한 표정을 지은 채 되물었다.
"아니야, 그럴 리가! 너와의 관계를 인정받는데 어떻게 싫을 수가 있겠어?"
"그럼 대체 무엇이 문제인가? 무엇이 문제이기에....약혼한다는 소식에 창백한 얼굴이 된다는 말인가.
능소화는 의구심 어린 얼굴로 선우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약혼식은 소규모로 치른다고 하더라고...고위 관리들과 황족들 몇 몇만 부른 채 말이야."
선우는 여전히 창백해져있는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며 입을 떼었다.
"소규모라 불만인가? 하지만 어쩔 수 없도다. 시국이 시국인 만큼...대대적으로 규모를 늘릴 수는..."
"아니....그것 때문이 아니야."
선우는 고개를 살짝 내저었다.
"그렇다면 뭐가 문제인가?"
"황족들을 온다는 건.....그러니까....너희 부모님들도...온다거지?"
"당연하지 않은가? 딸의 약혼식인데 어찌 부모가 오지 않을 수.........아!"
이내 능소화는 깨달았다는듯 탄성을 내뱉었다.
어떤 요소가 선우를 창백하게 질리게 만든 것인지
인지한 까닭이었다.
"혹여.......본녀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만나는게 부담스러운 것이더냐?"
"..............응"
선우는 고개를 살짝 주억거렸다.
"난 또 뭐라고, 그런 것이라면 걱정할 필요없도다. 두 사람 모두 덕이 많고 너그러운 성정을 가진 온화하신 분들이다. 그리 긴장할 필요없도다."
능소화는 살며시 손사래를 치며 말을 이었다.
자신의 부모인 연왕내외는 온화한 성품으로 명성이 자자한 이들이었다.
평생토록 누군가와 다툰 적도 없고
누군가에게 화를 내본 적 없는 보살같은 이들인 것이다.
괜스레 겁을 집어먹을 필요가 없었다.
"......상황이 조금 특수하잖아."
선우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일반적인 상황이었다면 이렇게까지 불안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군왕君王이 된 이상
이쪽도 꿇리지 않는 조건을 두루 갖춘 사윗감이었니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일반적인 상황이 아니었다.
아주 아주 특수한 상황인 것이다.
"특수하다?"
"....네가 아이를 가졌잖아.."
혼인식도 치르지 않은 남의 딸을 홀라당 임신시켜버렸다.
어찌 특수하다고 하지않을 수 있겠는가
".......흐음....그게 그리도 큰일이던가? 오히려 손주가 생겼다면 기뻐하지 않겠는가?"
"아니야...절대 그렇지않아...무조건 화내실 거야..무조건."
"흐음..그대가 본녀의 어버이에 대해 잘 몰라서 하는 말이로다. 온화하신 그분들이 화를 내실리 없도다. 다소 놀라긴 하겠지만 기쁘게 축하해줄 것이다."
"입장 바꿔 생각해봐, 소화야, 우리 딸을 혼례도 치르기 전 임신시킨 놈이 인사를 하러온다면 어떨 것 같아?"
"당연한 걸 뭘 묻는가? 팔다리를 전부 부러뜨려놓지 않겠는가?"
능소화는 차갑게 가라앉은 눈빛을 반짝거리며 말을 이었다.
"나도 같은 상황이면 안죽을 정도로 작열독을 뿌렸을 것 같아........."
선우는 심각한 표정을 지은 채 말을 이었다.
딸자식 가진 부모의 마음은 모두 비슷한 법.
아무리 온화한 성품을 가졌다고해도
귀한 딸을 임신시킨 사위놈에 대한 맹목적인 분노를 가지지 않을 수는 없을 것이다.
"........흐음...그리 말하니 심각한 것도 같도다."
능소화는 심각한 표정을 지은 채 선우에게 동조하였다.
입장을 바꿔보니 선우가 호되게 호통을 들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 까닭이었다.
"........어떻게 방법이 없을까?"
"흐음......본녀도 마땅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는다."
"혹시 뭐 좋아하시는 건 없어? 술이라던가....보석이라던가......선물 줄만한 걸로.."
"원체 소탈하신 분들이라.......뭘 준다한들 화가 누그러질 정도로 기뻐하진 않을 것이다."
능소화는 고개를 살짝 내저으며 말을 이었다.
사치와 향락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사는 연왕내외였다.
술을 마셔도 저렴한 죽엽청을 선호하였고
치장을 하여도 최소한의 치장만을 하였다.
친왕이라고 하기엔 그저 소탈하기 그지없는 삶을 사는 것이다.
"............큰일이네."
선우는 이내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선물공세로 마음을 돌려보려고 하였건만
마땅히 줄만한 것이 없었다.
"걱정말거라, 선우여, 그대가 맞는다면 내가 몸을 날려 막도록 하겠도다."
"맞는 건 확정이야?"
선우는 황당한 표정을 지은 채 되물었다.
이미 맞을 걸 상정하고 있는 그녀의 말에 당혹스러움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하하하하하하, 농이니라."
능소화는 유쾌한듯 웃음을 터트리며 말을 이었다.
"너무 걱정말거라, 분명 화를 내긴하겠지만 그 정도가 본녀와 그대만큼 지나치진 않을 것이다. 평생 화조차 제대로 내본 적 없는 분들이 화를 내봤자 얼마나 내겠는가?"
그녀는 대수롭지 않은 표정을 지은 채 말을 이었다.
"그...그런가?"
"그렇도다, 더구나 본녀는 나이대만 따지면 노처녀가 아니던가? 마땅한 배필이 없던 차 그대가 나타났으니 오히려 반가워할지도 모를 일이다."
황족들은 약관이 되기 전 배필을 정해놓는 게 일반적이었다.
어릴 적부터 정략으로 묶어놓아야 기반을 쌓으며 성장해나갈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 경우를 따졌을 때
능소화는 노처녀 해당하는 여인이었다.
이십대 후반의 나이임에도 마땅한 배필이 없었으니 말이다.
그런 상황에서 선우라는 완벽한 사윗감은
오히려 연왕내외에게 호재로 작용할지도 몰랐다.
그들은 언제나 딸의 혼사를 걱정하였으니 말이다.
".....정말..그럴까?"
"물론이도다, 본디 부모는 자식이 잘안다고 하지 않던가? 본녀만 믿도록 하거라, 확신할 수 있도다, 아무런 일도 없을 것이라고."
능소화는 확신에 찬 눈빛으로 선우를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후우...그렇게 말하니 조금 안심이 되긴 하네."
그리고 그 눈빛을 마주한 선우는 이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딸이 그녀가 저리 확신을 하니
어느정도 안심이 되었다.
부모는 자식이 가장 잘알지 않겠는가
'그래, 이미 벌어진 일이기도 하고......중원기준으로 소화는 노처녀니까.. 연왕내외 입장에선 쌍수 들고 환영할 만한 일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잖아?....그래..분명..그럴거야.'
선우는 나름의 합리화하며 마음을 안정시켰다.
그녀 말대로라면 호된 질책을 들을 일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다.
'별일 없을거야...아암...그렇고말고.'
*********
"이 말종같은 자식!"
짜아아악
찰진 타격음이 사방에 울려퍼지기 시작하였다.
휘익
그러자 선우의 고개가 그대로 옆으로 휙 돌아가버렸다.
'어..어라?...이게...왜..'
고개가 돌아가버린 선우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다짜고짜 뺨을 얻어맞은 상황에 어안벙벙해졌기 때문이었다.
"혼례도 치르지 않은 주제에 내 딸을 임신시켜!?"
그때 선우의 뺨을 때린 남자, 연왕은 얼굴을 잔뜩 붉힌 채 고래고래 언성을 높이기 시작하였다.
그의 얼굴에는 분노의 감정이 가득히 차있었다.
"사랑한다면 지켜줄줄도 알아야하거늘! 어찌 그새를 못참고 내 딸을 불명예스럽게 만드는 것이더냐!"
연왕은 다시금 반대 손을 들어올렸다.
"아..아버님.."
"누가 네 아버님이야!"
짜아악
연왕은 선우의 반대뺨을 그대로 갈겨버렸다.
휘익
이번에도 선우의 고개는 힘없이 옆으로 휙 돌아가버렸다.
입이 백개라도 할 말이 없는지라
그저 맞고만 있을 수밖에 없는 까닭이었다.
짜아악
짜아악
이내 선우의 뺨이 쉴새없이 양옆으로 돌아가기 시작하였다.
능소화는 그런 연왕의 모습을 멍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평생 군자처럼 살아온 아버지였다.
덕이 많고 너그러워 백성들에게 칭송받던 아버지였다.
온화하여 평생토록 화 한 번 제대로 내본 적 없는 아버지가
싸움 한 번 제대로 해본적 없는 아버지가
지금 흉신악살과도 같은 표정을 지은채 폭력을 행사하기 시작하였다.
괴리감이 들었다.
"이 나쁜 자식!"
이내 연왕은 고함을 내지르며 손을 번쩍 들어올렸다.
제대로 후려칠 요량처럼 보였다.
"아..아버지, 진정하십시오!"
그 모습에 화들짝 정신을 차린 능소화가 재빨리 연왕의 팔을 붙잡았다.
사랑하는 님의 맞는 광경을 도저히 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지금 진정하게 생겼느냐! 너를 임신시켰는데! 혼례를 치르기도 전에 애를 배게만들었는데!
연왕은 울화통 터지는 목소리고 고성을 내지르기 시작하였다.
"선우만의 잘못이 아닙니다! 제 잘못도 있습니다! 때릴려면 차라리 저를 때리십시오!"
능소화는 다급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아니다! 넌 피해자다! 잘못이 없다는 말이다! 모든 잘못은 저 망종 같은 놈에게 있다!"
"아닙니다! 서로 동의하에 벌어진 일인데 어찌 임신을 하였다고 피해자가 된다는 말입니까!"
능소화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혼전임신은 남자만의 잘못이 아니었다.
여자도 함께 저지른 공동의 잘못인 것이다.
그런데 어찌 남자만을 가해자로 만들고 그를 타박한다는 말인가
말도 안되는 일이었다.
"아니! 그건 전부 저놈이 순진한 너를 꼬드겨.."
"꼬드기지 않았습니다! 제가 원하였습니다! 그의 아이를 갖고 싶다고! 결실을 맺고 싶다고! 그는 잘못이 없습니다!"
능소화는 불꽃같은 눈빛으로 아비인 연왕을 바라보며 언성을 높였다.
"제 나이가 스물 여덟입니다! 제 앞가림도 못할 정도로 순진하지도 않으며 꼬드긴다고 넘어갈 정도로 의지가 연약치도 않습니다! 그가 좋아서! 그가 좋기에! 그의 아이를 배고 싶었던 것 뿐입니다!"
"허어....네가...네가...정녕.."
연왕은 충격받은듯한 표정을 지은 채 말을 더듬기 시작하였다.
부모 말을 하늘같이 떠받들며 살던 능소화의 반항이 한층 더 충격으로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
고루하기 그지없는 성정을 가지고 있지만 인의예지가 무엇인지 제대로 알고 있는 품격있는 아이였다.
부모에게 효를 행하는 것이 덕목이라고 여기며 살아왔던 훌륭한 효녀였다.
그런 그녀가
강경한 태도로 언성을 높이며
소리를 내지르고 있었다.
자신의 배필을
자신의 정인을
자신의 남편을 건들지 말라고
사랑하기에 임신을 한 것이라고 말이다.
"허어어....허어..허어어."
연왕은 뒷 골쪽에 땡기는 감각이 느껴지기 시작하였다.
너무 열이 받아 혈압이 치솟아버린 것이다.
뚝
이내 연왕의 의식이 그대로 끊어져버렸다.
치솟는 혈압을 참지 못하고 그대로 기절을 해버린 것이다.
"전하!"
"아버지!"
"아버님!"
이내 장내에는 비명성이 내질러지기 시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