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54화 〉 855. 이거 아주 개새끼일세.
"장문인, 술은 없는가? 내 약주를 한 잔 하고 싶네만."
"사조, 곤륜은 도를 닦는 곳입니다. 음주가 가능할 리 만주하지 않은가?"
"적당한 음주는 약되는 걸 모르는가?"
"곤륜에선 금주가 기본 원칙입니다."
"이런.....내가 폐관을 들던 사이 새롭게 만들어진 원칙인가?"
"사조께서 폐관에 들기 전부터 있던 원칙입니다."
"이상하군, 나 때는 곡주를 빚어 먹어도 뭐라고 하는 이가 없었는데 말이야."
"....그거야 사조가 무서워서 그런 게 아니겠습니까?"
무양은 조심스레 의견을 내보았다.
무척이나 신빙성있는 의견을 말이다.
"그럴 리가 없지 않은가? 성정이 너무 자애로워 곤륜선녀라고 불리우던 이 몸일세.....그런 나를 두려워할 리가 있겠는가?"
운설은 말도 안된다는듯한 표정을 지은 채 입을 떼었다.
"곤륜선녀라니..........금시초문입니다. 사조."
그 말을 들은 무양은 황당한 표정으로 말을 받았다.
곤륜선녀는 무슨 곤륜선녀란 말인가
성격이 지랄 맞아 곤륜광검이라고 불리웠던 인간이 말이다.
"금시초문일 수밖에.....내 검술이 워낙 뛰어나 곤륜선녀라는 별호대신 곤륜검성이라는 별호로 주로 불리웠으니 말이야. "
운설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은 채 말을 이었다.
"..............."
"왜 말이 없는가? 설마 믿지 못하겠다는 말인가?"
무양이 말이 없자 운설은 눈살을 찌푸린 채 되물었다.
"아닙니다....믿습니다..믿고 말고요."
"대답이 영 시원치 않구나."
운설은 불만 어린 표정을 지은 채 말을 이었다.
사손 녀석이 대놓고 불신 가득한 표정을 지으니
기분이 살짝 상한 까닭이었다.
"후우, 아쉽구나, 내 동년배 중 살아있는 이가 있었다면 증명을 해주었을 것을."
운설은 안타까운 표정을 지은 채 말을 이었다.
'어허..참.'
그 말을 들은 무양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증명할 방도가 없으니
공갈을 치는 주제에 어찌 저리 뻔뻔한 태도를 고수한다는 말인가
'반로환동을 숨긴게 잘한 일일지도..'
무양은 생각하였다.
그녀의 존재를 숨긴 게 잘한 일이 아닐까하고 말이다.
일대종사로서 위엄보다는 장난기 어린 소녀와 같은 면모가 돋보이는 운설이었다.
차라리 이렇게 숨기는 편이 나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곤륜의 제자들에게 곤륜검성은 존경할 만한 위인이었다.
세월이 흐른 만큼 악명은 잊혀지고 업적만이 미화된 까닭이었다.
그런 제자들에게 구태여 현실을 깨닫게 해주고 싶진 않았다.
자라나는 새싹들에게 괜스레 실망감을 안겨줄 필요는 없지 않겠는가?
꼬르르르륵
그때 갑자기 운설의 배에서 요동치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하였다.
".....배가 고프네, 장문인."
"...찬거리를 내어오도록 하겠습니다."
"고기 정식으로 부탁함세."
".......곤륜에선 채식 위주의 식단을 먹습니다."
"우리가 중놈도 아니고 어찌 풀떼기만 주워먹고 산다는 말인가? 오다보니 닭 몇 마리를 풀어놓고 기르던데 그거라도 하나 잡아주게나."
"그건 달걀을 얻기 위해 기르는 것입니다!"
"그럼 달걀 밖에 없는 것인가? 그럼 곤란한데.......오랜만에 입질이 당겨서 말이야.....혹여 멧돼지라도 한 마리 구워주면 안되겠는가?"
"........안됩니다.......사조."
"참으로 매정하구만. 장문인."
운설은 실망스러운 표정을 지은 채 입을 떼었다.
"......도道를 추구하는 도인이 육식을 멀리하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아, 그건 다 개소리라네, 스스로 제한하고 옥죄며 깨달음을 추구하는 것 자체가 인위人爲가 아니겠는가? 그런 상태에서 무슨 깨달음을 얻겠는가? 얄팍한 자기만족만 얻을 뿐이지. 진정 깨달음을 얻으려면 자연自然의 상태에 있어야한다네, 인간 본연의 욕망을 인정하고 원하는 바를 행하며 깨달음을 추구해야한다는 말이지."
운설은 현묘한 눈빛으로 무양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말도 안됩니다. 도道를 얻기 위해 고행을 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 아닙니까? 욕망을 통제하여 꺠달음을 얻는 행위가 어찌 개소리라는 말씀입니까? "
무양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듯한 표정을 지은 채 말을 이었다.
그에게 있어 고행이란 건 너무나 당연한 행위였다.
제한을 하고 억제함으로서 본연의 욕망을 통제한 뒤 깨달음을 추구하는 것이 어찌 잘못되었다는 말인가
욕심을 버림으로서 대도大道를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던가
"그러니까 너희들이 호랑말코 소리나 듣게 되는 것이다. 본디 인간이란 욕심이 그득한 것이 본질이거늘 어찌 그런 본질을 부정하고 멋대로 통제하려고 든다는 말인가? 본질을 알지 못한다면 깨달음은 존재치 않다."
운설은 한없이 가라앉아있는 심유한 눈빛으로 무양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어렵습니다.........너무 어렵습니다."
그 말을 들은 무양은 혼란스러워하였다.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것들이 부정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고행을 통해 깨달음을 추구하는 게 잘못되었다니
욕망을 통제하려고 들었던 게 본질을 부정하는 어리석은 행동이라니
어찌 혼란스럽지 않을 수 있겠는가
'세상이 깨어지는 기분이다.'
기존에 알고 있던 상식이 완전히 깨지는듯한 기분이었다.
"쉽다면 너도나도 등선하여 신선이 되었을 것이다."
그 모습에 운설은 재밌다는듯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고심하고 또 고심하는 그의 모습이 꽤나 기특해보였다.
슬며시 깨달음을 전해주고 싶을 만큼말이다.
"본질을 부정치 말거라. 결국 인간 또한 자연에 일부분인 존재이니라. 본질을 부정한다는 것은 곧 자연을 부정한다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일이지."
그녀는 무심한듯 툭 말을 내뱉었다.
".......자연의...일부분.."
그리고 그 말을 들은 무양은 무언가 홀린듯한 표정을 지은 채 되뇌이기 시작하였다.
그녀가 전해준 깨달음의 단초를 말이다
"밥은 알아서 먹도록하겠네.. 장문인은 좀더 고심을 해보거라.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계기가 될지도 모르니."
이내 운설은 자리에서 그대로 일어났다.
그다음 바깥을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하였다.
"............"
무양은 어떠한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그녀를 잡지도 않았고
잘가라는 인사조차 하지도 않았다.
그저 생각할 뿐이었다.
자연의 일부라는 인간의 본질에 대해서 말이다.
끼이이익
쿵
이내 문이 닫히고 방 안에는 장문인 무양만이 남게되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방에는 어마어마한 기파가 일렁이기 시작하였다.
***************
"젊어서 그런지 깨달음도 금방금방 얻는구나."
운설은 재밌다는듯한 미소를 지은 채 말을 이었다.
장문인실에 뿜어져 나오는 무양의 기파를 그대로 느낀 까닭이었다.
분명 한 단계 더 나아갈 수 있는 깨달음을 얻은 것이리라
"이제 어디가서 맞고 다니진 않겠구나."
그녀는 만족스러운듯한 표정을 지었다.
처음 무양을 마주하였을 때
그녀는 속으로 적잖이 실망을 하였다.
한 문파의 장문인이라는고 하기엔
무양의 경지가 너무나 일천하게 느낀 까닭이었다.
그녀는 걱정이 되었다.
저렇게 일천한 경지로 지내다간 어디서 시비가 걸려 객사하지 않을까하고 말이다.
그런데 지금은 그런 걱정을 어느정도 덜어낼 수 있었다.
지금이라면 어디가서 맞고 다니진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 까닭이었다.
'뭐 지금도 일천하긴 마찬가지지만.'
물론 그녀에 비하면 여전히 일천한 경지였다.
하지만 중원 전체를 놓고 봤을 땐 상대가 그리 많지는 않을 것이다.
인간의 한계에 도달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꼬르르르륵
그때 다시금 그녀의 배가 요동을 치기 시작하였다.
아무래도 위장이 한계에 도달한듯 싶었다.
'.......밥이나 먹자.'
운설은 가벼이 발을 튕겼다.
그러자 그녀의 신형이 허공에 치솟더니 그대로 날아가기 시작하였다.
마치 용이 구름을 거닐듯이 말이다.
*****
휘익
운설이 모아놓은 잔가지들을 향해 손을 가벼이 휘둘렀다.
화르르륵
그러자 잔가지에서 거센 불길이 타오르기 시작하였다.
운설은 타오르는 불길 위에 미리 잘라놓은 멧돼지 다리를 통째로 던져버렸다.
노릇 노릇
불길이 거센 까닭일까
이내 멧돼지 다리는 노릇노릇하게 익어가기 시작하였다.
"........하아..."
그 모습을 본 운설은 몽롱한 표정을 지었다.
노릇노릇 익어가는 고기를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감이 절로 차올랐기 때문이었다.
폐관에 들어가 수십 년간 벽곡단만 먹었던 그녀였다.
고기가 익는 모습이 행복하지 않을 리 없는 것이다.
'빨리..빨리 익었으면 좋겠구나.'
그녀는 속으로 쉴새없이 재촉하기 시작하였다.
고기가 빨리 익기를 말이다.
"아무래도 불길이 약한 것 같군."
그때 운설의 귓가에 중후하기 그지없는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그 목소리를 들은 운설은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타는듯한 적발과 적미, 적색 수염을 가지고 있는 거대한 남자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본디 불이라는 건 강하다고 능사가 아닌 법이지."
그녀는 고개를 가로 저으며 말을 이었다.
"지금 같은 화력이라면 해가 넘어갈 것이다."
"기다림은 미식美食을 위한 첫걸음이지."
"하하하하하하하하, 이런 내가 실수를 하였군."
"괜찮네, 실수를 하기에 사람이 아니겠는가?"
"옆에 앉아도 되겠나?"
"자리는 내어줄 수는 있지만 고기는 나눠줄 수 없네. 내꺼 거든."
"하하하하하하, 딱히 빼앗을 생각은 없다."
"그렇다면 내어주겠네. 하지만 옆은 사양하지. 모르는 남정네에게 곁을 내주는 건 현숙한 여인으로서 할 일이 아니니 말이야."
"하하하하하, 그럼 맞은 편에 앉겠다."
"맞은 편도 부담스럽네, 대각선에 앉았으면 하네."
"참으로 까탈스러운 심성을 가지고 있군."
남자는 투덜거리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털썩
그리고 그대로 자리에 앉았다.
정확히 그녀의 대각선에 위치한 자리에 말이다.
자리에 앉은 남자는 운설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흥미롭다는듯한 표정을 지은 채 말이다.
"뭘 보는가?"
그 시선을 알아차린 운설은 그에게 물었다.
"너무 아름다워서 말이야."
남자는 진한 미소를 흘리며 말을 이었다.
"그건 너무나 당연한 말이라, 감흥이 없네, 꼬실 생각이라면 좀더 마음을 울리는 말을 연습해오는게 어떻겠는가?"
운설은 담담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하하하하하하, 유쾌하군."
"내 본디 입담 하나는 타고났다네."
그녀는 대수롭지 않은 표정을 지은 채 입을 떼었다.
"그대의 이름은 어찌 되는가?"
"이름을 물을 땐 본인의 이름부터 밝히는 게 예의가 아니던가?"
"이런, 내가 실례를 하였군, 구양진이라고 한다."
"운설이네."
"운설이라...참으로 아름다운 이름이군."
"주인처럼 말인가?"
"크크크큭....그것도 틀린 말이 아니다."
구양진은 재밌다는듯한 웃음을 흘리며 말을 이었다.
"강하군."
구양진은 운설을 바라보며 대뜸 말을 내뱉었다.
무척이나 진지한 어조로 말이다.
"그걸 알아볼 정도라면 네놈도 한 수 재간이 있나보군."
운설은 그런 구양진을 올곧은 시선으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크크큭...한 수만 갖고 있는 건 아니지."
구양진은 재밌다는듯한 미소를 흘린 채 말을 이었다.
"곤륜의 제자인가?"
"그게 중요한가?"
"무척이나 중요하다."
구양진은 번들거리는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입을 떼었다.
"어떤 것 같은가?"
그녀는 역으로 그에게 질문을 하였다.
어떻게 보이느냐고 말이다.
"구 할 정도 확신한다."
"나머지 일 할이 비는 이유는 무엇이지?"
"도인道人이라고 하기엔 입담이 거칠어서 말이야."
"하하하하, 듣고보니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네"
운설은 재밌다는듯 웃음을 터트리며 말을 이었다.
"나는 곤륜의 제자일세."
이내 웃음기를 지운 운설은 차분히 가라앉은 눈빛으로 구양진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아쉽구만."
"어째서?"
"아니길 빌었거든."
구양진은 안타까운 표정을 지은 채 입을 떼었다.
"흐음.......그 이유가 궁금하군, 혹여 물어도 실례가 안되는가?"
운설은 궁금하다는듯한 표정을 지은 채 그에게 물었다.
"난 곤륜을 멸문시킬 심산이네, 그러니 자네의 적이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지."
구양진은 담담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곤륜에 원한을 진 것인가?"
운설은 차분히 가라앉은 목소리로 그에게 물었다.
"그런 것은 아닐세."
"그런데 어찌 곤륜의 멸문을 입에 담는가?"
"개인적인 업무의 일환이라고 하지."
"개인적인 업무라......업무라...."
구양진의 말을 들은 운설은 되뇌이듯 읊조리기 시작하였다.
그리더니 이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버렸다.
"이거 아주 개새끼일세."
퍽
그리고 그대로 발을 들어올려 구양진의 면상을 후려차버렸다.
부우웅
별안간 면상을 얻어맞은 구양진은 그대로 날아가버렸다.
저 우거져있는 숲속 안쪽까지 말이다.
쾅 쾅 쾅 쾅
이내 나무가 꿰뚫리는 소리가 울려퍼지기 시작하였다.
구양진의 신형이 나무를 꿰뚫으며 날아가고 있는듯 하였다.
"그딴 이유로 곤륜을 멸문시킨다고? 너 뒈지고 싶어?"
그녀는 구양진이 날아간 숲속을 바라보며 소리를 내질렀다
화가 머리끝까지 나있는듯한 모습이었다.
저벅 저벅
그때 숲속 안쪽에서 가벼운 발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하였다.
그러더니 이내 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별안간 기습을 당한 구양진이었다.
그는 너무나 멀쩡한 상태로 운설의 앞쪽까지 걸어나왔다.
"꽤나 비열하군. 계집."
그리고 담담한 표정으로 운설을 노려보며 입을 떼었다.
표정은 담담했지만 그의 눈빛에는 분노의 불길이 가득 차 있었다.
별안간 기습을 당했다는 사실에 화가 잔뜩 난 모습이었다.
"까고 있네, 그럼 공격 들어가겠습니다. 예고하고 들어가리?"
운설은 그런 그를 한껏 비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태도는 구양진을 더욱더 자극하였다.
으드득
".......버릇을 고쳐주마..계집."
화르르륵
구양진의 몸에서 불길이 타오르기 시작하였다.
세상을 뒤엎을 만큼 거대한 불길이 말이다.
"능력되면 해보던가."
운설은 차가운 눈빛으로 그 불길을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그녀의 눈빛에는 두려운 기색 따윈 전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