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40화 〉 641. 죄수번호 4885
[환청이 아니다]
"젠장, 누구냐!"
당소는 다급하게 고함을 내질렀다.
그리고 다시금 주위를 둘러보기 시작하였다.
어디서 나는 목소리인지 확인해볼 요량이었다.
하지만 어디에도 사람의 모습 따윈 보이지 않았다.
'뭐냐고 대체!'
당소는 몸을 잘게 떨기 시작하였다.
사람은 없는 목소리만 울리니 공포심이 자극되어진 까닭이었다.
[여기다....여기]
"여기가 어디라는 거야!"
당소는 답답하다는듯 고함을 내질렀다.
[네녀석의 뒷편이다.]
"내 뒤라고?"
당소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천천히 몸을 돌려 뒤편을 바라보았다.
뒤편에는 두터운 강철 문 외엔 아무것도 없었다.
당소는 인상을 와락 찌푸렸다.
자신을 놀리고 있는 게 분명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뒤편에는 문밖에 없잖아!"
당소는 언성을 높이며 소리를 내질렀다.
[문 너머다.]
"뭐..뭐라고!?"
[난 문 너머에 있다.]
"문..너머라면....죄수번호 4885?!"
당소는 경악스러운 표정을 지은 채 말을 내뱉었다.
문 너머에는 4885라고 불리우는 존재 외엔 그 무엇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맞다, 내가 바로 4885다.]
"어..어떻게..내게...말을 걸 수 있는거지!?"
당소는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은 채 입을 떼었다.
이해가 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죄수번호 4885는 말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구속을 받고 있기 때문이었다.
눈은 흑건으로 뒤덮여있었고
입에는 커다란 재갈이 물려있었으며
이빨은 전부 뽑혀져나가 있었다.
또한 온몸에 존재하는 모든 힘줄들은 끊어져있었고
팔다리는 각각 한철로 만든 족쇄로 결박되어있었으며
내공은 완전히 금제가 되어있었다.
무엇하나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유가 없어진 상태인 것이다.
그런데 어찌 그런 그가 자신에게 말을 건다는 말인가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흥, 본좌가 이딴 구속따위에 굴복할 성 싶더냐? 네 녀석 머릿속에 혼음魂音을 전하는 것 따윈 어린 아이 손목을 비트는 것 보다 간단한 일이지.]
"혼음魂音을 전한다고!? 그게 무슨 뜻이지?"
당소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듯한 표정을 지은 채 되물었다.
당최 알아먹을 수 없는 말만 지껄이니 좀처럼 이해할 수가 없었다.
[혼에 음성을 담아 네녀석 머릿속에 직접 전달한다는 말이다.]
"혼에 음성을 담는다고?"
[그렇다, 본좌 정도로 영혼에 조예가 깊은 이라면 혼을 깎아내 음성을 담아내는 것 따윈 어렵지 않은 일이리라]
"혼을 깎아!?"
4885의 말을 들은 놀란듯 그에게 되물었다.
혼을 깎아버린다는 충격적인 말이 너무나 경악스러웠기 때문이었다.
[그렇다. 음성의 길이에 따라 깎이는 혼의 크기 또한 커지지.]
"그렇게까지해서 나를 부른 이유가 뭐지? 말벗이나 하자는 건 아닐테고....."
4885의 말을 들은 당소는 모르겠다는듯 그에게 물었다.
혼을 깎는다니
듣기만 해도 무시무시한 소리였다.
그런데 그런 무시무시한 짓을 아무렇지도 않게 저지른 채 말을 걸었다니
대체 무슨 꿍꿍이라는 말인가
[마냥 멍청한 놈은 아니구나.끌끌]
"뭐라고!?"
4885의 음성을 들은 당소는 발끈하며 언성을 높였다.
[맞다, 난 네놈에게 용건이 있다. 그러니 혼을 깎는 것을 감수하고 말을 건 것이니라]
"내가 그 용건을 들어줄 것 같아?"
당소는 굳은 표정을 지은 채 말을 이었다.
비록 간수로서의 삶에 회의를 느끼고 있는 상태였지만
죄인의 부탁을 들어줄 정도로 타락하지 않았다.
그 또한 당가의 혈족으로서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당가의 무인이었으니 말이다.
[끌끌끌, 본좌가 생각하기엔 아무리 생각해도 들어줄 것 같구나.]
"입닥쳐라! 고작 죄인주제에 누구를 능멸하는 것이냐!"
당소는 짐짓 엄한 표정을 지은 채 꾸짖듯 고함을 내질렀다.
한낱 죄수따위에게 무시당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한 번 들어나 보고 결정하는 게 어떻겠느냐?]
"필요없다!"
당소는 단호한 어조로 소리를 내질렀다.
[네 녀석이 지루한 일상을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
"무슨...개 소리냐! 내 일상은 지루하지 않다!"
당소는 떨리는 음색으로 가라앉히며 고함을 내질렀다.
거짓말이다.
일상은 지루했다.
또래에 비해 월봉도 많고
할 일도 무척이나 쉬운 일이었지만
지루하기 그지없었고
심심하기 그지없었다.
빛 한줌 안들어오는 지하 감옥에서
등불 하나에 의지하여 세 시진 이상을 처박혀있어야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런 사실을 내색할 수는 없었다.
4885가 무슨 꿍꿍이를 가지고 있는 지 알 수 없었으니 말이다.
[끌끌끌, 거짓말이 서투른 놈이구나]
"뭐라고!?"
[거짓말이라는 것은 본디 차분하게 해야하는 법. 네녀석의 거짓말은 애초부터 글러먹었구나]
"나를 모욕하는 것이냐!"
[그저 사실을 말했을 뿐이다.]
"듣기 싫다! 입을 다물어라!"
[거절하지. 아직 내 제안이 끝나지 않았다.]
"들어볼 가치도 없는 제안이다!"
[궁금하지 않느냐?]
"전혀 궁금치 않다!"
물론 거짓말이다.
사실 궁금하였다.
어떤 식으로 자신을 지루한 일상에서 탈출 시켜줄지
궁금함이 치솟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들어선 안된다.
현재 요주의 인물로 낙인 찍혀있는 4885였다.
그런 그에게 틈을 내보여선 안된다.
[무공을 가르쳐주마.]
".........무..무공을!?"
하지만 뒤이어 들려오는 4885의 말은 당소로 하여금 틈을 내주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다시금 되묻게 만든 것이다.
[그래, 네놈에게 천하제일인이 될 수 있는 무공을 가르쳐주마.]
"말도 안되는 소리!"
당소는 이내 고함을 내질렀다.
"만신창이가 된 상태로 당가에 갇혀있는 네놈이 무슨 재주로 천하제일의 무공을 가르친다는 말이더냐!"
당소는 반발을 하였다.
말도 안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병신된 채로 옥에 갇혀있는 4885였다.
그런 그가 천하제일의 무공을 가르쳐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천하제일의 무공이 있다면 이런 곳에 갇혀서 자신같은 간수따위에게 말을 걸리 만무하지 않은가
[끌끌끌, 의심이 많은 놈이구나.]
"당연한 말을 내뱉었을 뿐이다"
당소는 당당하게 말을 내뱉었다.
[본좌는 살혼殺魂이다.]
"뭐...뭐라고!?"
4885의 말을 들은 당소의 눈이 휘둥그레해졌다.
귀를 의심하게 만드는 소리가 머릿속에서 울렸기 때문이었다.
살혼殺魂이라니?
살혼이라면 사십여년 전 무림의 명사들을 흔적없이 암살했다고 전해지는 무림의 공포가 아니던가.
그런 자가 어찌 당가에 갇혀있다는 말인가
"거짓말!"
당소는 4885의 말을 부정을 하였다.
그럴 리 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살혼의 존재는 그저 무림에 떠다니는 기담에 불과하였다.
그 누구도 실체를 확인한 적 없는 것이다.
그런데 별안간 살혼이라니?
말도 안되는 개소리였다.
[끌끌끌......믿음이 없는 아이로구나]
"믿을 리 만무하지 않더냐! 어찌 무림의 공포라고 불리우는 자가 당가의 옥에 갇혀있다는 말이더냐!"
[끌끌 그런 건 중요치 않다. 아가. 지금 중요한 것은 내가 네놈에게 천하제일의 무공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이다.]
"...........믿을 수 없다."
믿을 수 없었다.
[잘 생각해보거라. 사천제일가라고 불리우는 당가에서 본좌를 이렇게까지 철저하게 속박한 이유를 말이다. 네놈은 이렇게까지 철저하게 속박되어있는 자를 본적이 있더1냐?]
"..........."
4885의 물음에 남자는 그 어떠한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지금껏 단 한번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까지 철저하게 구속된 죄인은 말이다.
[어째서 본좌를 이렇게까지 철저하게 구속한 것 같더냐?]
".........모르겠다."
[아니, 넌 답을 알고 있다. 모른 척 하지 말거라. 잘알고 있지 않더냐?]
".................."
[틀렸다. 당가는 본좌를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다. 조금의 틈이라도 보인다면 모두를 몰살할까 두려운 것이다. 천하제일살수인 본좌를 말이다!]
4885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을 이어가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당소는 그의 말에 서서히 설득되는 것을 느끼기 시작하였다.
앞뒤가 어느정도 맞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지금껏 이렇게까지 특별대우를 받은 죄인은 없었다.
간수는 언제나 다 섯 명이상의 죄인을 감시하였고 관리하였다.
또한 죄인이라고 하더라도 이렇게까지 철저하게 자유를 빼앗지는 않았다.
모든 게 이례적이었다.
[네놈에게 무공을 가르쳐주겠다. 사천제일가인 당가마저 두려워하는 본좌의 무공을 말이다!]
두근 두근 두근
당소의 가슴이 미친듯이 두근거리기 시작하였다.
4885의 말이 당소의 가슴에 불을 당긴 까닭이었다.
쉽지만 반복되는 일상
언제나 똑같은 지루한 광경
그 삶속에서 당소는 지쳐있는 상태였다.
그저 의미없이 살아가는
당가를 이루는 부속품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이곳에 있는 이상
발전은 커녕 퇴보할 수밖에 없다는 불안감마저 들었다.
그런데 그런 그에게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어렵지만 새로운 일상
언제나 뒤바뀌는 색다른 광경
당가의 부속품이 아닌 당소라는 인간자체로서 천하에 우뚝 설수 있는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어찌 심장이 두근거리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가슴에 불이 당겨지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정말.....정말.....내게 무공을 가르쳐줄 심산이야?"
[네놈만 동의한다면 당장에라도 가르져주마]
"어째서 나지?"
당소는 의아한듯한 표정을 지은 채 질문을 던졌다.
살혼은 죽음의 신이라고까지 불리우던 전설적인 인물이었다.
그런 그가 자신에게 무공을 전해주려고 한다니 믿기지가 않았다.
[본좌도 네놈처럼 멍청한 녀석에게 무공을 전해주는 게 그리 내키지는 않는다.]
"그런데 어째서?"
[아쉽게도 본좌는 수명이 얼마 남지 않은 상태이다. 제자를 고를 여유따위가 있을 리 만무하지. 영광으로 알거라. 네놈은 순전히 운으로 천하제일의 무공을 얻게 되었으니 말이다]
"간수는 나말고도 더 있었잖아!?"
옥에 들어오는 간수는 자신 말고도 세 명이나 더 있었다.
그들 중에서 자신은 그리 특출나다고 할 수 없는 초라한 무인인 것이다.
그런데 왜 하필 자신이라는 말인가
[그 녀석들과 달리 네놈에게는 욕심이 많더군. 본디 무공은 욕심이 많은 자가 더욱더 잘 배우는 법이지.]
"고작 그런 이유로?"
[말하지 않았더냐? 본좌에겐 선택지 따윈 없다고 그저 개중에 나은 놈을 골랐을 뿐이다.]
"개중에 나은 놈이라.."
4885의 말을 들은 당소는 그의 말을 되뇌었다.
썩 나쁜 기분이 아니었다.
그래도 다른 세 명 보단 자신이 좀더 싹수가 있다는 말일테니까말이다.
[자아, 이제 선택하거라. 내게 무공을 배우겠느냐? 아니면 이대로 관두겠느냐? 선택에 여하에 따라 네녀석의 운명이 달라질 것이다.]
"배우겠어!"
당소는 한점의 고민없이 곧바로 긍정을 하였다.
항상 바래왔던 새로운 삶의 시작이었다.
거절할 리 만무하였다.
[끌끌끌, 좋다. 그럼 곧바로 무공을 가르쳐주도록 하겠다.]
"잠깐, 그..호칭은..스승이라고 불러야하는 건가?"
당소는 낯간지러운 듯 볼을 긁적이며 입을 떼었다.
[필요없다. 난 그저 무공만을 전해줄 뿐, 사승의 연을 맺을 생각이 없다. 스승이라고 부를 필요도 구배지례를 올릴 필요도 없다]
".......알았다."
차가운 4885의 말에 당소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설마하니 무공만 전수해주겠다고 할 줄은 예상치 못한 까닭이었다.
일반적으로 무공을 전수 받는다는 것은 그 스승에 대한 은원과 업보 또한 이어받는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그런데 살혼은 그런 무거운 짐을 전부 내던져버린 것이다.
권리는 있지만 의무가 없는 상태라고 할 수 있었다.
'나쁘지 않아.'
당소는 눈을 반짝였다.
전설적인 살수인 살혼이라면 모르긴 몰라도 셀수도 없을 만큼 많은 은원을 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모든 은원을 짊어질 필요도 없이 무공만 이어받는다는데 어찌 좋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좋아, 그럼 지금부터 내가 부르는 구결을 그대로 따라하거라. 한 치도 어긋나서는 안되느니라.]
"구결을?! 따라하라고? 그냥 외우면 안돼?"
[직접 따라하면서 입에 붙게 만드는게 휠씬 오래 기억에 남는 법이다. 천천히 불러줄터이니 정확히 따라하도록 하거라.]
"알...알았어"
당소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답을 하였다.
[모무 바구 눈 수르 버부 혼 바구 눈 수르 버브..........]
4885는 천천히 구결을 외우기 시작하였다.
무척이나 복잡하고 난잡하기 그지 없는 구결이었다.
'역시 신공은 다르구나.'
그리고 그 구결을 들은 당소는 눈을 반짝이기 시작하였다.
과연 신공답게 기존에 있는 무공들과는 궤를 달리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모무 바구 눈 수르 버부 혼 바구 눈 수르 버브.........."
당소는 천천히 4885가 불러주는 구결을 따라하기 시작하였다.
하나도 빠짐없이 정확히 말이다.
[바구어 즈어 라!]
"바구어 즈어 라!"
이내 당소의 입에서 마지막 구결이 외쳤다.
그리고 이변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당소의 온몸이 환하게 빛나기 시작하였다.
"이...이게 대체?!"
그 모습을 본 당소는 당혹스러운 감정이 들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광경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내 당소는 함박 웃음을 지었다.
이 모든 게 신공의 영향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떄문이다.
"하하하하하하하하하"
당소는 웃고 또 웃었다.
온몸에 발광되고 있는 빛을 즐기며 말이다.
그렇게 얼마나 웃었을까
추우욱
한창 웃던 당소가 정색하며 표정을 굳히더니 이내 몸을 추욱 늘어뜨렸다.
그다음 곧바로 고개를 숙여버렸다.
또한 발광되던 빛 또한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휘황찬란했던 빛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말이다.
쓰으윽
그때 당소가 숙였던 고개를 천천히 들어올렸다.
"끌끌끌, 내가 말하지 않았더냐? 거짓말이라는 것은 본디 차분하게 해야한다고 말이다."
그리고는 연신 혀를 차며 말을 내뱉었다.
그의 입가에는 기분 나쁜 미소가 지어져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