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95화 〉 596. 인류애따윈 개나 줘버려
"능력이 있다고 해서 그걸 다른 이들을 위해 써야하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선우는 담담한 표정을 지은 채 말을 이었다.
그는 진실로 그리 생각하였다.
무협지 속으로 떨어진 후 온갖 불합리를 겪었던 그였다.
떨어지자 마자 온갖 괄시와 모욕을 당하였으며
나중엔 천무맹의 명예와 위신을 지키기 위해 누명까지 씌워졌으며
무림공적으로 선포되기까지 하였다.
그리고 그런 일련의 과정들이 일어나는 동안 그 누구도 자신을 옹호하거나 대변해준 적이 없었다.
정황상 너무나 의심스러운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저 이재원과 천무맹을 맹신하면서 말이다.
선우는 알고 있었다.
자신에게 누명을 씌울 당시 수뇌부들이 충분히 의심스러운 정황임에도 불구하고 일제히 침묵을 했다는 사실을 말이다.
오직 천무맹의 명예를 위해서 말이다.
그런 이들에게 무슨 인류애적인 감정이 생긴다고 나선다는 말인가
웃긴 일이다.
다수를 위해 개인적인 희생을 강요한 주제에 이제와서 도와달라고 설설 기니 말이다.
"자네! 그게 정파의 협사로서 할 말인가!"
"전 단 한번도 협사를 자칭한 적이 없습니다. 팔복당주. "
"뭐라!"
"제가 협행을 했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으십니까?"
선우는 궁금한듯 그에게 물었다.
"..........."
그리고 그의 물음을 들은 허삼관은 입을 꾹 다물었다.
마땅히 생각나는 일화가 없었기 때문이다.
'참나.'
그 모습을 본 선우는 어이없는 웃음을 흘렸다.
자신은 협행따위를 행한 적이 단 한번도 없었다.
그저 살아남기 위해 발악하며 싸워나갔을 뿐
그런 자신에게 협을 강요하니 웃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저는 협객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악인도 아니고요. 또한 천무맹에 소속된 이도 아니지요. 저는 그저 무림에 살아가는 무인일 뿐입니다. 제게 협을 강요하지 마십시오. "
선우는 단호한 표정을 지은 채 말을 이었다.
감정으로 호소하는데 끌려다니면 끝이 없었다.
여기저기서 도와달라고 들러붙으며 희생을 강요할 것이다.
협을 행한다는 명분하에 말이다.
그리고 만약 도와달라는 부탁을 들어주지 않으면 되려 반발하며 비난을 할 것이다.
초심을 잃었다고 협의를 저버렸다면서 말이다.
그딴 건 질색이었다.
댓가없는 희생따윈 하고 싶지 않았다.
무조건적인 희생만 강요당하는 만인의 영웅이 되고 싶지 않았다.
자신은 성인군자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인류애적인 마음을 가진 영웅 또한 아니었다.
그저 댓가가 없다면 의욕이 나지 않고 더 나아가 회피하게 되는 평범한 사람에 불과한 것이다.
그런 자신에게 어찌 협객의 잣대를 들이민다는 말인가
이기적이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정마대전은 그대의 소중한 이들을 전부 앗아갈 걸세! 자네가 지지하고 있는 천봉과 그녀의 어미인 대부인은 물론 자네의 사문인 사천당문조차 멀쩡하지 못 할거라는 말일세!"
허삼관은 언성을 높이며 고함을 내질렀다.
정마대전이 시작된다면 그가 지지하는 주소양과 이예설은 물론 사문인 당가조차 멀쩡하지 못할 것이다.
아무리 독왕이라고 불리우는 걸출한 인재가 버티고 있다고는 하지만 악독한 마귀들의 진격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기 때문이다.
허삼관은 생각하였다.
아무리 파문당한 몸이라지만 사문에 대한 정은 남아있을 것이라고 말이다.
"상관없습니다."
선우는 단호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지금 사문을 저버리겠다는 말인가!"
허삼관은 얼굴을 잔뜩 붉힌 채 고함을 내질렀다.
"사문이야 제 손으로 직접 지켜내면 될 일이 아닙니까? "
선우는 담담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천봉은! 그의 어머인 대부인은 어쩌겠는가!"
"그럴 의리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선우는 담담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애초에 이익을 위해 동맹을 맺은 것 뿐이지. 제가 무슨 충성심이 생겨서 수하로 들어간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따로 정이 있는 것도 아닌데. 제가 뭣하러 그녀들을 위해 희생한다는 말입니까?"
선우는 단호한 표정을 지은 채 선을 그었다.
물론 거짓말이었지만 말이다.
이미 그녀들과는 넘쳐 흐를 정도로 정을 쌓았으며
마음속 깊은 곳에 소중하기 짝이 없는 존재로 자리를 잡았다.
그녀들이 없는 삶따윈 상상조차 하지 못할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선우는 거짓말을 내뱉었다.
그저 공동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 모인 공인 관계일 뿐
사적으로는 일말의 감정조차 없다고 말이다.
그녀들이 자신의 약점이 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현재 자신은 이재원과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사이였다.
그런 상황에서 두 모녀와 친분을 대외적으로 알리게 된다면 그녀들이 위험해질 수 있었다.
그렇기에 거리를 둬야했다.
그녀들이 자신의 약점이 되지 않기 위해.
그녀들이 위험에 빠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말이다.
"그....그런.."
한 편 선우의 말을 들은 허삼관은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은 채 말을 흘렸다.
선우가 이런식으로 나올 줄은 전혀 예상치 못하였기 때문이다
선우를 천하의 다시 없을 협의지사로 알고 있던 허삼관이었다.
독왕이라는 정파의 걸출한 인물 밑에서 자랐다면 분명 협을 숭상하고 협을 행하는 협객으로서 면모를 가지고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아무래도 모든게 착각인듯 싶었다.
설마하니 이렇게 제 놈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인간일 줄이야.
"소협! 그대는 잘못되었소! 큰 힘에는 본디 큰 책임 따르는 법! 어찌 그런 책임을 회피한다는 말이오!"
깨우쳐 줄 필요가 있었다.
저 썩어문드러 빠진 이기적인 면모를 깨우쳐줄 필요가 있는 것이다.
천하제일인인 이재원조차 두려워할 정도로 강대한 무공을 손에 넣었지만
그 무공을 뒷바침할 인성까지 갖춰지진 않은듯 싶었다.
그렇기에 계도가 필요하였다.
무림의 선배로서 후배가 올바른 길로 이끌어질 수 있도록 말이다.
"대체 무슨 기준으로 잘잘못을 따진다는 말씀입니까? 이건 그저 제 가치관일 뿐입니다. 잘잘못을 따질만한 개념이 아니란 말입니다."
선우는 눈살을 살짝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
자신만이 옳다고 여기고 남에게 자신의 가치관을 강요하는 모습이 썩 좋게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찌 사람의 가치관이 절대적인 기준에 의해 판단되어진다는 말인가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면 어떤 가치관이든 존중을 받아야한다.
적어도 선우는 그리 생각하였다.
그렇기에 반발심이 일어났다.
오직 자신만이 옳다 여기고 있는 허삼관의 태도에 말이다.
"아니 잘잘못을 따질 수 있다네! 세상에 통용되는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다면 말일세!"
"그 통용되는 기준은 그저 보편적인 기준일 뿐 절대적인 기준이 될 수는 없습니다."
"어찌 그리도 엇나가는가? 모든 이들이 보편적인 기준에 맞춰 살아가는데 어찌 그렇게 혼자 삐딱하게 군다는 말인가!"
"그들의 방식을 비난하는 건 아닙니다. 아니 오히려 존중합니다. 그러니 저도 존중을 받고 싶을 뿐입니다."
"자네의 가치관은 틀려먹었네. 그런데 어찌 존중 받을 수 있다는 말인가?"
"대체 어떤 부분이 틀려다는 말씀입니까?"
"수백 아니 수 천의 사람들이 죽어나갈 수 있는 것이 바로 정마대전일세. 그런 정마대전을 막을 수 있는 힘을 갖추고 있음에도 그저 방관을 택하다니! 어찌 틀려먹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마교와 전쟁을 하겠다는 건 천무맹의 수뇌부들이 결정한 사안이 아닙니까? 그런데 어찌 제가 그들의 선택이 틀렸다하며 막아서야한다는 말입니까?"
"그들은 틀렸네! 모두 맹주의 혓놀림에 넘어갔다는 말일세!"
허삼관은 목에 핏대를 세운 채 언성을 높였다.
맹주를 비롯한 수뇌부들에 대한 분노가 치솟았기 때문이다.
오직 감정에 지배당하여 정마대전이라는 끔찍한 전쟁을 일으키려고 드는 그들에게 말이다.
"우습군요."
그 말을 들은 선우는 담담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지금 뭐라고 했는가!"
"우습다고 말하였습니다."
선우는 담담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아까부터 본인외엔 전부 틀렸다는 태도로 일관하고 있으시지 않으십니까? 스스로의 잣대를 기준으로 삼아서 말입니다. 그런데 어찌 우습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선우는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우스웠다.
우스워도 너무나 우스웠다.
자신만이 옳고 자신만이 정의라고 생각하는 허삼관의 태도가 말이다.
"그렇다면 자네는 제대로된 범인도 특정되지 않은 상황에서 정황상의 증거만으로 전쟁을 일으킨다는 게 옳다고 생각하는가!"
"수뇌부들이 찬성한 이유에는 납득되는 합당한 이유가 있지 않겠습니까?"
"말하지 않았나! 맹주의 요사스러운 혓놀림에 현혹당한 것이라고!"
"팔복당주."
선우는 차가운 눈초리로 허삼관을 노려보며 입을 떼었다.
"왜 그러는가!"
"전쟁에 반대한 이가 몇 명이나 되었습니까?"
"나를 제외하면 아무도 없었다네! 이제 알겠는가? 사태가 얼마나 심각한지?"
"거듭말하지만 오만하시군요."
"뭐라?!"
"정녕 다른 이들이 생각이 짧아 정마대전을 일으켰다고 생각하십니까?"
선우는 딱딱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천무맹의 수뇌부들은 맹원들을 대표하는 능구렁이들입니다. 그런 자들이 정말 맹주의 말에 현혹되어 찬동을 하였다고 생각하십니까?"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것인가!"
"그들은 진심으로 동의를 한 것입니다. 현혹된게 아니라 진심으로 전쟁을 바라고 있는 것입니다."
선우는 차가운 눈빛으로 허삼관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럴리가! 그럴리가 없다! 그들 모두 이십여년 전 전쟁을 겪었던 이들이다! 그런 이들이 어찌 진심으로 전쟁이 일어나길 바란다는 말인가! "
허삼관은 언성을 높이며 고함을 내질렀다.
말도 안되는 소리였다.
어찌 그들이 전쟁을 바라고 있다는 말인가
수뇌부들 모두 이십여년 전 전쟁을 겪었던 참전용사출신이었다.
세상 그 어떤 누구보다 전쟁의 참혹함과 서글픔 그리고 비극을 잘 알고 있는 자들인 것이다.
그런 이들이 전쟁을 바란다니?
말도 안되는 개소리였다.
"모두가 팔복당주처럼 생각하는 건 아닙니다."
선우는 허삼관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당신처럼 전쟁을 원치 않는 부류가 있는 반면 전쟁을 원하는 이들 또한 충분히 있을 수있다는 말입니다."
"말도 안되는 소리! 대체 어떤 미친놈이 전쟁을 바란다는 말인가! 전쟁이란 참혹함과 비극이 가득한 최악의 사태란 말일세! 그런데 어찌 전쟁을 바랄 수 있다는 말인가!"
"팔복당주의 말이 틀리지 않습니다. 전쟁은 참혹함과 비극의 연속인 최악의 사태입니다."
선우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을 이었다.
"인류애적인 관점으로만 본다면 말입니다."
그리고 뒤이어 조건을 덧붙었다.
"뭐라?"
그 말을 들은 허삼관은 의아한듯 그에게 되물었다.
"인류애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전쟁은 최악이라는 말이 부족할 정도로 끔찍한 일일겁니다. 사람의 생명이 그 어느때보다 무가치해질테니까요. 하지만 다른 관점에서 본다면 전쟁은 부정적으로만 볼 수 없는 일이 됩니다. 아니 오히려 호재로 보는 이들도 수두룩 할겁니다."
선우는 담담한 표정을 지은 채 말을 이었다.
"대체 어떤 관점에서 보면 전쟁이 호재가 된다는 말인가!"
허삼관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듯한 표정을 지은 채 언성을 높였다.
"마교와 전쟁이 일어난다면 무엇이 필요하겠습니까? 병장기와 군수 물자가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모르긴 몰라도 상당한 양이 필요할겁니다. 십만대산은 황제조차 함락시키지 못한 난공불락의 요새에 가까울테니까요."
선우는 담담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그 많은 군수물자는 어디서 구해야할까요? 상인들을 통해 매입을 하게 될 겁니다. 그리고 상인들은 야장과 농부들에게 웃돈을 주고 많은 양의 군수 물자를 얻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수많은 군수 물자들을 운반하기 위해 인력을 고용하게 될 것입니다. 짐꾼과 그 물자를 지켜줄 무인을 말입니다. 그럼 어떻게 되겠습니까? 중원 전체에 돈이 돌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선우는 하나하나 짚어가며 말을 이었다.
"상인의 관점에서 보면 전쟁이라는 건 결코 나쁜게 아닙니다. 나라 간의 전쟁이 아닌 무림인들 간의 전쟁이라면 더더욱 말이지요. 어차피 대부분의 피해는 고스란히 무림인들끼리 부담하게 될테니까요."
전쟁이 참혹하다.
이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수 많은 이들의 생명이 무가치하게 변해버리며
평범했던 일상이 무너져내리고
소중한 것들이 전쟁이라는 미명하에 전부 사라져버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른 관점에서 보면 전쟁은 호재에 가까웠다.
상인의 관점에서 보면 전쟁은 돈이 된다.
전쟁으로 인해 어마어마한 양의 돈이 시장에 유통되기 때문이다.
무인의 관점에서 보면 전쟁은 명예를 드높일 수 있는 기회가 된다.
전쟁을 통해 전공을 세우고 이름을 날리며 무인으로서 갈망하던 명예를 얻을 수 있는 발판이 되기 때문이다.
권력자의 관점에서 보면 전쟁은 권력을 주도할 수 있는 기회가 된다.
전쟁에서 어떤 활약을 하느냐에 따라 정치적인 입지가 변화를 하기 때문이다.
이렇듯 전쟁에 따른 입장은 그 위치에 따라 자르게 적용된다.
그렇기에 우스웠다.
자신만의 관점으로만 전쟁을 바라보며 막아야한다고 핏대를 세우는 허삼관의 모습이 말이다.
협이라는 가치가 퇴색된 천무맹에서 협을 부르짖으며 인류애를 찾고 있는 그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