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22화 〉 523. 속임수를 잡아내다.
덥석
남자는 도박사의 손목을 재빨리 잡았다.
그리고는 약지에 끼워져있는 반지를 그대로 빼내어버렸다.
"안...안돼!"
도박사는 절망어린 비명을 내질렀다.
안되었다.
저걸 빼앗겨선 안되었다.
그는 남자를 향해 재빨리 손을 휘저었다.
어떻게해서든 반지를 되찾을 심산이었다.
퍽
하지만 그런 그의 노력은 남자에 의해 그대로 저지되었다.
남자가 발을 들어올려 도박사의 얼굴을 차버렸기 때문이었다.
"안되긴 뭐가 안돼."
남자는 피식 비웃으며 말을 이었다.
"자아, 이 반지를 봐주세요."
남자는 도박사에게서 빼앗은 반지를 들어올리며 입을 열었다.
그러자 도박장 내에 있는 이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에게 집중되었다.
"이 반지는 언뜻 보면 평범한 반지같지만 사실 아주 재밌는 비밀이 숨어있습니다."
남자는 새끼 손가락으로 반지를 쓰다듬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은밀하고 미세한 은사가 그대로 남자의 새끼손가락에 감기기 시작하였다.
"잘보십시오."
은사가 손가락을 휘감자 남자는 천천히 양손의 거리를 벌렸다.
그러자 은사가 쭉 늘어나기 시작하였다.
"누가 주사위 좀 탁자 위에 올려주시겠습니까?"
은사를 벌린 남자는 부탁하듯 언성을 높였다.
"여기요."
그러자 가만히 서있던 이소란이 바닥에 떨어진 주사위를 주워올렸다.
"감사합니다."
남자는 그녀에게 살짝 목례를 한뒤 주사위에 은사를 가져다대었다.
그리고 새끼손가락을 아주 살짝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달그락 달그락
주사위들이 달그락거리며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은사에 닿아 굴러간 것이다.
"아니!?"
"어찌 저런?!"
"이럴 수가!?"
그러자 여기저기서 탄성이 터져나오기 시작하였다.
도박사가 속임수를 썼다는 사실이 증명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어떻습니까? 이제 증명이 되었나요?"
남자는 장난기 어린 미소를 지은 채 이현경을 바라보았다.
으득
그 모습을 본 이현경은 이를 살짝 갈았다.
꼼짝없이 들켜버렸다는 사실에 짜증이 치밀어올랐기 때문이었다.
"하지만.....그가.....그 반지를 썼다는 증거가.."
"참으로 이상하군요."
그녀의 말을 듣던 남자는 중간에 가로채듯 말을 이었다.
"뭐가 이상하다는 거죠?"
남자에게 말을 빼앗긴 이현경은 고운 아미를 찌푸리며 그에게 되물었다.
말을 중간에 끊어먹고 채간 것이 마음에 들지 않은 탓이었다.
"길길이 날뛰어야 할 분이 도리어 저자를 옹호하니 말입니다."
남자는 재밌다는듯 진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마치 같이 짜고 친 것처럼 말입니다."
남자는 눈을 빛내며 이현경을 바라보았다.
".........."
그 눈빛을 마주한 이현경은 입을 꾹 다문 채 침묵을 하였다.
마치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듯한 그의 눈빛에 압도되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아가씨 말대로 저자가 이 반지를 썼다는 증거는 없습니다. 그가 말한대로 아버지와 전처가 남겨준 이 반지에 우연히 이런 장치가 발견된 걸수도 있을테니까요."
남자는 재밌다는듯 진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 이 불쌍한 도박사에게 기회를 주고 싶군요. 결백을 증명할 기회를 말입니다.
남자는 바닥에 나동그라져있는 도박사를 바라보며 입을 떼었다.
"다시금 주사위를 돌리는 겁니다. 이번에는 이 반지를 빼고 말입니다. 몇 번을 해봐도 좋습니다. 백 번이고 천 번이고 하셔도 좋습니다. 전부 제가 맞추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한 번이라도 맞추지 못한다면 당신이 꺼낸 비수로 제 목을 잘라도 좋습니다. 대신 제가 몇 번이고 맞춘다면 당신의 목을 자르는 겁니다."
남자는 한없이 진지한 표정을 지은 채 도박사에게 말하였다.
"어떻습니까? 제 제안을 받아들이겠습니까?"
남자는 진심 어린 눈빛으로 도박사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덜 덜 덜
그 진지하기 짝이 없는 눈빛을 마주한 도박사는 온몸을 덜덜 떨기 시작하였다.
그가 진심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죽...죽을거야!'
도박사는 알 수 있었다.
자신이 몇 번이고 주사위를 돌려도 눈앞의 남자가 전부 맞춰버릴 것이라는 사실을
무슨 짓을해도 자신은 죽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쉬이이이이
더불어 도박사의 가랑이 사이에서는 오줌이 새어나와 바지를 적시기 시작하였다.
마치 죽음을 선고 받은 죄인이 된듯한 심정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모락 모락
그가 싸지른 오줌이 바지에서 새어나오더니 이내 도박장 바닥을 가득 적시기 시작하였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남자는 환하게 웃으며 다시금 물었다.
"히이익!"
그리고 그 웃음은 도박사를 더욱더 겁먹게 만들었다.
웃음을 마주한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은 까닭이었다.
"계속 대답을 안하신다면 받아들인 걸로 알고 판을 깔도록 하겠습니다."
"필...필요...없습니다."
남자의 협박에 도박사는 천천히 입을 떼어내었다.
"뭐라고요? 잘 안들리는데요?"
남자는 귀에 손바닥을 가져다댄 후 안들린다는듯이 과장된 동작을 하였다.
무척이나 익살스러운 모습이었지만 목숨이 걸려있는 도박사의 입장에서는 소름끼치기 그지없는 모습이었다.
"결...결..백의 증명 따윈 필요없습니다!"
도박사는 이내 언성을 높이며 고함을 내질렀다.
소리를 질러서라도 두려움을 내쫓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럼 속임수를 썼다는 걸 인정 하는거네요?"
"...그...그렇습니다."
도박사는 우물쭈물거리며 간신히 말을 이었다.
"이야, 잘됐네요. 이렇게 인정도 해주시니 말입니다."
남자는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약지를 두어번 위아래로 흔들었다.
휘리리릭
그러자 새끼손가락에 감겨있던 은사가 반지로 빨려들어가기 시작하였다.
덥석
은사가 반지로 완전히 빨려들어가자 남자는 손을 뻗어 탁자에 꽂아두었던 도박사의 비수를 붙잡았다.
스르륵
그다음 비수를 그대로 뽑아들었다.
그러자 날카로운 비수가 빛을 발하기 시작하였다.
"자, 이제 약속을 이행합시다."
저벅 저벅
비수를 뽑아든 남자는 도박사를 향해 천천히 걸어가기 시작하였다.
"잠..잠깐만요! 전..전부 인정했잖습니까!"
그가 다가오자 도박사는 당황스러운듯한 표정을 지으며 되물었다.
"네에, 인정했으니까 약조한 바를 이행하려고 하는 것 뿐입니다."
남자는 담담한 표정을 지은 채 말을 이었다.
"처음에 약조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목을 걸겠다고 말입니다."
말을 마친 그는 천천히 비수를 들어올렸다.
그대로 내려쳐버릴 심산인듯 싶었다.
"잠..잠시만요!""
그때 남자의 뒤편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남자는 천천히 뒤편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처진 눈매가 매력적인 아름다운 여인이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황보유연의 딸 이소란이었다.
"무슨 일입니까?"
"그의 목숨을 빼앗지 말아주세요."
"그는 도박장에서 속임수를 썼습니다. 그럼 죗값을 받아야하지 않겠습니까?"
"그건 관아에서 판단할 몫이에요! 공권력이 아닌 개인적인 처벌은 옳지 않아요!"
그녀는 올곧은 눈빛으로 남자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괜찮습니다. 저는 무림인이라 관아에서도 딱히 처벌하진 않을겁니다. 관과 무림은 불가침의 관계이니까요."
남자는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당신을 걱정하는게 아니에요! 당신으로 하여금 어지럽혀질 질서를 걱정하는 거에요!"
"어지럽혀질 질서?"
선우는 의아한듯 그녀에게 되물었다.
"무법이 당연시하게 받아들여지게 된다면 대체 어떤 이가 법을 지키겠어요!"
"..........."
그녀의 말을 들은 남자는 이소란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신기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남자는 처음부터 모든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가 도박사에게 속임수를 쓴 것이 아니냐고 따질 때부터 도박사에게 각종 모욕을 당하고 손찌검을 하려고할 때까지 말이다.
그렇기에 신기할 수밖에 없었다.
사기를 당한 것은 물론 각종 모욕까지 들은 주제에 도박사를 죽이지 말아달라고 말하니 말이다.
'정작 한통속인 이현경은 가만히 있는데 말이야.'
남자는 웃음이 절로 나왔다.
착한건지 멍청한 건지 구분안되는 아가씨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곰같은 년.'
물론 곰치고는 너무나 귀엽게 생긴 여자였지만 말이다.
"소저는 바보입니까?"
남자는 이소란을 바라보며 물었다.
"바보라니요!"
그의 말을 들은 이소란은 발끈하며 언성을 높였다.
뜬금없이 바보라니 이건 또 무슨 소리란 말인가
바보라는 말은 그녀가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는 말이었다.
배움이 짧긴 하였지만 스스로가 멍청하다는 생각은 해본적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놈은 소저에게 사기를 치고 모욕을 준 놈이 아닙니까? 그런데 이런 놈을 죽이지 말라니.......이해가 안되는군요."
"감정이 법 위에 있어선 안되잖아요. 감정에 휘둘려 멋대로 행동했다간 저 또한 법을 어기는 범법자와 다를바 없다고 생각해요."
'..........호오'
그녀의 말을 들은 선우는 속으로 살짝 감탄을 하였다.
이재원 딸래미 답지 않게 올바른 윤리관을 갖춘 여인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확실히 소저의 말도 일리가 있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남자는 고개를 살며시 주억거리며 말을 이었다.
"그럼 살려주시는 건가요?"
남자의 말을 들은 이소란은 화색이 띈 얼굴로 그에게 물었다.
휘익
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남자가 도박사를 향해 비수를 휘둘렀다.
툭
"끄아아아아악!"
그러자 이내 도박사의 비명성이 울려퍼지기 시작하였다.
남자가 휘두른 비수가 도박사의 오른쪽 손목을 그대로 잘라버렸기 때문이었다.
"끄아아아아아아악!"
손목이 잘린 도박사는 피가 철철 흐르는 손목을 부여잡으며 데굴대굴 구르기 시작하였다.
끔찍하기 짝이 없는 고통이 치솟았기 때문이었다.
"뭐하는 짓이에요!"
그 모습을 본 이소란은 놀란듯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그에게 되물었다.
대체 이게 무슨 짓이란 말인가
"안죽이지 않았습니까?"
그녀의 물음에 남자는 태연하게 답을 하였다.
"죽이고 안죽이고 문제가 아니잖아요!"
"괜찮습니다. 손목 하나없어도 살사람은 잘 삽니다."
"뭐라구요!?"
그의 뻔뻔스러운 태도에 이소란은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그에게 되물었다.
"처음부터 손목을 자를 생각이었습니다. 손목도 목은 목이지 않습니까?"
남자는 입가에 진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허어."
그 미소를 마주한 이소란은 헛웃음을 터트렸다.
사람의 손목을 잘라놓고 여전히 익살스러운 모습에 실소가 터져나왔기 때문이었다.
"멋대로 다른 사람의 손목을 자르는 행위도 범법인건 아시나요?"
"괜찮습니다. 어차피 무림인이라는 족속자체가 세금도 안내고 살인이나하는 범법자나 다름없지 않습니까? 여기서 죄명이 더 추가된다고해도 그리 이상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남자는 장난기 어린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이소란은 그런 남자를 어이가 없다는듯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세상 천지에 무림인을 저런식으로 말하는 이는 처음 본 까닭이었다.
콰콰콰쾅
그때 주사위 도박판이 있는 곳으로 옆구리에 칼을 비껴 찬 험상궂기 짝이 없는 하고 있는 남자들이 우르르 몰려오기 시작하였다.
도박장을 지키는 경비 무사들인듯 싶었다.
경비 무사들은 그대로 도박사의 손목을 잘라낸 남자 주위를 둘러싸기 시작하였다.
행패를 부린 그가 도망가지 못하게 막아버릴 심산인듯 하였다.
"손님, 이게 대체 무슨 짓입니까?"
둘러싼 남자들 중 가장 덩치가 큰 남자가 바위처럼 묵직하기 그지없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의 음성은 무척이나 화가 나 있었다.
"손목을 잘랐습니다만?"
남자는 의아한듯한 표정을 지으며 반문하였다.
"어째서 입니까?"
"속임수를 쓰더라구요."
"그렇다면 관리자에게 직접 항의를 하셔야지 이렇게 멋대로 칼질을 하다니요. 어불성설입니다."
"본인이 자초한겁니다. 스스로 목을 걸었거든요."
"저희 도박장에서는 개인적인 내기는 금하고 있습니다."
"그건 몰랐네요. 다음부터 조심하겠습니다."
남자는 태연한 표정을 지은 채 말을 이었다.
"죄송하지만 다음은 없습니다. 관아로 가시지요."
거한은 남자를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그 또한 나쁘지는 않은데....그리 좋지도 않군요."
"말장난을 할 생각은 없습니다."
"저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관과 무림이 엄연히 불가침일진대 어찌 제 몸에 손을 댈 생각을 하시는 겁니까?"
"무림도 무림 나름이지요. 당신은 같은 무명소졸에게 까지 관군이 겁을 먹을 것이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거한은 비웃는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이곳으로 오기 전 출입명부를 확인했던 그였다.
그리고 눈앞에 있는 후줄근한 남자가 거액의 돈을 써서 이 도박장에 들어온 것을 알게 되었다.
제대로 된 무림인이 아닌 졸부인 것이다.
그런자에게 겁을 먹을 리 만무하였다.
"이거 참 민망하군요. 나름 유명인이라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무명소졸 취급을 받다니요."
남자는 머리를 긁적이며 말을 이었다.
"사람은 스스로를 과대평가하기 마련이지요."
"그래도 제 이름 석자를 듣게된다면 모르진 않을 것입니다."
"관심없군요."
남자의 말을 단박에 끊어버린 거한은 그를 향해 손짓을 하였다.
그대로 덮쳐버리라는 신호였다.
더이상 말장난을 할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스르릉
이내 도박장의 경비 무사들이 비껴찬 검을 뽑더니 그대로 남자에게 일제히 달려들었다.
군더더기 하나 없는 무척이나 깔끔한 모습이었다.
분명 제대로 된 연계 훈련을 받은 이들이리라
이내 남자의 신형이 경비 무사들의 몸에 가려져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
그대로 덮쳐진 것이다.
'끝났군.'
그 모습을 본 거한은 만족스러운듯한 미소를 지었다.
무서울 정도로 싱겁게 끝난 상황에 만족감을 느낀 까닭이었다.
쿵
그때 이변이 일어났다.
쿵
쿵
쿵
남자를 덮쳐들었던 경비 무사들이 하나둘씩 바닥에 무릎을 꿇기 시작하였다.
이내 경비무사들로 인해 모습이 가려졌던 남자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제 이름은 장선우라고 합니다."
모습을 드러낸 남자, 장선우는 거한을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무림에서는 천룡天龍이라는 과분한 칭호로 불리우고 있지요."
그의 입가에는 진한 미소가 지어져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