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16화 〉 517. 빚을 지게 된 농익은 유부녀
"다른 방도라뇨?"
팽가련은 의아한듯한 표정을 지으며 황보유연에게 되물었다.
"그...뇌물을 뱉어내는 것 말고....다른 방도는 없는 건가요?"
그녀는 우물쭈물거리며 간신히 말을 내뱉었다.
"황보 부인"
그 말을 들은 팽가련은 침중한 표정을 지으며 그녀를 불렀다.
".....네에."
"지금도 무리할 정도로 그대의 사정을 봐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팽가련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황보유연을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그런데 여기서 뭘 어떻게 더 해달라는 말인가요?"
".........."
그녀의 말을 들은 황보유연은 입을 꾹 다물고 침묵을 하였다.
그녀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는 까닭이었다.
이미 그녀는 차고 넘칠 정도의 호의를 베풀어주었다.
먹었던 것만 뱉어내면 죄를 묻지 않겠다니 그것보다 좋은 조건따위가 있을 리 만무하였다.
그런 좋은 조건도 황보유연의 입장에선 피말리는 악조건에 지나지 않았다.
돈이 없기 때문이었다.
돈이 없었다.
과장하는게 아니라 정말로 말이다.
반년 전 천일 상단으로부터 받았던 뇌물은 정확히 오십만냥이었다.
그 돈을 받은 황보유연은 곧바로 세가에 송금을 하였다.
봉문하여 하루 끼니조차 거르게 생긴 혈족들을 구제하기 위해서 말이다.
그리고 매달 지급되는 품위유지비와 계파 지원금으로 근근히 생활을 이어갔다.
그런 그녀에게 오십만냥이라는 거금을 지불할 능력이 있을 리 만무하였다.
"하지만...전...돈이.."
황보유연은 더듬거리며 말을 이었다.
"설마 그 돈을 다썼다는 건 아니겠죠? 오십만냥이나 되는 거금을 말입니다."
팽가련은 북풍한설보다 차가운 눈빛으로 황보유연을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움찔
"............"
그 시선을 마주한 황보유연은 몸을 움찔떨더니 이내 입을 꾹 다물었다.
여기서 돈을 다썼다는 말을 한다면 사태가 심각해질 것이라는 직감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황보 부인, 원래라면 뇌물과 더불어 범칙금까지 수십만냥을 배상해야할 상황입니다. 알고 계신가요?"
"......알고 있습니다."
황보유연은 기운없는듯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녀의 말은 사실이었다.
만약 적법한 절차를 밟아 처벌을 받았다면 뇌물과 더불어 어마어마한 금액의 범칙금이 청구되었을 것이다.
"그럼 제가 얼마나 큰 호의를 베풀었는지도 잘 아시겠네요?"
".........네에."
"그럼 어떻게 해야할까요?"
".........뇌물을 반환해야해요."
황보유연은 시무룩한 표정으로 답을 하였다.
"꼭 반환하리라 믿겠습니다."
팽가련은 올곧은 눈동자로 황보유연의 떨리는 눈동자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네에."
황보유연은 축 처진 표정을 지은 채 말을 이었다.
".............."
그리고는 그대로 고개를 푹 숙이더니 입을 다물고 침묵을 하였다.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리에 충격을 먹은듯 하였다.
"......황보 부인."
팽가련은 그런 황보유연을 부드러운 목소리로 불렀다.
".....네에."
황보유연은 축 처지는 목소리로 답을 하였다.
"칠주야를 드리겠습니다."
"칠...주야요!?"
"네에, 어찌어찌 전임 단주의 입을 막아놓긴 했지만 시간을 더욱 끌었다간 맹주께 직접 까발릴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렇다면 황보 부인 뿐만 아니라 집법당 또한 청렴을 의심받게 될 것입니다."
팽가련은 한없이 진지한 눈빛으로 황보유연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러니 어떻게해서든 칠주야를 맞춰주길 바랍니다. 만약 기한을 넘어선다면 저 또한 봐드릴 수는 없어요."
"...........네에."
팽가련의 단호한 말을 들은 황보유연은 천천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녀의 눈빛에는 서글픔과 불안함이 가득 차 있었다.
"제 용건은 여기까지입니다. 달리 할 말이 있으신가요? 없으시다면 오늘은 이만했으면 좋겠군요."
그녀의 대답을 들은 팽가련은 담담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이제 그만 나가라는 축객령이었다.
"저..."
그러자 황보유연이 천천히 입을 떼어내었다.
"용정은 얼마나 가져갈까요..."
황보유연은 수치심에 얼굴을 잔뜩 붉힌 채 말을 이었다.
"원하는 만큼 가져가도록 하세요."
그 말을 들은 팽가련은 귀엽다는듯 그녀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감사합니다.....그럼....시비에게 받아가도록 하겠습니다."
"그리 하도록하세요."
팽가련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을 이었다.
그러자 이내 황보유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저는 들어가보도록 하겠습니다."
황보유연은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는 곧바로 밖으로 나가버렸다.
팽가련의 얼굴을 더 마주하고 있기 힘든 탓이었다.
팽가련은 밖으로 나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갔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기척이 완전히 사라지자 이내 입을 열었다.
스르르르
그러자 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녀의 뒤편에서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잘 발달 된 근육과 준수한 외모를 가진 무인
선우였다.
"압박 잘하더라."
모습을 드러낸 선우는 팽가련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의 입가에는 만족스러운듯한 미소가 지어져있었다.
"과찬이십니다."
선우의 칭찬에 팽가련은 부끄러운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아니야, 진짜 잘했어, 이정도면 충분히 압박이 되었을까."
선우는 기특하다는듯 팽가련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감..감사합니다."
선우의 칭찬을 받은 팽가련은 얼굴을 잔뜩 붉히며 그의 손길을 즐기기 시작하였다.
매번 뺨맞고 욕설을 들으며 구박만 받던 그녀였다.
그런데 별안간 칭찬을 받으니 행복감이 미친듯이 치솟아오르기 시작하였다.
결핍 끝에 낙이있다고 하던가
그간의 설움이 그녀에게 극적인 감정변화를 가져다주었다.
"근데 뇌물 받아먹은거 진짜야?"
선우는 궁금하다는듯 그녀에게 물었다.
"네에, 진짜에요. 정확히 오십만냥을 받아먹었어요."
"그런데 왜 지금까지 비밀로 했어?"
쓰담 쓰담
선우는 팽가련의 흑단처럼 고운 머릿결을 더욱더 부드럽게 쓸어주며 그녀에게 물었다.
"......좀더 극적인 상황에서 터트리려고 묵혀두고 있었어요."
팽가련은 부끄러운듯 얼굴을 발그레 붉히며 말을 이었다.
"극적인 상황?"
"네에...예를 들어 후계 경쟁이 한창 진행되고 있을 때라던가..."
".......치졸하네."
선우는 감탄했다는듯 그녀에게 말하였다.
"........죄송합니다."
그녀는 송구하다는듯한 표정을 지으며 사과하였다.
"사과할 일은 아니지."
선우는 고개를 좌우로 저으며 말을 이었다.
".....네에."
"그건 그렇고 황보유연이 돈을 마련할 수 있을까?"
"무리일 거에요. 이미 쪼들릴 대로 쪼들리는 생활을 하고 있는 그녀니까요."
"돈 나올 구멍이 없대?"
선우는 의아한듯 그녀에게 물었다.
"달마다 품위 유지비와 계파 지원금이 나오긴하는데 그 정도로는 어림도 없을거에요."
"그럼 어떻게 할 것 같아?"
"일단 돈을 빌리러 다닐 것 같아요. 남편이라던가 아니면 다른 부인들한테 말이에요."
"빌려줄까?"
"아무도 안빌려줄거예요. 한푼이라도 아껴서 후계 경쟁에 힘써야할 판국에 누가 그녀에게 빌려주겠어요."
"이재원은?"
"이재원은 자린고비 기질이 있어서 적법한 일이 아니면 돈을 내어주지 않을 거에요. 더구나 지금 대자보때문에 한창 예민한 시기니까 자칫 잘못했다간 돈은 커녕 욕만 진탕 먹고 내쫓길수도 있어요."
"불쌍하네."
선우는 연민 가득한 시선으로 문밖을 바라보았다.
황보유연의 처지를 생각하니 연민이 치솟았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녀를 근본적으로 처량하게 만든 원흉은 황보세가를 반파시킨 선우였지만 말이다.
"안타깝긴 하지만 어쩔 수 없죠. 그녀의 업보니까요."
팽가련은 담담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업보?"
"네, 그녀는 오십만냥을 전부 외가에 송금했다고 하더군요. 그게 바로 그녀의 업보라고 생각해요."
"어째서?"
"차라리 그 돈을 기반으로 사업체를 굴려서 다달이 돈이 들어올 수있게 만드는 편이 더 좋은 선택이니까요."
그녀는 황보유연이 무척이나 한심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뇌물로 받은 오십만냥을 전부 외가에 보내다니
어찌 이리도 멍청할 수 있다는 말인가
만약 자신이 같은 상황이었다면 그녀처럼 멍청한 짓을 하진 않았을 것이다.
"황보세가도 그 돈을 허투루 쓰지는 않지 않을까?"
"그건 황보세가의 수뇌부들을 몰라서 하는 말이에요. 그들은 한탕주의가 강해서 사업을 몇 번이고 말아먹은 사람들이에요. 분명 오십만냥도 반 년동안 전부 말아먹었을 거에요."
팽가련은 확신에 찬 눈빛으로 선우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황보유연 진짜 불쌍하다."
그녀의 말을 들은 선우의 눈빛에 연민이 더욱더 심화되기 시작하였다.
속사정을 듣고나니 밑빠진 독에 물을 붓는 그녀의 모습이 더욱더 안타깝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잘해줘야겠다.'
선우는 생각하였다.
팽가련 보다는 그래도 잘해줘야겠다고 말이다.
적어도 지금보다 불쌍하지는 않게말이다.
*******
탁 탁 탁 탁
이재원은 붓대로 책상을 빠르게 두드리기 시작하였다.
탁 탁 탁 탁
마치 심기가 불편한듯 인상을 와락 찌푸린 채로 말이다.
"그러니까.......오십만냥이 필요하다고?"
이재원은 인상을 찌푸린 채 다소곳 서있는 황보유연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네에."
"어디다 쓸지는 말해줄 수는 없고?"
".......네에."
"그것도 칠주야내로?"
".........네에."
황보유연은 고개를 푹 숙인 채 답을 이었다.
도저히 그의 눈을 마주칠 용기가 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제정신이오?"
이재원은 어이없다는듯한 표정을 지으며 황보유연을 바라보았다.
대체 이게 무슨 개같은 소리란 말인가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오?"
"......하지만....상공...쓸데가.."
황보유연은 침울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어디다 쓴다는 말이오?
"그건...말할 수가..."
황보유연은 우물거리며 말을 이었다.
말할 수있을 리가 없었다.
뇌물을 반환하기 위해 돈을 달라는 이야기를 말이다.
뇌물 환수와 관련된 내용은 엄연한 비밀이었다.
그런걸 이재원에게 말했다간 경을 칠 것이 분명하였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사정을 봐준 팽가련조차 위험하게 될 수 있었다.
그럴수는 없었다.
그렇게 할수는 없는 것이다.
"대체 어디다 쓸지도 모를 거금을 어찌 내게 내놓으라고 하는 것이오! 그대는 내게 돈이라도 맡겨 놓았소?"
그 말을 들은 이재원은 언성을 높이며 고함을 내질렀다.
안그래도 짜증이 미친듯이 치솟아올라있는 상태였다.
그런데 마누라라는 여편네가 돈을 불려 내조를 할 생각은 커녕 오히려 돈을 내놓으라며 떼를 쓰고 있으니 화가 나지 않을수가 없었다.
"상..상공.....저는...그게...사실은"
이재원의 험악한 말에 황보유연은 상처받은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지금과는 전혀 다른 남편의 흉흉한 모습에 지금이라도 사실을 고할 심산이었다.
"듣기 싫소! 어차피 뻔하디 뻔한 이야기가 아니겠소? 감당치 못할 사치와 낭비벽으로 인해 빚을 지게 된 것이겠지! 내 그대의 낭비벽에 대해서는 익히 들어 알고 있소! 맹의 돈을 빼돌려 황보세가에 송금한다는 사실 또한 잘 알고 있소! 대체 나보고 어디까지 참으라는 것이오! 대체 나보고 어쩌라는 것이오!"
이재원은 그녀에게 온갖 짜증을 내뱉기 시작하였다.
그간 선한 척하며 묵혀두었던 감정을 모두 토로하기 시작한 것이다.
"꼴도 보기 싫소! 당장 내 눈앞에서 사라지시오! 당장 말이오!"
이재원은 거친 목소리로 축객령을 내렸다.
꼴도 보기 싫다는 말을 첨언하면서 말이다.
".......흐윽....흑...상공.."
이재원의 거친 축객령을 들은 황보유연은 눈물을 흘리기 시작하였다.
그래도 끝까지 자신의 편이 되줄줄 알았던 남편의 폭언에 참았던 눈물이 터지고만 것이다.
오라버니가 죽고 황보세가가 봉문한 이후 단언컨대 단 한번도 사치를 부린 적이 없었다.
선대 황보세가주가 사업체로 날려먹은 돈을 메꾸고 반파당한 황보세가를 복구하기 위해 돈이 생기는 족족 황보세가에 송금을 하였기 때문이었다.
뿐만 아니라 딸이 다른 아이들에게 기죽는 것이 보기 싫었던 그녀는 없는 돈을 아끼고 아껴 그녀를 풍족하게 만들었다.
사치품이라고해봤자 매년 선물로 들어온 물건들을 쌓아둔 것과 사기 당해 대량으로 구매해버린 싸구려 찻잎이 전부인 그녀였다.
그런 그녀가 사치따위를 할 리 만무하였다.
서운하였다.
너무나 서운하였다.
사치와 동떨어진 삶을 살고 있는 자신을 방탕한 여자라고 매도하는 이재원에게 말이다.
비참하였다.
너무나 비참하였다.
세상 모든 이들이 등을 돌려도 절대 등을 돌리지 않을 것 같았던 이재원이 자신의 말조차 제대로 들어주지 않는 이 상황이 말이다.
"흐윽...흐윽...흑...흑..흑.."
이내 황보유연은 눈물을 터트렸다.
무척이나 서럽고 슬프게 말이다.
"울거면 나가 우시오! 내 지금 그대의 눈물따위! 거짓된 눈물따위는 보기 싫으니까!"
이재원은 그런 황보유연을 바라보더니 이내 인상을 와락 찌푸리며 고함을 내질렀다.
'시발년이 떼쓰다 안되니까 처우네. 이래서 시발 짱개년들은 선즙필승은 시발 만국공통인가? 존나 어이없네. 시발 빨통이랑 궁둥짝만 큰년이 존나 추하게 우네.'
이미 마누라들에게 정이 있는대로 털려있는 이재원이었다.
그런 그에게 황보유연의 설움섞인 울음소리는 소음으로 밖에 들리지 않았다.
"흐윽....흑....흐극....알겠어요...흑...가..보겠어요."
그 말을 들은 황보유연은 소매로 눈물을 다급히 닦아내었다.
더이상 남편에게 추한 꼴을 내보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는 곧바로 집무실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무척이나 빠른 걸음으로 말이다.
이내 그녀의 신형이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이재원은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아, 저 시발년 문 안닫고 나갔네."
그리고 이내 깨달았다는듯이 말을 내뱉었다.
그의 어투에는 짜증이 잔뜩 서려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