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15화 〉 516. 황보유연의 위기
후르릅
팽가련은 여유롭게 찻잔을 들이키기 시작하였다.
본디 차라는 것은 그 향을 먼저 즐긴 후 마시며 음미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래야 비로소 제대로 된 다도를 즐기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팽가련은 그런 절차따위는 완전히 무시한 채 그대로 찻잔을 들이켜버렸다.
상품上品의 용정차를 물처럼 마시는 것이다.
다도를 제대로 아는 이가 봤다면 부러움에 한탄을 할 광경이었다.
벌컥 벌컥
그렇게 용정차를 들이키고 있을 때였다.
똑 똑 똑
갑자기 바깥에서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하였다.
"누구인가요."
그녀는 의아한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접니다. 팽부인"
그러자 바깥에서 무척이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오세요."
팽가련은 담담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끼이이익
그녀의 허락이 떨어지자 이내 문이 열렸다.
그리고 열린 문으로 아름다운 귀부인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축쳐져있는 수심가득한 눈망울
날카롭게 서있는 콧대.
야무져보이는 입매.
관리하는 중년다운 육감적인 몸매
귀부인의 정체는 천무맹의 안주인인 황보유연이었다.
"어서 오세요. 황보부인."
팽가련은 담담한 어조로 그녀를 반겼다.
"부르셨다고 들었습니다. 팽부인."
황보유연은 우물쭐한 표정을 지은 채 그녀에게 인사를 하였다.
"네, 맞아요. 할 말이 있어서요."
팽가련은 슬며시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네...말씀해주세요."
그녀는 마치 죄지은것 같은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일단 자리에 앉으시지요."
팽가련은 바로 앞 탁자를 가리키며 그녀에게 자리를 권하였다.
".....알겠습니다."
황보유연은 고개를 주억거리고는 그대로 자리에 착석을 하였다.
"일단 목부터 축이시지요."
그녀가 자리에 앉자 팽가련은 주전자를 살며시 들어올리며 그녀에게 말하였다.
"감사히 받겠습니다."
그녀가 주전자를 들어올리자 황보유연은 냉큼 찻잔을 들어올리며 말하였다.
쪼르르르
이내 황보유연의 찻잔에 차가 채워지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이내 차가 완전히 채워지자 황보유연은 재빨리 찻잔을 들어올렸다.
"흐음"
그다음 한 차례 찻향을 음미하였다.
화악
그러자 이내 그녀의 얼굴에 화색이 돌기 시작하였다.
상등품의 용정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흐르르릅
그녀는 그대로 차를 들이켰다.
용정 특유의 알싸함과 향긋함이 입가에 맴돌기 시작하였다.
'아아아...행복해.'
황보유연의 얼굴이 있는대로 풀어지기 시작하였다.
오랜만에 먹는 차다운 차에 행복감이 물밀듯이 차올랐기 때문이었다.
"갈 때 좀 싸드릴까요?"
그 모습을 지켜보던 팽가련은 피식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아...아니에요."
그녀의 말을 들은 황보유연은 불현듯 정신이 든듯 풀어진 눈을 선명하게 만들고는 좌우로 도리질쳤다.
"사양치 않아도 됩니다."
팽가련은 재차 그녀에게 권하였다.
"정말 괜찮아요....저도...꽤나 구비해두고 있답니다."
팽가련의 권유에 황보유연은 재차 거절을 하였다.
차를 너무나 좋아하는 그녀였지만 팽가련에게 자존심을 굽히고 싶지는 않았다.
가난하지만 자신은 엄연히 명가의 후예이고 천무맹의 안주인이었다.
적선같은 것은 사양이었다.
피식
그 말을 들은 팽가련은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황보유연이 얼마나 궁핍하게 지내고 있는지 잘 알고 있는 그녀였다.
그녀가 얼마나 용정을 좋아하는지도 무척이나 잘알고 있었다.
그런 그녀가 자신의 제안을 거절하는 것을 보니 같잖은 허세를 부리는 것 같아 귀여워보였다.
"제가 생각이상으로 대량으로 구입해서 그렇습니다. 황보부인이 가져가시지 않는다면 버리고 말 것입니다."
팽가련은 그녀의 자존심이 상하지 않게 최대한 우회적으로 돌려가며 그녀에게 권하였다.
이정도까지 말한다면 분명 상처입지는 않을 것이다.
"버린다고요!?"
황보유연은 놀란듯한 표정을 지으며 그녀에게 되물었다.
"네에, 전부 상하고 말테니까요."
팽가련은 살며시 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그렇다면 어쩔 수 없군요...멀쩡한 찻잎을 버릴 수는 없으니까요...아암...그렇고 말고요....그럼 제가 특별히 가져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황보유연은 변명하듯 말을 내뱉더니 이내 그녀의 제안을 수락하였다.
제안을 수락한 황보유연의 입꼬리는 위로 솟구쳐있었다.
"그렇게 해주시면 감사할 것 같습니다."
팽가련은 재밌다는듯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별말씀을요."
그녀의 미소를 본 황보유연은 이내 민망한듯 얼굴을 붉히며 말을 이었다.
너무 좋아하는 티를 낸게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것보다...저를 부른 이유가 무엇입니까?"
황보유연은 화제를 돌리듯 빠르게 팽가련에게 물었다.
"아, 그거요."
그 말을 들은 팽가련은 이내 생각난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한 가지 첩보가 들어와서 말입니다."
그녀는 한없이 진지한 표정을 지은 채 말을 이었다.
"첩..첩보요?"
"네에. 첩보요."
"무슨...첩보인가요?"
황보유연은 불안한듯한 표정을 지으며 그녀에게 물었다.
"부인들 중 천일 상단에게 뇌물을 받은 이가 있다는 첩보가 들어왔습니다."
"천..천일 상단이요!?"
그녀의 말을 황보유연은 놀란듯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그녀에게 되물었다.
천일상단이라면 과거 식재료 납품을 두고 경합을 벌이던 상단 중 하나였다.
더불어 황보유연이 상당한 뇌물을 받아먹은 전력이 있는 상단이기도 하였다.
'그게 왜 이제와서?'
그녀는 의아한듯한 표정을 지었다.
식재료 납품 경합은 이미 반년 전에 끝난 이야기였다.
그리고 경합에서 탈락한 천일상단도 황보유연에게 뇌물을 주었다는 것에 대해 입을 싹 닫고 있던 상황이었다.
만약 뇌물을 줬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다시는 경합 후보에 오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일이 왜 이제와서 터진다는 말인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네에, 천일 상단이요."
팽가련은 눈을 반짝이며 입을 열었다.
"이...이상하네요. 천일 상단이라면 반년 전 식재료 납품을 두고 경합을 벌이다 탈락한 곳이 아닌가요? 그런데 어찌 그런 곳에서 뇌물을 받은 이가 있다는 말인가요."
그녀는 손바닥으로 화끈거리는 얼굴을 부채질하며 말을 이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에 당혹스러움이 올라온듯하였다.
"그렇다고 주장하더군요. 며칠 전 천일상단에서 퇴출당한 전임 단주가 말이에요."
"..........조사를...끝마친건가요?"
"네에."
"........그렇다면...범인이 누구인지도.."
"제가 황보부인을 왜 불렀겠습니까?"
그녀는 차가운 눈동자를 반짝이며 말을 이었다.
"............"
그녀의 말을 들은 황보유연은 입을 꾹 다물고 침묵을 하였다.
모든 것이 들통났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저...저는...이제 어떻게 되는건가요.."
그녀는 쉴새없이 떨리는 눈동자로 팽가련을 바라보며 물었다.
"어떻게 될 것 같으신가요?"
".......처벌...받는건가요?"
"관례상 그렇게 되겠죠?"
팽가련은 태연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털썩
그때 황보유연이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팽부인!"
황보유연은 고개를 푹 숙인 채 말을 내뱉었다.
"부탁드리겠습니다.....부디 후계 경쟁이 끝날 때까지만 모른 척 해주세요."
"뭐하는 짓인가요. 어서 일어나세요."
팽가련은 그런 그녀를 담담한 표정으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벌은 얼마든지 받겠습니다! 평생 옥살이를 해도 좋습니다. 부디 처벌을 유예해주세요."
그녀는 빌고 또 빌었다.
현재 맹은 무척이나 뒤숭숭한 상황이었다.
더불어 맹주인 이재원의 심기도 예민하기 그지없었다.
만약 이런 상황에서 비리를 저지른 것이 밝혀지게 된다면 사태는 걷잡을 수 없게 될지도 몰랐다.
심각할 경우 딸인 이소란의 후계 자격이 박탈당할 수 있는 것이다.
'안돼!'
그럴 수는 없었다.
무려 이십여년을 기다리고 기다렸던 후계 경쟁이다.
그런데 이렇게 발목을 붙잡힐 수는 없었다.
자신의 실수로 인해서 말이다.
"법이라는 것은 누구에게나 평등해야하는 법입니다. 부인."
그녀의 말을 들은 팽가련은 무미건조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마치 애원따위는 소용없다는듯이 말이다.
"처벌이 두려우면 죄를 짓지 말았어야죠. "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쿵 쿵 쿵
이내 황보유연은 바닥에 머리를 찧으며 사과를 하였다.
너무나 비굴하고 비참한 짓이었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그녀의 동정을 살 수 없을 것 같았다.
"죄송하다는 말로 모든게 해결된다면 법도 포졸도 집법당도 없었겠지요."
"부인....수십년간 오로지 후계 경쟁을 위해 달려왔습니다. 그 마음을 부인도 십분 잘알고 있지 않습니까? "
황보유연은 머리를 박은 채 애원하듯 말을 이었다.
"물론 잘알고 있지요. 저 또한 후계 경쟁을 기다려온 사람 중 하나이니까요. 하지만 제가 그대를 봐줄 이유 따윈 어디에도 없을 것 같은데요? 경쟁자를 이렇게 손쉽게 제거할 수 있는데 뭣하러 그대를 봐준다는 말입니까?"
팽가련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듯한 표정을 지으며 그녀에게 말하였다.
그녀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팽가련의 입장에서 이소란은 경쟁자에 지나지 않았다.
딸의 걸림돌인 것이다.
그런데 그 이소란을 손쉽게 무너뜨릴 방법을 뭣하러 포기한다는 말인가
"제 입으로 말하긴 그렇지만 란이는 지금 후계자들 중 가장 약소한 세력을 갖추고 있는 아이입니다. 무공도 다른 아이들에 비해 연약하고 영입한 인재 또한 무공이 아닌 란이의 친분 위주로 영입한 인재들 뿐입니다. 게다가 자본도 딸려 제대로 된 지원조차 못해주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런 연약한 아이를 견제해서 뭣하겠습니까?"
황보유연은 팽가련을 바라보며 뼈아픈 사실을 일일히 나열하기 시작하였다.
황보세가가 봉문을 한 이후 이소란에게 지원다운 지원을 제대로 해주지 못한 그녀였다.
그런 그녀가 제대로된 경쟁력을 갖출 수 있을 리 만무하였다.
"이상하군요. 그럼 황보부인이야 말로 그런 연약한 아이를 뭣하러 기를 쓰고 후계 경쟁에 내보낸다는 말입니까?"
그녀는 모르겠다는듯한 표정을 지으며 그녀에게 물었다.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가장 약소한 세력을 갖추고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그녀가 어찌 이렇게 기를 쓰고 후계 경쟁에 집착을 한다는 말인가
"도전해보는 것과 도전해보기도 전에 짓밟히는 것은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도전을 한다면 설령 실패한다해도 최선을 다했기에 후회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도전하기도 전에 기회를 박탈당한다면 제 딸은 평생 후회와 저에 대한 원망속에서 살게 될겁니다."
황보유연은 무척이나 슬픈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어찌 딸 가진 어미로서 그런 것을 내버려둘 수 있겠습니까."
"........."
"가중 처벌 하셔도 좋아요.. 남은 일생동안 평생 옥살이를 하며 지내도 좋습니다. 그러니 제발 부디 처벌을 유예해주세요........제발요."
뚝 뚝 뚝
황보유연은 눈물을 뚝 뚝 흘리며 그녀에게 애원하고 또 애원하였다.
그 모습이나 무척이나 처량하고 처연해보였다.
"............."
팽가련은 그런 황보유연을 담담한 표정을 지은 채 그저 바라만보았다.
깊은 생각에 잠긴듯 보였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그대는 잘못되었습니다. 아무리 돈이 급하다지만 적법치 못한 돈을 받았으니까요. 이는 큰 처벌을 내려도 할 말이 없는 크나큰 중죄입니다.
"............"
"본래라면 정식 재판 절차를 밟아 그대를 처벌해야 옳지만 저 또한 딸가진 어미로서 그대의 마음을 어찌 모르겠습니까."
이내 팽가련이 입을 떼며 말을 이었다.
"그렇기에 한 가지 제안을 드리려고 합니다."
".....제안이요?"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황보유연이 고개를 재빨리 들어올리며 그녀에게 물었다.
그녀의 얼굴은 눈물과 콧물이 잔뜩 범벅되어 꽤나 우스운 모양새였다.
"네에, 그렇습니다. 저 또한 어미와 딸이 서로 원망하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으니까요."
그녀는 담담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뭐든...뭐든...말씀해주세요....그 어떤 제안이든 전부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녀의 말을 들은 황보유연은 눈을 반짝거리며 말을 이었다.
"제안은 간단합니다. 받은 만큼 뱉어내시면 됩니다."
"뱉..어내다니요?"
"그때 받았던 뇌물을 오십만냥을 모두 뱉어내세요. 그럼 이번 일은 묵과하고 넘어가겠습니다."
팽가련은 담담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사실 이건 어마어마한 특혜였다.
돈만 되돌려 놓으면 죄를 묻지 않고 처벌을 면해준다는 말이 아닌가
누구나 환영할만한 일이었다.
배상금을 내라는 것도 아니고 그저 먹은 돈만 뱉어내면 되니까말이다.
".............."
하지만 그녀의 말을 들은 황보유연은 아무런 대답을 할 수 없었다.
돈에 쪼달리고 있는 그녀에게 오십만냥이라는 거금을 뱉어내라는 것은 죽으라는 것과 다름없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차 마실 돈도 없어서 싸구려 찻잎이나 사먹는 그녀가 오십만냥이라는 거금이 어디있다는 말인가
"왜 대답이 없으신가요?"
그녀가 말이없자 팽가련은 의아한듯한 표정을 지으며 그녀에게 물었다.
".......팽부인......다른 방법은 없을까요?"
황보유연은 무척이나 비굴한 표정을 지으며 팽가련에게 되물었다.
그녀의 얼굴은 수치심과 창피함으로 인해 잔뜩 붉어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