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03화 〉 504. 대자보
제남 곳곳에 벽보가 붙어져 있었다.
[지난 이십여년 간 일어난 연쇄 간살 사건의 범인은 천무맹주 이재원이다.]
벽보에 쓰여진 내용은 간단하였지만 그 파급력은 상상을 초월하였다.
안에 담겨있는 내용이 결코 묵과하고 넘어갈 수 있는 내용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연쇄 간살범의 정체가 천무맹주 이재원이라니
어찌 파급력이 없을 수 있겠는가
무림에서 칼밥을 먹는 이라면 모르는 이가 없는 이름이 바로 천하제일인 이재원이었다.
그런 이재원이 연쇄 간살 사건의 범인이라는 벽보가 붙여져있는데 어찌 파급력 작을 수 있겠는가
대다수 사람들은 말도 안된다며 코웃음을 쳤지만 소수의 사람들은 그럴지도 모른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간살범은 그 유능한 맹주가 잡지 못한 유일한 범인이었기 때문이었다.
벽보에 관한 내용은 순식간에 온 무림에 퍼져나갔다.
*********
쾅
"대체 그딴 벽보를 붙인 이들이 누구란 말입니까!"
이재원은 거대한 탁자를 부술듯 내려치며 고함을 내질렀다.
누가봐도 화가 잔뜩 나있는 모습이었다.
"용의자를 짐작할 수 없었습니다."
군사인 제갈찬은 송구한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아니 어찌 그리 많은 벽보가 붙여졌는데 용의자를 짐작할 수 없다는 말이오!"
"아무래도 인적이 드문 새벽에 조직적으로 잔뜩 붙인듯합니다. 비각의 각원들을 풀었지만 목격자도 흔적도 전혀 찾을 수 없었습니다."
"이리도 무능해서야! 일을 이따위로 하고 어찌 비각을 천무맹 최고의 첩보조직이라고 칭할 수 있겠습니까!"
"송구합니다."
제갈찬은 깊게 고개를 숙였다.
입이 열개라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다 필요없소! 당장 범인을 찾으시오! 그리고 내앞에 데려오시오! 만약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관련된 맹원은 모두 옷을 벗을 각오해야할 것이오."
이재원은 차가운 눈빛으로 제갈찬을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최선을 다하도록 하겠습니다."
"최선을 다할 뿐 아니라 무조건 하시오! 무조건이오!"
"노력해보겠습니다."
"어찌 확답을 주지 않는 것이오!"
이재원은 제갈찬이 확답을 주지 않자 인상을 와락 찌푸리며 승질을 부렸다.
예 알겠습니다. 하고 넘어가면 될 것을 어찌 저렇게 우회적으로 말한다는 말인가
"장담할 수 없는 상황에서 함부로 확신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제갈찬은 나름의 이유를 설명하였다.
군사에게 확신이라는 것은 상당히 무거운 말이었다.
명령하나하나에 수십 수백의 맹원들이 죽어나갈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 그가 확답을 쉬이 내뱉을 수 있을리 없었다.
그것도 이렇게 불가능에 가까운 일을 조사하는 일이라면 더더욱 말이다.
"쯧쯧, 천무맹의 군사라는 작자가 이렇게 겁이 많고 자신이 없어서야."
그 말을 들은 이재원은 혀를 차며 제갈찬은 탓하기 시작하였다.
나이가 들다보니 겁이 많아진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시발 어째 마음에 드는게 하나도 없네.....시발 새끼들 나이들면 꼰대에 겁쟁이가 되고 어린 새끼들은 하나같이 개념없고 참을성 없는 응석받이들 투성이니 원.'
이재원은 요즘 세태를 비난하며 쉴새없이 혀를 찼다.
마음에 드는 인간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이건 조용히 넘어갈 문제가 아니오! 내가 누구란 말이오? 천무맹주 이재원이 아니오? 나에 대한 모함은 곧 천무맹에 대한 도전이라는 말이오! 그런데 어찌 그런 불순분자를 잡아내지 못한다는 말이오!"
이재원은 핏발이 선 눈으로 제갈찬을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죄송합니다."
제갈찬은 맹주를 바라보며 사과를 하였다.
그의 의견에 동의할 수는 없으나 상급자인 그에게 사과를 하는 편이 상책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천무맹에 남아있는 모든 인력을 동원해서라도 잡아들이도록 하시오!"
이재원은 파리쫓듯 손을 휘저으며 말을 이었다.
더이상 들을 가치가 없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이었다.
".......알겠습니다."
무척이나 무례하기 짝이없는 태도였지만 제갈찬은 아랑곳하지 않고 인사를 건네었다.
그리고 곧바로 바깥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하였다.
끼이이익
탕
이내 제갈찬이 완전히 밖으로 나가버렸다.
"하아....시발."
그가 나가자 이재원은 자동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짜증이 물밀듯이 차올랐기 때문이었다.
'아니, 시발 어떻게 알았지?'
이재원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신이 간살하고 다닌 것을 들켰다는 사실에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이십년 동안 단 한 번도 들킨 적 없는 사실이었다.
대놓고 따먹고 다녀도 나이가 들어서 몰래 따먹고 다녀도
단 한번도 들킨 적이 없었다.
언제나 허술하게 수사를 하였고 언제나 용의선상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런데 왜 이제와서 이런 사실이 수면에 드러난다는 말인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시발......에반데...이거 들키는거 아니야?'
이재원은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물론 아직까지는 자신을 옹호하는 이들이 많았기에 모함으로 보는 것이 중론이었다.
하지만 만약 이 벽보를 기점으로 사건들이 다시금 파헤쳐지기 시작한다면 꼬리가 밟힐 수도 있었다.
들킬 수 있는 것이다.
범인이 자신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아오 시발 장삼을 잡았어야했는데.'
이재원은 인상을 와락 찌푸렸다.
장삼을 잡았더라면 이런 의심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일단 대자보 붙인 새끼부터 잡자.... 그래야...꼭.'
명예를 위해서
안락을 위해서는 잡아야했다.
진실을 알고 있는 범인을 말이다.
이재원의 눈빛이 살기로 번들거리기 시작하였다.
*************
강명의 집무실
쾅 쾅 쾅 쾅
누군가 집무실 문을 거칠게 두드리기 시작하였다.
"............."
강명은 답하지 않았다.
그저 엎드린 채 온몸으로 귀찮음을 표현하고 있을 뿐이었다.
쾅 쾅 쾅 쾅
강명이 답이 없자 문이 더욱더 격렬하게 두드려지기 시작하였다.
"강 대주님! 저 아찬입니다!"
".......왜에에에."
강명은 무척이나 귀찮은듯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보고 드릴 일이 있습니다."
"거기서 말해."
"직접 보셔야합니다!"
"아오......들어와."
강명은 인상을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
벌컥
이내 문이 열리고 날렵한 인상의 무인, 아찬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대주님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집무실 안으로 들어온 아찬은 다급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뭔데, 빨리 말하고 꺼져."
강명은 심드렁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팽가련과 사흘밤낮을 새며 격렬하게 그녀를 능욕하였던 그였다.
피곤함이 몰려와 상대조차 하기 싫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대대에 맹주령이 내려왔습니다."
"맹주령?"
그의 말을 들은 강명은 의아한듯 물었다.
맹주령이라니
맹주 직속 명령이 아니던가
그런게 어찌 집법당 한직인 자신의 대대에 내려졌다는 말인가
"아무래도 이틀 전 제남에 곳곳에 붙여진 벽보때문인 것 같습니다."
"뭔 일인데?"
강명은 의아한듯 그에게 물었다.
"모르십니까?"
"모르니까 묻지. 뜸들이지 말고 빨리 대답해."
강명은 인상을 와락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
"요 이틀 전에 제남 곳곳에 벽보가 붙여졌습니다."
"그런데? 붙일 수도 있지."
"그런데 그 벽보 속에는 천무맹주에 관한 모함이 적혀져있었습니다."
"모함?"
강명은 의아한듯한 표정을 지으며 그에게 되물었다.
대체 무슨 모함이길래 맹주령까지 내려 난리를 피운다는 말인가
"네에, 직접 하나 가지고 왔습니다."
아찬은 품에서 커다란 둘둘 말려있는 종이 하나를 꺼내더니 그대로 강명에게 건네었다.
강명은 그가 건넨 종이를 받아들었다.
휘리리릭
그리고 재빨리 펼쳐 내용을 확인해보았다.
대체 무슨 내용이길래 이재원이 발끈하는지 궁금증이 일었기 때문이었다.
".............."
내용을 확인한 강명은 표정을 싹 굳혔다.
그의 얼굴에는 그 어떠한 표정도 드러나지 않았다.
그저 무미건조하기만 한 것이다.
"대주님이 봐도 어이없지 않습니까? 어찌 천무맹주에게 이런 모함을 한다는 말입니까? 이미 진범은 장삼으로 밝혀진 마당에 말입니다."
강명이 표정을 굳히며 말이없자 아찬은 입을 나불대기 시작하였다.
"제가 보기엔 이걸 붙인 사람이 장삼인 것 같습니다. 진실을 밝힌 천무맹주에 대해 원한을 품고 말입니다. 세상사가 참 무섭습니다. 애미애비 전부 잃은 애새끼 키워서 거둬주었더니 스승의 얼굴에 먹칠을 하는 것은 물론 이렇게 치졸하게 모함까지하다니 말입니다."
아찬은 고개를 좌우로 절레절레 저으며 말을 이었다.
".....아찬아."
강명은 그런 아찬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네에, 대주 말씀해주십시오."
"닥치거라."
"네에?"
"내 지금 깊은 생각 중이니 닥치고 있으란 말이다.."
강명은 타는듯한 눈빛으로 아찬을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아...알겠습니다."
그 말을 들은 아찬은 사색이 된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뭔지는 모르지만 강명의 심기를 거슬리게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이럴 땐 입을 고이 다물고 있는 것이 상책이었다.
강명은 심각한 표정을 지은 채 턱을 쓰다듬었다.
갑자기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졌기 때문이었다.
간살범의 정체가 이재원이라고 쓰여있는 벽보를 보는 순간 머리를 망치를 얻어맞은듯한 충격이 받은 까닭이었다.
이상하였다.
원래라면 개소리라고 치부하고 넘길만한 일이었건만 이상하게도 머리속이 끊임없이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하였다.
그의 머릿속에 수많은 기억들이 교차되기 시작하였다.
장삼으로서의 기억과 장선우로서의 기억 모두 말이다.
그리고 이내 머리속에 조각난 퍼즐들이 하나둘씩 맞춰진듯한 느낌이 들었다.
생각해보면 간살 사건은 천무맹 유일한 미제 사건이었다.
세상의 정의를 실현하는 무림 최고의 집단이 천무맹이 해결하지 못한 미제 사건말이다.
사람들은 그런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그들을 탓하지 않았다.
최고의 정보력과 인력을 가진 그들이 해결하지 못한 일이라면 다른 어떤 누구도 해결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만약 해결하지 못한게 아니라면 안한 것이라면?'
강명은 강렬한 의심이 들었다.
만약 이재원이 범인이라면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의심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맹주이기에 용의선상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맹주이기에 사건을 무마시킬 수 있었다.
범인이 사라지니 수사는 자연스럽게 난관에 봉착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고 결국 미제 사건이 되고만 것이다.
설득력이 있었다.
충분히 설득력이 있었다.
'그렇다면 설마....내게 누명을 씌운 이유가......?'
오싹
순간 강명은 몸을 흠칫하고 떨기 시작하였다.
끝없는 인간의 악의가 온몸에서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악의惡意
그저 악의로밖에 볼 수 없는 추론이었다.
'아니야....그럴리 없어...'
강명은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말도 안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떡협지 주인공 답게 개초딩 성격에 병신에 중2병에 죄책감 없는 쓰레기긴 했지만 연쇄 간살을 저지를만한 놈은 아니었다.
그저 배움이 모자라 전후구분을 못하며 살 뿐이었다.
나름 무협지의 주인공이 아니던가
그런데 어찌 그런 주인공이 타락하여 끔찍한 간살을 일삼는다는 말인가
이재원은 찌질이였다.
그럴 용기조차 없을 것이 분명하였다.
분명 그럴 것이다.
'그럴진대......왜 이렇게 마음 한구석이 불편하지?'
애써 부정하였지만 가슴 한켠에 자리잡은 의혹은 이내 뿌리까지 내려버렸다.
쉽사리 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 것이다.
'안되겠어...팽가련 조련을 최대한 빨리 마친다.'
강명은 눈을 반짝였다.
아무래도 팽가련에 대한 조련을 최대한 빨리 마져야할듯 싶었기 때문이었다.
모든 일에 진실을 밝히기 위해서 말이다.
강명의 눈빛이 반짝거리기 시작하였다.
*************
"그러니까 벽보를 붙인 범인을 찾아오라고 했다 이거지?"
이내 생각을 정리한 강명은 아찬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렇습니다. 놀고 있는 대대는 전부 투입되었습니다."
"염병, 운수 한 번 더럽게 없구만."
강명은 거칠게 머리를 벅벅 긁으며 말을 이었다.
누가봐도 귀찮음이 잔뜩 묻어나 있는 태도였다.
"어쩔 수 없지 않습니까, 집법당에서 가장 한가한 놈들이 저희니까요."
"그런 건 또 어떻게 알았대?"
"제갈찬 군사께서는 모르는게 없어서 만통지라고 불리우지 않습니까?"
"이래서 똑똑한 애들이 싫어."
강명은 고개를 좌우로 절레절레 저으며 말을 이었다.
"아찬."
강명은 아찬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뒤적 뒤적
"옛다"
그리고는 품안을 뒤적거리더니 이내 은자 몇개를 꺼낸 뒤 그에게 건네었다.
덥석
"이게 뭡니까?"
은자를 받아든 아찬은 놀란듯 그에게 물었다.
이게 무슨 은자란 말인가
"그거 가지고 애들이랑 대충 시간 때우다 돌아와."
"수색은요?"
"그거 어차피 못 잡아, 관행상 보여주기식이라 이거지."
"하지만...."
"얌마 날고 기는 비각놈들도 못잡아낸 걸 우리가 무슨 수로 잡냐? 대충 놀아라."
"그러다...들키면.."
"정보 취득을 위한 잠복수사라고 하면돼."
"그 말을 믿을까요?"
"안믿으면 지들이 어떻게 하려고? 딱히 구체적인 명령이 내려온건 아니잖아. 그냥 대충 시늉만 하고 놀다와."
"대주님은요?"
"난 따로 할 일이 있다."
강명은 담담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무슨 일인데요?"
"아주 아주 재밌는 일이지."
강명은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아찬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의문 어린 표정을 지었다.
대주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통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