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협지 안으로 들어와버렸다-472화 (473/1,419)

〈 472화 〉 473.멸맹의 횃불

"후학이 선배님들께 인사를 올립니다."

자소령은 깊게 고개를 숙이며 장내에 있는 이들에게 정중히 인사를 하였다.

"자소령이라고합니다."

자소령은 고개를 천천히 들어올리며 입을 떼었다.

"뭐라?!"

"자소령?!"

"어찌 네가!?"

그러자 장내는 경악성이 터져나오기 시작하였다.

전혀 예상치 못한 인물이 모습을 드러내었기 때문이었다.

자소령이 모습을 드러내다니?

자소령이라면 몇 달 전 천무맹의 기밀 정보를 들고 마교로 도주했다고 알려진 마교의 세작이 아니던가

어찌 그런 그녀가 천무맹이 위치하고 있는 제남에 모습을 드러냈다는 말인가

어불성설이었다.

"어째서 마교의 세작인 네가!"

윤강진은 깜짝 놀라며 그녀에게 물었다.

"금접문주님."

그의 물음에 자소령은 담담한 어조로 그를 불렀다.

"제가 세작이라고 생각하시나요?"

그녀는 의문이 담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당연하다!"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천무맹에서 발표를........."

말을 잇던 윤강진은 말끝을 흐렸다.

"증거가 있나요?"

"당연하다!"

증거라면 차고 넘쳤다.

수 많은 증인들이 있는 것이다.

"무슨 증거가 있던가요?"

"네가 세작질을 했다고 증언하던 증인들이 있었다."

"어떤 증인들이죠?"

".......그건 알 수 없다. 그저 증인 보호를 위해 정체를 철저히 숨겼으니까."

"결국 실체를 본 적이 없다는거네요."

"..........그렇다."

그녀의 말을 들은 윤강진은 무겁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녀의 말이 틀리지 않은 까닭이었다.

"이상하다는 생각 안드세요?"

"......뭐가 말이더냐."

"증언들은 존재하지만 증인들은 그 실체가 모호하니 말이에요."

"............"

윤강진은 입을 꾹 다물고 침묵을 하였다.

틀린 말이 아니었다.

생각해보면 지금껏 수많은 사건들이 있었지만 증인을 본 적이 없는 그였다.

증인 보호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증언만 존재하였을 뿐 증인은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건 증인을 보호해야한다는 맹법이 있기 때문이 아니더냐!"

그때 잠자코 말을 경청하고 있던 송경이 끼어들며 말을 이었다.

"그렇죠, 그런 맹법이 존재하지요. 저도 나쁜 법이라고는 생각지 않아요. 증인이 공식선상에 모습을 드러낼 경우 보복 범죄의 희생양이 될 수도 있으니까요."

그녀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입을 열었다.

"하지만 좋은 법이라고도 할 수 없어요."

자소령은 차가운 눈빛을 반짝거리며 입을 열었다.

"권력자에 의해 마음대로 사건이 조작될 수 있으니까요."

"뭐라!?"

송경은 당혹스러운듯 그녀에게 되물었다.

말의 저의를 묻는듯 하였다.

"증인을 내세울 필요가 없으니 조작된 증언을 얼마든지 만들어낼 수 있을 겁니다. 편의에 따라서 말입니다."

"그...그런!"

"그리고 저 또한 그런 조작된 증언의 희생자가 되었지요."

자소령은 슬픈 눈빛으로 좌중을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평생토록 봉황당에 들어가기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없는 재능을 극복하기 위해 아침에 일어나 잠이 들 때까지 검을 휘둘렀습니다.

아버지께서는 부족한 살림임에도 불구하고 한낱 계집의 소원을 들어주시겠다면서 영약마저 손수 구해와 달여먹이곤 하였죠. 그 정성 덕분일까요? 세 번의 낙방을 한 이후 저는 봉황당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꿈을 이룰 수 있게 된겁니다. "

자소령은 회고하듯 자신의 일생을 읊조리기 시작하였다.

무척이나 서글픈듯이 말이다.

"그런데 그 꿈은 얼마 지나지 않아 꺽이고 말았습니다. 끔찍한 이재원에 의해서 말입니다. 그는 저를 납치했습니다. 천무맹 깊은 곳에 위치한 축축하고 어두운 지하실에 말이죠. 그곳에서 고이 간직하던 순결을 잃어버렸고 짐승만도 못한 취급을 받으며 그에게 범해졌습니다. 쉴새없이....쉴새없이 말이죠......저는 아프다고 애원했지만 그는 듣지 않았어요..오히려 좀더 비명을 질러달라며......좀더 고통에 찬 울음을 터트려달라며 부탁했지요...."

부르르

자소령은 그때의 끔찍한 기억이 떠오른 것인지 온몸을 부르르 떨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이내 용기를 내어 입을 떼었다.

이들에게

모든 피해자들에게

진실을 알리겠다는 일념하에 말이다.

"그는.....제게 말했어요....요즘 애들은.....약하다고....좀만 강간 당해도 정신을 놔버린다고.......요즘은 수급이 어려우니까...한 달만 더 사용하다 버려야겠다고 말이에요.....절 여자로..아니..인간으로도 보지 않았던 거에요. 필요에 따라 언제든 죽일 수 있는 그런....도구로 봤던거에요.......아마 여러분들의 연인, 딸, 아내분들도 같은 취급을 받았을 거에요...그저 도구로만...성욕을 위한 도구로 취급했던 거에요.....우리는 사람인데..."

주르르륵

자소령의 고운 뺨에 투명한 실선이 그어지기 시작하였다.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이었다.

인간 이하 취급을 받았던 설움과 모욕감 그리고 치욕감이 가슴 깊은 곳에서 차오른 까닭이었다.

"................."

"................"

그녀의 말을 들은 이들은 하나같이 침중한 표정을 지었다.

분노를 터트리는 이도 적지 않았다.

화가 치밀어올랐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연인이 가족이 저렇게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았다는 사실에 말이다.

"그렇게....성노리개로서 산지...일주일이 되던 날.....저는 운좋게....그곳을 탈출할 수 있었어요....뜻하지 않는 조력자가 절 도운 덕분이지요......집으로 돌아갈 심산이었어요. 평생 꿈꿔오던 봉황당 입당도 여협으로서 이름을 날리겠다는 포부도 모두 잊은 채 그저 집에 돌아가 부모님과 평생을 살아가려고 했어요. 하지만 제가 탈출을 한 그날, 전 마교의 세작이 되었어요.......천무맹의 기밀 문서를 들고 도주했다는 누명을 씌운 채 말이에요....."

부들 부들

자소령은 온몸을 부들부들떨며 말을 이었다.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차오른 탓이었다.

"그리고 제가 마교세작으로 밝혀진 다음날 제 가문은 멸문당했습니다. 자랑스러운 천무맹주 이재원의 손에 의해서 말이에요."

그녀는 담담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

"................"

그리고 그런 그녀의 태도는 좌중에 있는 이들에게 더할 나위없이 심각함을 선사해주었다.

거짓말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생생하고 참혹한 이야기가 가슴 깊은 곳을 막힘없이 후벼팠기 때문이었다.

슬펐다.

가슴이 절로 아려왔다.

"...너는....어떻게 그곳을 탈출할 수 있던 것이냐.."

송경은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간신히 입을 떼어내었다.

".....조력자가 있었어요......그분도 이재원에 의해 소중한 이를 잃은 피해자라고 하더군요."

그녀는 담담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

"..........."

이내 그녀의 말을 끝으로 방안에는 침묵만이 흐르기 시작하였다.

누구 하나 입을 여는 이가 없었던 탓이었다.

모든 이들이 깊은 고심에 빠진 탓이었다.

혼란스러운 머리속을 정리하기 위해서 말이다.

그렇게 얼마나 오랜 시간이 흘렀을까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갑자기 잠자코 있던 검제 윤제균이 박장대소를 터트렸다.

"크하하하하하하하하하"

그는 웃었다.

웃고 또 웃었다.

기쁜 듯이

너무나 유쾌하다는듯이 말이다.

좌중들은 그를 바라보며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어찌 이런 상황에서 저렇게 웃음을 터트릴 수 있다는 말인가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하하하하 그런거구만.. 그랬었어....하하하하하"

그는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드르륵

벌떡

이내 그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벅 저벅

그리고 걸음을 옮기기 시작하였다.

"아니, 선배님 어디로 가시는 것입니까?"

갑작스러운 그의 행보에 송경은 놀란듯 되물었다.

갑자기 어디를 가는 것이란 말인가

"뻔하지 않은가?"

윤제겸을 당연한걸 묻냐는듯 그에게 말하였다.

"이재원을 죽이러 간다네."

그는 담담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네에에!??!?"

그리고 그의 말을 들은 송경은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은 채 비명성은 내질렀다.

이재원을 죽인다니?

대체 그게 무슨 소리란 말인가

"하나 뿐인 귀한 손녀를 죽인 진범이 밝혀졌는데 어찌 시간을 낭비한다는 말인가?"

"하지만 선배님! 아직 확실치 않은 것이 아닙니까!"

"자네는 바보인가?"

윤제겸은 차가운 표정을 지은 채 말을 이었다.

"모든 것이 명백하거늘 어찌 그렇게 맹주를 싸고도는가? 정신 차리게나. 그자는 자네의 딸을 간살하고 시체조차 온전치 못하게 만든 악귀일세."

윤제겸은 살기로 번들거리는 눈빛을 빛내며 말을 이었다.

"............정녕"

그 말을 들은 송경은 천천히 입을 떼어내었다.

"그렇게...생각하시는 겁니까?"

"반대로 자네에게 묻겠네. 정녕 아니라고 여기는가?"

"............"

윤제겸의 물음에 송경은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물었다.

정녕 범인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지

아니면 현실을 부정하고 있는 것 뿐인지 말이다.

이내 송경은 몸을 일으켰다.

"제가 바보였군요."

그리고 분노가 서려있는 눈빛을 반짝이며 말을 이었다.

"원수도 눈앞에서 못 알아봤으니 말입니다."

벌떡

벌떡

벌떡

송경의 말을 끝으로 앉아있던 이들이 하나둘씩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기 시작하였다.

그들의 눈에는 깊은 분노가 가득 자리잡고 있었다.

화가 난 것이다.

가증스럽기 그지없는 이재원에게 말이다.

그들은 울분을 토해내지 않았다.

눈물은 이미 장례식에서 흘릴만큼 흘렸기 때문이었다.

그저 피의 복수를 이어갈 심산이었다.

이재원의 모든 것을 빼앗기 위해서 말이다.

사람들은 윤제겸을 필두로 철문 쪽으로 향하기 시작하였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자소령의 아버지, 자일광이 그들을 가로막았다.

"비키게나."

윤제겸은 담담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지금 가시면 개죽음 밖에 되지 않습니다."

자일광은 굳은 표정을 지은 채 말을 이었다.

"상관없다네. 나는 그저 그 개만도 못한 자식에게 내 모든 것을 내뿜을 심산이라네. 죽음 따윈 두렵지 않아."

윤제겸은 차가운 분노를 터트리며 조곤히 말을 이었다.

십오년이나 지난 일이지만 그는 아직도 그때의 일이 생생히 기억이 났다.

그 날은 무척이나 비가 많이 오는 날이었다.

빗소리를 들으면 흥취가 절로 오른다며 비 오는 날을 좋아했던 손녀는 비가 오는 날. 변사체로 발견되었다.

제남제일미라고 불리울 정도로 고왔던 얼굴에는 여기저기 폭행의 흔적이 역력하였고 양쪽 가슴은 잘렸으며 여성기는 너무 심하게 훼손되어 형체조차 알 수 없을 정도로 짓뭉개져 있던 모습

그날 윤제겸은 태어나 처음으로 서럽게 울음을 터트렸다.

아들내외가 사고로 실족사를 했을 때도 울지 않던 그가

강철같은 심장을 가졌다고 칭송받으며 수많은 무림인들의 존경을 받던 그가

울음을 터트렸다.

어린아이 처럼 하염없이 말이다.

사랑하는 손녀를 지켜주지 못했다는 자책감이

사고로 목숨을 잃은 아들내외가 남긴 보옥을 지켜주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마지막 남은 혈육조차 잃어버리고 말았다는 상실감에

울고 또 울었다.

그리고 다짐하였다.

기필코 범인을 잡아 죽이고 말겠다고 말이다.

그런데 이렇게 범인이 드러나고 말았다.

그것도 무척이나 명백하게 말이다.

어찌 참을 수 있겠는가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겠는가

천갈래 만갈래 찢어죽여도 시원치 않을 놈을 어찌 가만히 냅두라는 말인가

으드득

"비키시게나...지금..상태론 도저히..제어가 안된다네."

윤제겸은 이를 으득 갈며 간신히 말을 내뱉었다.

온몸을 휘감은 분노의 감정이 도저히 제어가 안되었기 때문이었다.

"대국적으로 보셔야합니다! 지금 단체로 몰려가봤자! 천무맹은 선배님을 비롯한 모든 이들을 마교와 결탁한 반동분자로 볼 것이 분명합니다!"

자일광은 분노에 찬 윤제겸을 바라보며 열변을 말하였다.

윤제겸을 바라보며 말하긴 하였지만 실상 분노를 터트리고 있는 모두에게 하는 경고였다.

지금 이런식으로 복수를 택하는 것은 너무나 무모한 짓이었다.

이들이 전부 달려든다해도 이재원의 털끝하나 건드릴 수 없는 것은 너무나 자명한 사실이었다.

개죽음밖에 되지 않는 것이다.

"그럼 이대로 참으라는 것이냐!"

윤제겸은 분노에 찬 고함을 내질렀다.

머리끝까지 난 화가 폭발해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도 안다.

지금 이재원에게 가봤자 개죽음밖에 안된다는 것을

그도 안다.

그렇게 죽는다면 마교의 첩자로서 불명예스럽게 죽는다는 것을 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걸음을 멈출 수 있었다.

가슴 속 깊은 곳에 태양보다 뜨거운 분노가 자리잡고 있는데 어찌 이 분노를 조용히 삭히라는 말인가

무려 십 오년동안 숙성하고 또 숙성한 거대한 분노였다.

쉽사리 삭혀질리가 없었다.

"참으라는 게 아닙니다! 더욱더 철저한 복수를 위해 유예하는 것입니다."

자일광은 담담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철저한 복수?"

그의 말을 들은 윤제겸은 순간 멈칫하였다.

철저한 복수라는 말이 그를 붙잡은 까닭이었다.

"그렇습니다. 그는 벌을 받아야합니다. 우리가 느꼈던 아픔, 상실감, 고통, 분노를 모두 느껴야 한다는 말입니다!"

자일광은 핏발이 선 눈을 반짝이며 말을 이었다.

"어떻게...말인가"

이내 윤제겸은 흥분을 살짝 가라앉힌 채 그에게 물었다.

"제게 좋은 방법이 있습니다. 이재원을 철저하게 몰락시킬 수 있는 방법이 말입니다."

자일광은 눈을 반짝이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 방법을 위해서는 여러분 모두의 협조가 필요합니다."

자일광은 좌중을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모두 제게 협조 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협조를 구하는 자일광의 눈에는 복수심이 가득 서려있었다.

모든 것을 앗아간 이재원의 몰락을 바라는 처절한 복수심이 말이다.

그 복수심에 동조가 되어버린 것일까

장내에 있던 이들은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일광과 마찬가지로 광기 어린 복수심을 불태우면서 말이다.

이재원이 모르는 사이 멸맹의 횃불이 불타기 시작하였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