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30화 〉 431.본부인은 나예요.
모락 모락
그릇 안에서 모락모락 열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푸욱
강하윤은 그릇 속 내용물을 숟가락으로 퍼올렸다.
후우 후우
그리고는 입김을 몇 번 분 후 누워있는 백호당주를 향해 숟가락을 내밀었다.
"드시지요."
"입맛..없소."
그녀의 권유에 백호당주 갈지천은 씁쓸한 어조로 답을 하였다.
"뭐든 먹어야 힘이 나는게 아니겠습니까?"
"생각이 없구려."
"벌써 사흘째입니다. 계속 굶으시면 목숨이 위험할 수 있어요."
"이미 무인으로서 끝난 몸이 아니오? 죽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구려."
갈지천은 무척이나 허무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는 허무하였다.
모든 것을 잃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천무맹을 대표하는 무력단체 중 하나인 백호당의 당주라는 직함도
검왕이라고 불리우던 명예도
화경 상경에 이르렀던 무공까지 전부 말이다.
그런 상황에서 밥같은 것이 목구녕에 넘어갈 리 없던 것이다.
살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그저 죽고만 싶었다.
무인으로 살 수 없다니 그런 삶은 끔찍하였다.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무인으로서 끝났다니요. 아직 확실치 않은 것이 아닙니까?"
강하윤은 타이르듯 말을 이었다.
갈지천이 이대로 삶의 의지를 잃어가는 모습을 보니 안타까움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온몸에 뼈라는 뼈는 다 부숴졌소. 거기다 내장은 진탕이 되어 쉴새없이 각혈이 나오고 있구려. 이런 내가 어찌 무인으로서의 삶을 연명할 수 있겠소? "
"단전은 멀쩡하지 않습니까?"
"신체가 엉망인데 단전이 무슨 소용이겠소? 나는 지금 불구가 되도 이상하지 않을 상태란 말이오!"
"괜찮습니다. 환골탈태라는 것도 기대해볼만 하지 않습니까?"
"나는 이미 환골탈태를 끝마친 몸이오! 그런데 어찌 다시금 환골탈태를 한다는 말이오!"
갈지천은 발끈하며 언성을 높였다.
이미 자신은 환골탈태를 끝마친 몸이었다.
그런데 다시금 환골탈태를 꿈꾼다니 어불성설이었다.
"너무 부정적으로 생각지 마세요. 이런 말도 있잖아요? 내일의 해가 뜬다."
"
"나가시오!"
강하윤의 말을 들은 갈지천은 고함을 내질렀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녀가 자신을 놀린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죽을 먹어야.."
"딴 사람을 불러주시오! 당신이 주는 것은 먹지 않겠소! 애초에 가해자에게 피해자를 돌봐주라고 하는 것이 말이 된다고 생각하오!?"
"하지만 맹주의 명입니다."
"언제부터 명을 그리도 잘지켰소? 체포 명령도 이렇게 잘지키지 그랬소?"
강하윤의 말을 들은 갈지천은 비꼬듯이 말을 이었다.
명령을 그리도 잘지키는 사람이 어째서 체포 명령에만 기를 쓰고 반발한다는 말인가
"그거야 집법당에서 모함을 하는게 분명 했으니까......"
"집법당은 맹주로부터 사법기관임을 임명받은 곳이오! 모든 수사와 체포를 맹주의 이름을 등에 업고 진행한다는 말이오! 집법당의 체포에 불복한다는 것은 맹주의 명을 어기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말이오!"
갈지천은 핏발이 잔뜩 선 눈빛으로 강하윤을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나가시오! 그대가 주는 것은 그 어떤 것도 먹지 않겠소! 내가 굶어 죽는 꼴을 보고 싶다면 계속 들어오시구려!"
"..........알겠습니다."
갈지천의 고함에 강하윤은 고개를 푹 숙이고 수긍하였다.
이대로 가다간 그가 정말 굶어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사람을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강하윤은 시무룩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리고는 천천히 바깥으로 이동을 하였다.
"다시는! 다시는! 찾아오지마시오!"
그녀가 물러나자 갈지천은 방안이 떠나가라 고함을 내질렀다.
그의 목소리에는 분노와 설움이 가득 차 있었다.
**************
"하아."
방안으로 들어온 강하윤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갈지천의 원한 서린 외침이 머리에 떠나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게 아닌데.`
그녀는 죄책감이 물밀듯이 치솟는 것을 느꼈다.
자신의 손속으로 인해 갈지천이 반병신이 되었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저 자리에 팽가련이 누워있어야 했건만.`
그녀는 생각하였다.
갈지천 대신 팽가련이 저 자리에 누워있었다면 이만큼이나 죄책감이 들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말이다.
"하아"
그녀는 다시금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쿵 쿵 쿵 쿵
그때 누군가 방문을 두드리기 시작하였다.
"누군가요?"
강하윤은 의문에 찬 표정을 지은 채 입을 열었다.
"당진입니다."
"들어오세요."
끼이이익
그녀의 허락이 떨어지자 이내 문이 열리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문 앞에 녹색 바탕의 장삼을 입고 있는 무사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당진설이 붙여준 호위무사 당진이었다.
"무슨 일인가요?"
강하윤은 착잡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당 부인께서 봉황당주님 앞으로 서신을 하나 보내었습니다."
당진은 서신을 들어올리며 입을 열었다.
"서신이요?"
당진의 말을 들은 강하윤은 의문에 어린 표정을 지었다.
일절 교류가 없던 그녀였다.
그런 그녀가 별안간 서신을 보낸다고 하니 의문이 들었다.
"무슨 내용이신가요?"
"읽어보지는 않았습니다. 서신봉투에 본인외엔 개봉금지라고 쓰여있더군요."
당진은 담담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그리고는 그녀에게 서신을 내밀었다.
"그래요? 알겠어요. 서신 가져다줘서 고마워요."
서신을 받아든 강하윤은 그에게 고마움을 표하였다.
"별말씀을요."
그녀의 말을 들은 당진은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천천히 방문 밖으로 나가버렸다.
그 모습을 얌전히 지켜보던 강하윤은 그가 사라지자 이내 손에 들린 서신를 살펴보았다.
과연 무슨 내용이 쓰여있을 지 궁금증이 일었다.
촤르르르
이내 당진설은 서신을 펴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내용을 정독하기 시작하였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부들 부들 부들
이내 강하윤은 인상을 와락 찌푸리더니 서신을 들고 있는 손을 부들 부들 떨리기 시작하였다.
도저히 말도 안 되는 소리가 적혀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진설....네가...기어이..미쳤구나.."
그녀는 잔뜩 상기된 얼굴로 말을 내뱉었다.
서신 속 내용은 간단하였다.
서신에는 신룡을 죽이라는 명령이 적혀져 있었다.
차기 천하제일인이라고 알려진 신룡 장선우를 말이다.
그리고 만약 성공적으로 장선우를 처리해준다면 모든 빚은 없던 것으로 해주겠다는 뒷말도 쓰여져있었다.
부들 부들
강하윤은 온몸을 부들부들 떨기 시작하였다.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화가 치밀어올랐기 때문이었다.
자신이 누구란 말인가
협을 숭상하고 협을 위해 행한다고 전해지는 천무맹의 당주가 아니던가
평생토록 하늘아래 부끄러움 한점 없이 살아왔다고 자부하는 자신이 아니던가
그런데 어찌 그런 자신에게 암살이라는 천인공노할 짓을 시킨다는 말인가
그것도 경쟁자를 제거한다는 하찮은 이유로 말이다.
이해 할 수가 없었다.
아니 이해 할 수 있을리가 없었다.
어찌 천무맹의 안주인이라는 여자가
정종무공을 수련한 무인이
이리도 살인을 가벼이 여길 수있다는 말인가
"할 수 있을리 없잖아!"
강하윤은 손에 힘을 주었다.
개같은 서신을 그대로 찢어버릴 심산이었다.
어릴적 스승님은 말씀하셨다.
협俠이 아니면 보지도 않고 듣지도 말고 행하지도 말라고 말이다.
이건 협俠이 아니었다.
"으윽!"
하지만 찢을 수가 없었다.
정말 미약한 힘만 흘려도 찢을 수 있는 종이에 불과하였지만 찢을 수가 없었다.
그녀의 손을 목숨 빚이라는 마음의 짐이 꽉 붙들고 놔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으으윽!"
마음을 다잡고 다시금 찢으려고 해도 소용없었다.
마음의 짐이라는 녀석이 너무나 강력했기 때문이었다.
"젠장할!"
쾅
이내 강하윤은 서신을 탁자에 그대로 내려쳐 버렸다.
결국 찢지 못한 것이다.
`나보고 어쩌라는 거야.`
강하윤은 우울한 얼굴로 서신을 바라보았다.
평소라면 이딴 제안 따위는 가뿐히 거절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암살을 계획한 당진설을 포박하여 죄명을 물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녀는 당진설에게 목숨의 빚을 진 상태였다.
팽가련의 마수로 부터 보호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제남을 떠나온 지 벌써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흘렀지만 어떠한 목숨의 위협도 받지 않은 그녀였다.
그런 상황에서 당진설의 제안을 마냥 거절할 수는 없는 것이다.
"하아"
그녀는 다시금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눈을 감고는 고뇌에 빠졌다.
신념과 의리 중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에 대해서 말이다.
.
.
.
.
.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강하윤은 인상을 와락 찌푸리며 눈을 떴다.
도저히 선택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신념과 의리
무엇하나 포기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고민하고 또 고민하였다.
어떤 식으로 처신해야할지에 대해서 말이다.
밤이 깊어갈수록 강하윤의 고민도 깊어만 갔다.
****************
"흥흐응"
선우는 콧노래를 부르며 짐을 싸기 시작하였다.
강하윤을 만나러 갈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기분이 좋아졌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좋아요?"
그때 옆에서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를 들은 선우는 고개를 천천히 옆으로 돌렸다.
그곳에는 백의를 입은 아름다운 여인이 웃고 있었다.
정실부인 옥령이었다.
".....오랜만에 외출이니까."
그녀의 말을 들은 선우는 변명하듯 입을 열었다.
자신이 너무 좋아한티를 낸게 아닐까하고 아차하는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요? 선우가 그렇게 외출을 좋아하시는 줄은 몰랐네요?"
선우의 변명을 들은 옥령은 슬며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움찔
그 미소를 마주한 선우는 몸을 움찔하고 떨었다.
그녀가 미소를 짓고 있긴 하였지만 왠지 모를 한기가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하하하하하....나라고 집안에만 있는걸 좋아하는건 아니라구."
선우는 어색한 웃음을 흘리며 말하였다.
물론 거짓말이었다.
이재원으로부터 쉼 없이 도망 다녔던 기억 때문인지
밖으로 나다니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선우였다.
"그런가요."
옥령은 맑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천천히 손을 뻗어 선우가 싸놓은 짐을 만지작거렸다.
"옷이 상당히 많네요? 고작 사흘가는데."
"그...공식적인 자리잖아? 이왕이면 단벌로 가는 것보단 여러벌 있는게 낫지 않겠어? 게다가 지금 호위를 하다보면 옷이 찢어질 수도 있으니까...."
"이 향낭은 뭐죠? 원래 이런거 안 챙기셨잖아요?"
"그..러게? 그 향낭은 뭐지?"
그녀의 물음에 선우는 시치미를 떼며 입을 열었다.
"요랑이가 장난으로 넣어놨나?"
"선우."
옥령은 담담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제가 반한 장선우라는 남자는 변명으로 일관하지 않았어요."
그녀는 짐짓 엄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
그녀의 말을 들은 선우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녀가 어설픈 변명따위는 전부 다 꿰뚫어보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괜스레 부끄러움이 올라왔다.
남자답게 사실대로 말하면 될 것을 뭘 그리 변명을 한다는 말인가
"미안해."
선우는 담담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사실...강하윤은 내가 동경하던 사람이거든.....그래서 과하게 멋을 부린 것 같아."
선우는 그녀를 바라보며 이실직고를 하였다.
이렇게 된이상 솔직히 털어놓는게 낫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괜찮아요. 동경하는 이에게 잘 보이고 싶은 건 당연한 거니까요."
선우가 사실대로 말하자 옥령은 살짝 미소를 흘리며 입을 열었다.
"하지만 선우 기억하세요."
옥령은 진지하기 그지없는 눈빛으로 선우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본부인은 나예요. 여자를 늘리는 건 상관치 않는데 그 사실을 인지시키지 않으면 화낼 거예요."
그는 짐짓 엄한 표정으로 선우에게 경고하듯 말하였다.
"옥령, 진짜 그런 게 아니야. 나는 강하윤을 어떻게 해볼 생각이 없어."
선우는 억울하다는듯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선우는 억울하였다.
그저 가장 애착 갔던 그녀에게 호감을 사고 싶었을 뿐
그녀를 자빠뜨린다거나 유혹하고 싶은 생각 따위는 추호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안그래도 어마어마하게 많은 여인들이었다.
어찌 여기서 여인을 더 늘린다는 말인가?
게다가 지금 자신에게는 주소양이라는 언제 터질지 모를 폭탄같은 여인이 있지 않은가?
그런 상황에서 또다른 폭탄을 끌어들이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죄송하지만 선우의 화려한 여성편력을 보면 전혀 신뢰가 가지 않아요."
옥령은 담담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1년도 안되는 사이에 몇 명을 늘리신 거죠?"
"............."
그녀의 말을 들은 선우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녀의 말이 틀리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미안해."
선우는 옥령에게 사과를 하였다.
사과를 하는 것외엔 어떠한 선택지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사과를 들으려고 말한게 아니에요. 선우를 탓하려고한 것은 더더욱 아니고요. 이제는 그냥 그러려니해요. 애초에 선우만의 잘못이 아닌 것도 같으니까요."
"내 잘못이 아니라고?"
"네, 제 생각에는 초자연적인 미지의 힘이 자꾸만 선우가 여자와 엮이도록 조정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초자연적인 미지의 힘이?"
"네, 마치 운명을 비트는 것처럼 말이에요."
".......운명?"
"그렇지 않고서야 평생을 가도 보기 힘들 정도의 절세미녀들이 어찌 선우가 가는 곳마다 존재할 수 있겠어요?"
그녀의 말을 들은 선우는 이내 멍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껏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사실이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