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06화 〉 407.은원을 청산하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어느새 울음을 그친 이예설은 곧바로 고개를 푹 숙였다.
장선우 앞에서 어린아이처럼 울었다는 사실이 상기되었기 때문이었다.
화악
'내가 대체 무슨 짓을!'
이내 이예설은 얼굴을 능금처럼 붉혔다.
스스로 생각해도 꼴사납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미쳤어! 미쳤어.'
이예설은 속으로 몇 번이고 자책을 하기 시작하였다.
자신이 누구란 말인가
천봉이라고 불리우며 무림 재녀로서 이름을 날리고 있는 여인이 아니던가
그런 자신이 어린 아이처럼 울음을 터트렸다.
그것도 어미에게 혼나서 말이다.
어찌 꼴사납지가 않을 수 있겠는가
"야."
그때 귓가에 무척이나 거슬리는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쪽팔리지?"
얄미움이 가득 묻어나 있는 목소리가 말이다.
이예설은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도끼눈으로 선우를 노려보았다.
조롱기 어린 그의 말을 들으니 울화통이 터져나왔기 때문이었다.
"괜찮아, 원래 어렸을 땐 살짝 쪽팔려도 돼, 철없는 걸로 포장하면 되거든."
선우는 위로인지 조롱인지 모를 말을 지껄이며 미소를 지었다.
으득
선우의 말을 들은 이예설은 이를 으득하고 갈았다.
저 얄미운 주둥아리를 후려치고 싶다는 생각이 치솟았기 때문이었다.
"뭐, 어쨌든 당사자도 멀쩡해진 것 같으니까 일 얘기를 하자고."
선우는 그런 이예설의 시선을 은근 즐기며 입을 열었다.
"네에~, 그러는게 좋을 것 같아요."
선우의 말을 들은 주소양은 간드러진 목소리로 그에게 답을 하였다.
이어 그녀의 입가에는 미소가 지어지기 시작하였다.
그런 어미의 모습을 본 이예설은 벙찐 표정을 지었다.
주소양의 태도가 이해가 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분명 장선우에게 그간의 은원을 청산하겠다고 말을 하긴 하였다.
후계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 말이다.
하지만 어찌 사람 감정이 말처럼 쉽게 바뀔 수 있겠는가
일시적인 동맹일 뿐
장선우 대한 모든 악감정은 날려버릴수 있을 리 없는 것이다.
그런데 저 태도 변화는 무엇이란 말인가
주소양의 태도는 악감정이 남아있는 태도가 아니었다.
마치 정인을 대하는 것처럼 부드럽고 따뜻했던 것이다.
간드러진 음성에 환하게 지어진 미소 거기다 살짝 홍조가 올라온 얼굴색까지
혼란스러웠다.
어머니의 갑작스러운 태도 변화가 너무나 혼란스러웠다.
'대체 어머니한테 무슨 짓을 한거야!'
이예설은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선우를 노려보았다.
그가 무슨 술수를 부린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뭘봐."
그런 이예설의 시선을 눈치 챈 탓일까
선우는 퉁명스럽게 말을 내뱉었다.
"......아니에요."
선우의 퉁명스러운 대답에 이예설은 시선을 슬며시 내리며 답을 하였다.
의심이 무럭무럭 차오르긴 했지만 마땅히 딴지를 걸 건덕지가 없었다.
어미의 태도가 변화했다고 그에게 따질 수 있다는 말인가
아마 다른 이가 보았다면 질투하는 걸로 밖에 느끼지 못할 것이다.
"그럼 다같이 제안을 검토하자구."
선우는 씨익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일단 이예설 나는 네 제안에 대한 사부님의 허락이 떨어졌다."
선우는 담담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정말요?"
이예설은 반색하며 말을 받았다.
기회를 잡아 제안을 하긴 했지만 반신반의하고 있었던 그녀였다.
당가주가 실리보다 혈족을 택할 경우
완전히 도루묵이 될 제안이었기 때문이었다.
선우는 이번 후계 경쟁에서 무척이나 독보적인 위치에 서 있는 존재였다.
동년배 중 최고라 일컬어지는 용봉들마저 단숨에 제압할 만큼 압도적인 무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그를 내어준다는 것은 혈족인 당진설로부터 완전히 등돌린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그렇기에 제안을 하면서도 반신반의할 수밖에 없었다.
혈족 중심의 사고관이 뚜렷한 당가이기에 쉽사리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다행히 당가주는 실리주의자인듯 하였다.
혈족이 아닌 실리를 택하였으니 말이다.
'후우'
이예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첫 단추를 제대로 끼어넣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럼 이제 당가는 제 편이 되는 건가요?"
이예설은 살짝 상기된 얼굴로 그에게 물었다.
"그건 아니야."
선우는 고개를 좌우로 저으며 그녀에게 말하였다.
"네 편이 되는 건 장선우라는 무인 하나 뿐이다."
"네!?"
이예설은 이해가 안된다는 듯한 표정을 지은 채 그에게 되물었다.
이게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란 말인가
당가를 대표하는 무인이 자신의 뒤에 서는데 어찌 당가만 쏙 빠질 수 있다는 말인가
"당가는 원래대로 당진설을 지원할거야. 최선을 다해서 말이야."
선우는 담담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잠....잠깐만요!"
이예설은 당황한듯한 표정을 지은 채 다급히 말을 이었다.
"제가 이해가 안되서 그런데 다시 한 번 설명해주실 수 있어요?"
이예설은 혹여 자신이 잘못 들은 것은 아닐까 싶어 그에게 되물었다.
"뭐가 이해 안되는데?"
선우는 모르겠다는듯 질문을 하였다.
"당신은 당가를 대표하는 무인이잖아요! 그런데 어떻게 당가와 다른 후보자를 지지할 수 있죠? 설마 양다리를 걸치겠다는 건가요?"
"맞아. 당가는 양다리를 걸칠 생각이야."
선우는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게 용납될 거라고 생각하시나요! 저는 그렇다쳐도 당진설이 반발할거예요! 뿐만 아니라 수많은 무림인들이 당가를 비난할거라고요!"
그녀는 말도 안된다는듯이 고함을 내질렀다.
말도 안되는 소리였다.
두 후보자를 동시에 지지한다니 말이다.
물론 이예설 입장에서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녀에게 중요한 것은 선우가 누구를 지지하냐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당진설은 입장이 달랐다.
그녀가 양다리를 허용할 리가 없는 것이었다.
후계 경쟁에서 가장 중요한 패가 될 인재를 눈앞에서 빼앗겼는데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겠는가
그것도 믿었던 당가의 배신에 의해서 말이다.
그녀는 세상에 호소할 것이고 당가를 뒤집어 엎을 것이다.
그간 받아먹었던 혜택들을 전부 내놓으라면서 말이다.
"괜찮아, 그녀를 납득시키면 되니까."
"대체 어떤 방식으로 그녀를 납득 시킬 생각인가요? 돈? 아니면 병장기? 비급?"
선우의 말을 들은 이예설은 콧방귀를 뀌며 그에게 답하였다.
말도 안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현재 후계 경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인재였다.
돈이나 병장기 혹은 비급이 아닌 완성된 인재 말이다.
그런 인재를 빼앗기는데 어찌 당진설이 납득을 하고 넘어갈 수 있겠는가?
"간단해."
선우는 담담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내가 당가에서 퇴출당하면 돼."
"...뭐라고요!?"
선우의 말을 들은 이예설은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지은 채 그에게 되물었다.
말도 안되는 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당가에서 퇴출을 당한다니!?
그건 또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란 말인가
"난 당서윤과 파혼을 할 예정이다."
"............."
선우의 말을 들은 이예설은 입을 꾹 다물었다.
순간적으로 뇌정지가 왔기 때문이었다.
"..........농담이죠?"
그리고 이내 정신을 차린 이예설은 간신히 쥐어짜듯 말을 내뱉었다.
"진심이야."
선우는 담담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그의 눈빛은 진지하기 짝이 없었다.
"말도 안돼요!"
이예설은 경악어린 눈빛으로 선우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대체 이게 무슨 소리란 말인가
파혼을 하겠다니!?
"제정신이에요!? 파혼이라뇨!?"
"이런 방법이 아니고선 당진설을 납득시킬 수 없어."
"아무리 그래도 파혼은 너무 극단적인 선택이라구요!"
이예설은 이해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당가가 지금은 비록 쇠락하긴하였지만 무림의 명가였다.
그런 곳에서 파혼이라는 것은 상당히 불명예스러운 일이었다.
그런데 어찌 파혼이라는 말을 이리도 쉽게 입에 담을 수 있다는 말인가
"당가는 물론 독서시 또한 어마어마한 불명예에 시달릴 거예요!"
"걱정마, 모든 불명예는 나혼자 짊어질테니까."
선우는 담담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파혼 사유는 내가 부정을 저지른 것으로 공식발표될테니까."
"........하지만...그렇게 되면..당신의 명예가.."
"명예가 밥먹여주는 건 아니잖아?"
선우는 입가에 슬며시 미소를 지은 채 입을 열었다.
"..........."
선우의 말을 들은 이예설은 침묵을 하였다.
색다른 충격이 온 머리를 뒤흔들었기 때문이었다.
혼란스러웠다.
무인에게 명예가 중요치 않다니?
중원의 사고방식과는 전혀 다른 사고방식이었다.
명예에 따라 살인도 하고 명예에 따라 목숨마저 초개처럼 버리는 것이 바로 무인이었다.
어찌 보면 생명보다 소중한 것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데 눈앞의 남자는 그런 소중한 것을 그냥 던져버린단다.
오로지 실리를 취하기 위해서 말이다.
어찌 혼란스럽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예설 또한 명예를 숭상하는 무인이었다.
선우의 이상한 사고방식이 이해가 될 리 만무하였다.
"당신은 본인이 무림에서 어느 정도 위치에 서있는지 모르는건가요?"
"글쎄?"
"당신은 지금 차기 천하제일인으로 거론될 정도로 어마어마한 명예를 가지고 있다구요! 그걸 지금 버리겠다는 건가요?"
"그게 그리 대단한 건가?"
"당연하죠! 무림에 존재하는 수백 수천개의 문파들에 즐비하고 있는 수많은 고수들을 제치고 천하에 우뚝 선다는 이야기잖아요! 그런데 어찌 대단하지 않을 수가 있나요!"
이예설은 열변을 토해내며 반박을 하였다.
"그래?"
선우는 심드렁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그래? 가 아니에요! 영광스러운 명예라고요! 그런 명예를 길바닥에 내던질 참인가요! 차라리 당진설과 연을 끊으세요! 그 편이 오히려 당신한테 나을테니까!"
"하나만 묻지."
"뭔가요!"
"내가 파혼을 하면 내가 다른 후기지수들보다 약해지는 건가?"
".........네?"
"내가 당가와 파혼을 하면 차기 천하제일인이라는 사실이 사라진냐는 말이다."
"......그...그런건...아니지만....명예가.."
"그럼 됐어."
선우는 아무렇지 않은듯 말을 이었다.
"어차피 내가 강하다는 사실이 변하는게 아니잖아?"
"............."
선우의 말을 들은 이예설은 입을 꾹 다물고 침묵을 하였다.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그가 부정을 저질렀다고해서 차기 천하제일인이라는 사실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행실에 대한 욕을 들어먹을 수는 있겠지만 그의 무력을 깎아내리진 못하는 것이다.
그의 명예는 당가를 등에 업고 생겨난게 아닌 스스로의 무력을 바탕으로 생겨났으니 말이다.
그러니 누가 자신을 평가하든 상관치 않는 것이다.
스스로가 가진 무력에 대한 절대적인 자신이 있었으니 말이다.
'독존獨尊'
이예설은 생각하였다.
그야말로 독존이라는 말이 가장 어울리는 남자라고 말이다.
'멋져.'
이예설의 눈이 몽롱하게 풀리기 시작하였다.
명예만을 따지고 드는 고루하기 짝이 없는 인간들과는 전혀 다른 매력이 느껴졌다.
절레 절레
하지만 이내 이예설은 고개를 좌우로 격렬하게 내저었다.
'미쳤나봐!'
그리고 스스로를 자책하기 시작하였다.
눈앞에 있는 남자는 자신의 원수였다.
어찌 원수에게 그런 삿된 마음을 품는다는 말인가
물론 차기 천하제일인이라고 불리울 정도로 검증된 무공을 가지고 있었고 남자답게 생긴 호방한 외모에 탄탄한 골격과 체격 그리고 실리를 위해서는 명예따위는 얼마든지 저버릴 수 있는 담대함을 가지고 있긴 하였지만 흔들려서는 안된다.
그는 많은 사람들 앞에서 크나큰 수치를 준 원수였으니 말이다.
이예설은 눈을 부릅뜨고 선우를 노려보았다.
그녀의 눈에는 현혹되지 않겠다는 결연의 의지가 잔뜩 담겨있었다.
"뭐 어쨌든 당가의 결정은 이거야. 양쪽 다 다리를 걸치는 것."
선우는 그런 이예설을 바라보며 담담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그러기 위해선 천월궁쪽에서도 협조가 필요해."
"입을 다물어 달라 이거죠?"
"맞아, 양다리를 걸치는 것은 극비 중에 극비야. 절대로 다른 이의 귀에 들어가선 안돼."
"후계 경쟁에 승리하고 당가쪽에 지원이 들어가면 알게 될텐데요?"
"그때야 뭐, 스승에 대한 미안함으로 포장하면 되니까 괜찮아."
선우는 대수롭지 않은 듯 말을 이었다.
"퇴출 당하긴 했지만 당가가 근본인 것은 변하지 않을테니까. 분명 세인들도 이해하겠지, 뭐."
"그도 그렇네요."
선우의 말을 들은 이예설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확실히 틀린 말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비록 이예설 쪽에 붙긴 했지만 선우가 가진 무공의 근원은 당문이었다.
후계 경쟁에 승리한 이후 그런 당문에게 혜택을 주는 것은 그리 어색한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당문의 제자로서는 무척이나 당연한 일이리라
"좋아요, 입을 다물겠어요. 이런 일이 새어나가봤자. 좋은 일이 없을테니까요."
이예설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입을 열었다.
"탁월한 선택이야."
선우는 슬며시 그녀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뭔가요."
이예설은 인상을 찌푸리며 그에게 물었다.
"악수 몰라? 원래 거래성립은 악수로 끝나는 거야."
선우는 능글맞은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이 손을 잡으면 천월궁과 당가 사이의 은원은 그대로 청산되는 거야."
선우는 담담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이예설은 그런 선우의 손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터업
그리고 이내 선우의 손을 조심스레 붙잡았다.
그 모습을 본 선우는 만족스러운 감정을 느꼈다.
시한폭탄처럼 여기고 있던 천월궁과의 은원 관계를 완전히 청산한 것이다.
어찌 만족스럽지 않을 수가 있을까
선우의 입가에 지어진 미소가 더욱더 진해지기 시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