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98화 〉 399. 동맹을 맺다.
"갑자기 무슨 일이죠?"
당진설은 살짝 놀란 표정을 지은 채 입을 열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손님이 찾아왔기 때문이었다.
"사랑하는 동생을 보러오는데 무슨 이유가 있겠어?"
강하윤은 짐짓 호탕한듯한 웃음을 터트리며 입을 열었다.
"글쎄요. 언니와 제가 그리 친분이 깊은 줄은 처음 알았네요."
당진설은 담담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그녀의 말은 사실이었다.
그간 큰 교류없이 지내던 두사람이었다.
깊은 친분따위가 있을 리 만무하였다.
"친분이야, 이제부터 쌓으면 되는거 아닌가?"
강하윤은 능글스러운 미소를 지은 채 입을 열었다.
"꽤 몰릴만큼 몰렸나봐요? 언니가 이렇게 아쉬운 소리를 하는 걸 보니까요."
당진설은 재밌다는듯한 표정을 지은 채 말을 이었다.
그가 아는 강하윤은 굳이 직접 찾아와 아쉬운 소리를 할 사람이 아니었다.
호방하면서도 제 할 말을 똑바로 하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런 그녀가 무거운 엉덩이를 떼어내고 직접 찾아와 아쉬운 소리를 내뱉는다.
어찌 재밌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지독한 년한테 걸려서 말이야."
강하윤은 머쓱한 표정을 지은 채 말을 이었다.
"뭐, 재판 내용은 들었어요. 꽤나 거하게 저질렀더라구요."
"재판에 대해선 할 말이 없어. 적법한 처벌이라고 생각하니까."
강하윤은 담담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그녀의 말은 진심이었다.
핵심인사의 인생을 박살내버렸다.
이정도 처벌이면 지나치게 관대한 것이리라
"그러니까 순순히 잡히셨어야지, 그렇게 반항하셨나요? 놔물수수나 직권남용 같은걸로 끝났으면 근신며칠이면 충분했을 것 아닌가요?"
당진설은 한심하다는듯한 시선으로 강하윤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어쩔 수 없었어. 그 자리에서 팽가련을 쥐어패지 않으면 혈압이 터져 죽을 것 같았거든."
"차라리 본인 혈압이 터지지 그러셨어요. 엄한 백호당주를 패죽이지 말고 말이에요."
".....죽지는 않았어."
강하윤은 변명하듯 말을 덧붙였다.
"그 부상을 입고 재기할 수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그정도면 무인으로서 재기불능이라고요."
그녀의 말을 들은 당진설은 코웃음을 치며 입을 열었다.
무인으로서 생명을 앗아가놓고 저런 소리를 하니 어이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괜찮아. 그런건 근성으로 버텨낼 수 있을거야. 백호당주가 나보다 약하긴해도 엄연히 화경 상경의 고수야. 분명 회복할 수 있을거야."
강하윤은 확신에 찬듯한 표정을 지은 채 입을 열었다.
"그놈의 근성론은 대체 무슨 자신감인가요?"
당진설은 고개를 좌우로 절레절레 저으며 입을 열었다.
"그래서 원하는게 뭐죠?"
당진설은 담담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
그녀의 말를 들은 강하윤은 입을 꾹 다물었다.
설마하니 이렇게 직접적으로 물어올 줄은 예상치 못하였기 때문이었다.
'.......좀더 사담이 오갈 줄 알았는데.'
"원하는게 있어서 오신거 잖아요. 아니면 언니 성격에 아쉬운 소리하려고 저한테 왔겠어요?"
당진설은 다알고 있다는듯이 말을 이었다.
"그것도 그렇네."
강하윤은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좋아, 그럼 원하는 걸 말하지."
강하윤은 올곧은 눈빛으로 당진설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살려줘."
"네!?"
강하윤의 말을 들은 당진설은 당황한듯한 표정을 지은 채 그녀에게 반문하였다.
설마하니 천하의 강하윤의 입에서 살려달라는 말이 나올 줄은 예상치 못하였기 때문이었다.
강하윤이 누구란 말인가
봉황당의 당주이자 화경 상경에 다다른 백호당주조차 사경을 해메게 만든 천무맹 최고 전력이 아니던가
그런데 어찌 그런 그녀의 입에서 살려달라는 말이 나올 수 있다는 말인가
당진설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이러다 죽을지도 모르거든."
강하윤은 담담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대체 누가 언니를 죽인다는 말인가요?"
당진설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듯한 표정을 지은 채 되물었다.
"집법당주."
"팽가련, 그 계집이요? 그럴 능력은 되고요?"
그녀의 말을 들은 당진설은 코웃음을 치며 입을 열었다.
말도 안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팽가련은 초절정 상경의 고수였다.
제법 강하다고는 할 수있으나 위대한 경지를 눈앞에 두고 있는 강하윤에게는 일초지적조차 되지 않을 정도로 하찮았다.
그런 그녀가 누굴 죽인다는 말인가
"동생, 판결을 제대로 듣지 않았나봐? 나 내력이 금제 되었어."
강하윤은 막막한 표정을 지은 채 입을 열었다.
"아, 그러네요."
당진설은 생각났다는듯한 표정을 지은 채 입을 열었다.
강하윤의 말을 들은 당진설은 이내 수긍을 하였다.
금제 당한 강하윤이라면 연약한 팽가련이라 하더라도 충분히 죽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하는 부탁이야. 내 안전을 보장해줘."
"안전이요?"
"이미 팽가련과는 건널 수 없는 강을 건넜어. 그녀는 내가 약해진 틈을 이용하여 나를 죽이려고 들거야."
강하윤은 담담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아마 당가에 향할 때가 가장 적기일테지. 나는 보호가 필요해. 그러니 네가 내 안전을 보호해줬으면 해."
"흐음...글쎄요. 아무리 그래도 집법당과 척을 지는 건......"
"이미 후계 문제로 불구대천 원수가 된 마당에 무슨 소리를 하는거야."
그녀의 말을 들은 강하윤은 인상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그녀는 당진설의 내숭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미 서로를 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두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제와서 무슨 척을 진다는 소리를 한다는 말인가
어불성설한 소리였다.
"그렇다해도 대놓고 적의를 드러내는건 전략적으로 좋지 않아서요..."
당진설은 곤란한 표정을 지은 채 슬쩍 말을 흐렸다.
와락
그 모습을 본 강하윤은 인상을 와락 찌푸렸다.
역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원하는게 있으면 그냥 대놓고 말하면 될 것을 뭐 저리 돌려말한다는 말인가
"뭘 원해."
강하윤은 담담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어멋, 대가를 바란 것은 아니었는데요."
"됐어, 오는게 있으면 가는 것도 있어야지. 뭘 어떻게 해주면 나를 보호해줄래?"
강하윤은 당진설에게 직설적으로 물었다.
"흐음...굳이 그럴 필요가 없긴한데...언니가 굳이 보답을 원한다면 어쩔 수 없네요."
당진설은 슬며시 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이철화 아시죠?"
"봉황당의 조장이 아니던가?"
그녀의 말을 들은 강하윤은 짐짓 놀란듯 입을 열었다.
설마하니 당진설의 입에서 그녀의 이름이 나올 줄은 예상치 못하였기 때문이었다.
이철화는 봉황당 내부에서도 상당히 유명한 이였다.
나이와 어울리지 않는 높은 무공 성취와 아름다운 외모로 다른 당원들의 동경을 한몸에 받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를 설득해주세요. 우리 기아의 뒤편에 설 수 있도록 말이에요."
".........."
그녀의 말을 들은 강하윤은 고민에 빠진듯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의 부하들까지 파벌싸움에 끼어들게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다른 방법은 안될까?"
"안돼요. 지금 기아에게 필요한건 인재에요. 그것도 30세 이하의 인재말이에요. 봉황당에서 그 조건에 부합하는 이는 이철화밖에 없어요."
당진설은 단호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타협의 여지가 전혀 없다는듯한 표정이었다.
"..........후우."
그녀의 태도를 본 강하윤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확고한 의지를 새삼 확인하였기 때문이었다.
"좋아, 일단 말은 해보지. 하지만 그녀가 거절한다면 나도 어쩔 수 없어."
"거절해도 설득하세요. 그게 아니면 저도 언니를 지켜줄 이유가 없답니다."
"너도 팽가련 못지 않게 악독하네."
"원래 거래라는 것은 동등해야한답니다. 제가 아무 이유없이 언니의 안전을 보장해줄 리 없지 않나요? "
"좋아, 최선을 다해 설득해보지. 살기 위해서 말이야."
"잘생각하셨어요. 저는 언니가 꼭 해낼 것이라고 믿는답니다."
당진설은 환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강하윤은 그런 당진설을 바라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과연 만만치 않은 여자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당진설은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
"잘부탁드려요. 강하윤 언니."
"이쪽이야말로."
그러자 강하윤 또한 손을 내밀어 그녀의 손을 맞잡았다.
꼬옥
맞잡은 두손에는 힘이 꼬옥 들어갔다.
두 사람만의 동맹이 성립되는 순간이었다.
*********
"우갸갸갸갸갹"
재판을 마치고 처소로 돌아온 이재원은 팔을 쭉 편 후 기지개를 켰다.
그리고 곧바로 침상에 누워 뒹굴거리기 시작하였다.
그는 지금 무척이나 기분이 좋은 상태였다.
눈엣가시처럼 여겼던 강하윤을 저 멀리있는 사천까지 좌천을 보내는 것은 물론 내력까지 금제하여 고난까지 겪게 만들었다.
어찌 기분이 좋지 않을 수가 있을까
'그러니까 이년아, 서방님한테 잘했어야지.'
이재원은 희희낙락하며 푹신한 침상의 감촉을 즐기기 시작하였다.
모든 것이 완벽하였다.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들이 말이다
청수검협 살인사건의 진상을 파헤치던 강하윤은 좌천당하였고 죄를 지었다면 부인조차 처벌한다는 공명정대한 이미지까지 완벽하게 챙겼다.
어찌 완벽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아마 천무맹의 무인들 뿐아니라 무림의 수많은 무인들이 자신을 찬양할 것이다.
그것도 열렬히 말이다.
'이게 사는거지!'
이재원은 생각하였다.
이렇게 사는게 진정한 행복이 아닐까하고 말이다.
여기저기 따먹을 수 있는 미인들이 즐비해있었고 모든 원하는대로 먹을 수 있으며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한 대궐같은 집까지 갖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일신의 무공은 천지를 뒤흔들 정도로 강대했으며 무슨 짓을 하든 수많은 이들이 자신을 인정하고 찬양까지 해주었다.
게다가 반선에 가까운 육체 덕분에 늙지 않는 불노의 권능까지 손에 넣게 되었다.
어찌 행복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이곳에서 자신은 신에 가까운 존재였다.
누구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신말이다.
그는 생각하였다.
영원히 이곳에서 행복하게 살 것이라고 말이다.
이재원은 눈을 감았다.
그리고 솔솔 수마에 빠져들기 시작하였다.
지금이라면 즐거운 마음으로 잠에 들 수 있을 것 같았다.
번뜩
그때 이재원의 머릿속에 일련의 기억들이 지나가기 시작하였다.
[영중고 3학년 2반 이재원]
[너는 항상 아침마다 학교를 가야한다는 사실에 고통스러워 했지, 모든 아이들이 너를 무시하였고 괴롭히기 일쑤였으니까. 아이들 뿐만 아니였어. 선생들조차 너를 섞이지 못하는 문제아 취급을 했지.]
'아니야'
[근데 그거 알아?, 그 모든 일들은 전부 네가 못났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야. 무엇하나 열심히 한 적없는 네녀석이 말이야, 공부를 열심히한 것도 아니고, 운동을 열심히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노는 것을 열심히 한 것도 아니잖아!?, 그저 방관자를 자처하면서, 열심히 사는 누군가를 부러워하면서 시간을 보낸 찐따잖아!]
'아니야!'
[너는 네가 스스로 시니컬하다고 생각하던 모양인데, 그건 그냥 싸가지가 없는거야 그리고 다른 사람의 눈치를 안본다고!?? 그건 눈치없고 민폐덩어리인거고! 혼자 다니길 즐겨하고 다른 애들은 유치하다고!? 그건 공감능력이 부족한거지 이 찐따새끼야!!]
'아니야!!'
[너는 쿨한 척하지만, 사실 누구보다 애정을 갈구하는 쿨병 걸린 찐따새끼에 불과해. 이 병신 새끼야. 무림에 왔다고 네가 바뀐거 같아? 바뀐 건 하나도 없어, 너는 그냥 여전히 병신새끼에 불과해!]
"아니야아아아아!"
이내 기억을 떠올린 이재원은 비명지르듯 고함을 내지르며 침상에서 일어났다.
이재원의 이마에는 쉴새없이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상상만해도 끔찍한 기억들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시발"
이재원은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어마어마한 분노가 치솟았기 때문이었다.
그와 동시에 의아함이 들었다.
현대에서의 기억은 무림에 떨어지고 단 한번도 떠올려본 적 없는 기억들이었다.
그런데 별안간 그 기억들이 왜 갑자기 떠오른다는 말인가
"크윽!"
순간 이재원은 극심한 두통이 느껴지기 시작하였다.
그와 동시에 의도적으로 마음속 깊은 곳에 꼭꼭 담아두었던 기억들이 하나둘씩 선명히 떠오르기 시작하였다.
자신의 옆자리에 앉는 여자는 무조건 울었던 기억.
청테이프로 입이 둘둘 감겨진 채 경비아저씨가 올때까지 화장실에 갇혔던 기억.
좋아했던 여자 앞에서 강제로 고추가 까여졌던 기억.
하필 고추가 작아 전교생에게 나노소추라고 놀림을 받았던 기억.
빵셔틀 배틀이라고 옆반 빵셔틀이랑 싸움을 했던 기억.
옆반 빵셔틀한테도 져서 전교 빵셔틀 서열 1위가 되었던 기억.
친구라고 생각했던 찐따들조차 자신을 무시했던 기억.
친구가 없어 현장학습으로 간 놀이동산에서 혼자 돌아다닌 기억.
친구가 없냐는 선생님의 물음에 혼자가 편하다고 거짓말을 했던 기억.
이동 수업 후 매번 칠판에 욕이 써져 있던 기억.
장난치지 말라면서 웃어넘겼지만 속으로 하염없이 울면서 칠판에 써져있던 욕을 지웠던 기억까지
전부 말이다.
주르르륵 주르르륵
이재원은 눈물을 흘렸다.
눈물이 하염없이 나오기 시작하였다.
꽁꽁 숨겨놨던 감정들이 터져나오면서 눈물샘을 미치도록 자극했기 때문이었다.
"왜!!!! 왜 떠오르는 거야!!!!!어째서!!! 분명 기억을 봉해놨을텐데!! 어째서!!"
눈가를 쉴새없이 비비던 이재원은 비명성을 내질렀다.
영문을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십여년 동안 떠오르지 않았던 기억이 어느 순간 불현듯 떠올라 심장을 아프게 만들었다.
"난 주인공이잖아! 주인공한테는 이런 과거 따위는 중요치 않다고! 세줄 묘사로 충분하단 말이야!"
이재원은 비명성을 내지르며 발광을 하였다.
"잊혀져!!!!! 잊혀지라고!!!!"
이재원의 울음섞인 분노가 더더욱 커지기 시작하였다.
잊혀지지 않는 과거에 대한 분노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