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92화 〉 393. 전쟁의 씨앗이 심어지다.
"그 말에 한치에 거짓도 없겠지?"
"없어요! 저는 복수를 원해요! 그가 고통 받길 원한다구요!"
자소령은 악에 받친듯 언성을 높였다.
"그럼 묻겠다."
남자는 진지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너는 정파를 등질 수 있는가?"
"..........."
남자의 말을 들은 자소령은 입을 꾹 다물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질문이 튀어나왔기 때문이었다.
정파를 등지라니
정파는 자신의 근본이나 다름없는 것이 아니던가
그런데 어찌 그런 것을 등질 수 있다는 말인가
"마...교에서 오셨나요?"
그녀는 떨리는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맞다."
남자는 무덤덤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이재원에게 복수하기 위해선 정파를 등질 각오를 해야한다. 너는 그것을 행할 수 있는가?"
".....할...할 수 있어요!"
이내 자소령은 독기 어린 눈빛으로 남자를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현재 자신에게는 정파따위는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자신이 가장 힘들 때 손을 내밀어준 것은 정파 따위가 아니었다.
저 남자인 것이다.
복수만 할 수 있다면 정파가 되었든 마교가 되었든 상관없었다.
남자는 자소령의 독기 어린 눈빛을 가만히 응시하였다.
"멋진 눈빛이군."
그녀의 독기 어린 눈빛을 마주한 남자는 만족스러운듯 미소를 지었다.
저 정도 결의라면 발목은 잡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마음가짐 잊지말도록."
그러더니 이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리고 겉에 입고 있던 피풍의를 벗어 그녀에게 던져주었다.
"따라오거라."
피풍의를 던진 남자는 무심히 말을 이었다.
"잠깐만요! 저는 지금 이것 좀 풀어주세요!"
"뭘 풀어달라는거지? 이미 자유로워지지 않았느냐?"
"네!?"
자소령은 당황한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묶인 팔에 천천히 힘을 주었다.
파삭
그러자 팔을 옭아매고 있던 족쇄가 순식간에 가루가 되었다.
묶인 다리를 끌어보였다.
파삭
마찬가지로 족쇄가 그대로 가루가 되었다.
"아...아.."
현실감없는 모습을 본 그녀는 멍한 표정을 지은 채 팔다리를 바라보았다.
"크흑...흐으윽...흐극.."
그리고 이내 눈물을 흘리기 시작하였다.
옭아매고 있던 것들이 한순간 사라졌다는 사실에 기쁨과 감격이 올라왔기 때문이었다.
"꾸물댈 시간이 없다."
그때 무심한 목소리가 귓가에 파고들었다.
"감사합니다....감사합니다..정말...감사합니다."
여자는 쉴새없이 그에게 감사를 표하였다.
구출될 것이라는 희망따윈 이미 포기한지 오래였다.
이곳은 이재원의 말이 곧 법이고 전부인 천무맹의 심처였다.
그 누구도 그를 거역할 수 없는 것이다.
만약 누군가 자신이 성적학대를 받았다는 사실을 알게되었다해도 모두 모른척을 할 것이다.
이재원을 거스를 수 있는 이는 존재치 않을테니까 말이다.
"감사 인사는 되었다. 어차피 나도 맨입으로 구해준 것은 아니니."
남자는 무심하게 말을 이었다.
"어떤 일이든....맡겨만 주신다면...전부 할게요.."
자소령은 눈물을 흘리며 입을 열었다.
"일단 따라오도록 해라. 여기 계속 있다간 이재원에게 들키고 말것이다."
남자는 감흥없다는듯이 입을 열었다.
그리고 그대로 몸을 돌렸다.
"네..넷!"
남자의 말을 들은 자소령은 피풍의를 대충 걸처입고 그의 뒤를 졸졸 따라가기 시작하였다.
"저....이름이 어떻게 되시나요."
자소령은 궁금하다는듯 그에게 물었다.
감히 이재원을 거역하고 천무맹 심처까지 잠입한 간 큰 마인의 이름이 궁금했던 탓이었다.
"내겐 이름이 없다."
남자는 담담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그저 한 자루의 칼일 뿐이지."
".........."
남자의 말을 들은 자소령은 침묵을 하였다.
'본명을 밝히기 싫은가보구나.'
그리고 생각하였다.
그가 본명을 밝히는 것을 꺼려한다고 말이다.
그의 생각을 어림짐작한 그녀는 그에게 질문을 던지지 않았다.
구태여 긁어부스럼을 만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중년 남자와 자소령은 이내 지하실을 벗어나기 시작하였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아, 깜빡할 뻔했군."
갑자기 남자가 무언가 생각난듯 재빨리 몸을 돌려 지하실로 돌아가기 시작하였다.
'뭐야!?'
남자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란 자소령은 멍한 표정으로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내 지하실에 들어갔다온 남자가 다시금 걸음을 옮겼다.
".......왜 갔다오셨어요?"
"선물을 깜빡했거든."
남자는 씨익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 말을 들은 자소령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듯한 표정을 지었다.
저게 대체 무슨 소리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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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개 껍질 묶어~ 그년의 목에 걸고~ 그대로 잡아당겨~ 목을 조여버려~"
이재원은 시대의 명곡을 멋대로 개사하면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하였다.
오늘도 지칠대로 지친 업무와 마누라들 등쌀에 피곤한 하루를 보낸 그였다.
그는 생각하였다.
힐링이 필요하다고 말이다.
마음껏 짓밟고 박아대고 후두려패면서 스트레스를 마음껏 발산할 수 있는 자신만의 힐링을 말이다.
"우리 소령이를 보러 가볼까?"
이재원은 입가에 잔혹한 미소를 지었다.
정신이 나갔기는 했지만 취향에 딱 알맞는 체형과 얼굴을 가지고 있는 그녀였다.
분명 오늘도 즐거운 시간을 보낼수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이재원은 발걸음도 가볍게 자리를 옮겼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끼이익
어느새 지하실 문앞까지 도달한 이재원은 그대로 문을 열어젖혔다.
"암퇘지년아~ 주인님 오셨다~"
해맑은 미소를 지으면서 말이다.
하지만 이내 그의 표정은 사정없이 구겨지기 시작하였다.
지하실 내부가 텅텅 비어있었기 때문이었다.
족쇄에 팔다리가 단단히 묶인 자소령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뭐야!?"
당황한 이재원은 온사방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어디에도 자소령의 모습은 보이지가 않았다.
"뭐냐고 시발!"
이재원은 괴성을 내리질렀다.
그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지하실의 위치는 누구도 알지 못하도록 꼭꼭 숨겨놓은 비밀중에 비밀이었다.
지하실을 만든 인부는 물론 설계자까지 모두 죽여버리면서까지 말이다.
그런데 지하실에 침입자가 발생한 것이다.
현경인 자신조차 감지하지 못할 정도로 은밀한 침입자가 말이다.
계획하던 일이 어그러지면서 주체할 수 없는 화가 치솟은 것이다.
"어디갔어! 이 걸레같은년!"
그는 흥분하였다.
그것도 극도로 말이다.
두근 두근 두근 두근
심장이 미친듯이 뛰기 시작하였다.
바득 바득
입술이 바짝 바짝 마르기 시작하였다.
어마어마한 불안감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살아있어서는 안되었다.
지금껏 수많은 여협들을 납치강간살해한 산증인이기 때문이었다.
만약 그녀가 만천하에 실태를 밝힌다면?
자신의 치부가 밝혀질 수도 있었다.
물론 많은 이들이 그녀의 말을 믿지는 않겠지만 자신에 대한 의심의 씨앗을 심어주기엔 충분할 것이다.
그리고 만약 그 씨앗이 발아하게 된다면 자신의 위선적인 행보가 전부 드러날 수 있었다.
이십여년이라는 세월동안 견고하게 쌓아온 명성이 한순간에 무너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시발!"
쾅
화가 머리끝까지 난 이재원은 팔을 휘둘렀다.
그러자 벽이 그대로 무너져내렸다.
"시발년이! 시발년이! 시발년이!"
이재원은 거칠게 팔을 휘적거렸다.
그러자 이곳저곳이 무너져 내리고 부서지기 시작하였다.
견고하게 만들어진 지하실 내부였지만 현경에 다다른 이재원의 분노를 감당하는 것은 무리였던 탓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화풀이를 했을까
이재원은 지하실 내부가 반파당한 이후에야 손을 멈췄다.
'찾아야해!찾아야해!찾아야해!찾아야해!찾아야해!찾아야해!찾아야해!찾아야해!찾아야해!찾아야해!찾아야해!찾아야해!찾아야해!찾아야해!찾아야해!찾아야해!찾아야해!찾아야해!찾아야해!찾아야해!찾아야해!찾아야해!찾아야해!찾아야해!찾아야해!찾아야해!찾아야해!찾아야해!찾아야해!찾아야해!'
그리고 시뻘개진 눈으로 쉴새없이 중얼거리기 시작하였다.
그녀를 찾아야한다면서 말이다.
그렇게 몸을 돌리려고 할 때였다.
그녀가 있던 자리에 반듯하게 놓여진 네모난 상자가 보였다.
'뭐야!?'
우우웅
이재원은 허공섭물로 상자를 그대로 끌어왔다.
그리고 상자를 천천히 열어젖혔다.
그러자 그곳에는 서신 하나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마魔]
서신에는 마魔라는 한 글자가 쓰여있었다.
그 글자를 본 이재원은 얼굴이 시뻘겋게 변하기 시작하였다.
"크아아아아아아아아악!!!!!!!!!!"
그리고 이내 괴성을 내질렀다.
지하실에 침입하여 자소령을 납치해간 범인의 정체를 눈치 챈 탓이었다.
마중마.
마귀들의 왕.
생과 사를 거스르는 역천의 존재.
불사의 권능을 손에 넣은 악마.
천마였다.
"천마아아아아아아아!"
이재원은 핏발 선 눈빛으로 발하며 괴성을 내질렀다.
참을 수 없는 어마어마한 분노가 치솟았기 때문이었다.
당가를 반파시켰을 때만해도 그다지 큰 위기 의식을 갖진 못하였다.
그저 잔당들이 들고 일어난 것에 지나지 않았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실제로 피해를 입으니 감당할 수 없는 분노와 함께 위기감이 들기 시작하였다.
부활한 것이다.
천마가 말이다.
정마대전 당시 자신이 한줌의 핏물로 만들어버린 괴물이 말이다.
'죽여야한다!'
그리고 생각하였다.
그 괴물괭이 새끼를 죽여야한다고 말이다.
이십여년 간 숨겨온 최악의 약점이 잡혀버렸다.
생사대적에게 말이다.
없애야한다.
증거로 가져간 자소령을 말이다.
"시발, 미리 죽였어야 됐는데!"
이재원은 한탄하듯 언성을 높였다.
진즉 죽였으면 이런 번거로운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시발같은 새끼가 나를 건드려?"
이재원은 인상을 잔뜩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웬만하면 마교와 전면전을 피하고 싶었던 그였다.
마교에 대한 공포를 이용한 정책으로 솔솔하게 재미를 보고 있던 참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얌전히만 있어준다면 굳이 건들일 생각이 없었다.
충분히 필요악으로서의 역할을 해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심처에 침입하여 자소령을 납치해간 것은 선을 넘은 것이었다.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인내심이라는 선을 말이다.
자신이 누구란 말인가
천하제일인이자 무림 최강의 세력인 천무맹의 맹주가 아니던가.
천마는 그런 자신이 기거하고 있는 천무맹에 잠입하여 노리개를 빼앗아 갔다.
어찌 이런 일을 참을 수 있다는 말인가
한 번은 두 번이 되기 쉽고 두 번은 세 번이 되기 쉬웠다.
만약 이번 일을 허투루 넘긴 후 대충 마무리 짓는다면 그들은 언제고 같은 짓을 저지를 것이고 최악의 경우 자신의 위선이 탄로날 수도 있었다.
삭초제근
뿌리까지 그대로 제거해야했다.
자신에게 대항하려는 개새끼들을 멸족시켜야했다.
'전쟁이다!'
혈광 어린 이재원의 눈빛이 번들거리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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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무맹에서 끔찍한 살인 사건이 일어났다.
한 남자가 팔다리가 잘려진 것은 물론 아랫도리에 있는 남성기까지 뭉개진 상태로 발견된 것이다.
피해자는 평소 높은 인덕으로 인해 많은 이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던 백호당의 부당주인 청수검협靑秀劍俠 갈무량이었다.
용의자는 며칠 전 종적을 감춘 봉황당원 자소령으로 그를 유혹하여 무참히 살해한 것으로 결론이 나게되었다.
그 소식을 들은 수많은 이들은 경악을 금치 못하였다.
청수검협靑秀劍狹 갈무량이 누구란 말인가
눈에 띌만큼 큰 활약을 하진 못하였지만 끊임없는 협행과 바른 소리로 모든 이들의 마음을 훈훈하게 만들어주었던 젊은 협객이 아니던가
그런데 어찌 그런 이가 이리도 무참하게 살해당한다는 말인가
많은 이들이 그의 죽음에 의문을 표하였다.
아무리 방심해도 그렇지 어찌 백호당의 부당주 자리에 오른 갈무량이 일개 봉황당원에 불과한 자소령에게 당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런 의문을 품고 있던 차 또다른 소문이 들려왔다.
갈무량을 살해한 자소령이 사실은 마교의 세작이라는 소문이었다.
살해당한 갈무량의 몸에서 어마어마한 마기가 발견되었기 때문이었다.
그 소문을 들은 세인들은 경악하였다.
마교의 악귀들이 천무맹에게 정면 승부를 걸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지금까지는 각개격파하는 식으로 정파의 문파들을 소극적으로 압박하던 마교였다.
그런데 그런 마교가 천무맹의 심처에 침입하여 핵심인사라고 할 수 있는 갈무량을 죽여버린 것이다.
도발이었다.
당장 전쟁을 시작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도발말이다.
소문을 접한 세인들은 처음엔 소문의 진위여부를 의심하였다.
아무리 마교라지만 겁도 없이 천무맹에게 정면으로 도발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천무맹주인 이재원의 행보를 본 이후 소문이 사실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재원이 전 무림에 있는 모든 정파의 문파들에게 동시다발적인 공문을 돌렸기 때문이었다.
공문에는 청수검협 갈무량을 살해한 자소령을 무림공적으로 공포하겠다는 말이 쓰여있었다.
마교의 세작으로서 천무맹의 수많은 비밀 문건과 안보 서류를 훔치고 많은 이들에게 존경받던 청수검협 갈무량을 끔찍하게 살해하였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공문을 받은 문파들은 내용을 제자들에게 알렸고 이내 전 무림에 자소령에 관한 사실이 널리 널리 퍼지게 되었다.
그녀는 순식간에 무림 최악의 악녀로 등극하게 되었고 그녀의 가문은 이재원의 손에 의해 멸문하게 되었다.
죄목은 마교와의 내통한 죄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천무맹의 무인들은 마교에 대한 어마어마한 반발심이 생기게 되었고 종국에는 증오하는 수준에 치닫게 되었다.
이재원은 그런 천무맹의 무인들을 달래며 속으로 웃음을 지었다.
모든 것이 계획대로 진행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