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87화 〉 388. 제비를 뽑다.
"그녀의 말을 어떻게 믿지?"
당서윤은 의심스러운 듯한 표정을 지은 채 입을 열었다.
분명 그녀의 제안은 무척이나 좋은 조건임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가문의 존폐가 걸린 원한을 청산함과 동시에 기존과 다를 바 없는 혹은 더욱더 좋은 혜택을 누릴 수 있을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이예설을 신뢰할 수 있다는 전제하에 받아들일 수 있는 조건이었다.
본디 사냥이 끝난 개는 잡아먹기 마련이었다.
이예설 또한 그러지 말라는 법이 없는 것이다.
"나도 그게 걱정이야."
그녀의 말을 들은 선우는 담담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그녀에 대한 신뢰만 있다면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이겠지만 아쉽게도 그녀를 전적으로 믿을 수는 없으니까."
"그렇다면 무턱대고 그녀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는 없잖아!"
"하지만 우리에게 다른 선택지가 없어."
"왜 선택지가 없어? 이예설에게 후계 경쟁에 불참을 지시하면 되잖아."
"안돼."
선우는 단호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그녀를 지지하고 있는 이들이 반발할거야. 심할 경우 당가로 찾아올 수도 있고 말이야. 그럼 그녀가 인질로 잡혀있다는 사실을 알아채는 이가 나올 수도 있어."
"..그치만.."
"더구나 평생을 후계 위를 이어받기 위해 달려온 두 모녀야, 만약 불참을 지시한다면 목숨따위는 도외시하고 어떻게든 이재원에게 사실을 고하고 말거야."
".............."
선우의 말을 들은 당서윤은 입을 꾹 다물었다.
충분히 가능성 있는 말이라는 것을 알아챘기 때문이었다.
이예설은 본부인인 주소양의 딸인 만큼 지지기반이 탄탄한 편이었다.
나이 지긋한 수뇌부들부터 젊디 젊은 무인들까지 다양하게 말이다.
그런 그녀가 만약 불참을 선언한다면 아마 많은 이들이 납득하지 못할 것이다.
그녀를 찾아올 것이고 전말을 알기위해 당가를 들쑤시고 다닐 것이다.
최악의 경우 이예설이 인질로 잡혔다는 사실을 알게 될 수도 있었다.
도저히 감당이 되지 않았다.
그리고 만약 불참을 명한다면 이예설과 주소양이 반발할 가능성이 적지 않았다.
지금이야 강압으로 두 사람을 억누르고 있지만 만약 불참이라는 최악의 수를 놓아버린다면 그대로 폭발하게 될지도 몰랐다.
최악의 경우 이재원이 친히 당가에 방문하여 모두를 쓸어버릴 수도 있었다.
당서윤은 골머리가 아파오는 것을 느꼈다.
"마땅한 해결책이 없다면 나는 그녀의 의견을 받아들여야한다고 생각해. 우리에게 선택지가 많지 않으니까."
"하지만....이미 당가는 진설 언니를 지원하겠다고 서신을 보냈어."
"괜찮아."
그녀의 말을 들은 선우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을 이었다.
"이예설은 돕는 것은 당가가 아닌 나 혼자가 될테니까."
"응?!"
그녀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듯한 표정을 지은 채 말을 이었다.
"판을 짜면 돼, 내가 이예설을 도와도 당가가 당진설과 척을 지지 않는 판을 말이야."
선우는 담담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어떻게?"
"쫓아내는 거지."
"뭐!?"
"나를 당문에서 쫓아내는 거야. 명목은 바람을 피웠다는 걸로 말이야."
".........."
"그리고 더불어 파혼까지 자연스럽게 진행할 수 있을거야."
선우는 씨익 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말인즉슨.......양 다리를 걸치자는 거야?"
"어떻게 보면 그렇다고 할 수 있지. 대외적으로 쫓아낸다고 소문을 내긴 할거지만 난 당가에 계속해서 머무를 생각이니까."
"............"
선우의 말을 들은 당서윤은 입을 꾹 다물었다.
설마하니 저런 발상을 해낼 줄은 상상도 못하였기 때문이었다.
"선우, 만약 그런 식으로 소문이 났다간 네 명예가 실추될거야."
당서윤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은 채 입을 열었다.
후기지수들 사이에서 신룡이자 차기 천하제일인으로서 이름을 날리고 있는 선우였다.
바람을 피워 당가에 쫓겨났다니
만약 그런 소문을 냈다간 선우의 명예가 크게 실추가 되고 말 것이다.
"명예가 밥 먹여주는 것도 아니고 상관없어. 그리고 명예 같은 거랑 당가의 안전을 맞바꿀 수 있다면 난 언제든 맞바꿀 수 있어."
".......선우."
선우의 말을 당서윤은 감동어린 표정을 지은 채 선우를 바라보았다.
본디 무인에게 명예란 목숨을 등한시하더라도 지켜야한다고 생각할만큼 소중한 것이었다.
무인에게 이름을 드높이는 것만큼 영광스러운 일도 없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선우가 그런 영광스러운 일을 스스럼없이 내놓는다고 말하였다.
당가의 안전을 위해서 말이다.
당서윤은 가슴이 울렁거리는 느낌을 받았다.
신룡이라는 명예를
차기 천하제일인이라는 영광스러운 명예를
어떤 이가 함부로 포기할 수 있겠는가
아마 자신조차 쉽사리 포기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만큼 영광스러운 일이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그런 일을 선우가 해낸 것이다.
마치 별 것 아니라는 것처럼 말이다.
두근 두근
당서윤은 심장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그간 쌓아온 선우에 대한 애정은 가랑비에 조금씩 젖어드는 것처럼 살며시 다가왔다.
불꽃처럼 강렬한 느낌이 아니었다.
그런데 오늘은 무언가 달라보였다.
가슴에서 무언가 확 당겨지는 느낌을 받은 것이었다.
당서윤의 눈동자가 몽롱하게 풀리기 시작하였다.
'명예가 밥먹여주나.'
말을 마친 선우는 속으로 피식 웃음을 지었다.
현대에 살다온 선우에게는 먹지도 못하는 명예보다는 실질적인 실리가 중요하였다.
자신의 명성에 흠집이 난다지만 알게 뭔가
그덕에 당가가 안전하게 된다면 만사형통이 아닌가
선우는 생각하였다.
생각지도 않게 일이 딱딱 풀리고 있다고 말이다.
설마하니 이예설과의 동맹은 물론 당서윤과의 파혼까지 한꺼번에 처리하게 될 줄은 상상도 못하였기 때문이었다.
마치 퍼즐조각 맞추는 것처럼 딱딱 맞춰졌다.
마치 누군가가 조율하는 것처럼 말이다.
'잠깐'
순간 선우는 무언가 스치고 지나가는듯한 느낌을 받았다.
'이게 주인공 보정인가?'
퍼즐 맞추는듯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상황에 의아함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좌우로 거칠게 흔들었다.
우연의 일치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무슨 주인공 보정이 이렇게 사소한 것에 일어난다는 말인가
분명 우연히 상황이 겹친 것이리라
"아무튼 나는 이 방법이 최선이라고 생각해. 당진설의 원한을 당가가 아닌 오직 나에게만 집중시킬 수 있고 동시에 이예설과 양다리를 걸칠 수 있을테니까. "
선우는 담담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혹시 반대 의견이나 다른 의견 있어?"
선우는 여인들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혹여 다른 방법이 있다면 적극적으로 수용할 심산이었다.
"저기.."
그때 금적화가 천천히 손을 들어올렸다.
"말해주세요. 삼부인."
"만약 당진설이 선우님께 복수하려고 한다면 어떻게 하죠?"
"당진설이요?"
선우는 의외라는듯한 표정을 지은 채 그녀에게 물어봤다.
그런 생각은 추호도 안해봤기 때문이다.
"선우님은 모르겠지만 지금 선우님은 후기지수들 중 가장 요주 인물이에요. 용봉들을 단번에 제압했다는 무용이 널리 퍼져있거든요."
금적화는 걱정어린 표정을 지은 채 말을 이었다.
"아마 선우님이 이예설에게 붙었다는 소문을 듣게된다면 당진설은 선우님에게 원한을 품게 될거예요. 뿐만아니라 좀더 유리한 고지에 서기 위해 제거하려고 할지도 몰라요."
"확실히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그녀의 말을 들은 선우는 납득 간다는듯한 표정을 지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당진설 입장에서는 원한을 가질 수 밖에 없었다.
믿고 있었던 패가 사실은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될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뭐, 괜찮을 것 같습니다."
"네?!"
"딱히 위협적으로 느껴지진 않거든요."
선우는 씨익 웃으며 말을 이었다.
북해행에서 깨달음을 통해 현경에 다다른 선우였다.
현 중원에서 자신을 위협할 수있는 이는 오직 이재원 뿐이었다.
어찌 당진설 따위가 하는 위협에 겁을 집어먹을 수 있겠는가
"그...그치만.."
금적화는 걱정 어린 표정을 지은 채 말을 이었다.
"걱정 안하셔도 됩니다. 현재 중원에서 저를 위협할만한 이는 이재원 밖에 없습니다. 그가 직접 오지 않는 한 저를 어찌할 이는 존재치 않습니다."
선우는 확신에 찬듯한 눈빛으로 금적화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렇군요."
선우의 확신에 찬 눈빛을 마주한 금적화는 이내 수긍하듯 고개를 숙였다.
물론 불안감이 완전히 가신 것은 아니지만 확신에 찬듯한 눈빛을 마주하니 수긍할 수 밖에 없었다.
적어도 눈앞에 남자는 멍청한 선택은 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럼 다른 의견이 있으십니까?"
금적화가 수긍하자 선우는 주위를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아무도 손을 드는 이가 없었다.
아무래도 모두 자신의 의견에 수긍한듯 싶었다.
"그럼 이예설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가주 대리와 삼부인께서는 저에 대한 소문을 내주시길 부탁 드리겠습니다."
선우는 담담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알았어."
"알겠습니다."
선우의 말이 끝나자 당서윤과 금적화가 고개를 주억거리며 답을 하였다.
"제가 전할 말은 이게 끝입니다. 달리 하실 말씀이라도 있습니까?"
선우는 여인들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슬쩍
그때 능소화가 슬며시 손을 들어올렸다.
"소화야, 왜?"
"오늘...본녀는 그대와 잘 수있는가?"
능소화는 얼굴을 붉히며 말을 이었다.
"...어...그러니까.."
그녀의 말을 들은 선우는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은 채 말을 더듬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질문이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크흠.....민망하긴 하나...물어봐야할 것 같아서 물어봤다."
선우가 말을 더듬자 능소화는 민망한듯 얼굴을 붉히며 말을 이었다.
"안돼요. 소화."
그때 옆에 있던 옥령이 끼어들며 입을 열었다.
"순서라는게 있는 법이랍니다. 그간 선우를 독차지 하셨잖아요. 다른 여인들에게도 순서가 돌아가야죠?"
"...독차지 할 정도는 아니었다! 마차로 오는 내내 몇 번 하지 못했다는 말이다!"
능소화는 따지듯이 말을 이었다.
당가로 빠르게 달려오느라 객잔을 거의 들리지 않은 그들이었다.
자연스럽게 운우지락을 나눌 기회 또한 적을 수밖에 없었다.
"소화, 저희들은 최소 칠 개월은 참았어요."
옥령은 위화감 가득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미소는 무척 산뜻했으나 그녀 주위에 흐르고 있는 기운은 폭급하기 그지 없었기 때문이었다.
"소화는 최근에 한게 언제 인가요?"
".....일주야 전이다."
능소화는 얼굴을 슬쩍 붉히며 말을 이었다.
"참으세요."
".......우으으."
옥령의 단호한 말을 들은 능소화는 억울한듯한 표정을 지었다.
당가에 도착만하면 원없이 선우의 씨앗을 받을 수 있을 줄 알았건만 기다리고 있는 이가 너무 많은듯 싶었다.
"그럼 어떻게 할까요? 가려."
옥령은 당대부인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글쎄요."
당대부인은 난감한 표정을 지은 채 입을 열었다.
"아가씨는 어떻게 생각해요?"
당대부인은 당서윤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네!?....저요?"
그녀의 말을 들은 당서윤은 당황한듯 되물었다.
어째서 자신에게 잠자리 순서를 물어보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가씨도 공식적으로 선우의 여인이 되었잖아요. 잠자리 순서를 정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해요."
당대부인은 담담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하..지만.."
당서윤은 잔뜩 화끈거리는 얼굴을 매만지며 말을 더듬었다.
선우의 여인이 되겠다고 말을 하긴 하였으나 막상 잠자리를 같이하라고 하니 형용할 수 없는 부끄러움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애초에 외간 남자의 손가락조차 닿아본적 없는 그녀였다.
그런 그녀에게 남녀간의 운우지락이라는 것은 미지의 존재일 수밖에 없었다.
"가려 의견이 맞아. 나도 서윤이가 잠자리에 들 권한이 있다고 생각해."
옥령 또한 당대부인의 의견에 동의를 하였다
퓨수우우욱
"..........."
옥령의 말을 들은 당서윤은 머리에서 어마어마한 열기를 내뿜기 시작하였다.
전혀 생각지도 못할 일에 맞닥뜨리게 되니 머리에 과부하가 온듯 하였다.
"역시 언니가..."
"아니야....서윤이가..먼저."
"저...는...괜찮아요.."
이내 세 여인은 서로를 바라보며 오손도손 잠자리 순서를 정하기 시작하였다.
'허어'
그 모습을 본 선우는 저도 모르게 속으로 헛웃음을 내뱉었다.
설마하니 회의의 마지막 주제가 잠자리 순서 정하기가 될 줄은 상상도 못하였기 때문이었다.
'뭐, 상관없나?'
그래도 다같이 사이좋게 지내는 것을 보니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우는 그녀들이 순서를 정할 때까지 입을 꾹 다물고 얌전히 기다렸다.
여인들 간의 의견 교환을 존중해줄 심산이었다.
*******
선우는 침상 위에 무릎을 꿇은 채 다소곳이 기다리고 있었다.
두근 두근 두근
다소곳이 앉아 있긴 하지만 선우의 내부에는 심장이 미친듯이 쿵쾅거리기 시작하였다.
방에 누가 들어올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내빈실에서 잠자리 순서를 두고 열띤 토론이 오갔지만 밤이 깊어질 때까지 순서를 정하지 못하였다.
결국 그녀들은 제비를 뽑아 선우의 침소에 한 명을 들여보내자고 합의를 봤다.
회의가 길어질수록 선우와 보낼 수 있는 밤이 줄어든다는 판단이 섰기 때문이다.
선우는 그녀들의 의견에 수긍하였고 이내 먼저 침소로 들어가게 되었다.
누가 들어올지 기대하면서 기다리라는 옥령의 요망한 말을 들은 후 말이다.
'누가 오려나?'
선우는 궁금증이 일었다.
과연 첫날밤을 같이 보내게 될 여인이 누굴까하고 말이다.
본부인이자 완벽한 신체 균형을 가지고 있는 옥령일까?
아니면 두 번째 부인이자 주소양과 더불어 풍만의 끝판왕을 자랑하는 가슴과 소름돋을 정도의 명기를 가진 운가려일까?
아니면 이번에 서로 간의 정을 확인한 친구이자 연인인 당서윤 일까?
두근 두근 두근
선우는 심장이 두근 거리는 것을 느꼈다.
누가 올지 알 수 없으니 기대감이 배가 되었기 떄문이었다.
'누굴까...누굴까...누굴까..'
그렇게 잔뜩 기대하고 있는 사이
똑 똑 똑
갑자기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방안에 울려퍼졌다.
"들...들어와."
그 소리를 들은 선우는 떨리는 마음으로 말을 이었다.
끼이이익
이내 문이 열리고 아리따운 여인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흑단처럼 곱디 고운 검은 머릿결
살짝 날카로운듯 치켜든 눈매
마치 칼날처럼 날카로운 콧대
붉디 붉은 입술까지
절로 경국지색이라는 말을 떠오르게 만드는 여인이었다.
"당...서윤."
선우는 그녀를 바라보며 입을 떼었다.
"잘....부탁해.."
선우의 말을 들은 당서윤은 떨리는 음색으로 입을 열었다.
이내 방안에는 알 수 없는 열기가 가득 차기 시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