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83화 〉 384. 능소화를 소개하다.
"소개할 사람이 있습니다."
모두가 요랑의 무사 귀환을 환영해주고 있던 그때
선우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러자 요랑에게 집중해있던 시선이 일제히 선우에게 쏟아졌다.
"소개할 사람이요?"
옥령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에게 물었다.
"누군가요? 상공."
당대부인 또한 궁금하다는듯이 말을 이었다.
".......들어와."
그녀들의 눈빛을 받은 선우는 부담스러움을 꾹 참고 입을 열었다.
끼이익
그러자 문이 열리면서 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타오르는듯 붉디 붉은 머릿결과 눈썹
번들거리는 적안
베일듯 날카롭게 서있는 콧날
머릿결처럼 붉디 붉은 입술
잡티하나 없는 투명한 피부
게다가 상당한 큰 키에 균형적인 몸매까지
모습을 드러낸 이는 마치 인세에 강림한 여신과도 같은 모습을 한 여인이었다.
"..........."
"..........."
실내 있는 모든 이들은 그녀의 초월적인 아름다운 모습에 시선을 빼앗겨 멍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껏 경험해본 적 없는 초월적인 미를 마주본 탓이었다.
"반갑도다. 본녀는 경화군주라고 한다."
이내 안으로 들어온 경화군주는 입을 열었다.
"현 황제의 손녀이자 연왕의 딸로 군주의 자리를 맡고 있지."
그녀는 당당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그리고 선우의 정인이다. 잘부탁한다."
"............."
"............"
"..........."
그녀의 말을 들은 여인들은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너무나 갑작스러운 상황이 도저히 이해가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게 대체 무슨 소리란 말인가
현 황제의 손녀라니
연왕의 딸이라니
군주라니
선우의 정인이라니!?
어찌 이런 일이 일어난다는 말인가
"와아, 황제가 할아부지야?"
그떄 요랑이 감탄한듯 말을 이었다.
"그렇다고 볼 수 있지."
요랑의 말을 들은 경화군주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대단하다. 그럼 밥도 떠먹여줘?"
요랑은 궁금하다는듯 그녀에게 물었다.
"그런 기초적인 것은 본녀가 한다. 물론 떠먹이는 것까지 원하는 황족이 없는 것은 아니나. 본녀는 스스로 할 일을 남에게 미루는 짓은 죄악이라고 생각한다. 어찌 멀쩡한 팔다리를 놔두고 누군가에게 그토록 의지한다는 말인가?"
요랑의 물음에 경화군주는 성심성의껏 답해주었다.
"우웅, 그렇구나. 그나저나 경화군주가 이름이야? 되게 기네?"
"이것은 호칭에 가깝도다. 다른 이름이 있으나 황족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것은 금기시 되있으니 가명을 가르쳐주도록 하겠다. 능소화라 부르도록 하라."
"알았어, 소화야. 나는 요랑이야."
"반갑도다. 요랑."
요랑과 능소화는 처음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죽이 잘맞는듯 말을 이었다.
인간계의 신분따위 하등 상관없는 요랑이었기에 그녀에게 스스럼없이 대할 수 있었고 그 스스럼없이 대하는 태도가 능소화에게는 호감으로 다가온듯 하였다.
다른 여인들은 멍한 표정을 지은 채 그녀들의 대화를 지켜보았다.
그녀들은 도저히 현실로 돌아올 수가 없었다.
너무나 비현실적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황족이라니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피를 이어받은 이들이라고 명명되는 이들이 아니던가
또한 나는 새도 말 한마디로 떨어뜨릴 정도로 어마어마한 권력을 쥐고 있는 이가 아니던가
그런데 어찌 그런 황족이 선우의 정인이 될 수 있다는 말인가
머릿속이 복잡해지기 시작하였다.
다시는 여인을 늘리지 않겠다는 다짐을 어기고 또다시 여인을 늘린 선우에 대한 배신감과 그 여인이 황족, 그것도 현 황제의 손녀라는 사실에 대한 경악스러움이 동시에 들었기 때문이었다.
"선우."
그때 잠자코 있던 옥령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설명이 필요할 것 같아요."
옥령은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기존에 지어줬던 포근하고 따뜻하기 그지 없는 미소와는 무척이나 상반되는 모습이었다.
"......그..그러니까."
그녀의 미소를 마주한 선우는 말을 더듬었다.
지은 죄가 있던터라 그녀의 미소가 한층 무섭게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북해로 가다 그녀를 만났는데....."
선우는 능소화와 있었던 일을 천천히 설명하기 시작하였다.
그녀와 어떻게 만났는지부터 시작하여 어떠한 감정을 가지게 되었고 어떻게 정을 품게 되었는지까지 상세하게 말이다.
옥령과 당대부인 그리고 당서윤, 금적화는 그런 선우의 말을 담담히 들었다.
그리고 이내 다시금 경악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늘어난 여인이 한명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되었기 때문이었다.
"북해빙궁주요!?"
당서윤은 놀란듯 되물었다.
***********
"..............."
"..............."
"..............."
내빈실 내부는 무척이나 싸늘하였다.
뿐만 아니라 가슴속 깊은 곳에 비수가 날아와 꽂히는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모든 사실을 실토한 이후 오랜 침묵이 지속되었기 때문이었다.
'......하아'
선우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알고 있었다.
그녀들이 결코 쉽사리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런데 막상 겪어보니 그 싸늘함이 상상이상이었다.
북궁연의 설풍과 마주했을 때도 이정도는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춥다.'
이미 한서불침에 다다른 선우였지만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싸늘함이 느껴졌다.
분명 여인들이 쏘아보내는 눈빛에 압도당한 것이리라
"그러니까."
그때 조용히 침묵을 지키고 있던 당서윤이 입을 열었다.
"북해로 갔다가 경화군주와 북해빙궁주를 동시에 꼬신거네?"
".........응"
"빙궁주는 임신까지 시켰고?"
".........응"
"경화군주는 대외적으로 정실로 맞이할 생각이고?"
".........응."
"선우야."
당서윤은 진지하기 짝이 없는 표정을 지은 채 선우를 불렀다.
".....응"
"너 쓰레기야?"
"........"
"아니면 뇌수대신 정액이 가득 찬 인간인거야?"
"........"
"아니 어떻게 한마디 상의도 없이 그런 일을 멋대로 벌일 수 있어! 너는 배려라는 단어가 뭔지 모르는거야? 그렇게 멋대로 행동할거면 뭣하러 약속을 한거고 다짐을 한건데? 여자는 더이상 안늘린다며? 안늘린다며! 네 약속만 철썩 믿고 기다렸던 옥 소저와 당대부인을 무시하는 거야? 두 사람이 널 어떤 마음으로 기다렸는지 알아? 아냐고?"
당서윤은 잔뜩 흥분한 채 말을 이었다.
"북해의 바람이 차서 고뿔이라도 걸리는 것은 아닐까! 혹여 동상이라도 걸리는 것은 아닐까! 밥은 잘먹고 다니는 것일까! 멀미는 하지 않을까! 지루하지는 않을까! 온갖 걱정을 하며 하루하루를 보내던 사람들이라고! 넌 그 사람들의 마음을 완전히 배신한거야!"
당서윤은 어찌나 흥분했는지 얼굴을 잔뜩 상기시킨 채 입을 열었다.
평소 무미건조하고 딱딱한 표정을 주로 짓던 그녀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그리고 뭐? 경화군주를 정실로 맞이하겠다고? 네가 그딴 식으로 말하면 당가의 입장은 어떻게 되는데? 당가의 입장은 한 번이라도 생각해봤어? 그렇게 멋대로 굴거면 뭣하러 섭정을 한건데? 그냥 돈 될만 한 것만 가지고 나가지! 백번 양보해서 경화군주와 북해빙궁주를 정인으로 받은 것은 어쩔 수 없다쳐. 사람 감정이라는게 어떻게 급변하지 모르니까!"
당서윤은 숨을 고르며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적어도 결정이 아닌 상의를 했어야지! 태도 부터가 틀려먹었잖아! 소개한 후 정실로 맞이하면 어떨까라고 제안을 한 것도 아니고 통보라고? 미쳤어? 정말? 내가 등신이야. 진짜 너같은 새끼 믿고 칠 개월간 노심초사 기다린 내가 등신이라고!"
당서윤은 한탄하듯이 언성을 높이며 고함을 내질렀다.
"............."
그녀의 말을 들은 선우는 입을 꾹 다물었다.
뭐라 반박할 말이 전혀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말 중 틀린 것이 하나 없었기 때문이었다.
자신이 다짐과 약속을 어기고 정욕에 휘둘려 두 여인과 관계를 맺은 것은 물론이었고 다른 여인들에 대한 배려도 없이 멋대로 능소화를 정실로 만들어버린 것도 사실이었다.
쓰레기 짓을 한 것이다.
여인들에 대한 배려따위는 일절 없는 쓰레기짓을 말이다.
".........미안해."
선우는 당서윤을 바라보며 사과를 하였다.
"당연히 미안해야지! 주위를 둘러봐! 다른 사람들 표정이 어떤지!"
그녀의 말을 들은 선우는 내빈실을 한 번 쭉 둘러보기 시작하였다.
제일 먼저 옥령이 보였다.
옥령은 무척이나 슬픈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분명 약속을 멋대로 어겨버린 자신에게 실망한 것이리라
그 다음은 당대부인이 보였다.
그녀는 애절한 표정을 지은 채 눈물을 흘리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분명 자신의 난봉꾼같은 행보에 상처를 받은 것이리라
그 다음 보인 것은 당서윤이었다.
언제나 무표정하면서 감정기복이 크지 않던 그녀였다.
그런데 그런 그녀가 잔뜩 화가 나있었다.
얼굴이 시뻘개질 정도로 말이다.
언제나 제멋대로 구는 자신에 대한 화가난 것이리라
"..........."
선우는 말없이 고개를 푹 숙였다.
미안함이 중첩되고 또 중첩되었기 때문이었다.
그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자신은 그녀들을 배신하였다.
그리고 그 어떠한 반성도 하지 않았다.
오직 스스로만 생각했고 스스로의 감정만 생각하며 움직였다.
다를 바가 없었다.
이고깽으로 무협세계관에 넘어와 제 마음껏 깽판을 부리던 이재원하고 말이다.
마음이 무거웠다.
무거워도 너무 무거웠다.
가장 경멸하는 사람과 닮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드니 두려움마저 들었다.
자신이 제 2의, 제3의 이재원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선우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지금으로선 그녀들을 마주볼 용기가 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외로이 무협지 속 세상에 내던져진 자신이었다.
그런 자신을 지지해주고 독려해주던 여인들의 마음을 배신한 것이다.
어찌 자신이 함부로 그녀들의 얼굴을 마주볼 수 있겠는가
선우는 기다렸다.
그녀들의 화가 누그러질 때까지 말이다.
그렇게 얼마나 흘렀을까
"......선우"
이내 보다못한 옥령이 입을 열었다.
"고개를 들어주세요."
"..........."
옥령의 말에도 불구하고 선우는 고개를 들 생각을 하지 못하였다.
너무 민망하고 부끄러워 마주볼 용기가 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괜찮아요. 정말 괜찮으니까. 얼굴을 보여주세요."
옥령은 다시금 부드러운 음성으로 선우를 설득하였다.
그녀의 말을 들은 선우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선우의 얼굴은 잔뜩 울상이 지어져있었다.
그녀들에 대한 미안함이 가슴속 깊은 곳에서 쉴새없이 차올랐기 때문이었다.
".......미안해."
선우는 울상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미안하다는 말외에는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외의 말은 핑계나 다를바 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선우, 그거 아세요?"
옥령은 애달픈 눈빛으로 선우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선우는 제게 구원같은 사람이에요. 상처받기 싫어서, 버림받기 싫어서 심산유곡에 숨어서 홀로 상처만 어루만지던 저에게 진정한 사랑이라는게 무엇인지 알려준 고마운 사람이거든요. 그래서 저는 선우가 저를 생각하고 사랑해주시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어요. 그저 버림받지만 않으면 된다고 생각했답니다."
옥령은 진지한 눈빛으로 선우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욕심이 생기더군요. 선우가 가장 사랑하고 가장 아끼는 여인이 되고 싶다는 욕심이 말이에요. 참아보려고 했지만 그 마음을 도저히 참을 수 없더라구요. 선우가 처음 가려라는 여인과 정을 통했다는 사실을 안 순간 저는 세상이 무너지는 줄 알았답니다.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질투를 한거겠죠. 경지에 올라 수양이 깊어졌다고는 하나 남자의 사랑을 갈구하는 계집인 것은 어쩔 수 없나봐요."
옥령은 살짝 미소 지으며 말을 이었다.
"선우, 사실 지금도 무척이나 질투가 나요. 가려와 정을 통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고 생각해요. 저라는 사람이 오늘내일 하던 상황이었으니 다른 여자에게 눈길이 갈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드니까요. 그리고 대외적으로 당 소저를 본부인 자리에 올린 것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해요. 그 편이 활동하는데 지장이 없을테니까요."
".............."
"하지만 북해에서 두 여인과 정을 통한 것은 너무 질투가 나요. 저와의 약속과 스스로의 다짐마저 어기면서까지 만나고 싶을 정도로 매력적인 여인이라는 거잖아요. 그 사실이 분하고 슬프면서 질투가 나요."
"............"
"마음같아선 당장에라도 칼을 뽑아 선우를 노리는 모든 여자들을 결단내고 싶어요. 선우는 제껀데..그런 선우를 뺏어가려는 모든 여자들을 말이죠."
그녀의 말을 들은 선우는 식겁하였다.
설마하니 세상 현모양처나 다름없는 옥령이 저렇게 극단적인 생각을 할줄은 상상도 못하였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는 않기로 했어요. 만약 그렇게하면 선우는 슬퍼할테니까요."
옥령은 담담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가려를 처음 받아들일 때 분명 제가 말했죠? 여인을 늘리는 것은 상관없다고 대신 본부인 대우는 제대로 해달라고 말이죠."
".........응"
"저는 지금 이 자리에서 선우가 공인해주길 원해요. 대외적으로 누가 부인이 되었든 실질적인 본부인 자리는 저라는 사실을 말이에요."
옥령은 선우를 바라보며 당당히 요구하였다.
선우가 공인해주길 원하는 본부인이라는 자리를 말이다.
"해주실 수 있나요?"
옥령은 담담한 눈빛으로 선우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할게."
선우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입을 열었다.
이미 능소화나 운가려에게도 말해뒀던 사안이었다.
대외적인 신분과는 관계없이 실질적인 본부인의 자리는 옥령의 차지라는 사실을 말이다.
분명 당장 공인한다고 해도 상관없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