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4화 〉 305.두려움을 뛰어넘다.
덜 덜 덜 덜
온몸이 오돌오돌 떨리기 시작하였다.
탁 탁 탁 탁
이빨이 쉴새 없이 부딪히기 시작하였다.
이런 공포감을 대체 언제 느껴봤을까?
이런 두려움을 느껴본 적이 있긴 한 걸까?
"그대의 모습이 마치 겁에 질린 토끼같구나."
그때 능소화의 목소리가 선우의 귓가에 닿았다.
선우는 떨리는 눈으로 시선을 올려 능소화를 마주보았다.
능소화는 마치 귀여워죽겠다는듯한 표정을 지은 채 선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분명 자신이 겁을 집어 먹었다는 사실을 인지한것이리라
"걱정말거라. 본녀는 그대를 해치지 않는다. 흑염黑炎은 두렵기 그지없는 힘이지만 결코 그대를 해하지 않는다. 팔을 보거라. 흉터 하나 없지 않더냐? "
능소화는 선우의 오른팔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그녀의 말은 사실이었다.
정신을 놔버리게 만들정도로 극심한 고통을 주었던 흑염은 자신의 팔에 조그만한 화상자국 하나 남기지 않았다.
마치 아무일도 없었던 것처럼 말이다.
"그대는 건방졌다. 감히 본녀에게 대항하려고 하였으니 말이다. 또한 오만하였지. 감히 본녀를 상대로 승리를 장담하였으니 말이다. 만약 그대가 아닌 북궁연이 그런 말을 했더라면 온몸을 불살라 버렸을 것이다."
능소화는 분노어린 시선을 내보이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대이기에 본녀는 고통만 느낄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다. 아무리 건방지다해도 본녀는 그대가 다치는 것은 원하지 않았다. 내 어찌 기분이 나쁘다하여 소중한 그대를 다치게 할 수 있겠는가?"
능소화는 핏물처럼 붉디 붉은 적안으로 선우의 눈을 마주보며 입을 열었다.
"이제 그만 반항은 되었다. 충분히 할만큼 했다고 생각한다. 그대는 본녀를 상대로 충분한 역량을 보여주었다. 그러니 이제 그만하도록 하라. 거기까지가 그대의 한계이니라."
능소화는 단정짓듯한 어조로 선우에게 말하였다.
".............."
그녀의 말을 들은 선우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녀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확실히 그녀는 자신을 배려해주었다.
흑염으로 극심한 고통을 주었음에도 상처하나 남기지 않았으며 화룡을 불러내었을 때도 빙산을 향해 처박을 뿐 자신에게 공격적 의사를 내보인 적이 없었다.
배려당한 것이다.
마치 앙칼진 애완동물을 달래듯한 태도로 말이다.
선우는 느낄 수 있었다.
현경과 화경 사이의 넘을 수 없는 어마어마한 간극을 말이다.
분명 단계적으로는 한 단계 차이에 불과하건만 그 차이는 생각보다 어마어마한듯 싶었다.
선우는 과거 검황과 마주하며 절망을 느꼈다.
초절정 상경에 불과한 자신이 화경 극의에 다다른 그에게 승리를 쟁취할 엄두가 안났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선우는 결국 검황으로부터 승리를 쟁취할 수 있었다.
여러가지 행운들이 맞물린 결과였다.
검황은 옥령과의 전투에서 빈사 직전의 상태까지 몰렸고 패왕귀면갑이라는 희대 기물에 도움을 받았으니 말이다.
지금도 상황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
능소화는 빙산을 단번에 녹일 정도로 어마어마한 화룡을 만들어내어 내력이 절반이상 날아갔고 비록 패왕귀면갑은 없지만 그에 맞먹는 기물인 용미연검이 자신의 손에 있었다.
하지만 엄두가 안았다.
현경이라는 초월의 단계를 넘어설 엄두가 말이다.
이말인즉슨 초절정 상경과 화경 상경의 차이보다 화경 상경과 현경 초입 간의 격차가 더욱더 크다는 말이 된다.
적어도 선우는 그렇게 느꼈다.
선우는 절망감이 들었다.
무슨 짓을 하더라도 그녀를 뛰어넘을 수 없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왜 대답이 없더냐?"
선우가 아무런 말이 없자 능소화는 재촉하듯 물었다.
그녀는 선우에게서 확답을 듣고 싶었다.
반항해서 죄송하다고
잠시 정신이 나간 것이라고
당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당신만을 사랑하겠다고 말이다.
그녀의 물음에 선우는 천천히 그녀와 시선을 마주쳤다.
그리고 핏물처럼 붉디 붉은 적안이 보였다.
지금은 호감으로 가득 차 있는 눈빛이지만 만약 여기서 또다시 거절한다면 분명 분노가 서릴 것이다.
그렇기에 선우는 고민하였다.
이 상황에서 어떤 선택을 해야하는지에 대해서 말이다.
무슨 수를 쓰든 그녀를 넘어설 수는 없었다.
의지만으로 꺼지지 않는 불꽃을 만들어내는 그녀를 어찌 상대할 수 있다는 말인가
저 흑염을 베기위해선 검인처럼 마음의 검을 세우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아직 화경 상경에 불과한 자신에게는 요원하기만 한 일이었다.
심검에 대한 제대로된 묘리조차 잡지 못한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다는 말인가
여기서는 그저 납작 엎드리고 용서를 비는 것이 나을 것이다.
그 편이 자신에게 좋을 것이다.
북궁연을 죽이던 무고한 마을사람들에게 화풀이를 하던 상관치 않고 그저 자신의 목숨만 보존하면 될 것이다.
그전과 판이하게 달라진 능소화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녀의 노리개가 되어 그녀가 원하는 것을 전부 들어주며 살아가는 것이 나을 것이다.
그렇게 한다면 적어도 살 수는 있을테니까 말이다.
머리속에서 끊임없이 명령을 하였다.
당장에라도 땅바닥에 머리를 박으라고
제발 살려달라고
있는 그대로의 당신을 받아들이겠다고
당신이 누굴 죽이든 상관치 않겠다고
오직 당신만을 사랑하겠다고
빌라고 말이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몸은 물론 입까지 달싹이지 않았다.
머리와는 다른 녀석이 자신의 행동에 제동을 걸고 있었다.
마치 큼지막한 쇠사술로 칭칭 묶어놓은 것처럼 단단하게 옥죄면서 말이다.
그 녀석은 굴복하지 말라고 말하고 있었다.
여기서 굴복하면 한계는 여기까지라고
평생 패배속에서 살아가고 싶냐고 말이다.
그리고 또다시 말한다.
만약 여기서 이대로 굴복한다면 다시는 본래의 그녀를 볼 수 없을 것이라고
정말로 괜찮겠냐고 말이다.
괜찮을 리가 없었다.
능소화가 자신에게 소중한 친구라는 말은 결코 빈말이 아니었다.
소중하였다.
자신에게 즐거움을 주었던 그녀가
자신에게 아낌없이 깨달음을 공유해주었던 그녀가
자신에게 호의를 베풀어주었던 그녀가 말이다.
"능소화."
선우는 올곧은 눈으로 능소화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말하거라. 본녀는 어떤 말도 들을 준비가 되었다."
"아무래도 나는 머리가 나쁜가봐."
선우는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게 무슨 말이더냐?"
능소화는 모르겠다는듯 고개를 갸웃뚱거리며 말을 이었다.
뜬금없이 머리가 나쁘다는 말을 왜 한다는 말인가
"머리가 하는 말을 오질라게 안들어처먹거든."
말을 마친 선우는 허리를 굽혔다.
그리고 땅바닥에 떨어져있는 용미연검을 집어들었다.
검을 집어든 선우는 천천히 검을 들어올려 능소화에게 겨누었다.
"무슨 의미더냐?"
능소화는 한층 차가워진 눈빛으로 선우를 쏘아보며 입을 열었다.
"보는 그대로야. 너를 제압하겠다는 생각은 변함없어."
선우는 결연의 의지가 담겨 있는 눈으로 능소화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어리석다."
선우의 말을 들은 능소화는 짤막이 답하였다.
어리석었다.
어리석어도 너무 어리석었다.
자신과의 격차는 이미 충분히 겪어보지 않았던가
그런데 어찌 자신에게 검을 겨눈다는 말인가
선우는 자신을 이길 수 없다.
자연마저 거스를 수 있는 경지에 도달한 자신을 마음의 검조차 제대로 세우지 못한 그가 어찌 상대할 수 있다는 말인가
불가능하였다.
일망의 가능성도 없었다.
"그대가 본녀를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인가? 본녀와의 격차는 충분히 인지하고 있을터 그런데 어찌 그런 어리석은 선택을 한다는 말인가?"
능소화는 이해가 안된다는 듯한 표정으로 선우에게 물었다.
"어리석지. 솔직히 내가 생각해도 어리석은 것 같아. 당장 용서를 빌고 목숨을 구걸해도 모자랄 판국에 이렇게 검을 들다니 말이야. 누군가 날 본다면 멍청한 놈이라면서 갖은 욕을 했을거야."
선우는 능소화를 바라보며 담담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검을 드는 것이냐?"
"그렇게 하고 싶으니까."
"뭐라?!"
"몸이 말을 안들어. 머리에서는 이길 수 없다고 온몸이 타버리고 말거라고 그러다 죽을 거라고 끊임없이 경고하는데 마음이라는 놈이 자꾸만 몸을 제멋대로 움직인단 말이야. "
"이해가 안된다."
능소화는 영문을 모르겠다는듯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해 안되지? 나도 이해안되는 판국에 네가 어떻게 알겠어?"
그녀의 반응에 선우는 피식 웃으며 답하였다.
"병에 걸린듯 하다. 의원에게 가보는 것이 어떤가?"
"그러게, 살아남으면 꼭 가도록 할게."
선우는 담담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걱정말거라. 본녀는 자비롭다. 비록 그대가 본녀에게 이빨을 보이긴 하였으나 병에 걸린 것이니 특별히 팔 한쪽 태우는 것으로 봐주도록 하겠다."
"그거 고마워서 눈물 나겠네."
"눈물까지 흘릴 필요는 없다. 그저 본녀는 타고나길 자비롭게 태어난 것 뿐이다."
능소화는 자부심 넘치는 표정을 지은 채 말을 이었다.
아마 스스로에게 도취되어 있는듯 하였다.
"그 자비 쭉 이어지길 빌게."
말을 마친 선우는 음양조화신공을 극성으로 운용하기 시작하였다.
처음부터 전력으로 가야한다.
간따위 볼 여력 따윈 없었다.
그저 최상의 상태로 그녀와 맞부딪칠 뿐이었다.
우우우우우우우웅
선우의 몸에서 거대하기 짝이 없는 기운들이 일렁이기 시작하였다.
음과 양의 조화를 추구하며 그 어떤 기운보다 맑고 강력한 기운.
음양조화기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선우는 음양조화기를 순식간에 세맥 곳곳에 퍼트렸다.
그러자 신체가 활성화되면서 온몸에 힘이 솟아오르기 시작하였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선우는 그 상태에서 혈류를 가속시키기 시작하였다.
전과는 다르게 다른 누구보다 빠르게 말이다.
쿵 쾅 쿵 쾅
그러자 심장이 미친듯이 빨리 뛰었다.
온몸이 붉게 물들어가기 시작하였다.
"하아...하아...하아."
선우는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혈류를 가속시킨만큼 산소가 더욱 필요하였기 때문이었다.
덜 덜 덜
그리고 온몸이 덜 덜 덜 떨리기 시작하였다.
주체할 수 없을 정도의 강력한 힘에 몸이 반응하고 있는 것이다.
선우는 핏발이 선 눈으로 능소화를 바라보았다.
"호오, 분위기가 바뀌었구나."
한 편 그 모습을 얌전히 지켜본 능소화는 감탄하였다.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안될 정도의 기세를 느낀 탓이었다.
"다를거야."
그녀의 말을 들은 선우는 잔뜩 흥분한 얼굴로 그녀에게 말하였다.
"기대하도록 하겠다."
능소화는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능소화는 기대가 되었다.
선우가 자신에게 무엇을 보여줄지 말이다.
쭈우우욱
선우는 상체를 뒤로 젖혔다.
자신이 젖힐 수 있는 한계까지 말이다.
그다음에 용천혈에 음양조화기를 쉴새없이 불어넣었다.
쾅
이내 선우는 용천혈에 가득 차 있던 내력을 일순간 터트려 반발력으로 몸을 앞으로 쏘아보냈다.
그리고 폭발과 동시에 젖혔던 상체를 튕겨 쏘아지는 속도를 더욱더 가속시켰다.
쇄애애애액
순간 선우의 신형에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
"아니!?"
그리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능소화는 당황하였다.
시야에서 선우가 완전히 사라져버렸기 때문이었다.
능소화는 재빨리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라진 선우를 찾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어디에도 선우의 모습이 보이지가 않았다.
그렇게 그녀가 당황하고 있을 찰나였다.
쇄애애애액
뒤편에서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을 느꼈다.
능소화는 재빨리 염황마기를 끌어올렸다.
쾅
"크윽!"
뒤편에서 전해지는 상당한 충격에 능소화는 신음성을 내뱉었다.
쾅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이번에는 오른팔 부근에서 상당한 충격이 전해져왔다.
"으윽!"
능소화는 인상을 찌푸린 채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자신을 공격한 선우의 모습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고개를 돌린 곳에 있는 것은 넓디 넓은 빙하지대일뿐
선우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쾅
그때 다시금 그녀의 뒤편에 상당한 충격이 전해져왔다.
상당한 충격에 능소화는 그대로 앞걸음질을 칠 수 밖에 없었다.
쾅
쾅
쾅
그후에도 수없이 많은 공격들이 그녀에게 쏟아지기 시작하였다.
"도대체 어디 있는 것이냐!"
화가 머리 끝까지 난 능소화는 인상을 잔뜩 찌푸리며 고함을 질렀다.
그녀는 지금 무척이나 심기가 불편한 상황이었다.
제대로 된 공격도 한 번 못해본 채 일방적으로 공격을 당하고 있는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염황마기가 자동적으로 공격을 방비해주기에 걱정은 없었지만 기분이 나쁜 것은 기분이 나쁜 것이다.
쾅
쾅
쾅
그녀의 고함에도 불구하고 그녀에게 쏟아지는 선우의 공격은 멈출 기세를 안보였고 능소화는 짜증이 더욱더 치밀어오르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나온다면 본녀도 어쩔 수 없느니라!"
잔뜩 성이 난 능소화는 경고하듯 허공에 대고 소리쳤다.
그리고는 극양염황마공을 극성으로 운용을 하였다.
화아아아아아
이내 그녀의 몸에 뜨겁기 그지 없는 열기들이 가득 차더니 끊임없이 팽창하기 시작하였다.
"언제든 오거라!"
쾅
그때 다시금 뒤편에서 충격이 전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능소화는 그 순간 모아뒀던 열기들을 그대로 터트려버렸다.
콰콰콰콰쾅
그러자 천지가 뒤흔들릴 정도로 어마어마한 굉음과 거대한 폭발이 능소화의 몸 주위에서 일어나게 되었고 거대한 폭연이 그녀를 뒤덮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