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0화 〉 301.주화입마-1
화르르르륵
온몸이 불타고 있는 능소화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불길이 치솟으며 빙산을 녹이기 시작하였다.
그러더니 이내 화염은 빙산 전체를 뒤덮어버렸다.
온통 화염밖에 보이지 않게 된 것이다.
꿀꺽
선우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어마어마한 화염이 치솟을 것이라고 몇 번이고 듣긴 하였지만 설마 저정도로 어마어마할지는 상상도 못하였다.
빙산을 말그대로 덮어버렸다.
물론 산이라기 보단 동산에 가까운 크기였지만 그만큼의 화재를 일으킨 것만으로도 그녀가 가진 위대한 힘의 일부를 엿볼 수 있었다.
선우는 몸이 떨려오는 것을 느꼈다.
자연 그 자체를 마주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거대함이었다.
그가 그녀에게 느낀 감정은 말이다.
너무나도 아득하고 거대해서 닿는 것조차 두려울 정도의 거대함말이다.
선우는 침조차 삼켜지지 않았다.
"뭐하고 있는가?"
그때 선우의 귓가에 능소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번쩍
그녀의 목소리에 정신이 번쩍 뜬 선우는 그녀를 제대로 바라보았다.
실오라기 하나 입지않은 알몸에 마치 핏물처럼 붉은 적안 그리고 온몸을 뒤엎고 있는 거대한 화염이 눈에 보였다.
"괜찮아?"
선우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그녀에게 물었다.
"괜찮다. 오히려 상쾌한 기분마저 든다."
선우는 의아함이 들었다.
분명 폭발은 그녀가 빙정을 섭취하기 직전에 일어났다.
그리고 폭발에 의해 빙정이 날아가는 것을 두 눈으로 확인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어찌 저리 멀쩡할 수 있다는 것인가
"빙정은?"
"본녀에게 그런 천한 계집따위가 준 물건 따위는 필요없다."
선우의 물음에 능소화는 인상을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그 말을 들은 선우는 위화감이 들었다.
그가 아는 능소화는 누군가에게 천하다며 폄하하는 여자가 아니었다.
그 신분에 걸맞지 않은 배려와 자애로움을 갖춘 여자인 것이다.
그런 능소화가 천하다는 말을 입에 담으니 위화감이 생겼다.
"정말 괜찮은 거 맞아?"
선우는 미심쩍다는듯이 그녀에게 물었다.
"괜찮다고 하지 않았는가? 본녀는 괜찮다. 오히려 후련함은 물론 정신마저 맑아졌다. 금제가 풀리면서 현경에 도달한듯 싶다."
"현...현경!?"
그녀의 말을 들은 선우는 몹시 놀라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가 현경에 근접해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설마하니 금제를 푸는 것만으로 현경에 도달할 줄은 상상도 못하였기 때문이었다.
"뭘 그리 놀라는가, 본녀와 같은 고귀한 자라면 당연한 것이 아닌가?"
"...그렇긴 하지?"
"그보다 선우, 어서 빙궁으로 돌아가자구나."
능소화는 선우에게 재촉하듯이 말을 이었다.
"왜 마호위에게 자랑이라도 하려고?"
그녀가 재촉을 하자 선우는 피식웃으며 맞받아쳤다.
아무래도 상태가 멀쩡해졌다는 것을 마 호위에게 자랑하고 싶어하는듯 하였다.
"아니다. 북궁연을 죽일 심산이다."
"응?"
하지만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은 선우의 예상과는 정반대되는 말이었다.
순간 선우는 뇌가 정지되는듯한 느낌을 받았다.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빨리 돌아가자."
그리고 이내 그녀의 재촉에 선우는 다시금 상념에 깨어나게 되었다.
'잘못 들은 거겠지? 분명 잘못 들었을거야.'
선우는 속으로 맹렬하게 스스로의 청력을 의심하기 시작하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안되었다.
능소화가 누군가를 죽인다는 말을 하다니 말이다.
분명 잘못 들었을 것이다.
그녀는 누군가를 죽이라는 말을 함부로 입에 담는 이가 아니었다.
선우가 겪은 능소화는 그런 여자였다.
"소화야."
선우는 마치 불의 여신처럼 온 몸이 불타고 있는 능소화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말하거라."
"내가 잘못 들었거든? 혹시 왜 북해야 빨리 가야하는지 다시 말해줄 수 있어?"
"젊디 젊은 그대는 귀가 먹은듯 싶구나. 하지만 본녀는 자비로우니 다시금 말해주겠다."
능소화 싸늘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북해빙궁의 궁주인 북궁연을 죽이러 가야한다."
"............"
그녀의 말을 들은 선우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자신이 잘못 들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이다.
"농...농담이지?"
"농담이 아니다."
선우의 물음에 능소화는 단호한 어조로 답을 하였다.
"그게 무슨 소리야! 북궁연을 죽이다니!?"
선우는 말도 안되는 소리에 언성을 높이며 소리를 질렀다.
감정이 쌓였다고는 하나 북궁연과의 관계는 생각보다 깔끔하게 끝나지 않았던가
빙정을 받았고 묘안석을 건네었다.
그런데 어찌 그녀를 죽인다는 말인가
"당연한 일이다. 본녀가 그녀를 죽이고 싶으니까."
"뭐라고!?"
"본녀는 그녀가 싫다. 죽일 정도로 말이다."
능소화는 살기어린 눈빛을 빛내며 말을 이었다.
"건방지다. 고작 시골 촌구석에서 왕 노릇이나 하는 계집주제에 중원에서 가장 고귀하고 귀중하기 그지 없는 핏줄을 타고난 본녀에게 어찌 그런 건방진 태도를 보인다는 말인가? 죽어 마땅하다. 아니 죽이겠다."
"잠..잠깐! 그건 네 신분을 몰랐으니까..."
"그 뿐만 아니다. 그녀는 재수가 없다. 재수가 없어도 너무 없다. 마치 본인이 질서인냥 법칙인냥 지껄이는 꼴이 심히 거슬렸다. 죽여야한다. 죽이지 않고서는 본녀의 마음이 가라앉을 것 같지 않구나."
능소화는 화가 잔뜩 난듯 인상을 와락 찌푸리면서 말을 이었다.
"그리고 제일 죽일 죄는 내 것에 손을 댔다는 것이다."
"네것?"
선우는 의아한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북궁연이 도둑도 아닐진대 뭣 하러 능소화의 물건을 손댄단 말인가
"그렇다. 그녀는 건방지게도 내것에 손을 대었다. 이는 삼족을 멸해도 모자랄 죄지. 물론 그녀는 이미 삼족이 멸해있으므로 그녀 혼자만 죽이면 되겠지만 말이다,"
능소화는 본인이 말해놓고 유쾌한듯 웃음을 지었다.
"능소화, 진정해. 평소에 너랑은 너무 다르잖아."
"왜....소화라고 안 불러주느냐?"
"응?"
"왜 소화라고 다정히 불러주지 않냐는 말이다!"
화르르르르륵
그녀의 고함과 함께 몸 주위를 둘러싸고 있던 불길이 더욱더 거세지기 시작하였다.
"그년 때문이지? 그녀의 요망한 숨결과 요망한 속삭임에 넘어간 것이렷다!"
능소화는 극양의 기운이 아낌없이 분출하며 소리를 질렀다.
"이 사지를 절단할 년! 내것인데! 선우는 내것인데! 어찌 내 것을 탐낸단 말이냐!"
"내가 왜 네 꺼야!"
능소화의 말을 들은 선우는 나름 반박을 하였다.
"죽일 것이다. 선우에게 손을 댄 그녀를 뼛가루 하나 남김없이 모두 불태워버릴 것이다! 선우는 내것이다. 오직 나만 바라보고 나만 좋아해야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어찌 선우에게 손을 댄다는 말인가!"
능소화는 끊임없이 분노를 토해내며 고함을 내질렀다.
그리고 그 고함과 함께 불길이 더욱더 크게 치솟기 시작하였다.
"죽일 것이다! 그것만으로 부족하다. 그녀가 재건하길 염원하는 빙궁은 물론 마을사람들까지 모두 불태워버릴 것이다! 그녀는 후회할 것이다! 본녀의 것에 손댄 것을 말이다!"
능소화는 잔혹한 미소를 지은 채 열변을 토해내었다.
그녀는 웃고 있었다.
죄없는 이들을 학살한다는 말을 저리도 쉽게 해놓고 말이다.
"................"
능소화의 분노 서린 고함을 들은 선우는 확신할 수 있었다.
그녀가 지금 제정신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이다.
지금의 능소화는 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순수하기 그지없던 아기 소화도 아니었고 요망하게 느껴졌던 여우 소화도 아니었다.
그저 폭군과도 같았다.
마치 극양염황마기와 같이 말이다.
그녀는 지금 비정상적일 정도로 감정이 심화되어 있었다.
능소화가 자신에게 의존하는 경향이 있긴 하였지만 저리 집착을 하진 않았다.
그리고 그녀가 북궁연을 싫어하긴 하였지만 그녀를 죽이고 싶다 감정을 가질만큼 독한 여자 또한 아니었다.
'주화입마.'
선우는 확신하였다.
갑자기 튀어나온 극양염황마기에 의해 그녀가 주화입마에 빠졌다는 것을 말이다.
지금 그녀는 모든 감정이 격해져있었다.
그리고 모든 것을 파괴하고 싶어하였다.
이는 분명 극양염황마기의 영향일 것이다.
선우는 생각하였다.
그녀를 말려야한다고 말이다.
그저 화염만 내뿜는 것이 전부라면 튕겨나간 빙정을 흡수시키면 될 것이다.
하지만 주화입마에 걸렸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녀를 제압해야했다.
그리고 빙정까지 먹여야헀다.
'망할'
선우는 갑자기 펼쳐진 개같은 상황에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능소화의 주화입마는 그의 계획에는 없던 일이었다.
없던 일이 벌어지니 절로 짜증이 치밀어올랐다.
"소화야."
선우는 짐짓 다정한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그래, 말하거라. 그대가 말하는 것이라면 그어떤 말도 귀 담아 듣겠노라."
선우가 다정히 부르자 능소화는 마치 기다렸다는듯이 곧바로 답을 하였다.
"혹시 빙정 먹을 생각 없어?"
"거절한다."
"내 이야기 귀담아 준다며?"
"듣기만 한다고 했지, 들어준다고는 하지 않았다."
선우의 말에 능소화는 단호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러지 말고 내 얼굴을 봐서 눈 딱 한 번 감고 삼키는게 어때?"
선우는 미남계아닌 미남계를 펼치며 그녀를 유혹하였다.
자신에 대한 호감마저 극대화된 그녀라면 제안을 들어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그대가 부탁해도 소용없다. 어찌 그런 천하디 천한 계집이 가지고 있던 것을 권한단 말인가?"
선우의 말에 능소화는 인상을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
선우의 말을 거절하는 것은 가슴 아픈 일이지만 북궁연에 대한 미움이 더욱더 큰 그녀였다.
그런 그녀가 북궁연이 건네준 빙정을 선뜻 섭취할 리 없었다.
"그리고 본녀는 지금 자체로도 완벽하거늘 어찌 그런 하찮을 물건을 섭취한다는 말인가? 어불성설이다."
그녀는 핏물보다 더욱더 빨간 눈으로 선우를 바라보며 말하였다.
"선우, 어서가자. 내 보여주겠노라. 자연마저 거스를 수 있는 위대한 힘을 말이다."
능소화는 위험하기 짝이 없는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
그리고 선우는 말없이 그녀를 쳐다보았다.
온몸을 불사르고 있는 거대한 화염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새하얀 나신
타는듯이 붉디 붉은 적발과 적미
침어낙안(浸魚落雁)의 용모, 폐월수화(閉月羞花)의 아름다움을 갖춘 절세의 미모까지
다르지 않았다.
겉모습만 보면 언제나 봐왔던 능소화와 다르지가 않았다.
여전히 아름다웠고 여전히 신비로운 분위기를 풍겼다.
하지만 선우는 알고 있다.
같은 것은 겉모습뿐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휘리리리릭
선우는 허리춤에 매어있던 용미연검龍尾軟劍을 풀어헤쳤다.
그러자 낭창거리는 용미연검이 아래로 축 늘어졌다.
"뭐하는 짓인가?"
"소화야, 너 지금 제정신이 아니야."
"그게 무슨 소리더냐! 본녀는 그 어느때 보다 정신이 또렷하다!"
"아니 그건 또렷한게 아니야. 무공에 잡아먹힌 상태인 거지."
"말을 함부로 하는구나!"
선우의 말을 들은 능소화는 언성을 높이며 말하였다.
"본녀는 반선이라고 불리우는 현경에 경지에 다다른 위대한 무인이다! 어찌 그대와 같은 범부가 본녀를 평가한다는 말이더냐!"
능소화는 잔뜩 상기된 얼굴로 고함을 내질렀다.
화르르르륵
그리고 그녀의 분노에 반응하듯 몸을 둘러싸고 있던 화염이 더욱더 커져갔다.
"현경에 다다른게 아니야. 힘에 휘둘리고 있는거지."
"뭐라! 그대도 실로 건방져졌구나!"
"능소화, 나는 네게 빙정을 먹여야겠다."
선우는 능소화를 바라보며 담담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본녀가 가만히 있을 것 같더냐?"
"네 의견은 중요치 않아. 나는 이미 마음을 굳혔어."
우우우우우웅
말을 마친 선우는 용미연검에 내력을 불어넣었다.
촤아악
그러자 낭창하게 흐뜨러져 있던 용미연검이 순식간에 뻣뻣해지기 시작하였다.
선우는 뻣뻣해진 검을 능소화에게 겨누고 말하였다.
"그저 뜻한 바를 행할 뿐이다."
선우는 결연한 눈빛으로 능소화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어리석도다. 진실로 그대가 내 상대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인가? 아니면 본녀가 그대를 친애한다고 하여 봐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인가? 그대의 의중이 궁금하구나."
능소화는 이해가 안된다는 듯이 선우에게 말하였다.
그녀는 이해가 안되었다.
그와 자신 간의 격차는 장성한 성인과 일곱살 짜리 어린 애만큼 어마어마한 차이가 났다.
선우도 분명 그걸 인지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어찌 자신에게 검을 겨눌 수 있다는 말인가
이해가 될 리 없었다.
"상대할 수 있다고 생각해."
선우는 담담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본녀가 그간 그대와 너무 격없이 지낸듯 하구나. 이리도 우습게 보였으니 말이다."
능소화는 붉디 붉은 적안으로 선우를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그 음색은 다소 싸늘하게 느껴질 정도로 차가운 느낌이었다.
"아무래도 격의 차이라는 것을 몸소 느끼게 해주어야할듯 싶구나."
화아아아아아아
그녀가 말을 마치자 빙산 전체를 두르고 있던 화염들이 일제히 선우가 있는 쪽으로 몰려들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고온고압의 열기들이 선우를 압박하기 시작하였다.
"크윽"
순간 선우는 살결이 탈 것 같은 고온에 뜨거움과 숨이 턱 막힐 것 같은 답답함이 드는 것을 느꼈다.
"허억...허억...허억.."
이내 선우는 거칠게 호흡을 하기 시작하였다.
갑자기 호흡하는 것 자체가 힘들어졌기 때문이었다.
"불이라는 것은 무척이나 무서운 것이다. 직접 닿지 않고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죽음에 이르게 만들 수 있을 정도의 살상력을 가지고 있으니 말이다."
능소화는 핏물처럼 붉디 붉은 적안으로 선우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선우여, 사랑스러운 나의 선우여. 칼을 치우거라. 그리고 대항할 생각은 거두어라. 그저 있는 그대로의 본녀를 받아들이거라."
능소화는 볼에 빨갛게 홍조가 핀 모습으로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그대는 뭐든 할 수 있을 것이다."
능소화는 농염하기 그지없는 목소리로 선우에게 유혹하듯 말하였다.
"그 무엇이 되었든 말이다."
능소화는 요염하기 그지없는 눈빛으로 선우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선우는 흔들리는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심적이 동요가 일어난듯 싶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나는."
이내 선우의 입이 천천히 열리기 시작하였다.
능소화는 뒤에 나올 말을 기대하며 열망어린 시선으로 선우를 바라보았다.